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군단과 재향군인회

역사/1930- 2013.02.26 14:35

 

밤에는 야경꾼이 돌고, 마을을 위협하는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자위대가 구성되고,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도 외세가 침입하면,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의병들이 나섰다. 따라서 국가가 조직한 군대 외에도 역사적으로 민간이 조직한 군사조직은 항상 존재했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독일의 경우에 프러시아에 17세기부터 자유군단의 이름으로 국가외 조직이 존재했었다, 특히 국가가 프랑스와의 7년전쟁, 나폴레옹에 의한 해방전쟁 시기에 애국적으로 마을을 지키려는 의용자위대가 조직되었고, 이는 국가에서 칭찬하는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1차 세계대전 후에 참전장교와 사병들을 중심으로 각 지역에서 자유군단이 조직되었다. 자유란 아마도, 국가의 상비군이 아닌 자율적인 군대라는 뜻일 것이다. 물론 이미 1차 세계대전시기에는 국민 개병제가 실시되고 있었고, 1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말미암아, 베르사이유 협약에 의거하여 국민 징병제는 다시 폐지되었다. 그러나 자유군단의 이름으로 1차 대전 후에도 수십만명 (혹자는 백만명 단위를 거론하기도 하나 40-50만 명 수준으로 평가하는 것이 적당할 것으로 보인다)이 속해있었고, 이들의 규모는 정규군이 10만 명으로 제한된 것과 비교하면 상당한 숫자라는 점을 잘 알 수 있다. 특히 국가의 위기시에 심지어, 히틀러의 등장과 같은 시기에도, 오히려 정부의 정규군이 히틀러의 돌격대와 자위대에 눌러 있을 정도였다고 보면된다. 히틀러의 돌격대와 보위대는 자유군단 출신들이 그 구성원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면 이들 자유군단은 무슨 일을 하였고, 어떻게 재정을 충당하였는가? 자유 군단은 겉으로만 보면, 국가적인 수준의 일을 행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노동자들의 파업을 파괴하고, 프랑스가 배상금의 불이행을 근거로 라인지역을 점령하자, 파업을 선동하고, 폴란드 지역에서 전위대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신문 광고를 통해 그들이 필요로 하는 일이 있으면 용병으로 고용할 수있다고 광고도 하였다. 사회적으로 국가의 경찰이나 군인이 합법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그러나 사회적으로 해결하여야 하는 일들이 많았음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이들이 무료로 봉사한 것은 아니었다. 모든 마치 직업군인처럼, 급여를 받고, 추가적인 보너스도 충분히 받고, 연금혜택까지 받았다. 이들의 수요는 국가적인 수요를 빙자하여 사업적인 수요가 많았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자유군단과 이들이 히틀러의 등장에 어떤 기여를 하였는가에 대해서는 자동적인 연관관계를 설정하는 것은 또 다른 연구 대상이다. 이에 대해 J.J. Schokking, 1955, “Militarism in Berman Society”는 국민 징병제의 등장이 상비군 제체와는 다른 정치적 효과를 가져왔다고 주장한다. 한편으로는 상비군의 폐쇄성을 혁파하여, 상비군이 개인적인 충성심으로 뭉쳐있는 상황을 완화시킨 반면에, 국민 개병제는 국민들의 심리나 행동방식 속에 군사주의를 광범위하게 확산시킨 면을 강조하다. 이렇게 확산된 결과 그들의 확신은 단순한 충성심을 넘어서서, 인생관, 역사관, 세계관을 포괄하는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변모했다는 것이다 (John L. Snell ed., 1959: 60). 구체적으로 가장 민감한 청춘의 시기에 군사훈련을 받은 이들은 특유의 사나이의 특성을 갖게되었다. 또한 군대에서 맺은 사회적 관계가 사회에서도 어느 정도 적용되었고, 이는 민주적인 질서로 재편하는데 장애로 작용하였다. 따라서 사호의군대화가 진행되어서, 전쟁에서의 패배나 내부로부터의 혁명과 같은 방식이 아니면 이것이 타파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독일의 경우에, 1차 세계대전에서의 패배와 바이마르 제국을 끝장낸 노동자사회주의 혁명에 의해서만 바이마르 민주주의 체제가 가능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독일 사회에서는 민주주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바이마르 체제도 불가피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또한 Schokking은 바이마르 체제에서의 자유군단과 히틀러가 자유군단과 독일인들의 군사주의적 성향을 이용한 것은 다른 측면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점에서는 너무 히틀러가 시대에 대해 완벽하게 독일사회를 이용하였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 같다. 독일의 군대사회적 성격은 바이마르 공화국 체제에서도 군사조직에서 베르사이유 체제를 무력화시키는 사실상의 군사훈련을 민간 항공사, 민간 항공기 제조의 제조를 진행하였고, 또 러시아와의 협정을 통해 군사훈련도 진행했다. 그리고 민간 군사조직이 정규군에 비해 적어도 4-5배 이상이 존재하였기에 쉽사리 군대로 재편이 가능했을 것이다. 이에 더해, 군사전략이나 새로운 군사기술을 활용하는 것에 능숙하게 대해 전격전을 활용한 점도 히틀러의 대담한 전략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군사전문가들은 공수부대의 활용, 전차군단과 통신장비를 활용한 적군의 종심을 관통하는 전격전, 전략에서 후방과 전략적 거점을 상공을 통해 장악하여 심리적으로 상대방의 저항의지를 초기에 꺾어 버린 점은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독일 국민들도 히틀러의 전쟁을 자신들의 생명을 버리면서까지 헌신적으로 지지하였는가는 시간이 흐르면서 희미해진다. 상당수의 해석에서는 외부의 과격함 (볼세비키)을 싫어하였기에, 내부의 과격함(히틀러)을 선택하였을 뿐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당시에 이미 미국에서는 전쟁에 게임 논리를 도입하여 전략게임을 랜드연구소를 통하여 개발하고 있었다. 독일의 병력자원, 무기자원, 국민들의 사기, 전반적인 경제능력 등은 독일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팽창해져 있었고, 히틀러 자신도 전쟁 후기로 접어들면서 대담한 작전을 두려워 한다. 즉 수세로 몰리면서 대담성이 줄어들고, 그래서 초기에 나타난 독일군의 전격전은 빛을 잃게 되는 것이다.

