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1900-1919'에 해당되는 글 39건

  1. 2019.08.04 Gorky, 1906, Mother 2/2
  2. 2019.08.04 Gorky, 1906, Mother 1/2
  3. 2013.09.11 11세 일본인 소년이 목격한 마산 3.1운동
  4. 2013.09.11 1910년대 마산의 일본인 의사와 그의 아들의 삶
  5. 2010.02.23 훈육, 순치, 자아의 등장
  6. 2010.02.22 마산의 일본인과 한국인
  7. 2010.02.22 차별하는 사회에서는 혁신이 없다.
  8. 2010.02.22 민족자본과 민족국가의 관련성
  9. 2010.02.18 식민지 이해법
  10. 2010.02.17 왜색 도시 마산의 독립만세운동 2

Gorky, 1906, Mother 2/2

역사/1900-1919 2019. 8. 4. 13:06

"진리를 믿지 못하는 자, 죽음을 무릎 쓸 용기가 없는 자,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하고 두려워하는 자, 모두 물러나십시오! ... (152)

"Comrades!" sang out the Little Russian, subduing the noise of the crowd    with his mellow voice. "Comrades! We have now started a holy procession    in the name of the new God, the God of Truth and Light, the God of    Reason and Goodness. We march in this holy procession, comrades, over a    long and hard road. Our goal is far, far away, and the crown of thorns    is near! Those who don't believe in the might of truth, who have not the    courage to stand up for it even unto death, who do not believe in    themselves and are afraid of suffering—such of you, step aside! We call    upon those only who believe in our triumph. Those who cannot see our    goal, let them not walk with us; only misery is in store for them! Fall    into line, comrades! Long live the first of May, the holiday of    freemen!"

"뒤에 있는 사람들은 전혀 서두르는 기색이 없었다.  그들은 그저 구경거리를 만난 듯이, 그리고 결말이 어땋게 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는 듯이 냉담한 표정이었다 (155).

There, far away from her, was the red banner—she saw her son without seeing him—his bronzed forehead, his eyes burning with the bright fire of faith. Now she[Pg 224] was in the tail of the crowd among the people who walked without hurrying, indifferent, looking ahead with the cold curiosity of spectators who know beforehand how the show will end. They spoke softly with confid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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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rky, 1906, Mother 1/2

역사/1900-1919 2019. 8. 4. 12:34

르이빈이 파벨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파업을 하기는 힘들걸세!  돈 몇푼에 눈이 뻘게지긴해도 겁은 많거든. 삼백명이나 따라오려나? 그 이상은 어려워. 쇠스랑 하나로 퍼 올리기에는 퇴비의 양이 너무 많아. 말은 잘했는데, 마음을 못움직였어. 심장깊숙이에 불을 댕겨야 해"...

시조프 영감이 어머니에게 말했다.  "우리같은 늙은이들은 이제 무덤이나 가야해요.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소? 무릎꿇고 벌벌기면서 머리가 땅에 닿도록 굽실거리며 살지 않았소?  하지만 요즘 사람들은 우리와 달라요. 젊은이들을 보구려. 사장하고 대등하게 말하잖아요. 전혀 거리낌이 없어요.....

르이빈이 중얼 거렸다.  "자넨 이제 틈새를 메우는 시멘트와 같네! 파벨, 자넬 대표로 뽑자고 소리치던 사람들을 보았지? 사회주의자니 선동가니 하면ㅅ허 수군대던 사람들 역시 그들이었어! 당장 해고당하기는 싫고, 자네가 길을 열어주면 따라가겠다는 거지".  (고리키, 1906/2006, 어머니, 푸른 숲: 82-83 => 원문을 축약한 것).

"You cannot get them to strike!" said Rybin, coming[Pg 90] up to Pavel. "Greedy as these people are for a penny, they are too cowardly. You may, perhaps, induce about three hundred of them to follow you, no more. It's a heap of dung you won't lift with one toss of the pitchfork, I tell you!"

Pavel was silent. In front of him the huge black face of the crowd was rocking wildly, and fixed on him an importunate stare. His heart beat in alarm. It seemed to him as if all the words he had spoken vanished in the crowd without leaving any trace, like scattered drops of rain falling on parched soil. One after the other, workmen approached him praising his speech, but doubting the success of a strike, and complaining how little the people understood their own interests and realized their own strength.

Pavel had a sense of injury and disappointment as to his own power. His head ached; he felt desolate. Hitherto, whenever he pictured the triumph of his truth, he wanted to cry with the delight that seized his heart. But here he had spoken his truth to the people, and behold! when clothed in words it appeared so pale, so powerless, so incapable of affecting anyone. He blamed himself; it seemed to him that he had concealed his dream in a poor, disfiguring garment and no one could, therefore, detect its beauty.

He went home, tired and moody. He was followed by his mother and Sizov, while Rybin walked alongside, buzzing into his ear:

"You speak well, but you don't speak to the heart! That's the trouble! The spark must be thrown into the heart, into its very depths!"

"It's time we lived and were guided by reason," Pavel said in a low voice.

"The boot does not fit the foot; it's too thin and[Pg 91] narrow! The foot won't get in! And if it does, it will wear the boot out mighty quick. That is the trouble."

Sizov, meanwhile, talked to the mother.

"It's time for us old folks to get into our graves. Nilovna! A new people is coming. What sort of a life have we lived? We crawled on our knees, and always crouched on the ground! But here are the new people. They have either come to their senses, or else are blundering worse than we; but they are not like us, anyway. Just look at those youngsters talking to the manager as to their equal! Yes, ma'am! Oh, if only my son Matvey were alive! Good-by, Pavel Vlasov! You stand up for the people all right, brother. God grant you his favor! Perhaps you'll find a way out. God grant it!" And he walked away.

"Yes, you may as well die straight off!" murmured Rybin. "You are no men, now. You are only putty—good to fill cracks with, that's all! Did you see, Pavel, who it was that shouted to make you a delegate? It was those who call you socialist—agitator—yes!—thinking you'd be discharged, and it would serve you right!"

