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1900-1919'에 해당되는 글 39건

  1. 2010.01.22 東道 西氣?
  2. 2010.01.21 근대에서의 인식 지평
  3. 2010.01.20 마산에서 근대는 일제의 수탈이었다.
  4. 2010.01.19 분열을 조장하는 자는 외세에 의존하는 자들이었다.
  5. 2010.01.18 개인적 행동의 역사적 평가
  6. 2010.01.14 일본의 영토 침탈과 외교력
  7. 2010.01.13 同文同種의 허위를 깨닫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8. 2010.01.12 바뀌는 세상을 감지 하지 못한 자의 운명
  9. 2010.01.11 파업 파괴자로 동원된 대학 체육 선수들

東道 西氣?

역사/1900-1919 2010. 1. 22. 10:27
서양의 물건만 사용하고, 정신은 빼앗기지 않는다.  나는 1989-90년에 국민경제제도 연구원에 근무하면서, 과소비, 금융실명제, 토지 공개념 등에 관련된 일을 하고 있었다. 당시의 한 토론회에서 젊은이들의 서양물건 소비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말했던 것이 생각이 난다.  이것은 개인적인 취미의 문제가 아니라, 나는 개인적으로는 한국적인 것을 소비하고 있고, 그것이 나의 취향이나, 감각에 맞기에 그런 것이지. 당위론적인 것은 아니었다.  또한 혹자는 마치 고무신을 신고 다니면 한국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데, 그것도 틀린 것이다.  고무신은 마산의 경우에는 개항이후에도 아직 주민들이 신지 않았고, 적어도 1910년경까지는 대개는 짚신을 신고 다녔던 점을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짚신을 신으려면, 대개는 4시간 걷는 거리에 한컬레를 사용하였으니, 바깥 나들이 하지 않는 경우에는 나무신발이나, 맨발로 다녔을 것이다.  차라리 맨발로 다니는 것이 전통적이고, 건강에 좋을 것 같다.

1900년대 초반은 맥주, 커피, 설탕, 와인 등 입맛을 바꾸는 음료들이 등장하였고, 1910년경정도가 되면, 서울에서는 영화관도 등장한다.  옷감도 이제는 영국산이나 일본산 면제품이 들어오기 시작하여 옷의 혁명이 진행되게 된다.  그러나 아직도 이들 옷감을 이용한 의복이 발달한 것은 아니었고, 더구나 속옷이나 양말은 도입은 20-30년이상을 기다려야 한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경험 물건들에 대해 일본은 대한제국보다는 적어도 30년가량 일찍 물건을 모방하야 제조하려 시도하였고, 이에 성공하였다.  현재 일본에 가면, 유명한 맥주, 커피, 비프스테익 등이 존재하고 그 품질도 우수하다는 점을 알수 있다.  우리의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이러한 모방의 역량이 사회적으로 부족하였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해 박은식은 통사에서 사회적 활력의 부족을 탓하고 있다. 이점은 이미, 당시를 관찰한 외국인들의 기록에서도 자주 아주 기분나쁘게 등장한다.  기분이 나쁘더라도 그 이유는 알아 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사회의 활력이란 사회의 이동가능성, 자시 생애에 능력을 발휘하여, 사회가 인정해 주보 보상해 줄때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사회적 활력은 오로지 왕조 일가, 양반일부 세력, 그리고 상인이나 전문가 세력에게만 있었다.  이들은 모두 기득권을 수호하거나, 새로운 문물의 도입에서 상인적인 이익을 취하려는 세력뿐이었다. 따라서 진취적인 세력이나 모험적인 세력을 아니었다.  이는 일본과 다른 점이다.  일본이 봉건적인 제도였다고하지만, 적어도, 몰락하는 사무라이들을 사회적으로 통합시키기 위해 이들에게 활로를 열어주는 정책을 취한 점이 다르다고 볼 수있다.

