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20세기'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13.10.29 한완상 전 통일부 장관 강연 소감
  2. 2013.10.17 1979-80 부산, 서울, 광주
  3. 2013.09.30 3.15 부정선거의 원인
  4. 2010.05.28 Tom Hayden이 1960년 한국의 학생혁명에 영향을 받았다.

한완상 전 통일부 장관 강연 소감

역사/20세기 2013.10.29 15:52

지난 금요일 10월 25일 금요일 오후 4-6시에 경남대 인문관 101강의실에서 한완상 전 통일부 장관 (1993년)을 모시고, 경남대 인문학 명사 강좌를 개최하였다.  중간고사가 있는 주일의 금요일 오후라서, 학생들의 참석이 어려울 것이라고 학생회에서 우려를 전달하였다.  한선생님의 일정을 고려해서 그리했기에 그대로 진행하였다.  그래도 학생들이 사회학과의 경우 현재 85명 재학생에 20여명이 참석하였고, 질문도 있어서 다행이었다.  선생님은 강연중에 역사적인 사실과 평가를 하시면서, 민족 자주의 입장에서 평화적인 상생을 주장하셨기에 이러한 사실을 제대로 학생들에게 가르치지 않는 우리 교수들을 혼내셔서 그런지 학생들이나 일반 청중들은 교수가 어른 교수님으로부터 꾸중 듣는 모습이 생소해서 흥미로왔다고 강연후에 전해 들었다.

선생님은 자신의 제자들이 경상대나 경남대에 있는 제자들이 별로 변한 것이 없다고 말쓰하시고, 그러나 청중들은 한완상 선생님이 변하지 않은 모습으로 민족과 사회적 실천에 대해 말씀하시는 모습을 감동을 받았다고 역시 나에게 전했다. 이런 모습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전달될 모르지만, 사람이 특히 지식인이나, 사회적 실천을 중시하는 사람들이 시대가 변함에 따라 이리 저리 흔들리는 세태에 비추어 보면 감동적인 모습인 것 만은 사실이다.

최근에 나온 저서에 사인을 해주시면서, 날자는 2013년 10월 26일로 기록해 주시고, peace maker란 표현을 사용하였다.  peace maker는 이미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 (2000년에 안기부장)이 저서에서 사용했던 말이다.  즉 임동원은 peace keeper가 아니라 peace maker로 시대의 흐름에 따라 바뀌어야 한민족의 번영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동구권이 망한 시기에 북한은 남북 관계의 개선을 간절히 소망하였다.  이유는 중국과 소련이 한국과 국교정상화하는 상황, 그리고 사회주의 권이 개혁 개방으로 나아가는 상황에서 한국과의 국교 정상화를 통해 체제 유지와 개혁개방의 물꼬를 트려고 했었던 것이다.  여기에 미국이 한국의 핵무기를 철수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냉전이 자신들의 기득권에 내걸고 있던 세력들은 남북한의 화해 협력을 바라지 않았다.  이 시점에서 노태우 대통령 말기에 남북 협상이 완료되었고, 비핵화 선언이 나왔던 것이다.   1992년에 조치를 취하려던 이인모 장기수의 북한 송환은 다시 미궁에 빠져 버린 상태였다.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민족을 최우선의 가치로 둔다는 점을 천명하고, 한완상 교수님이 통일원 장관 겸 부총리가 되면서 전격적으로 3월에 이인모씨의 송환이 이루어 졌다.  그 이후 보수언론에 의해 한완상 총리는 좇기는 신세가 되고, 김영삼 대통령도 역시 여론의 악화를 염두에 두고 과감한 정책을 취하지 못했다.  당시에 서울 광화문 정부 종합청사에서 부총리 님을 만난 나는 약속도 없이 찾아간 제자에게 1시간 이상을 할애하시면서, 현재의 상황을 셜명해 주셨고, 바깥에서 도와달라는 말씀을 들었으나, 나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어서 그냥 방관한 기억을 갖고 있다.

