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시대의 교류는 자유로왔다.

역사/BC 2008. 11. 15. 13:17
역사서술 이전 시대를 선사시대라고 한다면
우리의 경우에는 아마도 삼국 초기 이전단계는 거의 선사시대에 속한다.
그리스의 경우에는 BC700년경부터 역사시대라고 칭할 수있을 지 모르지만.
선사시대에 대한 역사 해석은 순전히 발굴된 유물과, 드문드문 남은 중국이나, 일본의 사서들, 아니면 민담으로 전해내려오는 설화, 기록된 설화 들을 보고 해석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문제는 이 정도의 시기에 이르르면 같은 땅에 살았다는 것 외에 나와 같은 핏줄을 지녔는지에 대해서는 매우 모호해 지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선사시대에는 국경선 통제가 거의 없었고, 아니 국경선이라는 개념도 없었고, 한반도의 경우에는 국경선 내에 주민들을 가두어 놓는 주민등록제도도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주민들은 국경선의 개념이 없이 자유롭게 필요에 따라 이동하면서 살았을 것으로 추정할 수있다.  또한 정착식 농업이 완전히 자리 잡기 전에는 토지의 비옥도에 따라 이동하고, 기후에 따라 이동하고, 수렵과 채취를 곁들인 생활이었다면 당연히 이동을 전제로 자시의 삶을 꾸렸을 것이다.

이동의 범위가 어느정도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석기시대, 청동기 시대의 유물, 벽화의 비슷함, 다른 지역의 산물이 이동하여 나오는 정도 등을 파악한다면 일본의 큐슈지역은 가야에 해당하는 지역고 교류가 있었을 것이고, 중국의 산동반도는 우리나라의 서해안과 인근의 섬들과 이동이 많았을 것이고, 중국의 요서지방은 요동을 거쳐 대동강변까지, 아니 더 나아가 울산지역까지도 비슷한 바위에 새겨진 조각을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이동은 대규모로 정치나, 기후상의 변화로 인해 발생했을 것이다. 단순히 한 부족 단위로 경제를 위해 이동하는 정도의 거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중요한 점은 선사시대의 주민들은 국경의 거리낌이 현재보다 거의 없었다는 점에서 보다 이동의 자유를 누렸다고 볼 수 있다.  현재의 우리는 이동의 수단을 가지고 있지만, 이동할 때마다 국적을 의식하고, 강요당하고, 민족의식을 재현하는 각종 인공건조물에 세뇌당하고, 따라서 우리는 좁은 영토주의에 사로 잡히는 결과를 초래한다.  오히려 선사시대의 사람들은 좁은 영토라는 의식 자체가 없었을 것이고, 필요에 따라 자유롭게 이동하는 한층 cosmopolitan 적인 사고와 생활을 영위하지 않았을까?

'역사 > BC'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테네의 직접 민주주의  (0) 2013.10.05
플라톤의 국가론에 나타난 민주주의  (0) 2010.07.02
인류의 역사  (0) 2008.10.17
우주와 지구의 역사  (0) 2008.10.17
:

이자를 받는 것은 사회관계를 표현한다.

교양 2008. 11. 14. 11:04
옛날 사람들은 이자를 받았을까?
친한 사람들끼리는 이자를 받지 않았고, 잘 모르르는 사람에게서는 이자를 받았다.  물론 아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국가가 법률적으로 보증하지 않는다면 돈을 빌려 주지 않았을 것이다.

