1979. 10. 6 - 10. 16 박정희의 의사걸졍

역사/20세기 2020. 1. 27. 09:10

(1) 당시의 권력층의 과제들

10/11-13에 야당의 의원직 사퇴서 제출, 10/16 여당은 선별수리키로

10/15 김영삼은 교토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원외투쟁을 선포

 

10/9 내무부, 남조선민해방전선 검거 발표

10/14 천주교 안동사제단, 오원춘 사건 조작 발표

 

10/8 한미섬유협상 결렬

10/13 카터대통령 방송에서 김영삼제명을 비난

 

(2) 박정희의 대응

10/8 월, 김재규, 김계원, 차지철 오전 9시 50분 - 10시 25분 (35분간)

           차지철                            10시 25분 - 10:45 (20분)

           외무장관과 김계원             11시 - 12시 15분 (1시간 15분간)

           내무장관과 김계원              12시 15분 - 12시 30분 (15분간)

           차지철, 김계원, 김재규, 유혁인 만찬 오후 5시 50분 -

10/10 수 차지철  오전 10시 23분 - 11시 30분 (1시간 7분간)

            차지철 오후 1시 20분 - 1시 28분 (8분간)

10/11 목 김재규, 김계원, 차지철 오전 9시 30분 - 9시 45분 (15분간)

10/15 월 김재규 오전 10시 10분 - 10시 55분 (45분간)

            김치열 법무장관 10시 57분 - 11시 25분 (28분간)

             최규하 국무총리  오후 1시 45분 - 2시 35분 (50분간)

10/16 화 차지철 오전 9시 40분 - 10시 (20분간)

             주미대사, 김계원 비서실장 오후 2시 - 3시 35분 (1시간 35분)

             수석비서관들과 만찬 오후 5시 55분 -

 

(3) 전반적인 특징

박정희의 평일 근무는 불규칙적이었고, 사적인 생활과 공적인 생활의 경계가 없었다. 공적 근무시간이 절대적으로 적은 것으로 보인다.  평일에 휴식시간이나 운동시간이 지나치게 많았다.

권력문제에 집착함으로써 상대적으로 경제문제나 민생에 대한 ㄷ처에는 소홀히 한 것으로 짐작한다.

김영삼의 제명이후의 외교관계에 집중한 것으로 보이고, 국내문제에 대해 회심의 반격카드를 준비한 것으로 보인다.

'역사 > 20세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Port Huron Statement, 1962  (0) 2020.03.25
1960년 대구의 횃불  (0) 2020.03.03
1979. 9. 26-10. 6 박정희의 의사결정  (0) 2020.01.26
한완상 전 통일부 장관 강연 소감  (0) 2013.10.29
1979-80 부산, 서울, 광주  (0) 2013.10.17
:

1979. 9. 26-10. 6 박정희의 의사결정

역사/20세기 2020. 1. 26. 17:52

이 시기는 사실상 공작정치에 의한 신민당 내분, 박정희의 두번에 걸친 (국군의 날, 개천절 기념사) 정국에 대한 견해 발표, 10월 4일 국회에서 유정회가 주도하고, 공화당이 따르는 가운데 김영삼 의원의 제명, 이에 대한 미국무부의 유감 표명 (10/4, 10/5), 유감표명에 이은 주한미국대사의 본국소환 (이는 1958년 보안법 파동시에 소환한 이래 두번째), 케네디의원의 한국정부 비판, 10/6 한국 외무부의 미국무성 미판에 대한 성명 발표. 그리고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이시기에 10/7일 김형욱 전 중정부장에 대한 처리 공작이 개시되었을 것을 추정한다.

박정희의 의전기록을 보면, 정치공작은 차지철 경호실장이 담당한 곳으로 보인다.  하루에도 몇번 짧은 시간으로 나누어서 보고를 한다.  9/25 화  오존 10:20-10:45 (25분), 오후 1시 15분-1:23 (8분간), 오후 4시 5분 - 4; 30분 (25분); 9/26 수, 오전 9시 17분- 9: 40 (23분); 9/28 금 오전 9: 25-9:40 (15분), 오후 4시 20분 - 4: 40 (20분); 9/29 토 오전 9시 17분 - 9:57 (40분), 오후 12시 5분 - 12: 11 (6분간); 10/2 화, 오전 9시 40분 - 10: 20 (40분간), 오후 3시 30분 - 5:25 (배드민턴, 김계원 비서실장, 의전수석과 같이); 10/4 오전 9시 40분 - 9: 57(17분간), 오후 3시 55분 - 4시 45분(김계원 비서실장과 같이, 이후 유혁인 정무 1수석을 추가- 박정희가 불러서 김영삼제명에 대해 의논을 한 것으로 추정); 10/5 금 추석, 김재규 중정부장과 차지철 같이 오찬 11:50-1:20pm

반면에 김재규 중정부장은 공작의 실행부분만 담당하거나 아니면 담당하지 않은 것이 아닌가 추정한다.  9/28 금 오후 3시 40분 - 3: 55 (15분간 보고); 9/29 토 오전 10시 15분 - 10: 33 (18분간) 김계원, 정무1수석 유혁인과 같이 보고; 10/2 화, 오후 12시 20분 - 1:25 (1시간 5분간) 오찬; 10/5 금 추석, 오전 11시 50분 - 1:20pm (1시간 30분) 오찬; 10/6 토 오전 9시 50분 - 10시 10분 보고 (김계원 비서실장, 유혁인 정무 1수석과 같이).