통일원이 대북 정보를 갖고 있지 못하고, 안전기획부에 의존하는 상황이 안타까웠다.  따라서 주도권을 갖고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임동원의 책에 지적되었고, 1993년 가을에 감사원 감사를 통해 밝혀진, 안기부의 대통령 청훈 묵살, 왜곡, 지연 등의 문제점이 사실상 안기부는 남북 화해를 대통령의 의지를 무시하면서까지 방해하고 있었던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말하자면, 대통령에 대한 항명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런 상황을 한완상 전 통일원장관께서는 책을 통해서 극좌와 극우의 적대적 공생관계로 표현하셨다.  강연 말미에 발악이 아닌 발선을 하자는 말씀을 하셨다.  상대방에게 선을 행하면 선이 돌아오고, 선 순환이 시작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실은 이것이 신뢰프로세스다.  엄연한 국제관계에서는 다소 낭만적인 표현이지만, 그래도 우리와 같은 강대국에 둘러싸인 강소국의 전략으로는 염두에 두어야 할 전략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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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80 부산, 서울, 광주

역사/20세기 2013.10.17 10:52

어제 부산 민주공원에서 "부마에서 광주로"라는 부마항쟁 34주년 기념 학술대회가 열렸다.  필자는 토론자로  참석하였다.  부마의 1979년 10월 16-20일 사건 -> 1980년 4-5월의 서울의 봄 -> 1980년 5월 18-27일 광주 민주항쟁으로 이어지는 선을 가정한 학술대회였다.  역사적 의의와 연관성을 찾는 학술대회였다는 느낌을 갖는다.  그러나 실제로 영향을 준 사람, 받은 사람, 영향을 주고 받은 매체들, 그리고 내용에 대한 대한 논의가 포괄적으로 이루어 진 것은 아니었다. 만일 항쟁의 지도부 내지 조직음모자들의 경우에는 어느정도 상호 영향을 주고 받았다는 증거가 나왔다.  그렇다고 노골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또는 받았다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아니었다. 이에 대해서는 실제와 이를 표현하는 것이 다른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즉 적어도, 영향을 받았다, 주었다는 것은 금기시 되는 표현이다. 시위의 조직자들이 영향을 주거나 받는 것은 범죄행위로 처벌받는 상황에서 실제로 주고 받은 것을 잘 표현하지 않았고, 가능하면 이러한 일을 스스로 금지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범죄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영호남의 관계라는 것이 어느 쪽이 다른 쪽에 영향을 수수할 수있는 그런 표현문화적 허용을 용납치 않고 있다는 점도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이는 정치권이나 지역언론만의 문제가 아니라, 운동권이나 심지어는 학술연구자들도 지역 상황의 영향을 받기에 그렇 실증적 분석이나 결론을 내린다는 것이 쉽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손쉽게 등장한 것이 서울 우회론이다.  서울 우회론에 대해서는 부산과 광주가 합의하기가 용이한 부분이기에 그렇다.  서울은 지역이 아니라, 하나의 커다란 시장을 이루어서 누구나 참요하여 경쟁하는 장소이기에 부산이나 광주도 그들의 구성인자들이 서울에서 자라고 논의하는 장이 마련된 곳이어서 서울의 영향을 그곳에 있는 재향 인사들로 받았다면 쉽게 용납할 수 있는 상황이다.  따라서 서울 우회론은 실은 실제의 여부에 관계없이 쉽게 합의 할 수 있는 가설이다.

영향을 주고 받는 것을 직접적인 의사소통으로 파악한다면, 여러가지 경로를 복합적으로 판단하여야 할 것이다. (1) 인적 교류: 당시에 부산과 마산은 하루에도 거의 10-20분간격으로 시외버스가 다녔고, 따라서 부산의 소식은 쉽게 마산에 전파되었으며, 또한 통학내지 통근권에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다시 경남의 여러 공장지역에서는 호남 출신들이 많이 있었으므로, 물론 주로 전남 동부쪽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들의 친인척을 통해 광주의 소식을 쉽게 경남으로 흘러 들어올수 있는 인적 교류의 통로는 있었다는 평가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2) 당시에 정확하게 며칠까지 광주와 연락이 가능했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5월 18일, 19일, 20일정도까지는 광주의 교통편과 통신이 정상적으로 작동되고 있었으므로, 광주의 소식이 외부로 전해질수 있는 통로는 열려있었다.  언론의 보도도 일단 정부측의 발표이기는 하지만, 인쇄되어 나왔고, 따라서 무엇인가 심각한 상황이었다는 점은 인지하고 있었다.  전국적인 네트워크를 가진 가톨릭조직이나 기업 조직 등도 정보 소통이 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언론도 초기에 보도팀을 파견한 경우에는 이들이 어느정도 보도를 하고 있었다.

