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17-18세기'에 해당되는 글 12건

  1. 2009.02.13 전쟁으로 세계는 무너졌다.
  2. 2009.02.12 평민의 경제적 성장과 붕당정치
  3. 2009.02.11 불평등한 세상은 혈연을 강조한다.
  4. 2009.02.10 자연경제와 도덕경제를 뚫고 나오는 상품경제의 싹들
  5. 2009.02.09 무역독점 능력이 국가 능력이었다.
  6. 2009.02.08 여진 -> 후금 -> 청 나라로 가는 동안 조선은 무엇을 하였는가?
  7. 2009.02.04 일본과 중국이 강대국으로 부상하는 시기에 조선은 무엇을 하였나?
  8. 2009.01.30 경험의 확대와 공유는 세계관의 혁명을 가졌왔다.
  9. 2009.01.29 노예의 땀으로 이루어진 자본주의
  10. 2009.01.28 종교 -> 과학 -> 산업혁명

전쟁으로 세계는 무너졌다.

역사/17-18세기 2009.02.13 16:47
유럽 역사와 조선의 역사를 비교하면, 특히 근세의 경우에 유럽에는 전쟁이 끊임없이 발생했다는 점과 조선은 상대적으로 평온했다는 점이다.  물론 조선의 1400-1500년대에는 왜구의 침입, 1500년말의 일본, 1600년대초중의 후금과 청의 침입이 있었지만, 실은 상대적으로 해외에서의 침략은 상대적으로 적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혹자는 전쟁이 국가를 만들고 국가는 다시 전쟁을 일으키고 하는 상호 강화작용을 한다는 점에서 본다는 전쟁이 적었다는 것이 백성들에게는 상대적으로 편안하였을 지도 모르지만, 국가 능력의 측면에서는 국가 능력의 약화를 가져온다고 말한다.

아무튼 1600년대 중반 조선의 국가는 몰락하였다.  과세자료와 신분자료의 망실은 국가를 유지시키는 세금부과와 군역과 부역을 부과하는 능력에 치명적인 손상을 가져오게 된다.  물론 양반들은 자신들의 고향에서 스스로 의병을 일으키거나 하면서 자신들의 실질적인 지배를 강화해 갈 수 있었다.  그러나 국가의 몰락은 신분질서의 몰락일 뿐만 아니라, 이데올로기 질서, 자신들이 경제력을 궁극적으로 보호해 줄수 있는 세력의 몰락을 의미하므로, 양반들도 과거의 국가질서로의 복귀를 위해 노력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러나 그 질서는 과거와 같을 수는 없다.  이미 백성들은 국왕과 그의 신하들이 백성들을 보호할 능력이 없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먼저 도망쳤으며, 위기에 그들을 보호할 능력이 없다는 점이 적나라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동시에 왜, 명나라, 후금과 청나라 군대의 장기간 백성들과 접촉하므로써 조선의 국왕이 아닌 다른 세력들의 국가 능력을 경험하게 된 상황이다.  왜군은 마치 자신들이 조선을 지배하는 것처럼 조선의 인민들을 애초에는 돌보는 정치를 하기도 하였고, 명나라는 은을 이용한 화폐를 사용하고, 명나라 상인들이 들어와 명나라 군인들을 위해 물건을 팔고, 이에 더해 조선에서도 은광산을 발굴하여 은을 이용하여 장사하려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된다.  발달된 명나라의 옷감이나 지식이 넘처 들어오게 된다.  이후 후금과 청나라를 통해 임금이 무릎을 꿇는 장면을 목격한 백성들은 이제 조선의 백성을 우습게 볼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된다.  자신의 국왕에 의지할수 없는 백성들은 자신들의 능력, 아니면 가족, 아니면 해외 강대국의 세력에 의존하려는 생각을 갖게 된다.

또한 이미 중국과 일본은 서구와 접촉하고 있었으므로, 천주교나 과학적인 지식과 지도, 문물이 들어와 있었고, 이것이 해외와의 접촉을 통해 조선조 사회에 유입되게 된다.  국제무역을 위해 청나라 말이나, 일본말, 여진의 말을 배우는 자는 쉽게 돈을 벌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다.  글을 좀 알아서 일찍 의학이나 약학을 공부한 사람들은 이제 의사나 약사가 되어 돈을 벌 기회가 생긴 것이다.  강이나, 도로가에서 일을 하는 상대적으로 상업에 일찍 눈을 뜨게 된 사람들도 새로운 사업기회를 포착하게 된다.