 

참고문헌

Christopher Ailsby, 2001/2007, [히틀러의 하늘의 전사들: 2차세계대전 최강 독일 공수부대의 신화], 프래닛 미디어

Gorden A. Craig, 1955, The Politics of the Prussian Army, 1640-1945, Oxford, The Clarendon Press

Allan Shepperd, 1990/2006, [프랑스 1940: 2차 세계대전 최초의 대규모 전격전], 플래닛 미디어

Robert G. L. Waite, 1952, Vanguard of Nazism: The Free Corps Movement in Postwar Germany, Cambridge, Mass.: The Harvard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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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안 우월주의와 열등인종 학살

역사/1930- 2013.02.25 12:14

 서구의 인종주의는 공식적으로는 폐기되었지만, 사회적으로는 인종 차별적 언어나 관행은 지속되고 있다. 이의 근원은 바로 19세기 중반으로 넘어간다. 즉 서구가 산업혁명을 이루고, 식민지를 본격적으로 직접 지배하던 시기와 일치한다. 선구자적 인종 결정론은 당시에 고비, An Essay on the Inequality of the Human Races (18531855)를 통해 이루어 진다 (고비노의 이론은 Nicholas S. Timasheff, 1955/1961, Sociological Theory: Its Nature and Growth, 사회학이론, 수도문화사: 74-76를 참조).

