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란이 역사의 진보로 가기 위한 조건들

역사 2009. 1. 4. 08:11
유럽이 당시 가장 경제적으로 앞선 중국을 추월한 시기를 1300년경으로 잡는다면, 유럽의 중세는 암흑기가 아니라, 고도의 경제적 생산력을 만들어내기 위한 준비의 시기였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중세는 대개 프랑크 왕국의 국가체제가 바이킹들(노르웨이와 덴마크인들)에 의해 몰락하고, 지방분권적인 봉건영주체제가 건설되는 시기를 가리킨다.  물론 여기에 가톨릭 교회와 수도원들도 통치기구의 하나를 이루게 된다.  봉건 영주체제란 영주들이 그들의 가신들에게 나누어준 봉토를 다시 농민들에게 분배하여 경작하여 세금을 바치고, 영주는 이들 가신들을 무력으로 보호하는 체제를 가리킨다.  영주는 사실상 국가의 역할을 담당하여 군사와 사법권을 행사하게 된다.  유럽은 어느정도는 왕에 의한 국가체제라는 것이 형식상 존재하지만, 실제로는 힘을 쓰지 못하는 체제가 되어 버린 상태였다.

여기에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중앙집권 국가체제에서는 대개 노예제도를 이용한 생산, 또는 용병을 사용하는 징병체제르 갖추고 있었지만, 봉건체제는 노예제가 아닌 자유로운 농민(때로는 농노라고 불리우기는 하여도), 가신들에게 나누어진 봉토를 다시 분배받아 농사를 짓는 제도였다. 따라서 신분적으로는 자유로왔다.  노예제에 비해서는 농업생산이 늘어났다고 평가한다.  물론 인구도 늘어났다.  이를 거두어 들인 가신과 영주들은 잉여생산을 이용하여 교환을 촉진하게 된다.  상업과 도시의 등장이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중앙국가가 강력하게 농업과 상업을 통제하던 시절보다 한결 생산력도 늘어나고 유통도 활발하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런 내부적인 요인외에도 해양을 이용한 장거리 무역도 발전하게 된다.  지중해에서 흑해, 북해연안 도시들간의 무역이 발전하게 되고, 이는 도시들간의 연합이나, 중앙아시아 대륙이 징기스칸에 의해 평정됨으로써 한층 쉬워졌다.

봉건제도의 등장과 더불어 등장한 기사계급은 예비된 전문적인 직업군인들이었다.  이들은 무력집답이면서 동시에 가신과 영주, 또는 더 큰 영주 연합체를 위해 봉사하는 집단이었으나, 항상 체제 위협적인 불안한 세력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이들은 결국 십자군전쟁을 통해 해외의 식민지 건설, 동방지역과의 교류의 물꼬를 트는 역할을 담당한다.  당시에 문물이 앞선 이슬람 세력들은 십자군을 너무 얖잡아 보기도 했고 내부적으로 수니파와 쉬이터파와의 갈등, 지역적인 분열이 이들에게 패배한 원인이라고 보면 될것이다.  즉 십자군은 상대적으로 가톨릭의 결집된 세력이었던데 반하여, 이슬람권의 방어세력은 분열되어 있었다.

유럽과 이슬람과의 교류는 결국, 앞선 무역능력을 보유하고있던 이슬람권의 아라비아 숫자, 회계제도를 도입하게되었고, 대규모의 근대 국가 경영을 위한 제도적인 기반을 마련하게 된다.  당시의 한반도의 상황을 보면, 한반도 역시 바다에는 마산에서 출발한 세금을 거두어 들인 배가 6척정도가 개경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고, 대마도의 왜구들은 한반도 해안을 유린하였으며, 제주도와 유구(오키나와)간의 왕래도이루어지고 있었으며, 우리가 장보고에서 알듯이 중국 연안과의 왕래도 활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바다는 국가의 세곡선, 상인들의 국제무역, 인민들의 피난을 위해 활발히 움직였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우리가 유럽과 다른점은 우리는 해외와의 문명 접촉을 통해 내부적인 개혁(인민들의 평등을 기초로 한 경제활력화, 지방분권을 통한 전체적인 국가의 기반 강화, 외부 문화의 수용)등에 소홀하였던 것으로 분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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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은 발전을 위한 전단계에서 발생한다.