이들은 이제 새로운 사업기회와 생존 양식을 위해서는 새로운 지식이 필요하게 된것이다.  개인들의 인격 양성을 위한 4서 3경을 읽을 필요는 없다.  오히려 우리의 현실을 잘 알 수 있는 지식, 해외의 문물이 돌아가는 것을 알려 줄수 있는 지식이 필요하게 된 셈이다.  양반은 돈을 주고 사면 되므로 돈을 버는 것이 우선인 계층이 나타난다.  아마도 이들은 상대적으로 몰락한 양반층이나 중인 계급(기술, 하위 관료층)에서 나왔을 것이다.  이들을 서구에서 말하는 부르주아지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들이 독자적인 정치세력을 형성하고, 국가를 장악하려는 시도, 아니면 적어도 국왕이나 양반신분세력에 의한 자의적인 법률 집행이나 부분적인 자산 독점을 넘어설 수있는 정치적인 힘을 가졌느냐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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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민의 경제적 성장과 붕당정치

역사/17-18세기 2009.02.12 14:49
평민들이 경제적으로 성장하여 1750년경에는 이미 양반이라는 계층의 혈연적 세습이 거의 의미가 사라진 시기였다.  평민들은 자신들의 직업적 지위를 이용하여 화폐경제의 이점을 살려서 재산을 축적해 나갔다.  이들 재산을 기반으로 양반이라는 지위를 사들일 수 있었다.  경제적 지위를 향상시키는 방안으로는 부지런함으로 인해 농사를 지어서 농토를 확장하는 것, 역관 등과 같이 국제적인 무역 기회를 이용하여 상업활동을 통해 자산을 축적하는 것, 국내 교역이 늘어감에 따라 교통 수송에 종사하여 자산을 축적하는 법, 국내의 거래에 참가하여 이익을 내는 것, 돈이나 곡식을 빌려주어 이익을 취하는 것 등이 그것이다. 반면에 양반들은 기본적으로 농토 또는 자신들의 직위에 기반하여 백성들을 착취할 수있는 공식적 지위에 오를 경우에만 재산을 증식시킬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공식적 지위에 오르기 위해서는 장기간의 노력, 노비, 의관, 예절 등과 같이 양반이라는 신분을 유지시키기 위해 소모되는 비용이 너무너 컸기 때문에 생산보다는 소비적인 요소가 많았다.  물론 양반은 각종 조세나 부역으로 면제되었으므로, 상대적으로 상민 보다는 적게 국가에 수탈당하지 않는 유리함이 있었으나, 18세기 중반에 이르러서는 대부분이 양반의 지위를 이미 구축하였으므로, 국가도 양반에 대한 특혜를 없애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혹자는 이러한 경제적 자산가 세력의 등장의 정치적 세력화의 한 양상으로 붕당의 존재를 설명하려고 한다.  물론 붕당은 특정 집단이 공직을 장악하여 이를 이용하여 각종 이권을 챙길 수 있다는 점에거 경제적인 이익이 있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다고 하여 각 붕당간에 다툼이 각 붕당의 경제적인 이익에 기반하여 이루어 졌다는 것은 과도한 주장으로 보여진다.  조선조 초기에 국왕은 개국공신세력과 권력을 공유하여햐 했기에 강력한 왕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재야 유학 세력을 정치와 관료조직에 투입시켜 개국공신 세력들 견제하려 하였다.  이는 아마도 1500년경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동인, 서인 등과 같은 세력들이 그들이다.  그러나 각 세력들의 명칭에서 드러나듯이 이들은 특정한 이념적 정책적 대결을 하기 보다는 상당한 정도, 주자학적 세계관의 범위내에서 개인들의 생활에 관련된 이슈를 가지고 대결을 벌이는 양상이었다.  어찌 보면 종교적인 요소를 갖고 국가 정치를 이념투쟁을 하는 것이다.  현대의 종교가 국가 정치를 장악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갖는 것과 같다.

따라서 흥미롭게도 임진왜란 당시 이이(율곡)은 서인이었고,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10만 양병설을 주장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로 1590년 일본을 다녀온 서인출신의 통신사는 일본의 침입할 가능성이 적다고 보고하였고, 우리가 잘 아는 이순신은 실은 유성룡을 등에 업고 출세하였다고 가장한다면 동인 출신이라고 볼수 있다.  또한 경남 지역의 경우에는 동인출신 (또는 남명학파의 북인)들이 왜병에 대해 적극적인 저항을 하는 의병을 일으켰다.  즉 이기 이원론에서 기를 강조하는 서인들이 실제로는 전쟁에서는 강력한 저항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1600년대 이후에도 남인 북인의 대결에서도 역시 국가의 정책보다는 (특히 국방) 왕위계승과 예절 문제가 항상 정치적인 이슈였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조선의 정치는 붕당이라는 것을 통해 국왕의 전제를 견제하는 효과는 있었지만, 국가 정책의 발달까지는 이어지지 못했다.  특히 인조반정이후 남인의 득세는 소중화주의로 흘러, 오히려 왜와 청나라의 성장을 애써 무시하기까지 정책으로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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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등한 세상은 혈연을 강조한다.