 이 이론은 가장 자명한 명제로 (1) 문명의 흥망이나, 국가의 흥망은 우세한 인종의 혈통 순수성에 기인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당시에 널리 인용되던, 서구의 진보론을 거부하고, 서구는 현재 팽창하면서 인종이 혼혈이 되어서 퇴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면에서 고비노는 독일인들이 생물학적으로 좀 더 혼합종이기 때문에 불란서인들보다 민족적으로 열등하다고 생각하였다. 진실로 우월한 민족은 영국에 가장 잘 보존되어 있다고 그는 논하였다” (Timasheff, 1955/1961: 74). 그에 의하면, 북구 유럽 사람들과 북부 독일, 그리고 영국인들이 가장 순종인 백인을 유지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후에는 미국, 독일 발달하자, 이론을 수정한다. 백인이 다른 인종과 합쳐도 백인종의 우월성이 보존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2) 두 번째 명제로는 아리안 우월주의를 주장한 것이다. “모든 주요한 문명들은 백인종의 최고의 줄기를 이룬 아리안인종이 달성한 것이었다” (Timasheff, 1955/1961: 75). 이는 물론 사후적인 설명이다. 즉 과거에는 백인종보다도 우월한 문명이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현재 남아 있는 문명은 백인종의 문명이 가장 우월하므로, 아리안종의 문명이 가장 우월한 문명이고, 따라서 백인종이 우월하다는 주장이다. 우월주의는 두가지 형태로 구체화된다. 즉 저열한 인종은 우월한 인종의 지배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점과, 동시에 우월한 인종의 생존공간이 부족하므로, 저열한 인종의 영토를 침략하여 이들을 몰아 내는 것은 문명적으로 정당하다는 주장이다.

 특히 나치의 인종이론가인 Hans F. K. Günther는 아리안 인종중에서도 노르딕 인종이 가장 우월한 인종이고, 이는 독일 게르만 민족에서 가장 잘 보존되어 있다고 주장하여 독일 게르만 종족의 우월성을 주장한다 ( 1922, Rassenkunde des deutschen Volkes, 독일민족의 인종과학). 즉 아리안 인종이 코카사스 산맥 아래에서 시작하였다면, 게르만 종족은 민족 대이동시기에 고트, 반달족 등의 이름으로 북부에서 이동을 시작한 종족이다. 아리안 종족에는 아시안 아리안 즉, 셈족까지 포괄하는 것이었으나, 나치의 지도자들은 아시안 계통의 아리안 족은 배제한다. 그러나 나치의 갈고리 상징모양 (불교의 상징을 방향을 바꾼 모양)이나, 스스롤 정당화할 때는 힌두교의 베다, 시들을 인용하였다.

 (3) 당시에 인종이론의 영향력은 대단하였다. 이러한 영향력은 현실에서의 이종족에 대한 억압과 수탈을 윤리적으로 정당화시켜주는 것이기에 환영을 받았다. 19세기 중반의 고비노 이론은 프랑스에서 그의 이론은 많은 사람의 상상을 황홀케 하였다... 그러나 당시에 퍼져 있던 진보이론에 배치되는 것이라고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Timasheff, 1955/1961,: 75-76).

 독일은 고비노의 이론을 이어받아 Houston Stuart Chamberlain (1855-1927)19세기 말에 독일에 소개한 소개하고, 독일어로 [19세기의 기초]라는 책을 발간하였다. 결국 프러시아의 빌헤름 2세와 그의 주변에 영향을 주었고, 후에 나치는 이를 취하여 인종이론에 기초한 침략, 우생학적 정책을 실현할 수 있었다. 특히 챔버린이 1899년에 발간한 책은 그 후 10년간에 걸쳐 약 6만부가 판매되었고, 1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10만부가 판매되었고, 1938년까지 25만부 이상이 판매되었다. 즉 지속적인 베스트 셀러 자리를 유지한 셈이다. 미국에서도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영향을 주어 1924년의 이민제한법을 정하는데 이론적 기초를 제공한다.