역사 2009. 1. 3. 17:31
유럽 중세의 역사는 비판의 의미를 지닌 중세봉건사회라는 표현에서부터, 암흑시대라는 표현에 이르기 까지 상당한 정도의 부정적인 평가가 등장한다.  즉 폭력과 무질서, 그리고 농노제도와 봉걵건제도에 딸린 영주가 농노들이 결호낳기 전에 처녀와 미리 잠자리를 같이 한다거나, 흑사병, 마녀사냥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십자군 전쟁, 농업혁명, 도시의 등장, 기사도(궁정사회), 직업장인의 등장, 분업과 동시에 원거리 무역의 발전과 내지 무역의 등장, 한자 동맹, 바이킹의 아이슬란드와 그린랜드 정착 등을 든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표면적인 평가 또는 관찰의 뒤에 있는 보다 깊은 사회구조적 변화의 동인을 살펴보는 것이다.  기후 사학자들은 중세 온난화 현상을 주장한다.  즉 800년경부터 1350년경까지 현재의 기후보다 1도가량 높았다는 것이다.  이는 사람들이 개간할 수 있는 땅의 증대를 가져왔고, 농산물이 풍성하게 수확되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 북쪽에서는 바다가 얼음에서 녹고, 유빙의 한계가 극지방으로 밀려감으로써 노르웨이에서 아이슬란들와 그린랜드 나아가 현재의 캐나다 북동부지방까지 진출했다는 점, 덴마크인들은 노르만디와 영국 방향으로 진출하게 되었다느 점을 지적한다.  즉 중세의 온난화시기는 농업의 풍요로음과 동시에 바이킹들이 적극적으로 바다에서 활동하게 만들었다는 점을 든다.

동서양의 관계, 더정확히 말하면 현재의 서부 유럽과 중국과의 교류라는 측면, 그리고 이 둘을 매개하는 이슬람 권인 중앙아시아와 아랍의 관계까지 넣고본다면, 중국이나 이글람 권보다도 열등한 문명을 지니고있던 유럽이 중세암흑기를 거쳐 이들 두개의 문명권보다도 앞선 문명을 구가하는 과정이 이 중세에 들어 있다.  따라서 우리는 유럽이 세계를 제패하는 현재의 유럽으로 등장하는 계기를 설명하는 방식을 찾는 것이 흥미롭다고 하겠다.

중국은 11세기에 거란과 여진을 밀어내고, 다시 훈족을 밀어내어 간접적으로 유럽에 파급효과를 준다. 특히 훈족은 앞선 시대의 북방에서 내려오는 민족이동을 야기시킨 하나의 원인이 되어 로마제국 멸망의 한 요인이 된다.  거란과 금나라 역시 유럽의 문명과 대면하여 최초로 중국을 소개하는 민족이 된다.  이후 1200년대들어서는 몽골의 징기스칸이 유럽의 흑해 연안까지 진출하여, 한편으로는 흑해를 장악하던 라틴 문명과 충돌을 일으키기도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대륙내의 교역의 안전성을 보장하여, 지중해 연안의 장거리 무역이 더욱활발해지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한다.  베니스가 현재 크로아티아 연안을 거쳐, 그리스 연안, 흑해까지 진출하여 사실상 유럽의 동방 무역을 독점하고, 지중해의 르네상스를 준비한다.

유럽은 또한 십자군 전쟁을 통해 1000년대 말부터 막강한 사라센 제국과 겨눈다.  이는 내부적으로 중앙집권국가로 향하는 과정에서 기독교 세력과 힘을 합치고, 유럽의 봉건적인 내부 무장 세력들의 힘을 결합시켜 외부로 향하게 하는 의도때문에 발생한 것이기는 하지만, 과학과 수학이 발달한 이슬람의 문명과 본격적인 교류를 통해 르네상스를 준비하는 계기가 된다.

물론 중국 또는 이슬람 세력과의 문명 접촉은 직접적으로는 흑사병의 창궐, 종교재판의 등장과 같은 사회적 혼란이 야기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유럽의 중세 역사를 통해 나는 외부와의 접촉을 무서워할 것이 아니라, 어느정도의 혼란을 감수하고라도, 이를 수용하여 앞으로의 발전의 전략을 삼는 것이 역사의 발전을 이루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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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바다를 통해 무역과 침략이 동시에 이루어졌다.