(Gutenberg 프로젝트에서 인용한 영어번역문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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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세 일본인 소년이 목격한 마산 3.1운동

역사/1900-1919 2013. 9. 11. 17:42

고길희, 2005, [하타다 다카시, 마산에서 태어난 일본인 조선사학자], 지식산업사에는 1908년에 신마산지역에서 태어나 마산 3.1운동을 목격한 진술담이 실려있다. 이는 물론 하타다다카시가 말년에 회고록에 나온 기록을 원용한 것이다.

"소학교 때의 일이다. 하타다 소년은 구마산에 있는 친구 집에 놀러갔다 오는 길에 신마산 장군천 다리 근방에서 우연히 삼일운동의 독립만세 시위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마산에서는 320, 25, 30일 즉 5일장이 서는 날을 이용해 시위행진이 있었다. 조선인들이 구마산시장에 집합해 신마산에 있는 府廳警察署 등 관청을 향해 행진해 갔다. 일본군대와 경찰은 신마산 입구의 다리에 대기하고 있다가 시위대를 진압하는 작접에 나섰고, 90여명 이상의 조선인을 체포하였다.

하타다는 노년에 당시의 일을 글로 적었다. 그에 따르면 우연히 맞닥뜨린 시위에는 조선 젊은이들은 물론 노인과 어린 여자까지 합세해 만세를 부르짖고 있었다. 어린 마음에 겁이 났지만, 그들은 어떠한 가해 행위도 없었고, 다만 귀가를 서둘렀을 뿐이었다. 그때 경찰들이 몰려와 시위대를 둘러싼 뒤 곤봉으로 마구때렸다. 시위가 있은 뒤 수 많은 조선인들이 끌려가 구속되었다. 경찰서는 신마산 시가의 변두리에 있었다. 일본 아이들은 경찰서 주변에 모여, 조선인들이 연행되어오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다. 연행되어온 조선인들은 구치소에 다 넣을 수 없게 되자, 경찰은 경찰서 안에 있는 테니스 코트에 철조망을 치고 그 안에 조선인을 몰아 넣었다. 그걸 본 하타다는 어린 마음에 비가 오면 어떻게 될까 걱정했다고 한다.

당시 하타다 소년은 조선인이 남녀 모두가 시위하고, 더욱이 자신과 동년배인 아이들까지 시위 행렬에 참가하고 있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평소에 아무말도 못하던 조선인들, 특히 노인과 아이들까지 시위에 참여하는 것을 보고 어린 마음에 놀랐던 것이다. 그리고 시위대가 자신이나 일본인들에게 어떤 위해도 끼치지 않았음에도 경찰이 몰려와 곤봉으로 마구 때리는 모습을 보고 공포를 느꼈다" (42-43).

저자는 마산 3.1운동이 20, 25, 30일에 발생한 것으로기록하였으나,실제로는 21, 26, 31일에 발생한 것으로 자료를 통해 논증되었다 (남부희, 1997, "마산 창원지역의 3.1운동 성격", 한국민족운동사 연구, 15; 김봉렬, 2002, "마산의 3.1운동", 경대사론, 12/13호).

기록에 따르면, 3차례시위가 모두 구마산 정기시장날을 이용하여 발생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하타다 다카시가 3차 시위중 어느 시위를 목격했는지는 불분명하다.  대체로 3차례 시위에 대해 각각의 격렬성, 폭력성의 정도는 다른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1차 시위 - "구마산장날 장터는 시위참가자를 비롯하여 장으 ㄹ보려고 나온 인근 지역 주민들로 붐볐다.  시위주동자들은 보부상으로 가장한 김익열에의해 시장에 들여온 태극기를 독립선언서와 함께 군중들에게 배포하였다.  이들은 정오 경 마산발 삼랑진행 열차의 기적소리를 신호로일제히 태극기를흔들고 만세를 외쳤다.  이에 장터의 군중들도 합세하여, 만세를 부르며 시내로진출하였다.  시위행렬이 이어지자 주위의 행인들도 가담하여 시위대는 삽시간에 3천여명에 이르렀다.  당시 마산에 거주하는 조선인이 15천여명이라는 기록을 감안하면, 3천여명은 거의 전 조선인이 참여한 것으로 짐작한다.  평화적 만세시위에 대해 일제는 처음부터 강압적 폭력적 방법의 진압으로 일관하였다.  시위 군중이 가두로 진출하며, 단시간에 대규모 시위로 확대되자, 마산주재 일본군 헌병과 경찰을 출동시켜 총검을 앞세워 시위대를 무차별 탄압하였다.  더욱이 일제는 진해 해군 경비대의 군함 조무호를 마산포로 출진시켜 전투태세를 방불케 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이날의 시위는 오후 6시까지 계속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주동인물 50여명이 마산경찰서로 연행되었다" (김봉렬, 2002: 182)

2차시위 -  "오후 2시경 구마산장터에 모인 군중은 앞서 제 1차 구마산장날 시위에 투옥된 애국지사와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가두로 진출하였다.  시위행렬이 북마산파출소를 지나 마산형무소로 나아가며 시위군중은 3천여명으로 극격히 불어났다.  이날의 시위는 구속인사 석방이라는 구체적 요구가 전면에 등장하며, 1차 시위에 비하여, 그 정도가 좀더 격렬해졌다.  일부 과격시위자들은 마산형무소까지 쳐들어가 수감된 동지들을 구출하고자 외칠정도였다.  시위군중의 확산에 당황한 일제는 경찰을 급파하고, 마산 가포동의 육군 중포병대대 병력까지 긴급 출동시켰다.  무장 군경의 무차별 진압속에 이날 시위에서도 주동자 14명이 체포 연행되었다" (김봉렬, 2002: 183).