역사/17-18세기 2009.02.11 17:18
1600년대 후반부터 조선 사회는 핵가족의 형태보다는 확대가족의 형태를 띠고, 장자상속제도를 확립한다.  당시 국가는 외부의 침입에 대해 무력해지고, 신분보다는 경제력이 더욱 중요해지자, 신분은 경제력에 의해 구입이 가능한 것으로 바뀐다.  전쟁은 인간에게 적나라하게 그들의 직접적인 실력이 가장 중요함을 깨닫게 해준다.  백성들은 이제 자신들의 경제력만이 그들의 운명을 구해줄 것이라고 믿게 된다.  국가가 하는 말은 허언이고, 국가의 말을 따르다가는 언제 죽을지도 모르게 된다고 느끼게 된다.

대부분의 천민들과 상민들은 국가가 전쟁때문에 백성들의 인력에 더욱 의존하게 되고, 이를 빌미로 상민과 천민들은 국가를 상대로 양반의 지위를 요구한다.  양반들은 국가 위기시에 군역과 세금 납부가 면제되어 있으므로, 실제로 국가는 양반에 의존하는 것이 많지 않다.  국가는 상민와 천민들의 신분 상승을 미끼로 전쟁에 필요한 인력을 독려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양반도 백성들에게 퉁치의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국가도 인정받지 못하게 되고, 더구나 1600년대 말과 1700년대 초에는 빈번한 이상 기후로 인해 작황이 좋지 않아, 전염병이 창궐하고, 백성들은 이제 떠돌이 생활을 하며, 국가의 통치 범위를 이탈하게 된다.  국가는 좁아진 과세대상를 보전하기 위해 양반을 파는 것을 장려하는 수 밖에 없게된다.  국가 재정은 사실상, 양반신분을 파는 것과 무역과 상업 독점, 부역을 통해서 해결하는 수 밖에 없게 된다.

양반들은 이에 대응하여 자신들의 재산을 보존하기 위해 양반들끼리의 통혼, 가족 범위를 넓힘으로써 사회적인 불안에 대응하게 된다.  당시만 해도, 대가족 제도와 장자상속제도가 확립되어 열연을 통한 재산 보존이 확고히 자리를 잡게 된다.  물론 이때에도 집안의 노비가 많아지기도 하고, 그러나 천민의 신분은 줄어드는 현상이 발생하게 된다.  즉 신분이 아니라, 경제적인 예속관계로서 종속적인 신분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상당한 정도의 화폐관계나 상업적인 이해관계가 경제관계의 주류로서 자리잡는다는 뜻이다.

물론 이때 호적도 발전되고, 양반의 지위로 부르는 명칭도 대부분의 백성들이 사용하게 된다.  즉 19세기 초반에 이르르면 전국민의 70% 이상이 양반신분을 획득하게 된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호적도 대부분 이때 작성되게 된다.  진성 양반들은 양반의 가치를 지니기 위해 노력하게 되나, 이 역시 더욱 많은 비용이 들고, 상당수의 양반들은 양반신분을 유지하기 위한 비용을 조달할 수 없으므로 사회적 신분에서 사실상 탈락하게 된다.  이들은 서당에서 한문선생으로, 아니면 공부를 더해서 한약을 팔 거나, 아니면 의원으로 전업하는 경우가 생기게 된다.  지방의 공무원 출신들이나 해외에 나들이 할 수 있는 신분에 있는 사람들, 전문적인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돈을 벌고, 양반신분으로 상승하면서 사회적인 주도 세력으로 움트는 현상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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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경제와 도덕경제를 뚫고 나오는 상품경제의 싹들