 (4) 아리안 우월주의는 반대로 흑인과 유태인은 열등민족이라고 규정한다. 그러나 애초의 고비노나 챔버린의 반유대주의에서는 주장되지 않았지만, 나치 시기의 이론가인 군터에 의해 제기되고 이론화되었다. 즉 고비노는 Essai sur l'inégalité des races에서 오히려, 유대인들은 어려운 자연조건에서도 이를 극복한 자유롭고, 강하고, 지적인 민족이라고 지적하였다. 이러한 견해는 자치에 의해 편집되었다. 챔버린의 경우에도 유태인에 대해 호의적인 것은 아니었으나, 중세이후 반유태주의 정서는 독일에 이미 만연해 있었다. 이는 종교적인 이유와 경제적 경쟁관계에 의해 더욱 촉발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기독교가 유대교를 대항하여 발생하였다는 점, 그리고 유대인들이 상인이나 금융업 등에 중사하였으므로, 이 분야의 경쟁관계에 있는 토착인들의 배척을 받았을 것이다. 나치의 이론가인 군터도 유대인들의 특성을 상인정신을 가진, 그리고 기교가 많은 무역가로 표현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이미 1885년에 Josiah Strong 목사가 인종주의 사상을 배태하였다. 반유대주의적 사회적 분위기는 프랑스의 드레퓨스 사건, 그리고 러시아의 유태인 대학살에서 드러난다. 러시아에서는 19세기 중엽이후 1905년에 이르기까지 주로 남부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유태인에 대한 민중의 학살과 박해가 일삼아 졌다. 당시에 수천 명이 죽은 것으로 보고된다.

 (5) 히틀러는 1938년부터 시작된 체코 침입, 그리고 1939년의 폴란드 침입에서 같은 아리안 계통의 인종끼리 침입하는 것에 대한 이론적 혼란을 느끼게 된다. 폴란드, 체코 민족은 아리안 계통이기는 하지만, 폴란드는 1939년 침략 당시에 하위 인종으로 다시 규정하여, 지배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체코는 물론 독일 거주인들 Sudeten문제로 침략하기는 했지만, 역시 인종적으로 몽골계통이 섞인 것으로 의심된다고 주장하여 아리안 인종에서 철회하고, 침략 대상이 된 것으로 주장한다.

 물론 러시아를 침입할 때는 슬라브 민족은 인간에 속하지 않고, 하위 인류에 속하므로, 제네바 협약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전쟁포로에 대해서도 자의적으로 처분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또한 우월한 인종의 생존공간 Lebensraum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슬라브 민족이 살던 지역으로 참략하여, 이들을 몰아내고, 우월한 인종인 게르만 민족이 살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여 자신의 침략을 정당화하였다. 물론 전쟁 말기 병사의 숫자가 부족해 지자, 슬라브 인종도 전쟁주인이 아니라, 도구로서 사용할 수 있다고 주장을 일부 변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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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사이유 조약과 나치의 등장

역사/1930- 2013.02.24 12:04

  나치의 등장에 바르사이유 (히틀러의 표현에 따르면, 파리 교외) 조약의 가혹함에 있느냐의 문제가 제기된다. 가혹하다는 것은 관점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독일이 1차세계대전을 발발시킨 책임을 묻는 것은 승전국인 프랑스, 이태리, 영국, 미국, 러시아, 일본등이 다른 당사자로 참여하고, 독일이 그 대상으로 참여하는 형태이다. 주목할 점은 일본이 바르사이유 조약의 대표단의 사진에 따르면, 59명의 대표단이 참석하였다. 대규모의 대표단이나, 실제로 협상에 참여하지는 않았고, 서명의 당사국이 되지도 못하였다. 최후까지 협약의 협상과 서명에 참여한 나라는 미국, 영국, 프랑스였다. 당연하게도 프랑스가 가장 강경하게 독일의 전쟁 배상 책임을 강하게 물었다. 프랑스는 나폴레옹 시절에는 독일을 침략하여, 승리로 이끌었지만, 반면에 1871년 독불 전쟁과 1차 세계대전에서 연이어 패배의 곤혹을 치루면서 가장 피해가 켰고고, 독일과 국경선을 직접 마주하면서 위협을 직접적으로 느끼고 있던 국가였으므로,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영국과 미국은 상대적으로 독일의 경제가 불황에 빠지면 세계경제가 위축될 수 있으므로, 약한 제재를 원하였다.