3차시위 - "3차의거인 3월 31일, 구마산 일대에서 약 2천여명의 군중이 2시간에 걸쳐 만세운동을 전개했지만, 이때 일경은 물론 日軍 중포병대대원까지 동원하여 탄압함으로써 이날의 의거는 더 이상 진전되지 못했다" (203).  이 기록은 앞선 2차 의거시에도 군까지 동원하였다고 나오므로, 2, 3차 모두 군인이 동원된 것으로 이해된다.  "구마산장날 시위에는 약 2,5백여명의 군중들이 참가하였으나, 시위의 정도는 1, 2차에 비해 더욱 격렬해 지고있었다.  시위군중들은 마산 형무소로 진출하여, 애국지사들의 즉시 석방을 요구하며, 만세를 불렀다.  특히 이날 시위에는 형무소 간수까지 참여하였다.  시위군중의 만세함성에 흥분한 한국인 간수 박광연이 제복을 벗고, 시위대속으로 뛰어들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형무소간수까지 시위군중에 합세하자, 시위 분위기는 한층 고조되었다.  만세시위가 절정에 이를 즈음, 진압을 위해 예외없이 무장 일군경이 출동하였다.  이들은 총칼을 휘두르며, 또 다시 시위군중 20여명을 연행하였다" (김봉렬, 2002: 183-84).

하타다의 기록과 논문들의 기록을 비교하면, 하타다는 형무소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구마산 장터에서 신마산의 부청과 경찰서를 향하여 시위가 진행되고 있었고, 이를 장군천 다리에 저지한 것으로 진술하고 있다.  또한 약 90명이 연행되었다고 하여, 1차의거를 목격한 것으로 추정된다.  즉 2, 3차의거는 주로 1차 의거나, 앞선 의거에서 구속된 인사들을 석방하라는 것이 주요요구중에 하나였고, 2, 3차 의거는 1차 의거에 비해 적은 숫자가 연행되었다고 논문들에서는 기록하고 있기에 그렇다. 또한 하타다의 목격에는 경찰 만이 등장하고 있는 점 또한 경찰과 군인이 동시에 출동한 2, 3차의거와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따라서 하타다는 1차의거를 목격한 것으로 판단된다.  경찰서와 부청은 모두 신마산의 현재 경남대 평생교육원, 경남종합사회복지관 자리, 그리고 그 건너편의 현 파출소로 추정되기에 그렇다.

폭력성에 대해서는 남부희는 적었다고 표현하였고, 김봉렬은 더욱 심해졌다고 표현하나 모두, 1차 시위에서는 격렬하였다는 점을 인정하고있다.  따라서 하타다 다카시는 1차의 거를 목격한 것으로 판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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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대 마산의 일본인 의사와 그의 아들의 삶

역사/1900-1919 2013. 9. 11. 16:23

고길희, 2005, [하타다 다카시, 마산에서 태어난 일본인 조선 사학자], 지식산업에 1910년대의 마산에서 살은 일본인의 체험 기록이 나온다.  "하타다 다카시는 1908117일 경상남도 마산에서 태어나, 1921년 마산소학교를 졸업한 뒤, 부산중학교에 입학해 1925년 졸업하기까지 약 17년 동안을 조선에서 생활한 재조일본인 2이다" (25).

"개항한 1898년에는 마산 근교를 포함하여 일본인 이민자 수는 103, 1900년 마산포 사건을 전후하여 3백명으로 증가하고, 러일전쟁 뒤인 1905년이후에는 2천명으로 급증하고, 하타다가 태어난 1908년에는 3,687명에 이르렀다....1912년 당시 마산의 이민자들의 일본 지역 출신지역은, 혼슈(本州)의 야마구치(山口), 히로시마(廣島) , 규슈(九州)의 나가사키(長崎), 후쿠오카(福岡), 사가(佐賀)현에 이어 에히메(愛媛) 현과 함께 오카야마 현이 6위로 7백명의 이민자 수를 보여주고 있다 (32).  출처: 朴宗根, 1995, “旗田巍先生馬山”, 旗田巍先生追悼集刊行會, [追悼 旗田巍先生]: 140-141).  오카야마 현의 사람들은 통영 현재 도남동 관광단지 입구에 이주어촌을 형성하였다.  이에 대한 기록은 김준 외, 2007, "경남 통영 강산촌의 형성과정과 주택변용에 관한 연구", 대한건축학회 논문집 계회계, 23권 8호 (통권 226호), 8월호를 참조하시오.

"1906년에 의사였던 하타다의 부친이 오카야마 현(岡山縣)에서 마산으로 이주했다. 아버지의 이주 동기는 하타다의 조부가 경영하던 주점 (酒店, 사카야)가 망하자, 조선이란 신천지에서 성공해 보겠다는 야심을 갖고 하타다의 부친 하타다 가네타로 (旗田兼太郞)가 마산으로 이주했다" (하타다의 누이인 하타다 게이코 旗田惠子의 증언) (31).  1911년 마산에 있던 빈전 신문점이 발행한 [마산과 진해만](일문)에는 마산에 당시 8명의 의사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허정도, 2011. 8. 8, 100in.com에 올라온 것).  이때에는 이미 마산병원이 자혜의원으로있었기도 한 시기라서 의사이름도 등장하고 있었다.  즉 김형윤, [마산야화]에 "1909년 신마산 마산병원에 근무한 적이 있는 마에하라가 철도병원 위탁 산과를 경영했으며, 마산병원 도구가와는 마산병원을 시가의 배로 쳐서 조선 총독부에 기증했다.  마산병원은 경남 자혜병원으로 됐다가, 경남 도립 병원으로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현재 필자가 확인한 바로는 월영초등학교 뒷편, 헌병대장이 살았다던 인근의 언덕 집에 [자혜병원 산부인과]라는 나무 팻말이 쓰러져 있음을 확인했다.  그러나, 마산부청이 1915년에 발간한 [마산안대](일문) 책자에는 마산병원이 마산중부 경찰서, 또는 월초등학교 동편 맞은 편으로 추정되어 확인이 필요하다 (조용호, 1999. 1. 25일자 경남신문). 아무튼 중요한 것은 당시에 하타다의 부친은 8명중 한면의 의사로서 근무했으며, 아마도 초기에는 개인 병원에서 근무하다, 후에 마산병원에 근무하지 않았나 하는 추측을 해본다.  그 이유로는 마산병원의 역사가 더 밝혀져야하지만, 1908년생인 하타다가 초등학교 중간에 병원이 이전하여 이사하였다는 말이 나오기에 그렇다.  그러면 대강 1915-20년 사이로 추정된다.