어제 논의에서는 광주와 부산이 다루어졌지만, 대구의 장세룡 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 이사장님은 두가지 지적을 하셨다. (1) 사실은 1979년 10월 16-20일 부마항쟁이 발생하였을 때 대구에서는 민주화운동 전통이 미약한 지역에서 저렇게 커다란 저항 시위가 발생한 것에 대해 놀랐다고 한다.  (2) 1980년 서울의 봄시기에도 대구에서는 영남대 등이 적극적으로 시위를 전개하였고, 실제로 골목까지 따라들어와 경찰이 시위를 진압하였고, 포항에서 해병대가 온다는 소문도 돌아서 상당히 치열한 시위가 전개되고 있었다고 한다.  반면에 부산에서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느 점을 지적하였다.

아울로 방청석에서도 두분이 마산과의 연관성을 가지셔서 흥미로왔다.  (1) 한분은 윤미숙 (현재 73세로 추정, 1980년 당시 40세로 소개, 부산민주당 고문) 할머님으로 1960년 마산 3.15의거에 참여하신 분이라고 소개하였다.  (2) 또 한분은 경남대 78학번이라고만 소개하신 분이다.  따라서 1979년 10월 18일 마산 민주 항쟁에 참여하신 분이라고 소개하였다.  1981년에 군사훈련단에 있었고, 80년이후 상무대에서 보수교육을 받았다고 표현하였다.  정확한 의미는 필자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해 발언 내용을 소개하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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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5 부정선거의 원인

역사/20세기 2013.09.30 13:41

한계레 21 (979호) 2013. 9. 30일자 pp.32-33에 교학사 [고등학교 한국]의 문제점을 지적한 글이 실렸다. 이중 기사의 제목으로 나온 "3.15 부정선거는 이기붕 당선을 위한 것?"이란 제목이 실리고, 글이 "정부는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해서 부정선거를 자행하였다"고 서술하였다고 한다.  이에 대해 정은주 기자는 "실제 3.15부정선거는 이승만을 당선시키기 위한 행위였고, 이승만 당선시 이기붕이 부통령으로 되는 것이었다"고 지적하였다.

이에 대해 역사적 사실을 좀 부연 설명할 필요가 있다.  1960년 3.15 부정선거는 관권선거 (마산에서는 경찰이 주요역할, 전국적으로는 자유당과 방계국민운동조직, 반공쳥년단과 같은 깡패조직, 부수적으로 교사, 공무원을 동원), 북한이 당시에 저지른다고 비판한 3, 6, 9인조 집단 내부 감시선거 (투표함에서 기표시, 상호 보여주고 조장에게 확인을 받은 후에 함에 넣는다), 반대자들에게 투표권 주지 않기, 야당참관인 몰아내기, 기자들 취재 금지, 사전 기표하여 투표함에 넣는 것, 반대표 무효표로 만들기, 개표시에 바꿔넣기 등을 자행한 것이다.  이러한 선거 관행은 오랜 기간, 아니 지금도 관권선거개입이 하나의 한국 정치의 관행으로 자리 잡은 것 같다.  최근에 논란이 되는 정보기관의 선거개입 여부에 대한 논쟁도 사실 여기에 기인한다.  당시에도 야당을 지지하면, 모두 빨갱이로 몰아부쳤고, 이번 선거에서 국정원의 심리 전단 소속 직원들의 활동은 주로 여기에 집중한 것으로 보인다. 즉 반대자에게 빨갱이 낙인을 찍는 것이다.

결국 이승만 정권은 대통령 선 자체를 무효선언을 하였고, 이승만은 망명 길을, 이기붕 일가는 가족 모두 자살(장자이자 이승만의 양자가 쏜 권총으로 죽었다), 당시 주동자인 내무부장관과 깡패 조직의 수괴들은 나중에 사형에 처해진다.  그래서 한국의 민주주의는 쓰레기 더미 속에서 장미 꽃을 피우게 된다. 당시의 상황에 대해 영국의 한 기자가 한국의 정치를 평하면서,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바라는 것을 쓰레기 속에서 장미꽃 피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는 표현을 사용하여 매우 비관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에 1960년 학생들 (애초에는 고교생들, 후에[ 대학생들 합류, 당시 대학생은 4월 1일에 개학하여 늦게 합류할 수 밖에 없었다)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소생시켰던 것이다.