역사/17-18세기 2009.02.10 16:19
조선 후기로 들어서면, 국가 조공체계나 도덕경제를 벗어나서, 유랑하는 백성들이 나타나고, 이들은 국가의 조공이나 공동체를 벗어나고, 그렇다고 자연경제에서도 살지 못하는 유랑민화한 집단들이 대거 등장한다.  이들이 등장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1600년대 말에서 1700년대 초반에 이루어진, 자연이상의 빈번함, 그래서 나타나는 식량의 부족, 인구의 증가에 따른 토지 압력의 강화, 아무튼 살기 힘들어진 생활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물론, 이에 대한 반응으로 토지생산력을 높이고, 경작지를 넓히고, 새로운 구황작물을 도입하여는 시도도 있었고 어느정도 성공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유민화를 떨쳐낼 정도로 발전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사회적으로는 농경지의 광작화, 집약적 농업의 발달에 따른 노동력의 집약적 필요성, 신분체제의 와해, 국가의 감시체제와 약화, 지방 탐관오리들의 횡포 등이 구실이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미 1700녀대 후반 들어서면 아주 자연스럽게 임노동자군이 형성되어 있었다.  물론 그 시초는 1600년대 초반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임노동자군은 또한 화폐의 발전과 그 궤를 같이 한다.  즉 정부에 내는 세금, 그리고 군역과 부역을 대신하는 사람을 사서 쓸수 있는 제도, 또는 포나 쌀로서 내는 방식의 등장, 정부의 일에 대해서도 일용노동자를 고용하여 일을 시키는 방식의 등장은 임금 노동자의 등장을 염두에 둔 정책이었다고 보면 된다.  특히 도시 지역, 특히 서울 지역은 이미 1700년대를 넘어서면 약 20만의 인구가 밀집되어 살고 있었으므로, 상당수는 임금 노동으로 그 생활을 영위하였음을 알 수 있다.  농촌의 경우에도 전문적으로 임금노동만으로 생계를 영위한 사람들이 발생할 정도로 임금노동의 수요는 상당히 존재했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서 간과하지 말아야 하는 점은 임금노동의 존재가, 아니 무산자층의 존재가 곧바로 자본주의의 발전의 단초를 이루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임금 노동은 화폐 소득을 매개로 하여 생활필수품을 시장에서 구매아여야 하므로 자연히 시장에서의 상품 교환이 많아질 것으로 예측할 수 있다.  물론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 전국적으로 5일장이 서고, 행상들이 많아지고, 고정적인 상점들도 들어섬으로써 상품 경제는 어느정도 발달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국내적인 수요 정도로는 대량생산이나, 표준화된 상품을 생산하여 대량으로 판매할 정도는 아니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분명히 보부상과 같은 아니면 보다 국제적인 무역을 행하는 상인들이 존재하였지만, 이들이 본격적으로 자신들이 시장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상품생산에 직접 나선 것에 대해서는 그 정도가 미약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초기 단계의 화폐, 이에 따른 국제 국내적인 시장의 형성, 화폐의 원재료를 생산해내기 위한 광산의 개발, 국가와 양반수요를 위한 전문적인 생산체제의 구축은 어느정도 이루어졌다고 보이나, 일반 소비자들을 위한 상품 생산이 본격적으로 이루어 진것은 아직 부족했다고 보여진다.  즉 의복생산의 단계로 까지 나아가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대개는 의복생산은 자족적으로 이루어 진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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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독점 능력이 국가 능력이었다.

역사/17-18세기 2009.02.09 17:11
서양사에서 식민지라는 것은 사실상 무역을 독점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서구가 그 외의 나라에 대해서 국가가 직접 개입하여 국가체제에 통합한 것은 19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였다.  그 이전에는 물론 국가도 하나의 주체로서 참여하였지만, 동인도 회사 또는 서인도 회사라는 형태로 식민지에 가서 무역을 독점하는 형태였다.  물론 이 회사는 무력까지 사용하고, 무역지의 인민까지 지배하는 치외법권적인 지위를 누리는 권한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튼 본국정부가 식민지를 직접 지배하는 형태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조선 후기의 무역형태를 보면, 일본의 공세적인 조선무역(아마도 청나라와의  중계무역을 통하기도 했을 것이다)과 네델란드와 독점적인 무역을 통해 조선과 중국과의 무역이익을 취하는 형태를 갖고 있었다.  물론 네델란드의 입장에서도 일본과의 무역을 상호간의 독점적 성격에 의해 막대한 차익을 낼수 있는 상황이었다. 일본은 영국와 네델란드가 조선과의 무역을 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저지하고 자신들을 통하여 서구의 물품이 거래되도록 하여 자신들은 중간이익을 취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 내었다. 조선은 일본을 통하여 네델란드가 필요로하는 물품을 수출하였고, 일본은 다시 이를 네델란드에 되팔았던 것이다.  일본은 상대적으로 은을 직접 생산하고 있었으므로, 조선에 은을 유입시켜 쉽게 교역을 수행할 수 있었다. 반면 조선은 조선와 왜 간의 교역 결제수단인 은을 생산하지 못했으므로, 왜의 은을 통해서 청과 왜의 무역을 수행할 수 밖에 없었다.  유럽의 각 나라들은 이미 은을 통해 국제 무역의 결제를 행하고 있었던 시점이었다.

청나라와는 공식적인 사행과 변경무역을 통해, 그리고 밀무역(황해를 건너는 바다와 만주 국경선지역)을 통해 막대한 양의 물품 교류가 행해지고 있었다.  이는 만주지역에 거주하는 여진족들의 유목민적 성격에 의해 무역의 필요성이 더욱 커지기도 하였지만, 청나라가 서구와의 무역을 엄금함에 따라, 국내 시장이 활성화되었고, 상대적으로 조선과 청나라의 무역을 허용되었으므로, 매우 활발하였던 것이다.  특히 황해 연안은 중국 대륙의 남부와 북부를 연결하는 무역로이었으므로, 상대적으로 손쉽게 청나라의 무역선들 (특히 강남의 무역선)이 조선반도의 잔라도 연안에 많이 출몰하였다.