"하카다의 생가는 일본인 거리가 급속히 발전한 러시아 영사관 동쪽 마산천 주변, 즉 일본인 거리와 조선인 거리의 경계에 있었다 (마산천은 현재 창원천이라 불리우는 제일각 옆, 제일여고의 연애 다리가 있는 천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 일본인과 조선인 거리의 경계라는 표현은 잘못, 일본인 거주지역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듯, 근처는 본정으로 불리우던 곳이다 – 이은진 지적). 그곳에 살다가 하타다가 소학교 저학년이었을 무렵 (1915년경으로 추정, 이은진 추가), 그의 일가는 일본인 거리로부터 약 4-5킬러미터 떨어진 동쪽 지역으로 이사했다 (마산역까지는 직선 거리 6백미터 정도 떨어진 곳이다. 따라서 걸어서 거리라고 하더라도 1킬로 미터 미만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옳을 듯, 이은진 추가). 1905년 일본이 군사목적으로 마산선 철로를 부설하였는데, 마산역에서 가까운 곳이었다. 당시 일본인 거리가 러시아 영사관 주변 (현재의 월포초등학교, 이은진 추가)에서부터 점차 동쪽으로 확대되었기 때문에 집 주변에는 일본인 소학교 (월영 초등학교, 이은진 추가)와 관공서 (마산우체국, 이은진 추가)도 있었다. 그 속에서 하타다의 집도 醫院 건물을 세워 조금씩 넓혀 갔다" (35).  앞서 조용호 기자의 글에는 인근에 창원 군청이 있었고, 장군동에 검찰과 법원이 있었다.

34쪽에 1910년대 마산의 일본인 거리 사진이 게재 => 멀리 보이는 공장은 주류 공장 (창포 동성, 창포 한백 아파트로 추정, 그러나 사진 도로가 구부러진 방향이 현재의 도로 방향과 달라서 후에 허정도에게 문의해보아야 할 사항... 이은진 추가).

책을 읽다가 흥미로와서 적어 보았다.  최근에는 일제하 조선에 살던 일본인에 대한 연구가 많이 진척되었다.  필자의 메모에 성신대 김주희 교수가 쓴 박사학위 논문에 마산 가포지역에 거주한 일본인들의 생활을 일본신문에서 기사화 한 것을 인용하였다고 들은 적이 있다.  한번 문의해 보아야겠다.  오늘 성신대 홈페이지에서 검색해보니 주소가 불명하다.  혹시 아시는 분은 댓글을 달아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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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육, 순치, 자아의 등장

역사/1900-1919 2010. 2. 23. 12:01
1910년대는 일제가 식민통치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한국내의 기존 사회 신분은 심각한 동요 현상을 보인다.  즉 과거가 폐지되고, 토지조사 사업으로 이익을 본자도 있겠지만, 일단 기존의 토지를 기반으로 한 양반층의 재편성이 불가피해진 것이다.  이에 따라 토지를 기반으로 지역에서 안정적인 신분층으로 존재하던 대주지 계층은 계층적 불안정,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휩싸이게 된다.
이에 대한 대응의 일환으로 가족이나 혈족 내에서는 과거에는 관료진출을 통해 출세를 위한 학문에서, 일단 미래를 보장하는 수단으로 해외 유학을 선호하게 된다.  이때 많은 양반 대지주의 자제들이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신학문에 접하게 된다.  그러나 조선조말의 양반층이 학문하는 태도와는 다른 방식으로 근대적인 대학에서 학업에 임하게 된다.  즉 공무를 완료한 후에 특별한 직업 보장이 없는 상태에 빠지게 된다.  따러사 가족이나, 마을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고등교육을 받았지만, 이들은 확실한 직업과 위세를 갖는데 실패하게 된다.  1910년이전만 해도, 유학이라는 것은 관에 의한 국비 유학으로 모두, 기존의 관료나 국가체제에 봉사할 것을 전제로 한 것이었으므로, 미래안정성이 보장되므로, 고민할 필요는 적은 편이었다.

여기에 일제의 통치 정책은 특히 수세정책은 초기에 주세, 연초세, 가옥세를 신설하여 징수하였는데, 아직 근대적인 공장채제가 발달하기 전이라서 수공업적인 방식으로 집에서 제조하여 자가소비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였다.  이는 양반지주계층들이 주세의 대상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일제 총독부는 징세와 수세를 위하여 가가호호 방문하면서, 강압적으로 독려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따라서 과서에 수령에 의해 징수되던 마을 단위의 징세에서 이제는 가가호호방식으로 바뀌면서, 공동체적인 연대성이 약화되게 된다.  이에 더하여 일제는 위생을 중시한다고 하면서, 가가호호 방문하고, 거주하는 사람들을 일일이 호명하고 끌어내서어 이를 확인하는 방식을 사용하였다.  즉 가족의 권위가 말살되고 이제는 개개인이 각자의 위생을 책임지고, 이를 국가가 공인해 주는 방식으로 바뀐 것이다.  이는 세무공무원을 두고, 헌병경찰제도를 도입하여 강압적으로 이루어졌고, 교육기회와 기업기회는 제한하면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민족의식을 말살하기 위해 역사 유적의 말살과 새로운 신화를 만들어 내는 박람회, 박물관의 설립 등이 이어진다.
또한 일제는 초기에 단행된 사회적 간접 기반시설을 위해 토지의 수탈(자진 헌납)과 동시에 노력 동원을 강제하게 된다.  일본의 우익들은 이점에 대해 일본 제국의 자금이 직접 한반도의 항구, 철도, 도로 등의 건설에 사용되었다고 강조하면서, 식민지에 대해 일본이 오히려 희생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한반도의 자원을 수탈하고, 일제의 제품을 판매하는 루트를 만들기 위한 것이었음은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다.
일제는 또한 1910년대는 내내, 무력을 앞세워서, 한국인들을 통치하였다.  무력 통치는 기존의 권위 체계를 무너뜨려서, 공동체 의식이다, 사회적 신성을 무너뜨려, 긍정적으로는 현실의 냉혹성과 과학적 인식의 중요성을 깨우쳐 주었다고 볼수도 있지만, 사회적 공동체성을 무너뜨리는 데에 결정적으로 기여한다.  노인들에 대한 존경심의 상실, 무력을 앞세우는 일제의 앞잡이가 됨으로써 자신의 출세를 노리는 사람들이 등장하여 기존의 권위는 무너지게 된다.