물건과 정신을 구분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다.  프랑스에서는 카페에서 1789년의 혁명이 발생하였다고 하는데 우리의 경우에는 카페는 퇴폐의 장소로 여겨졌고, 토론의 장소로 여겨지지 않았다. 우리의 대부분의 사회운동의 발생은 시장에서 시작되었다.  그것도 전통적인 시장이다.  시장과 카페는 모양이 다르기 때문에 토론의 형식과 내용도 다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서양의 카페에서는 토론이 이루어 졌다면, 우리의 카페에서는 마담과의 감각적인 대화가 주를 이루었다는 점이다.  우리가 자랑하는 인쇄술도 책자나, 신문 잡지의 발간과는 큰 상관이 없었다.  물론 19세기 초반까지 전통인쇄술에 의해 소설 잡지류가 발간되었다고는 하나, 19세기 말기의 신문의 발간이나, 근대적인 책자의 발간은 서구의 인쇄기기에 의해 이루어 졌다.  서구의 인쇄기기는 우선, 성경의 전파를 가져왔고, 조선정부의 정책홍보로 이어졌고, 독립협회의 신문 정도에 이르러서야, 근대적인 신문이 등장하여 개개인의 의견을 표출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필자는 기본적으로 물질과 형식은 긴밀히 제도나 사회적 관행에 의해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우리의 토양에서 받아들일 수 밖에 없어서, 그대로 이식되지는 않는다.  중요한 점은 서구의존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중요한 가치에 합의하고, 이를 위해서 우리 스스로 판단하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항상 사회적인 의제가 발생할때마다, 우리는 서구의 예를 좇는데, 급급하다.  세종시의 행정복합 도시 문제를 위해 독일의 본을 간다고 한다.  갔다오면 분명이 보는 이마다 다른 의견을 낼 것이다.  독일은 기본적으로 수도를 통합하려했고,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 본은 도시 재활성화에 성공하였다.  우리의 문제는 균형발전의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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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에서의 인식 지평

역사/1900-1919 2010. 1. 21. 14:48
사람들의 세계관은 직접적인 경험에 의며, 이러한 직접적인 경험은 교통 통신의 발달과 이에 의존한 경험에 일차적으로 의존한다.  간접적인 경험이라고 할 수 있는 매체에 의한 경험이 그 뒤를 따른다.  1900년을 전후하여 마산은 개항과 동시에 중국인, 일본인들이 거주하기 시작하였고, 서구 열강들 러시아, 독일, 영국인들이 마산에 힘을 앞세워서 공식적으로 거주하였다.  또한 1900년을 전후한 시기에 종교의 형태로 일본인, 호주인들, 프랑스인들이 선교를 행하고, 교회를 세우고, 학교를 세웠다.  그리고 마산거주의 사람들도 이제 외부 여행의 기회가 많이 주어졌다.

물론 아직 자동차가 없었고, 대가는 가마, 말, 인력거, 그리고 1905년 11월에 들어서서 하루에 2회 부산가는 기차가 등장한 것이 인식의 지평을 넓히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비록 신마산에 주로 일인 거류자를 위한 것이기는 해도, 우체국, 전신국, 전화가 등장한 것도 커다란 변화중의 하나일 것이다.  신문은 일인 거류자들을 중심으로 발행되고 있었고, 마산 조선인들의 독자적인 신문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당시의 필기도구는 여전히 일본이건 대한제국이건 마찬가지로 붓에 의존하고 있었다.  현재 우리 생각에는 붓이 불편하였을 것으로 짐작하지마, 간편하게 가지고 다닐 수 있는 붓이 발달되어 1800년경에도 다산 정약용이나, 많은 실학자들은 길가다가도 관찰한 것으로 즉석에서 그리고, 기록하였던 것이다.  만년필이나 연필은 1910년이전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마산에 등장한 외국인들의 존재, 그리고 구마산까지 침투한 중국인들의 상점, 일본인들의 정미소, 무역상, 요리점, 대금업, 사창가(현재 수성동 지역 - 상당부분 요리, 사창, 대금업을 겸했던 것으로 보인다)의 등장은 마산의 거류민들에게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중국인들은 대개 광동인이었고, 이미 부산에서 사업을 하던 사람들이 중심을 이루었으며, 일본인들은 아직 확실치는 않지만, 구주지역일 것이고, 이미 부산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중심이 되고, 가난한 일본이주자들이 이들에 고용되는 형태를 띠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튼 일본인 사회는 이미 신문, 거류민단의 구성, 상인회, 신사를 중심으로 한 공동체 형성(1910년에 제일여고 자리에 건립)가 발달되어 있었다.  이는 일본사회의 지금까지도 내려오는 속성으로 우리와 비교하면 마을 단위의 공동체가 매우 강하게 존속하고 있고, 이것이 국가체제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 다르다.

여기에 일제의 공권력을 동원한 침탈, 즉 헌병, 경찰(현재 부림 시장), 군대의 주둔, 형무소의 설치가 한편으로 자리잡고, 다른 한편으로는 왜색 종교가 완월동 부근을 중심으로 자리잡고, 우리의 경우는 마산 포교당(추산동)이 1910년대에 들어서서 자리잡게 되므로, 불교도 사실상 그다지 활발하다고 볼 수 없다.  교회가 회원동 지역을 중심으로 자리잡는 형상이 벌어진다.  공립소학교, 일본 불교에 의한 소학교 나중에는 일본인 자녀들을 위한 중등학교(월영초등학교), 호주 장로교에 의한 창신학교의 설립(회원동), 지역 유지들에 의한 노동야학(어시장 북편 끝자락)에 의해 부두노동자들의 교육 기회 제공 등이 일어난다.  전반적으로 보면, 일제는 종교를 앞세우고, 거류민들의 응집력과 국가와의 연계를 내세워 침투한다.  반면에 대한제국의 마산주민들은 아직 국가의식이나, 사회의식은 발달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근대는 국가의식, 사회의식, 민족의식의 프리즘을 통해 의식의 지평을 넓히게 된다.  물론 여기에는 통신, 교통, 매체, 교육, 종교등의 영향을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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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에서 근대는 일제의 수탈이었다.