조선의 입장에서는 외래무역에 대한 불안감이 이미 청나라와 일본의 침략으로 발생하여 가능하면 무역 역시, 국가의 통제하에 그것도 줄이는 방향으로 이루어지는 원칙을 갖고 있었다.  상대적으로 소수의 무역상인들만이 독점적인 이익을 누릴 수 있는 구조, 그리고 무역에 필요한 물품의 국내 교환이 손쉽지 않았으므로, 상대적으로 전시기에 비해서는 시장거래되는 상품이 늘어다고 하여도 역시, 절대량에 있어서는 대규모 무역을 수행하기에는 적합치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는 사이에 조선은 국제적인 무역 네트워크에서 소외되었고, 상대적으로 원격지 무역에 의해 발달이 가능한 국내 생산체제의 활성화도 더디게 진행된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tags : 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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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 -> 후금 -> 청 나라로 가는 동안 조선은 무엇을 하였는가?

역사/17-18세기 2009.02.08 16:27
조선반도는 지정학적으로 북에는 만주대륙에 면한 나라들, 서해를 건너 중화대륙에 움트고 있는 세력들, 물론 중국대륙은 남을 향하고 있기는 하지만, 기본으로 만주를 통해 육지로 연결되어 있고, 황해를 통해 바다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는 동쪽에 일본이 면해 있다.  물론 남에는 유구열도가 있기는 하지만, 우리에게 위협이 될 정도는 아니었다. 1500년대 후반과 1600년대 초반은 동아시아를 비롯하여 세계적으로도 각나라의 세력을 겨루는 시기였다.  일본은 전국시대를 거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을 통일하여 국가체제를 완성하고 대외적인 팽창을 통해 내부의 무장세력들의 탈출구를 마련하는 시기였다.  만주 대륙에서는 과거의 몽골 세력 일부가 만주의 여진을 압박하여 조선과 명나라를 위협하고 있었다.  이들은 명나라와의 무역을 위해 각 부족세력들간의 다툼과 경쟁, 그리고 이를 통한 실력배양에 나서게 되어 결국은 후금으로 통일된 세력이 나타나게 된다.

조선은 항상 세력균형과 동시에 명나라에의 사대를 통해 자신의 생존을 보존하려는 대외정책을 취하고있었다.  그러나 이미 일본의 침입으로 드러난 군사군능력과 국가 통치능력의 약화는 결국 1600년대 초반에 이르르면 실질적인 군사력의 약화를 추래할 수 밖에 없었다.  여기에 대외정보수집과 이를 기반으로 한 대외정책의 수립과 이를 집행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즉 외부의 위협을 감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대비를 할 수 없었던 틸레마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이를 우리는 국가능력의 부족이라고 표현하기는 하지만, 당시의 상황을 본다면 전적으로 왕조 보존과 당시 정치 엘리트들의 능력 부족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더구나 이미 선조때 부터 나타난 왕위계승의 정통성 확보가 부족한 상황은 끊임없이 왕위계승을 둘러싼 무장세력들간의 다툼으로 번지고, 이를 빌미 삼아, 소위 주자학에 기반한 각종 예의 논쟁을 통한 정쟁은 정상적인 정보판단을 흐리게 할수 밖에 없었다.

광해군의 왕조위엄을 살리기 위한 지나친 낭비, 인조반정을 통해 나타난 무장세력에 의존한 왕위 계승의 결과 국가 병력의 기강약화, 광해군이 보낸 명나라 연합군이 후금에 투항하면서 조선의 최정예부대가 모두 후금의 군사가 되어 버리고 나아가, 후에 후금이 조선을 침입할 때 투항한 조선군이 조선침입의 최전선에서 활약한 점을 보면 당시 조선의 불행이라기보다는 정쟁을 일삼는 정치엘리트들, 왕의 정치적 능력 부족을 탓하지 않을 수 없다.  후금의 3만군대가 개성에 이르도록 오직 정쟁만을 일삼고, 군사적인 판단을 유보시키고 있는 상황은 현재 우리가 되돌아 보아도 정상적인 통치행위로서는 이해할수 없는 대목이다.

더구나 후금과 청은 수차례에 걸쳐 조선과의 전투를 회피하기 위한 타협책을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명나라와의 의리를 내세우고 전투력은 준비되지 않은 척화책은 결국 항복이라는 치욕적인 행태를 드러내게 된다.  말만 앞세운 의리, 백성들은 안중에 두지 않는 정책, 오로지 자신들의 정치적인 세력의 보존과 확대만 염두에 두는 정치인들은 바로 아무리 제대로 정보를 갖고 있고, 대외적인 타협책의 여러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치욕, 그리고 국가의 약화, 백성들의 고생으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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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과 중국이 강대국으로 부상하는 시기에 조선은 무엇을 하였나?