필자는 이러한 요인들이 공동체성의 상실을 가져왔고, 1900년전후로 시작된 민족의식이 1907-9년의 의병으로 운동으로 나타났지만, 아직은 근대화된 의식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반동적인 성격이 컸었다고 보여진다.  비로서 1910년대의 방황과 1919년의 독립운동을 기점으로하여, 한국인들은 근대적인 의식으로 깨어날 수 있었다고 볼수 있다.  독립운동은 한국인들의 광범위한 참여, 기존의 지도자들의 권위를 되살리는 계기가 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세로운 사회적 권위와 공동체 의식이 민족을 기반으로 형성되는 계기가 되었다.


참고문헌
이선이, ?, "초기 자유시 담당층의 정체성 모색과 그 의미," 국제 어문, 26집: 91-112
신지연, 2007, "재현의 언어와 최남선의 산문형 시", : 4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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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의 일본인과 한국인

역사/1900-1919 2010. 2. 22. 17:39

마산은 명백하게 구분되는 2개의 사회로 나뉘어져 있다.  과거의 조계지역인 일본인이 주로 거주하는 지역과, 마산포를 중심으로 하는 한국인 지역이 그것이다.  일본인 지역에 한국인이 전혀 상업활동을 하지 않거나 거주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각각의 사회는 한국인과 일본인 혼재되어 사업을 하고 거주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사업면에서는 한국인이 비교적 구마산에서 과거의 상권을 어느정도 유지하고 있었다고 해도, 1910년대에는 이미 창고기능을 상실하고, 다만 어시장이 존속하고 있었지만, 이미 과거의 명성인 원산과 강경을 이어지는 중개항구 또는 인근지역의 물산을 집산하고 분배하는 기능의 상당부분이 약화될 수 밖에 없는 사정에 처해 있게된다.  즉 세금은 이미 금납화로 바뀌었고, 강경과 원산의 중개기능은 이미 개항장으로바뀜에 따라 해외의 세력이 장악하는 계기가 되고, 경부선, 경의선, 호남선, 그리고 마산선의 철도 개설은 아직 자동차가 등장하지 않은 시기라고 하더라도, 항구를 기반으로 하는 또는 강길의 배를 중심으로 하는 운송기능의 약화를 가져왔다.

이제 마산포는 신마산에 건설된 철도정거장과 마산항의 일본항구로서의 기능은 새로운 상업기회를 가져왔다.  물론 진해가 일본의 요항으로 군사기지화함으로써 진해로 일본인들이 어느정도 이전하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마산은 중요한 일본무역항으로서, 그리고 일본인 거주사회의 중심지로서 정착되어 발달하기 시작했다.  신마산에는 일본인들을 위한 신문의 발행, 일본인들의 자치기구들, 국가 권력기구들, 일본인들의 경제활동을 돕기 위한 세관, 금융기관, 우체국 등이 들어서고, 또한 생활상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학교, 병원, 일본인들의 절이나 신사 등이 세워졌다.  여기에 더하여 일본인들의 사업상의 필요에 따라 요정이나 창녀촌, 영화관, 목욕탕 들이 들어서고, 도로의 개설, 다리의 건설, 가로등, 전기의 공급, 상수도 시설의 등장, 도서관, 벚꽃의 식목, 일본술의 제조(아직 막걸리는 상품화되기전이었다), 인근에 유원지를 건설하고(공원) 등등의 근대적인 시설을 급속도로 공급한다.

실제로 마산에 1910년대에 살았던 이들은 마산에서 한국인과 같이 놀거나 교류한 기억이 없다고 진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사업면에서는 한국인들의 상권에 침투하여 일본의 수입품을 판매하고, 한국의 물산을 일본에 수출하고, 한국인 사업가들을 통하여 예속적인 방식으로 사업을 영위하는 등의 행태는 드러나고 있다. 이 당시에 구마산을 지배한 일본인 등장하고, 특히 대토지 소유자는 구마산에 그리고 신마산에도 등장하고, 대규모 건설업자나, 부산의 금융을 지배하던 일본인이 마산에도 장악을 시도하는 장면이 여럿이 등장한다.  마산의 금융은 구마산이건, 신마산이건 모두 일본인이 거의 완전히 장악한다.  전당포나 작은 금융기관까지도 모두 일본인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따라서 일본인들 마산에서 거부가 된 이들이 상당수에 달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이후에 한반도 일본인 사회를 상당한 정도 독자성을 유지하면서, 제국의 본국 일본인 국가를 벗어나 독자적으로 한반도를 지배하려는 시도를 상당히 하게 된다.


참고문헌
조용호, 1999, "마산개항백년: 근대화 1세기 향토 유사", 1월 18일자, 1월 25일자, 경남신문 (신마산 조계지역, 1915년대 마산시가지)
허정도, 2001, "20세기 초 마산 도시공간구조의 복원적 연구: 1912년을 기준으로", 4월 19일 경남대 인문과학연구소 세미나 발표문
허정도와 이규성, 2002, "일제강점기 원마산의 도시공간 변천과정 연구: 1912년부터 1945년까지", 건축역사연구, 11권 2호: 57-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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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하는 사회에서는 혁신이 없다.