  제재라는 것은 전쟁 배상, 배상이 현금으로 어려우므로, 현물과 지적재산권도 포함하고, 침력으로 팽창된 영토만이 아니라, 식민지와 독일 국경내의 광산자원이 매장된 영토까지 장악하는 내용이었다. 이에 더불어 군축과 군수산업의 기반활동을 금지시키는 내용이었다. 이에 대해서도 미국은 독일이 직접 현금으로 주는 것은 오히려 독일 경제를 파괴시켜 세계경제에 위협을 준다는 점을 잘 인식하고, 독일에 대해 금융지원을 통해 배상하는 방안을 제시하였고 실제 그렇게 실행되었다.

  그러면 전쟁 패배국에 대해 이러한 내용의 제재가 타당한가에 대해서는 당시 영국대표였던, 케인즈가 카르타고식의 평화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비판하고, 영국 협상대표직을 사퇴했고, 또한 대부분 1871년 독-불전쟁에서 독일이 프랑스에 5년정도에 배상이 가능한 정도를 부과한 점에 비해 59년에 걸친 배상을 부과한 점은 과도하다는 등의 지적이 있었다. 카르타고식의 평화라는 것은 기원전 로마가 카르타고를 대상으로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에 카르타고를 완전히 불살라버리고, 주민들을 모두 노예를 삼아, 도시 자체가 사라진 점을 지적한 것이다. 즉 케인즈가 판단하기에는 바르사이유 조약대로 이행될 경우, 독일 경제는 사실상 파산한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그러나 반론을 펼치는 학자들은 바르사이유 조약의 내용은 당시의 배상 수준으로 보면 상식적인 내용이지 특이한 점은 없었다고 지적한다.

  바르사이유 조약은 독일의 1차 세계대전 전범 책임을 묻기도 하였지만, 또한 러시아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와해에 따른 새로운 국경선을 획정한 점도 포함되어 있다. 이 점이 중요한 것은 유럽 대륙에서 독일의 팽창을 강력하게 제어하던, 동부지역이 사실상 사라짐으로써 국제적인 세력균형이 사라졌다는 점을 지적한다. 신생국에 해당하는 폴란드, 독일주민을 대량으로 갖고 있는 체코슬로바키아, 역시 독일주민이 많은 오스트리아, 신생국 헝가리, 제국이 사라지고 볼셰비키 혁명으로 국가가 혼란 속에 빠진 러시아 등이 모두 독일에 대항할 수 없는 상황에 빠져 있었다. 이런 상황은 결국, 독일 1936년 오스트리아를 병합하고, 1938년에 체코, 1939년에 폴란드를 공격함으로써 증명되었지만, 아무튼 국게적 세력균형의 와해라는 것이 독일의 나치등장과 성공에 결정적으로 작용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독일이 바르사이유 조약을 충실히 이행하였느냐의 문제는 별개이다. 실제로 바르사이유 조약은 1919년에 체결된 이후에도 계속 약화되어 가고, 히틀러의 등장 직전인 1932년에는 사실상 사라지는 상황에 까지 가게 된다. 물론 1932년의 상황은 1929년부터 시작된 국제적인 대공황의 영향이기는 하지만, 지불 배상을 유예하였던 것이다. 실제의 배상은 1932년 현재 1919년에 약정된 금액의 1/8정도가 지불 완료되었다고 한다. 물론 배상의 부담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로 부담이 컸었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많은 학자들은 이 기간중 독일의 경제가 발달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1933년에 히틀러가 조약 무효를 선언하고, 2차세계대전에서 패배한 이후에 독일 정부, 특히 서독정부는 배상 의무를 다하여, 2010년에 배상이 완료되었다고 한다. 2차세계대전이후에 바르사이유 조약이후에 조정된 배상금을 독일 통일이후로 미루어졌으나, 서독 정부는 자발적으로 배상의무를 통일 이전에도 지불하고 있었다. 이로 미루어 독일 자체의 문제라기 보다는 독일 내부에서도, 히틀러의 역사적 채무를 무겁게 여기는 정치적 상황의 변화가 이러한 책임을 다하는 것으로 이끌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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