역사/17-18세기 2009.02.04 15:15

일본 토요토미에 의한 임진 침략, 후금과 청나라에 의한 정묘호란 등의 두차례의 조선반도 침략은 조선을 일거에 약소국으로 전락시키고, 아니면 약속국임을 스스로 증명하게 한 사건이었다.  이후 조선은 그 멸망의 시기까지 당시의 상태를 회복하지 못하고 서구 열강과 중국과 일본의 틈바구니에서 버퉁거린다고 평가할 수 있다. 청나라, 일본, 그리고 조선이 각기 다른 길로 가게된 요인은 무엇일까

일본은 이미 1500년대 포르투갈로 부터 조총을 받아들이고, 전쟁의 소요돌이에서 전쟁무기와 실용주의적 경제관, 근검절약하는 습성, 인민들을 효율적으로 통치하는 능력 들을 발전시켰다.  이어서 토구가와 이에야스가 전국을 통일한 이후에는 네덜란드에게만 무역을 허용하기는 하지만, 은광산을 개발하여 서구와 무역을 전개하고, 내적으로 외부에서 볼 때에는 온 나라가 하나의 군사 요새인 것처럼 보일 정도로 인민들의 법질서에 대한 복종의식이 강하고, 국가통치기구들이 상당한 정도 규율된 형태로 움직인다.  조선의 통신사가 오오사카에서 다음으로 이동할 장소로 물건을 보내놓고, 그것이 전혀 손상됨이 없이 도착한 것을 보고 놀라는 장면이 나온다.  필자도 일본에서 두차례 지하철에서 물건을 놓고 내린일이 있는데 빠른 시간에 찾아서 갖다주는 것을 보고 내심 놀란 일이 있다.  물론 군사적인 정보에 대해서는 상당한 정도 조선의 통신사들에게 제공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상시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전문화된 군인의 수가 8만명은 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도시의 활력, 규모, 상업의 발달, 인민들의 이동 등이 상당한 정도로 발달하였다고 한다.

후금에서 청나라를 세운 이후에 세계적인 추세에 맞추어서 적어도 17세기까지는 영토를 넘히는 작업에 몰두하고 실제로 현재의 중국의 국경선을 획정한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중국은 러시아와 부딪쳤고, 이에 러시와 더불어 중앙아시아 북부, 그리고 시베리아, 연해주 부근에서도 협상을 벌이고 자신의 영토를 확정하게 된다.  조선은 안탑깝게도, 영토 확정의 노력에는 나서지 못한 것으로 봉니다.  다만 청나라와 백두산 정계비를 통하여 영토획정에 나섰으나, 이 역시 현재까지 우리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는 것이 많은 것 같다. 혹자는 백두산정계비에 나타난 해석을 통해 요하, 할얼빈, 아무르 강으로 대한민국의 영토를 획정하는 것이 옳다고 까지 주장하고 있으나, 아무튼 국경선에 대한 관심이 추세를 따라기 못한 것은 사실이다.

조선의 통신사들이 일본을 방문하여, 그리고 약 1만여명에 달하는 표류자들이 일본을 방문하였고, 또는 무역을 위해 대마도에 나간 상인들을 통해 일본의 현황을 보기는 하였지만, 소중화의식이나 문화적 우월의식을  표출하는 것이 대부분이었고, 소수가 일본의 문물의 발전에 놀라기는 하였고, 이를 조정에 보고하였지만, 대부분은 시급하게 위협적이라고 보지는 않아서 심각하게 고려한 것 같지는 않다.  따라서 일본과 중국의 발전을 알고는 있었지만, 내부의 능력배양에 미친 영향은 매우 미미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일본 역시 17세기에는 자신들에 대한 우월의식을 키워나가고 있었고, 조선은 아직 소중화의식(이미 망해버린 명나라에 대한 충성, 또는 주자학주의자들의 우세)이 남아 있었고 내부 파벌 싸움이 외부환경 판단을 흐리게 하였고, 국가의식이나 민족의식, 민족적 공동체 의식이 싹튼 것으로 보기는 어려운 것 같다.  내외를 비교하는 의식이 싹튼 것은 사실이지만, 일본에 비해서 늦었고, 서구는 이미 조선반도 주변을 프랑스와 네덜란드 배들이 넘나들면서 호시 탐탐노리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중국의 상인들, 해적들이 조선반도를 넘나들기도 하였다.  이런 상황에 대한 반응은 아무리 영정조의 시기를 높이 평가한다고 하여도, 기껏해야 1700년이 넘어서야 군사력이 임진란 이전의 상태로 회복된다는 사실을 놓고 보면, 너무도 늦었다, 느렸다고 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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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의 확대와 공유는 세계관의 혁명을 가졌왔다.

역사/17-18세기 2009.01.30 12:50
유럽이 아라비아를 거치지 않고 직접 외부세계를 찾아나서게 되자, 새로운 세상에 대한 경험과 정보는 이들의 세계관을 바꾸었다.  유럽 대륙에 한정된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중세의 종교는 더 이상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한 이들에게 자신들이 사는 세상을 설명할 수 있는 틀이 되지 못하였다.  즉 가톨릭, 아니 가톨릭을 정화시키거나, 시대의 변화에 적합하게 변형시킨 개인 중심의 종교들은 신대륙, 아시아 대륙에서 들어오는 정보를 흡수할 능력을 갖지 못하였다. 