역사 2009. 1. 3. 14:52
고려시대를 읽노라면, 태조 왕건의 웅대한 기상과 동시에 중국에 기대어서 권력을 유지하려는 세력의 등장, 그리고 이에 대한 반동으로 나타난 무신정권, 1200년대 들어 무너져 버린 고려의 역사를 복합적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한마디로 고려는 중국과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려 했다는 제국이라는 성격과 동시에 거란과 금의 침입, 원나라, 홍건적, 왜구의 침입에 시달린 허약한 나라라는 두가지 이미지가 동시에 겹쳐온다.

그러나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할 것은 고려시대는 세계적으로 바다라 열린 시대였다는 점이다.  이 열린 바다를 매개로 해서, 중국의 송나라 시기에 해당하는 고려 초기에는 멀리 아라비아 상인들까지 개경에 들어와서 무역을 했다는 사실, 그래서 개경에는 낙타와 코끼리도 보였다는 점, 우리나라 성씨중 외래에서 귀화한 성씨가 반정도 인데, 그중 다시 반정도가 고려시대때 귀화한 성씨라는 점(고려때 귀환한 사람들이 지은 사대부 문학가으로서는 변안열, 이자란, 설손, 설장수, 설순 등이 있다), 압록강과 두만강변은 뚫려있어서 사실상, 사람들은 넘나들면서 세력다툼을 벌리고 있었다는 점 등을 알수 있다.  물론 최근에는 진도에서 항몽의 기지로 사용된 성에서 발견된 기와와 같은 기와가 오키나와에서 발견되어 아마도 삼별초의 일부가 오키나와(유구)로 피난했을 가능성을 말하고있다.

고려 초기의 거란과 진나라(금나라)가 서양에서 중국을 부르는 이름인 Cathay(China라는 명칭이 정착되기 전에는 Cathay즉 거란이라는 명칭으로 중국 영토를 불렀다.  거란은 중국의 중심지에서 서쪽으로 밀려나서 서양인들에게 중국을 부르는 이름으로 정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와 Chin(현재 중국을 부르는 명칭인 China는 진나라에서 시작했다)으로 시작했다는 점은 당시에 중국에 대해서 서양으로 그 지리적 존재가 부각되던 시기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물론 본격적으로 마르코폴로가 1300년경 원나라의 북경에 체류한 경험을 기록한 책에서 알려지지만, 아무튼 서양과 동양이 본격적으로 만난 시기임에는 틀림없다.  이때 Korea(고려, 현재의 대한민국을 가리키는 말)라는 명칭도 그리고 Japan(일본은 원래 닛폰이라는 명칭으로 일본에서는 불리운다)이라는 명칭도 서양에 들어갔다.

고려시기가 한편으로는 중국대륙과 일본으로 부터 밀려오는 세력들에 의해 유린당한 역사라고 평가할 수도있지만, 동시에 우리가 이에 맞서 해양세력으로 진출하고, 만주의 벌판을 넘나들면서 국가의 자존심을 지키려는 시도를 한 역사로도 기록된다.  또한 중앙국가 체제가 지방에까지 미치지 못하고 날씨가 온화한 시기적인 잇점, 중국의 문물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잇점을 살려 지방농민들은 비록 고립적이기는 했지만, 생산력을 많이 발달시킨 시기였다. 아쉽게도 1200년대이후의 원나라, 홍건적, 왜구의 침입으로 만신창이 되었지만, 지방의 신층사대부들이 고려의 명맥을 이을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음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당시의 마산은 고려시대의 끝자락에서 세금을 거두어 들이는 창고가 있었고, 이를 운반하던 배가 머무르던 곳이었다.  마산의 명칭도 원나라의 말을 기르던 산(아마도 자산동 또는 산호동)에서 비롯된 것으로 전해진다. 마산포는 산호동 방향을 일컫는 것으로 비정되고 있다. 김해에서는 김해에서 원의 요동정벌을 위한 말을 길렀다고 말한다.  마산은 배를 모아서 거제를 거쳐 일본 대마도 규슈로 출발하던 기지역할만 했다는 것이다.  아무튼 마산이 출발기지였으므로, 이곳에 2차레엘 걸쳐 중국의 남쪽 사람들, 원나라 사람들, 고려사람들이 적어도 3만명 정도가 모였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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