어느 정도의 이자를 받는 것이 적정한 것인가?  이에 대해서는 분명한 개념은 없다.  물론 경제학에서는 돈의 수요 공급과, 미래에의 위험 정도에 따라 이자율이 결정된다고 한다.  즉 돈을 쓸 사람과 빌려줄 돈이 대기하고 있는 정도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상대방의 돈을 갚을 수 있는 능력에 달려 있다.  BC3000-BC2000년경에 만들어진 함무라비 법전에는 1/6을 이자로 주라고 했으므로 따진다면 연 17%정도의 이자율이다.  이 정도의 이자가 낮은 수준인가 아니면 높은 수준인가는 당시의 물건이 대개 자연물이거나, 노동집약적인 물건일 가능성 따라서 자본을 가지고도 몫을 늘리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는 점, 그리고 당시 바빌론의 국가가 신용보증을 제대로 해줄 수 있어 위험 발생 가능성이 낮았자는 점을 고려해야 할 것 같다.  지금 우리나라의 사채대부가 연간 60%로 묶어 놓은 것을 놓고 높으니, 낮으니 하는 것을 보면, 우리나라는 돈이 궁한 사람들이 많고, 이들에게 돈을 빌려주려는 사람은 적고, 또한 돈이 떼일 염려가 높다는 점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10월 26일(일)에 성당에 가서 독서를 들으니, 탈출기22:20-26에서 "너희가 나의 백성에게, 너희곁에 사는 가난한 이에게 돈을 꾸어 주었으면, 그에게 채권을자처럼 행세해서도 안되고, 이자를 물려서도 안된다.  너희가 이웃의 겉옷을 담보로 잡았으면, 해가지기 전에 돌려주어야 한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금융위기가 진행중이고, 점차 이자율이 높아가는 상황에서 새롭게 들렸다.  탈출기의 시기와 장소는 함무라비의 법전이 나온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그러면 유대인들은 상호간에 이자를 받지 않는가?  정답은 받지 않는다고 맞다.  유대인들은 상호간에는 이자를 받지 않고,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고리의 이자를 받는다.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고리대금업자 유대인의 모습은 외부인에 대한 것에서 나오는 문제이다.  이슬람교에서도 이자를 받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즉 외부인과 내부인의 구분이 분명한 것이 이자제도이다.  내부인은 믿을 수 있고, 설사 이자를 갚지 못해도, 이웃이나 가족이 갚아주든지 아니면 장기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궁극적으로 갚을 것을 전제하고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공동체를 유지하는 방식으로 상호간에 이자를 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외부인들에 대해서는 단기간의 관계만이 형성되고, 믿을 수 없기때문에 엄격한 이자를 적용하였을 것이다.  공동체라는 것은 나의 뿌리가 되므로, 이곳에서는 상호간의 의존이 아주 심하고, 설사 화폐적인 관계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다른 형태로서 묶여있고(사회적 존경, 정치적 권위, 만남), 이 속에서는 다른것에 손실이 발생하지 않게 하기 위해 화폐적인 손실은 감당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만일 우리사회가 이자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1) 돈의 수급관계를 원활하게 하는 것 외에도, (2) 신용관계를 국가가 보증하는 제도, (3) 한국내의 거주자들간의 공동체적인 의존을 높이고, (4) 화폐적인 거래 외에도 거래의 방식(존경, 만남, 권위)의 다양화가 필요하다.
:

대학 교정의 나체 조각상들

역사 2008. 11. 13. 16:29
지난 금요일 춘천의 한림대에서 지역사회학회가 열려 병원쪽의 정문으로 들어섰다.
마침 학회가 열리는 장소가 대문 옆에 있어 학회시간보다 일찍 온 셈이 되었다.  고령연구센터와 같은 역할을 하는 건물인데 회의장이 원형으로 되어 있어 다른 학교에서는 볼수 없는 구조이다.
모든 참석자들이 똑같은 위치에서 사회, 발표, 토론을 진행할 수 있다.  자리의 앞, 뒤, 서열이 없는 구조이다.
지난해에 몽골국립대학의 회의장이 이와 비슷하게 그러나 반원형의 형태로 생겼었다.  반원형은 앞이  있어 앞에서 발표하고, 반원형의 계단구조의 청중석을 향해 발언하게 되어 있었다.  따라서 발표자에게 집중해야 하는 형태로서 적합하였다.

고령연구센터를 나오니 길 건너편에 아마도 도서관과 같은 건물이 있고, 민망하게도 건물 앞에 남자 벌거벗은 조각상이 불알을 내놓고 서있다.  아마도 로마나, 그리스, 아니면 서양의 유명한 조각가의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이들 조각상이 무엇을의미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름다움, 균형미, 인간미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한다.  이런 조각상은 우리 경남대학에도 본관 건물앞에 높여 있다.  물론 성기 모양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은 아니지만, 벌거벗은 모습의 조각이 본관 입구 올라가는 계단 양편에 놓여있다.  학교 도서관 앞에는 생각하는 사람의 조각상(로댕)이 높여 있다.  그것도 벌거벗은 모양이다.  무언가 우리네 실정하고는 안맞는 것 같다.   조용히 사색하는 학교에 벌거벗은 조각상이라.

기원전 4-5세기의 그리스 조각상에 기초를 둔 인체 조각상은 실은 신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이를 로마가 이어받았고, 나중에 르네상스를 거쳐, 19세기에 유럽이 그리스를 본격적으로 자기네 것으로 만든 후에 그리스의 조각상을 열심히 파내오고 그래서, 현재 유럽에는 많은 그리스 유물들이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실은 유럽과 그다지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나, 유럽의 민주주의, 철학, 예술의 원천으로 간주하고있다.   스스로 그렇게 주장할 뿐이다.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왜 그리스, 유럽의 조각상의 모조품을 대학에 들여놓아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우리 대학의 이념과 맞는것인지, 무엇이 맞는 것인지, 대학을 상징할 수있는 조각인지?  몽골국립대학의 반 원형 회의장에는 벽면에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학자들으 모습을 걸어놓았다.  그다지 어울리지는 않지만, 대학의 모습과는 어울린다고 볼수 있다.  비엔나 대학의 구내 정원에는 그 대학 출신의 유명한 교수들의 부조상과 이름을 새겨놓은 공원이 있다.  그것은 더욱 이해할 수 있다.

우리의 대학의 위상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