그렇다고 새로운 경험 그 자체가 곧바로 새로운 세계관에 대한 고민을 갖게 하는 것은 아니다.  즉 항해를 통해 직접 동양과 교류를 하기 전에도 아라비아와 중앙아시아를 통해 중국이나 인도와 교류를 한 적도 있다.  그러나 이때의 경험은 극히 소수의 사람들이 우연하게 한 경험이었고, 많은 살마들이 체계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기회는 없었다.  항해술이 발달하고, 해외 물자가 들어오고, 해외의 사람들, 동물과 식물, 새로운 기호식품들, 그림과 음악 들이 들어오자 유럽인들은 기존의 종교적인 세계관으로 해결할 수 없는 세상이 있다는 점을 인식한다.

더 나아가 망원경과 현미경의 발달은 우주로 인간의 육체내부의 작은 것 까지 볼 수 있는 길을 터 놓았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할 수 있게 됨으로써 기존의 종교적 지식체계가 주장하던 신의 영역이 인간의 가시적인 영역으로 들어오게 되고, 신의 주장을 검증할 수있게 된 것이다. 과거의 신이 주장하던 우주와 지구의 피조물에 대한 이론, 지리적으로 나누던 천상과 지상의 개념들, 하느님이 창조한 우주에 대한 개념들이 모두 검증받게 되었다.  여기에 덧붙여 상당수의 지식은 이제 상호간에 공유될 수 있는 기술적, 제도적, 정치적, 사회적 기회를 맞이하게 되었다.  즉 기술적으로는 인쇄술의 발달이 곧 지식의 보급을 가져오게 하고, 제도적으로는 대학의 발달, 각종 연구자들의 조직, 카페와 공적인 식당의 등장, 그리고 상당수의 군주들은 과거의 교황의 지배에서 벗어나면서 과학에 근거한 세계관을 장려하게 된다.

보편적인 세계관을 향한 유럽인들의 노력은 결국, 라틴어를 넘어서는 각 나라의 언어의 표준화 작업, 수학적 언어를 통한 보편적인 의사소통매체를 만들어 내기 위한 시도, 종교적인 세계관을 대체하기 위한 보편적 철학의 발달을 가져오게 한다.  물론 이러한 과정에서 신의 영역에서 연역적으로 사고하기보다는 경험에 근거하여 귀납적으로 사고하는 방식을 선호하게 되었고, 장거리 상업의 발달은 소식을 전하고 광고하는 신문의 발달, 연구자들의 연구결과를 보고하고 공유하고 평가하는 시스템인 잡지의 등장, 보험과 은행과, 증권거래소의 등장을 가져오게 한다.  장거리 상업혁명은 현대에 사용하는 거의 모든 관행과 제도의 기본적인 만들어 내었다고 보면된다.  말하자면 새로운(근대적인) 인간의 등장이다.  일하는 노역과 눈 앞의 현실을 벗어나는 것을 볼 수 있고, 예측할 수있는 자가 필요한 사회가 등장한 것이라고 해석하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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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의 땀으로 이루어진 자본주의

역사/17-18세기 2009.01.29 13:24

지난 구정 설명절에 히스토리 채널에서 방영하는 1620년에 영국에서 미국으로 건너간 청교도들이 타고 간 Mayflower호에 관한 영화를 보았다.  북아메리카의 뉴잉글랜드지방에 청교도들(영국 국교회를 반대하는 종교도)이 정착하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이 때 설명중에 하나는 당시 북미대륙에는 인디언이 5천만이 살고 있었고, 유럽인들은 2천명정도가 정착하고 있었다고 한다. 물론 1501년인가에 최초로 아프리카의 서부해안가에서 브라질 지역으로 흑인 노예가 팔려가기 시작했다고 전하기는 하지만, 아직 본격적으로 아프리카의 중서부 해안가의 흑인들이 미국 신대륙으로 본격적으로 판매되지는 않던 시기였다.  그럼 대체 언제부터 왜 아프리카의 노예들이 아메리카 신대륙으로 팔려갔을까?

아메리카 신대륙은 미지의 땅이었고, 이곳에서는 광활한 토지에 유럽에서 건너온 백인들이 고국에서 채무노예의 상태로서 밀려서 떠나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상당수는 유럽의 고국을 떠나 앞서 본 종교나 정치적인 이유로 대륙으로 건너온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곧 미지의 대륙에서 농장 주인이 되고, 이들 농장 주인들은 현지에 거주하고 있는 인디언들을 노예로 사용하여 브라질 부근에서 금광을 개발하고, 이어서 은광, 그리고 캐리비안 연안과 부미 대륙에서는 사탕수수, 목화를 재배하기 시작한다.  이에 열대 기후에 강하고, 질병을 잘 견디는 아프리카 노예들을 대량으로 들여오기 시작한다.  1700년대에 가장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현재 추정치로는 아메리카 대륙에 1명의 노예가 오기 위해서는 현지에서는 3명정도의 인명 희생이 따랐다고 한다.  즉 노예를 잡는 전쟁, 내륙에서 잡은 노예를 항구까지 행진시키고, 항구에 보관하고, 배를 태워 보내고, 새로운 지역에 도착한 노예들이 현지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적어도 3명의 희생 후에 1명의 노예가 팔릴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 현재 사학자들이 계산하는 1천2백만(과거에는 1천 5백만명이라고 추정하였다)명이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하기 위해서 약 4천 8배만명의 아프리카 인들이 잡혔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아프리카는 생산인구의 감소, 전쟁 능력의 약화가 이루어져서 결국은 유럽의 국가들에게 식민지화되고 만다. 물론 이 과정에서 유럽의 식민제국들은 아프리카 내부의 균열, 상호 전투를 부추키는 전략을 사용하였다.  현재의 아프리카는 결국 유럽의 식민제국이 만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노예를 많이 잡은 부족, 노예로 많이 잡힌 부족들은 지금도 여전히 상호 갈등을 일으키고 있다고 볼수 있다(유럽 중부 콩고, 앙골라, 나이지리아, 니제르 등 아프리카 서부 중부 연안국가들).