역사/1900-1919 2010. 1. 20. 20:43

일제가 조선반도를 완전히 장악하던 시기에 마산은 러시아, 영국, 일본의 각축장이었다.  러시아는 해군에서는 남포에, 러시아 부영사관에서는 율구미를 중심으로, 애초에는 블라디보스톡과 여순을 연결하는 군항으로, 후에는 저탄장, 제빵소, 해군 병원의 기지로 생각하여, 이곳을 사들였다.  일본은 애초부터,  부산을 보완하는 무역항, 그리고 진해의 해군기지를 보완하는 군항으로서 마산을 지목하고, 끈질기게 마산의 외서면 지역(신마산)에 조계지, 전관거류지를 만들고, 후에는 러시아의 율구미 장악을 막기 위해 부산의 일인 부호들을 동원하여 땅을 사들였다.  영국도 19세기 말에는 거문도를 점령하면서 까지 한반도에 탐을 내었지만, 결국은 남아프리카에서 진행중인 보아전쟁에 전력을 쏟느라, 러시아의 침략을 막는 방향으로 선회하고, 일본과 동맹을 맺는다.  이제 러시아와 일본의 대결이 진행되지만, 결국은 러시아는 만주에 집중하고, 일본이 마산을 장악하는 과정을 겪게된다.

20세기의 초엽에는 구마산(원마산)을 중심으로 일본 상인들이 수입품 장사(주로 면제품)와 한일 상인들의 미곡 수출이 주된 상업활동이었다. 그러아 이후 특히 1904년 초이후에는 일본이 마산을 장악하고, 일본육군이 군항을 만들고, 마산선을 건설한다.  이 과정에서 땅을 빼앗기고, 철로 부지의 조성, 궤도 부설에 일본인의 건설업자들의 하청 노역을 담당하게 된다.  이들 철도건설지역은 1904년 2월에 맺은 한일 협정서에 따라, 그리고 대부분의 철도 주변 부지는 관리하느 나라의 군사적인 통치와 사법체제의 적용을 받는 점에 따라, 노무자들은 일본 법의 지배를 받게 된다.  즉 법을 어기거나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일본 영사관에 송화되어 처벌을 받는 것이다.  이러한 일들은 조선정부가 러일전쟁을 위한 철도건설에 적극협력한다는 방침에 따라, 조선정부의 권유로 마산의 주민들이 동원된 것이다.  이후에는 중앙 마산지역(즉 철도 정거장 부지 약 40만평, 장군동에서 반월동 정도까지)의 도로 건설에서도 마산 주민들이 노역으로 동원된다.

땅을 빼앗겨서 이에 대한 소송이 많이 발생한다. 특히 철도 부지나 정거장 부지의 경우에, 조상의 묘지나 옥토를 강제로 팔아야 되는 경우가 많아 창원 감리에 호소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미 1904년말에 들어서면, 조선왕조에는 재무와 외무 분야에 고문정치가 행해지고 있고, 1905년 말에는 을사보호 조약에 의거하여, 외교권을 완전히 상실한 상황이 되어서 일본인들의 횡포에 대해서 일본 이사청(일본 영사관)에 호소 해야하는 모순이 발생한다.  이에 더하여, 일본인들은 조선인민을 착취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대부업에 많이 진출하였다.  특히 부산의 경우에는 토착상인을 상대로 일인들이 대부업에 종사하여 착취하는 경우가 많았다.  1905년 1월에는 화폐개혁으로 일본의 화폐와 같게 만드는 조치가 발생하여 금융공황이 초래되고, 일제의 제일은행을 비롯하여 일본 거류민들 계통의 은행들이 한국의 금융을 장악하게 된다.  이시기에 일제는 신마산 지역에 전당포를 많이 설치하게 된다. 
 
일인들은 또한 이미 1905년이 되면, 사실상 조계지 또는 일본인 전관 거류지역, 군사지역 등에서는 완전히 독자적인 행정을 실시하고 있었고, 징세도 조선왕조의 권한이 미치미 못했다. 관세권도 외국인들의 손에 들어가 있었다.  그럼에도 대한제국 조선왕조는 지방지배체제를 제대로 확립하지 못하고 여전히 관리들의 부패와 탐관이 횡행하고 있었다.  아니 일제에 빌붙어서 자신의 개인적인 영달을 도모하는 자들이 많았다.