당시에 이기붕은 이미 만으로 84세에 달하여 일설에 따르면, 50년대 중반부터는 사실상 대통령 직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기붕이 장악하였다는 말도 나돈다.  아무튼 이승만은 영웅, 신격화하여, 동상을 세우고, 영화를 만들고, 정자가 세워지고 하는 그런 상황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 보안법 통과, 경향신문 폐간, 조봉암 사형 등으로 폭압정치로 나아가고 있었다.  위의 문장과 관련하여 분명한 것은 이승만 역시, 당시의 사람들이 평가할 때에도 스스로의 당선을 위해서는 이미 유력 경쟁자인 조병옥이 사망하여 궐위상태이므로, 그렇게 부정선거를 할 이유가 없었는데도 밀어부친 점이다.  당시는 대통령과 부통령선거가 분리되어 있어서, 정은주 기자가 표현한 것처럼, 대통령이 당선되면, 부통령이 자동적으로 당선되는 그런 시스템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승만의 선거에는 부정이 없었고, 부통령 선거에서만 부정이 있었다는 것도 틀린 지적이다.

중요한 것은 이승만 정부내에서 부정선거가 기획되었고, 그리고 1960년 만이 아니라, 이미 1960년의 보궐선거나 이전 선거에서도 부정이 자행되었었다.  그리고 자신도 부정선거의 덕으로 4선에 당선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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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m Hayden이 1960년 한국의 학생혁명에 영향을 받았다.

역사/20세기 2010.05.28 20:01

지난 수요일 26일 광주 전남대  용지관 컨벤션 홀에서 5.18기념 국제 학술대회가 열렸다.  이날 참석한 인사 중에 Tom Hayden이 있다.,  책자에는 전직 캘리포니아 상원으로 기록되어 있고, 위키피디아에는 1960년대의 동물보호, 인권운동, 반전운동가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참석자들에게는 사회학 교수로 캘리 포니아의 클레몽에 있는 피처 대학에서 강의하고 있다.  그리고 필자에게 이 대학이 하바드를 지향한다고 하면서 근처 거리이름에 하바드가 있다고 전한다.  필자가 한국의 동료 교수들에게 물어보니, 이 사람을 잘 모르고 있었다.  헤이든은 미국에서는 전설적인 60년대의 학생운동가이자, 반전배우인 제인 폰다의 남편이었었고, 필자가 1980년대 미국의 LA에 살고 있었을 때 근처 태평양 바닷가에 있는 도시인 산타 모니카의 사회주의적인 정책을 이끌고 특히 임대료 통제법을 통해 도시 전체가 진보와 보수의 대결이 심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잇다.  필자가 목요일 저녁 리섭션 때 우리 테이블로 오게 하여, 동료 교수들에게 인사시켰더니, 언론이 자신을 유명하게 만들었다고 하면서, 자신이 하지 않은 훌륭한 일도 자신이 한 것으로 해놓고,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잘못도 자신이 한 것으로 묘사하여 영웅이 되었다고 고백한다.

수요일 오후에 헤이든의 발표가 끝나고 자신이 1960년 당시에 미국의 미시간 대학에서 잡지 편집자로 있었을 때, 한국의 학생운동 뉴스를 접했다고 한다(발표문 책자 1권: 97).  발표문의 문장을 그대로 옮기면, "50년전, 세계에 청년과 학생운동이 싹트고 있었을 때, 나는 일상적 영웅주의에 고무된 학생기자였다.  나의 세대의 많은 이들이 이승만 독재정권을 무너뜨리는 우리와 같은 나이의 청년들을 보여주는 한국에서 온 사진을 보고 흥분했었다.  나는 처음으로 한국전쟁과 냉전의 감추어진 역사를 배웠다"  내가 나중에 질문시간에 어떻게 뉴스를 이해하였느냐고 하니, 구체적인 것을 안 것은 아니고, 사진을 보았었고, 학생으로도 정권이 무너질 수 있구나하는 생각에 감동을 받았고, 당시에 일기 시작한 미국의 학생운동에 자극을 받았다고 진술했다.  그리고는 아마도 그 당시에 미국이 한국의 독재정부를 지지하지 말도록 시위를 했다고 한다.  당시 4월 19일 한국의 학생혁명이 있기전 일주일 전에 북 캐롤라이너의 쇼 대학에서 수백명의 학생이 모여 학생 비폭력운동조직을 결성하였고, 4월 19일에는 다이너마이트로 죽은 변호사를 기념하고 항의하기 위해 시장을 향해 항의행진을 하였다고 한다.  자신들도 지난 4월 19일에 50주년 기념행사를 하였다고 한다.  한국에 초청받아 연설하느라 약간 과장할수 있겠지만, 한국의 학생운동은 당시의 다른 나라의 학생운동세력들에게 상당한 희망을 준것은 사실로 보아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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