역사/1900-1919 2010. 2. 22. 13:34

인도에서 가장 소프트웨어가 발달한 지역은 남중부 지역이다.  근처에 현대자동차 공장이 있다.  이곳은 현재 인도에서 가장 투자가 활발히 이루어 지는 곳이다.  즉 정치의 중심지인 델리, 경제의 중심지인 뭄바이가 아닌 천민들만이 사는 곳에서 가장 투자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필자가 2007년 12월에 첸나이 현대자동차 공장을 방문하였을 때에도, 이곳은 공산당이 지배하고 있었으나,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인도 사람들조차 자신들을 천민으로 여기는 상황에서 현대자동차가 공장의노동자로 고용하여 평등한 조건아래에서 노동을 시키고, 급여를 주는 것에 대해 상당한 정도로 감동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또한 이 근처는 세계적으로 콜센터로 유명하고, 소프트웨어의 개발력도 인정받고 있다.  즉 인도는 지금 천민들의 열정으로 경제발전이 일어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끔 중국과 인도의 미래 경제발전가능성에 대한 논란이 이는 것을 본다.  나는 여러가지가 있으나, 중요한 점은 국민누구나가 평등한 조건에서 공평하게 일을 하고, 자신이 한 일에 대해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이 갖추어져 있는가가 중요한 요건이라고 본다.  겉으로 보면 인도가 더 민주적인 제도에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사회적으로 특히 직업선택이나 경제활동 면에서는 카스트 제도가 아직도 완고하게 남아 있다.  물론 법률적으로나, 공식적으로는 카스트가 철폐되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인도 사회는 천민을 멸시하고 직업세습, 멸시하는 직업이 남아 있다.  반면에 중국은 공산당이 사회의 중요한 지배계급으로 등장하고, 이들을 중심으로 특혜를 받는 층들이 부당하게 이익을 취하는 경우가 많기는 하지만, 그래도 전통속에서, 그리고 공산주의 사회의 이념속에서 그동안 사회평등이 상당히 자리를 잡았다. 특히 직업면에서는 천대받는 직업이 거의 없고, 돈을 많이 버는 것에 대한 열망이 무척 강한 사회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는 천민자본주의적인 요소는 남아 잇다고 하더라도, 당분간 중국이 인도보다는 앞서서 경제성장을 이룰 가능성은 더 높다고 보는 것이다.

우리의 역사에서 1910년대를 본다면, 한반도에서 가장 경제활동이 활발한 지역은 경기도의 수도권, 그리고는 평안남도와 경상남도가 손꼽힌다.  조선의 역사에서 본다는 평안도와 경남지역은 가장 소외받는 지역이었다.  평안남도 지역은 이후에 기독교를 일찍받아들이고, 근대 산업이 발전하는 지역으로 변신한다.  물론 독립자강운동이 가장 발전한 지역이다.  경상남도는 일본인들이 한반도에 이주하여 발달시킨 부산과 마산을 축으로 상공업의 발달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마산의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1910년대에 아직 공업이 발달하지 않고, 본격적으로 민족자본가들이 등장하지 않은 시기에 일본인 자본가들에 의해 경제활동이 활발하던 지역이었다.  그래도 마산은 상대적으로 지주계급보다는 상공인세력이 강했고, 기독교나, 일본의 외래 종교가 일찍 이입되어 정착한 점으로 미루어 볼때, 봉건적인 차별에 대항하여 자신들의 열망을 성취하고자 하는 의식이 강했던 지역이라고 볼 수 있다.

현재의 상황에서 바라보아도, 이루는 지나치게 자신의 기득권을고집하는 경향이 심함을 쉽게 관찰할 수 있다.  이런 사회는 혁신이 나타나지 못하고, 정체되게 마련이다.  차별없이 기회를 주고, 성과에 대해 보상하는 제도나 관행이 확립된 지역에서만이 모험, 진취성, 혁신성이 나타난다.  이는 역사적으로 그리고 다른 지역에서도 찾아볼수 있다.

참고문헌
주익종, 1994, [일제하 평양의 메리야스 공업에 관한 연구] 서울대 경제학 박사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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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자본과 민족국가의 관련성

역사/1900-1919 2010. 2. 22. 10:27
민족자본을 우리나라사람들이 운영하는 자본이라고 생각한다면, 당연히 조선인, 한국인이 운영하는 자본은 역사상 항상 있어왔다.  그러나 민족자본이 문제가 되는 것은 특히 일제가 한반도를 강점하고, 총독부를 통해서 본격적으로 군대와 세금 수취를 장악하고, 식민지 경영을 시작하였던 시기일 것이다.  이 시기에도 여전히 귀족 관료층들, 지주계층들은 설사 일제가 1910년에 회사령을 통해, 한반도내의 회사의 발전을 억압하였다고 하더라도, 상업과 무역, 금융을 통하여 자본축적을 지속하려도 노력하였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혹자는 한국인과 일본인들이 공평한 조건하에서 경쟁하였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근대적인 경제활동의 경력, 자본축적의 정도, 기업경영의 환경을 일본까지 쉽게 확대시킬 수 있는 일본 내지의 자본가들에 비해서는 열등한 상황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럴경우, 만일 우리가 민족국가체제하에 있었다면, 대부분의 후발 자본주의국가가 취했던 무역정책인 보호무역정책을 취하고, 국가가 우선적으로 민족기업을 육성하는 금융이나, 진입장벽같은 정책을 취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일제의 등장은 1910년대에 한국인 기업에 이러한 보호장치를 제거함으로써 사실상, 일본인 자본가와 직접적인 경쟁에 돌입하여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이에 더하여, 일본 자본가들은 총독부의 무력과 금융면에서의 혜택, 한반도에 거주하고 있는 일본인 자본가들끼리의 모임을 통한 정보교류와 대정부 로비능력, 국가의 정책적인 사업(기반시설, 식산사업 등)에 우선권을 부여받는 혜택을 누리게 된다.  이에 공평한 기회는 곧 한국인 자본가들의 기업 설립이 일본인 기업 설립에 비해 1/3정도에 불과한 실적으로 바뀔수 밖에 없게 된다.  물론 상당수의 기업들은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토지의 임대와 매매 등을 통해 이익을 집적하고, 여기에 금융적인 혜택을 통해서 자본축적에 성공하는 사례가 나타난다.  김성수 일가가 천석꾼에서 만석꾼으로 전환되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지방에서는 특히 우리지역은 구포지역의 저축조합, 부산에서 발의 된 경남은행의 경우에는 지주들이 중심이 되어 금융기관을 운영하는 사례가 된다. 아울러 쌀의 일본 수출을 통해 상업자본으로의 진출도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는 특히 1918년 일본에서 발생한 싸 소동이후에는 특히 격심하게 된다.