실제 정당을 담당하는 정무 1수석의 역할은 실행역할보다는 조언을 듣는 정도의 역할에 머물렀다.   9/29 토 10:15-10:33 (비서실장, 중정부장과 같이), 오전 10시 35분 - 11:47 국방장관, 합참의장, 안보특보의 회의중에 잠시 의견을 개진하는 정도; 10/4 목 오후 3시 55분 - 4:45에 차지철경호실장, 김계원 비서실장 자리에 15분정도 불려가서 의견 개진; 10/6 토에 오전 9시 50분 - 10:10 감재규 중정부장과 김계원 비서실장 자리에 동석하여 보고.

비서실장의 역할이 매우 제한적이었다는 점, 아울러 미국의 대응에 대해 이를 조언할 사람을 전혀 부르지 않고 정보라인에서 결정하여 이를 외무부에 통보한 것으로 추정.  부분적으로 김치열 법무와 상의 (9/27 목 오후 4시 5분 - 4:45분, 40분간).

'역사 > 20세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1960년 대구의 횃불  (0) 2020.03.03
1979. 10. 6 - 10. 16 박정희의 의사걸졍  (0) 2020.01.27
한완상 전 통일부 장관 강연 소감  (0) 2013.10.29
1979-80 부산, 서울, 광주  (0) 2013.10.17
3.15 부정선거의 원인  (0) 2013.09.30
:

1979. 9. 15- 9. 22 박정희의 의사결정 방식

카테고리 없음 2020. 1. 22. 21:29

대통령 의전일지와 당시 일간지 를 참조하여, 박정희가 김영삼의 뉴욕타임즈 회견, 미국의 논평, 신민당 내분의 전개, 기영삼 제명 결정 등과 같은 중요한 사안에 대해 정보를 입수하고, 논의하는 과정을 정리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의 의전일지에는 오찬과 만찬과 같은 식사, 면담과 공식회의로 나누어서 의견을 나누거나 보고를 받았다.  이중 의견을 적극적으로 요청한 것은 한차레 (9/18 차지철 경호실장을 55분간 서재로 불러 의견을 초치하여 의견을 들었다. 김영삼의 뉴욕타임즈 회견문이 실린 것이 9/16일자로 이에 대한 처리 의견을 들은 것으로 추정한다.  이후 같은 날(9/18) 오후 6시- 8시 45분에 총리공관에서 총리, 부총리, 공화당의장, 유정회의장, 비서실장, 경호실장이 모여 김영삼에 대한 대응 결정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김영삼에 대한 강경 대응 기조와 정운갑 대행을 통한 신민당 분열을 획책한 것이다.

 

이후 9/21 금 오전에 차지철을 만나 50여분간에 걸쳐 보고를 받고, 신직수 법률 보과관으로 부터 김영삼의제명에 딸느 법률적 검토를 보고받은 것으로 추정되고,  오후 2시 - 3시 5분, 정부 당 연석회의에서 공식적으로는 FY80(회계연도 1980년도의 예산안)을 검토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동아일보 9. 21일자에 따르면 김영삼의 제명에 대한 건이 결정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공화당의장과 사무총장이 3시 5분-3시 45분 (40분간), 유정회 의장과 원내대표가 3시 50분-4시 5분 (15분)에 걸쳐 만나 최종 전략을 논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9/15 토 - 9/ 22 토까지의 의전일지에 의거하면, 가장 많이 대통령에게 보고하거나, 초치받거나, 회의에 참여한 인물은 압도적으로 차지철 경호실장이다.  식사: 9/15 토 45분 (비서실장, 유혁인 정무 1수석과 같이), 9/18 화 오전 8시 55분-9시 50분 초치, 보고는 9회 (9/17 월 3회, 9/18 2회, 9/19 1회, 9/20 1회, 9/21 1회, 9/22 1회), 9/18 총리공관회의에 참석 등 모두 12회에 걸쳐 대통령과 일정을 공유한다.

 

반면에 비서실장은 9/15일 오찬, 9/18 총리공관회의 참석으로 2회 기록되어 있다.  정무 1수석 유혁인 9/15 오찬, 신직수 법률보좌관 9/21 차지철 면담에 동참 등 청와대 참모진들의 대통령 면담 기록은 매우 드물다.  흥미로운 점은 김준곤 목사 (1925-2009)가 9/18 화 1시간 8분간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차(의전일지의 기록) 독대했다는 기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