노예들의 활용은 산업혁명전에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영국의 노동자들도 점차 과거보다 많은 노동을 하고, 휴식시간을 짧아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산업혁명 전단계에서 지구상의 노동자들은 더욱 많은 착취에 직면하고 있었다는 점은 분명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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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 과학 -> 산업혁명

역사/17-18세기 2009.01.28 15:07

역사를 배우면서 항상 떠나지 않는 의문은 어떻게 서양이 동양을 지배하게 되었느냐? 라는 초보적인 질문에서부터 서양의 문화나 생활양식이 지구의 모든 거주자들에게 영향을 강요하게 되었느냐에 있다.  중세의 서양이 종교에 의해 지배되던 세상이라면, 르네상스를 거치고, 지구상으로 개척이 이루어지면서 과학적 세계관이 나타나게 되었다.  물론 간단하게 서술하고, 이를 역사적인 사실로서 외우는 것의 이면에는 상당한 진통과 역사의 반동이 진행되었다는 점도 지적해야 할 것이다.  지구상의 탐험은 물론 해외 식민지 개척을 통한 부의 축적이 일차적인 동기이기는 하지만, 항해술의 발달이 한몫을 했을 것이다.  부의 축적이라는 동기가 중요하게 된 이면에는 유럽 역사에 등장하는 왕조들의 국가 재정 확보, 이를 통해 전쟁능력의 고양, 끊임없는 전쟁의 위협과 전쟁에 의한 영토 침략의 유혹이 존재했을 것이다.  혹자는 전쟁에 의해 국가가 형성되었고, 국가는 전쟁에 의해서만 존재할 수 있었다고 까지 평하기도 한다.  아무튼 서양의 17-18세기는 전쟁의 세기였다는 점만은 분명하고, 이러한 전쟁은 대부분 왕조들간의 영토야욕을 툴러싼 전쟁이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국민국가의 전쟁이나 종교전쟁, 징집된 군인들에 의한 전쟁은 아니었다.  상비군이거나 또는 용병이거나 대부분 돈을 주고 고용한 사람들에 의한 전쟁이었다는 점이 다르다.  조선의 경우에는 전쟁이 발발하면, 예를 들면 임진왜란과 같은 경우에는 농민들을 아무런 급여를 주지 않고 강제로 동원하는 형태였거나, 아니면 왜군의 경우에는 조선을 정복하여 그 약탈품을 소유하게끔 하여 군인들을 독려하였다.  물론 당시에 참여한 명나라군들은 급여를 주는 군인들이었다.

부의 축적에의 갈망이 곧바로 과학적인 사상의 보급을 가져온 것은 아니었다.  과학적 아이디어는 한편으로 절대주의 국가체제나 로마 교황청의 명목상의 허가를 받는 것이기는 하지만, 국가 지배의 신성함을 보장받는 기반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과학적 아이디어는 국가 지배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전쟁무기나, 전쟁에 소요되는 재정을 풍족하게 하는 산업에는 도움이 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11600-1700년대에는 끊임없는 갈등이 계속되었다.  즉 한편으로는 종교의 신성함을 강조하기 위해 종교전쟁이 벌어지고, 과학적 세계관이 세속에 퍼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종교재판을 통해 사상과 표현을 통제하는 한편, 건축물이나 무기, 길, 항구, 터널 등의 건설을 위해서는 과학의 힘을 사용하게 된다.  종교나 세계관에 대한 갈등은 일반인들에게까지 광범위하게 퍼져서, 종교전쟁의 폐해는 일반인들까지 전쟁에 가담하게 되었고, 마녀 사냥이라는 이름으로 사회적인 따돌림을 행하게 된다.  사회적인 따돌림과 희생양은 사회적인 격변기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회에서 발생한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당시의 사람들이 느낀 사회격변(생산성의 발달, 도시의 등장, 사회적 격차의 심화, 지식의 보급에 의한 종교적 권위의 상실)의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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