민족자본이 일본토지조사사업이라 쌀 수출을 통해 이익을 보고, 일제 통치에 협력하는 한편, 일본자본과의 직접적인 경쟁에 나선 경우에는 민족국가의 보호막이 필요하였음을 느끼는 경우도 많아진다.  특히 경상남도와 같은 국가의 변방에 위치한 곳에서는 국가의 보호을 받을 수 없고, 다만, 일본식민국가와 일본자본과의 직접적이고 적나라한 경쟁에 노출된 경우에는 더 크게 민족국가의 보호막을 받아야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안희제의 백산상회나 경남은행이 독립운동 자금의 흐름길이었다는 것은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다. 대한제국이 멸망한 후에 이들의 회복움직임이 미약했고, 짧은 시간에 끝이 났다는 점은 민족국가로의 열망이 상대적으로 강했다는 점을 반증하는 것일 수도 있다.

참고문헌
김영성, 1995, "사회경제적 건전성의 지역간 격차변동: 1915-43", 사회과학연구, 7호: 51-74
조기준, 1973, [한국기업가사] 박영사
Carol Joel Eckert, 1986, [The Colonial Origins of Korean Capitalism: The Kochang Kims and the Kyongsong Spinning and Weaving Company, 1876-1945], Ph.D Dissertation, University of Washing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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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이해법

역사/1900-1919 2010. 2. 18. 07:09
식민지 기간의 업적에 대해서 근대화로 보는가 아니면, 강제 수탈의 빼앗긴 40년으로 보아야 하는가의 문제가 역사해석에서의 논란꺼리로 남아 있다.  식민지 근대화를 주장하는 근거는 현재의 업보는 모두 과거에 근거하므로, 우리의 현재가 잘되고 있으므로(산업화, 경제성장, 민주화), 이것의 원인은 과거로 거슬러 갈 수 밖에 없다는 것에 근거한다.  이럴 경우, 현재에 대한 평가, 그리고 과거라는 것이 어느 정도의 과거를 가리키는가가 논란의 핵심이 된다.  즉 현재를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과거의 긍정적인 것을 중심으로 이해할 것이고, 만일 현재를 부정적으로 본다면 과거도 부정적으로 볼수 밖에 없다. 

또한 과거를 조선후기, 열강의 침략이 시작되고 이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조선왕조와 대한제국기, 일제의 침략에 당하고 일제의 가혹한 침략이 자행된 1980년대에서 1910년대까지, 아니면 일제가 한반도를 만주와 몽고, 연해주의 침략의 전진기지로 삼고, 일본의 식량과 공업원료 생산지대로 개발한 1920년대와 30년대, 전쟁시기의 1940년대, 일제가 건설한 물적 기반이 와해되어 버린 해방이후와 한국전쟁, 거의 일제시대 수준에 머물러 정체된 시기인(미군에 의해 군정이 이루어 지고, 오직 군사적인 목적으로 생존하던 ) 1950년대-60녀대 중반, 아니면 본격적인 개발이 이루어진 1960년대 중반이후 등, 어느 시기를 강조하느냐에 따라 논란이 달라 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또한 과거의 누적적이고 집적된 것이 현재를 이루었다고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단순히 물적 자본만 가리킬 것인가, 인적 자본(교육, 기술, 숙련, 규율적), 사회적 자본(조직력, 단력력, 사회관계능력),자연자본(한반도의 자연자원들, 광산, 수자원, 해양 수산자원 등), 자본의 형성(자본주의 경영 능력)까지 포함한다고 한다면 각 분야마다 또 평가가 달라질 것이다.  대개 식민지 근대화 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은 물적 기반 특히 교통 수송 통신 시설이 남아 있다는 점을 가리킨다.  공장과 같은 산업적 물적 시설은 대개 한국전쟁을 통해서 파괴되었다.  인적 자본도 거론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한국인 스스로 개발하였다거나, 아니면 일본인 공장에서의 공장 경험을 가리킨다.

그런데 식민지라는 것의 요체는 식민모국, 제국과의 관계에서 항상 보조적인, 부수적인, 쉽게 희생당하는 존재라는 데 특징이 있다는 점은 별로 지적되지 않고 있다.  다만, 이를 물적인 표현으로 바꾸어야 하니, 불평등, 차별, 분업구조의 열등한 위치 등으로 고정시키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더욱 중요한 것은 자율적으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능력을 지녔느냐의 문제이다. 만일 우리가 현재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지 못하다면, 우리는 식민지 상태와 같은 상태에 있다고 보면된다. 우리의 군대를 우리가 운영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우리의 의사를 표현할수 없다.  대통령이 잘못하고, 법을 어겨도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 이런 상황은 사실상 일제하의 식민지시절과 같은 상태가 되는 것이다.

식민지는 헌병경찰제도와 동시에 군대의 주둔, 세금체제의 강화로 나타났다.  특히 1910년대에는 주세와 연초세와 같은 세금을 도입하여 일반서민가 가장 많이 소비하는 제품에 승부를 걸고, 이를 통치자금으로 사용하였다.  즉 우리가 낸 세금이 우리를 억누르는 비용으로 지출된 것이다.  주세의 아이디어는 일본에서 이미 도입되어 성공을 건두었기에 조선왕조시절의 세금을 체제를 거의 그대로 두면서, 간단하게 도입하였던 것이다.  당시 약 30만명이상의 한국인들이 술 제조허가를 얻어서 세금을 납부하고, 술을 먹는 사람들도 간접세 형태로 세금을 납부하였다.  일본제국은 한반도의 공장 건설을 저지하고, 단지 일본상품의 소비와 원료수취지역으로 운영하였다.  개발하여 수취한 것도 아니고, 단지 있는 것을 빼앗는데 열중하였다.  이리하여 관세의 수입이 늘고, 토지조사사업을 통해서는 토지세가 급증하게 된다.  그러나 1918년의 일본에서 발생한 도시에서의 쌀 부족사태는 이후에 한반도를 쌀 생산지역으로 본격적으로 개발하게 된다.  그리하여 1920년대는 쌀 생산의 전문화된 지역으로 전화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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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색 도시 마산의 독립만세운동

역사/1900-1919 2010. 2. 17. 08:04
1919년 3-4월에 걸친 독립만세운동은 경남지역에 전국에 비해서 본다면, 수도권, 서북지역 다음으로 격렬하게 발생하였다.  국권이 조선왕조, 대한제국이 멸망해 가는 과정에서 저항이 상대적으로 미약했던 경남 지역에 격렬하고 활발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는 점은 특이한 현상이다.  반면에 의병활동이 활발하였던, 호남지역에서의 독립만세운동이 상대적으로 약화되었다는 점은 설명을 요한다.  10년도 되지 않은 세월에 저항운동의 지도가 바뀐 것이다.

이에 대해 기존의 설명들은 대개 전통적인 저항운동의 흔적을 살피면서, 저항의 전통을 강조하는 것, 토지수탈과 같은 경제적 이권의 상실, 일제의 무단 통치, 서울지역과 연계된 조직망(기독교, 유림, 지식인 그룹 등), 다른 독립운동 단체와의 연계망을 지적하고 있다.  분명이 이러한 설명들은 실제로 발생한 사실에 근거하고 있으므로,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할수는 없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이러한 사실만으로는 지역의 특성이나, 구조적인 요인에서 행위로 나아간 사실을 설명할수는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보다 지역이 다른 지역과 다른 특성을 지녔거나, 아니면 보다 전국적인 아니면, 일본제국주의의 대응 능력 면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경남을 비롯한 마산 지역은 상대적으로 조선왕조나, 대한제국시기에 전국적으로 권력의 핵심지역이라기 보다는 변방적인 성격이 강한 지역이었다.  이러한 변방성은 자신의 이익은 자신이 스스로 지켜야 하는 자립심을 길렀고, 대신 일제의 경제적 이권 침략에 대응하여 그 대응능력을 키웠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1905년이후에 국권을 상실한 후에는 일본제국은 마산을 비롯한 경남지역이 상대적으로 저항이 적은 점을 감안하여, 가장 적극적으로 식민정책을 펼치기 시작한다.  즉 토지조사 사업, 가옥세 주세 연초세와 같은 근대적 세제의 도입, 철도건설을 위해 토지와 노력의 수탈이 가장 먼저, 그리고 가혹하게 이루어졌던 것이다.  수탈은 근대화와 동시에 오게 되어 마산은 구마산과 신마산이 거의 격리된 상태로 존재하기는 하였지만, 상호의 격차와 차별을 일상생활에서 체감하면서 거주하게된다.  여기에 일본제국의 진해 요항의 해군함대와 포병대대, 일본육군의 군수물자 항구, 일본과의 무역을 전관하는 항구라는 특징을 지니게  되어, 무력침탈과 무역물자의 이동을 통해 일제의 침략을 가장 적나라하게 경험할 수 있는 지역이 된다. 

마산은 상대적으로 유림의 세력이 약하고, 기독교 계통이 일찍 들어오고, 어시장과 샛강항구를 통해 일용노동자들이 많이 존재하고 있어 이들을 상대로 한 야학이 발달되어 있어 근대적인 사상과 동시에 근대적인 프롤레타리아트가 어느정도 존재하고 있다는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수치상으로는 마산의 3월 두척산, 추산정, 그리고 시장에서의 2차례에 걸친 만세운동은 학교의 교사와 학생을 중심으로 일어난 것이지만, 어느 사회운동이 다 그렇듯이 초기의 온건한 운동을 주도한 세력과 후기의 폭력적인 운동을 주도한 세력을 다를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과격한 운동을 주도한 세력은 상대적으로 항구의 노동자들(부두, 운송), 근대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들이었을 것이다.  물론 마산외에도 진동, 함안, 합천의 만세운동이 격렬하였지만, 그 구호는 같다고 하더라도, 지역적인 발생구조나 동인은 다르게 해석되는 것이 마땅한 것 같다.  농촌의 경우에는 전통적인 마을이나 씨족 구조간의 경쟁, 유림의 영향력, 서울 운동조직과의 연계성 등이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의입장에서 보면, 대한제국 유민들의 항거는 비교적 온건한 항거였고, 갈길이 바쁜 일제의 침략 단계의 발목을 잡는 사건이었다.  일제는 1915년 독일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하고 독일의 산동반도 영토, 태평양 섬들을 점령하고, 중국을 상대로 21개조 조약을 통해 만주와 몽고를 침탈하려는 의도를 보이고, 미국과는 이미 중국에서의 권한을 양해받은 바 있다.  1918년에는 시베리아에 7만명을 출병시켜 광범위한 러이사 영토에서 침략을 일삼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따라서 한반도에서의 독립운동은 이미 1차세계대전의 마무리 협상을 통해 조선인민들의 민족자결의 희망을 무산시키고, 일본의 권리를 인정받았으며, 어느정도 한반도에서의 저항을 예상하고 있었을 것이다.  약 8천여명의 희생자가 나기는 하였지만, 상대적으로 적은 비용을 들이고, 한반도의 저항을 봉쇄한 셈이다.

일본은 내부적으로 이미 경제부흥, 산업의 성장, 민권의식의 고양에 따른 근대적인 정당체제의 확립, 선거권의 확산이 진행중인 상황에서 더 강한 억압을 취하기 보다는 상대적으로 저항 정도로 치부하고 전쟁에 가까운 내전으로 이끌지는 않았다.  즉 의병봉기와 같은 전쟁상태로 나아가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독립만세운동이 근대적인 국가를 마련하는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기는 했지만, 운동의 방식은 전 근대적은 방식으로 진행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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