일제는 제조업분야에서는 주조, 정미 등, 그리고 상업 분야에서는 일단 신마산 지역에서는 자체의 시장을 개설하고, 구마산 지역에는 서서히 침투하는 양상을 보였다.  교통분야는 하루에 2회정도 왕복하는 부산과 마산과의 철도, 인력거의 등장을 볼 수 있었고, 신마산 지역의 영화관 등장, 일본군인들을 상대로 하는 화류계의 등장과 더불어 구마산지역으로 침투를 볼 수 있다.  이렇게 서서히 근대의 물결은 일본의 착취와 약탈과 더불어 마산에 들어 오게 된다.  물론 마산의 유지들도 역시, 상업에 종사하고, 금융업에도 진출하고, 학교를 설립하고, 인쇄소도 만들고, 야학도 하는 상황이 발생하나, 다른 전통적인 지역에 비해서는 그리 강한 편은 아니다.  그래서 마산은 기본적으로 일제의 육군 군항으로 도시가 성장해 온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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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을 조장하는 자는 외세에 의존하는 자들이었다.

역사/1900-1919 2010. 1. 19. 09:23

조선왕조가 일제에의해 강제 합방을 당하기 까지 조선내의 세력들을 왕권수호세력, 개화세력, 민중세력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즉 왕권수호세력을 자신들의 기득권 수호를 위해 조그마한 양보도 허용치 않고, 심지어는 외세에 빌붙어서 왕조를 유지하려던 세력이었다.  고종은 1904년의 한일의정서까지만 해도, 일본이 자신의 조선지배권을 보호해줄 것을 믿고, 일제에 빌붙어서 러시아 전쟁시기에 조선의 모든 물자와 영토와 인민들을 동원하여 협력하였다.  그러나 그 결과가 1905년의 을사 보호조약으로 귀결되자, 자신의 외교권을 잃어버리고, 사실상 내치권도 상실되었다고 생각하자, 이 시기부터 반격에 들어 간다.  그러사 이 당시의 반격이라는 것은 고작 독일 황제에게 편지를 보내고, 물론 이때 독일 황제는 이를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영국의 헤럴드 트리뷴 기자를 불러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하고, 이는 영국의 신문에 1906년 3월경에 게재되었다.  헤이그 만국 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하여 만국의 공법에 의거하여 해결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었다.  이러한 무모한 일은 단순히 자신들의 민중이나 개화파들과 협력하여 외세를 몰아내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는 정도를 넘어서서, 이미 일본와의 협력 체제에들어간 회세에게 왕권의 수호를 의탁하려고 한 정세의 어두움과 판단력의 부족함에 있다.  조선왕조가 어떻게 보면, 이 정도의 수준으로 왕조를 유지하여왔는가에 이르르면 통치술의 한계를 직감하게 된다.  결국 고종은 1907년에 군대해산, 순종에게로 왕위를 물려주고, 자신은 덕수궁에 눌러 앉고, 순종을 왕위를 받고 창덕궁으로 들어간다.  순종은 이제 철저하게 일본에 의존하여 왕실의 재산을 유지하는 세력으로 전락하게 된다.  그러나 실은 1907년부터 1090년까지 사이에 조선반도에서는 의병들이 일어나 일제와 전쟁을 벌인다. 이때 전쟁이라고 표현한 것은 일제로서는 경찰과 헌병에 더불어, 군대를 파견하여 정식으로 의병들과 전쟁을 벌이기 때문이다. 의병들이 응집되고, 중앙집중화된 의사결정체제는 없었다고 하더라도, 왕권의 몰락에 의해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이들과 이념적으로 의존하던 향리 세력등이 협력하여 일어난 전쟁이었다.  이들에 대해서만이라도 고종이나 순종이나 조선왕조가 응원하였더라면, 그나마도 왕조는 이후의 역사에서 다르게 평가받았을지도 모른다.  바로 이 시점이 왕권사상에서 넘어와 한반조의 인민들이 민족의식이 싹트고, 이를 기반으로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나려는 생각을 가지게 된 시기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개화세력은 일본에 협력하는 자들이 많았다.  개화란 바로 국가체제, 산업화, 사회의 근대화를 노리는 세력이었다.  이들의 생각이 세밀하고, 미래를 내다보는 선지자적인 시각을 갖고 있지 못하다하더라도, 이들은 시대의 움짐익을 포착하고, 이를 기반으로 무엇인가 개혁하지 않으면, 무너질 수 있다는 점을 깨달은 사람들이라고 볼 수있다.  따라서 처음에는 이들이 자주적으로, 아니면 외세에 빌붙어서 개화를 이루려고 시도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들이 성공하지 못하자, 최종적으로 한일 합방을 주도하는 세력으로 나아가기도 했다.  이들 세력들을 조선왕조, 아니 대한제국이 흡수하였더라면, 조선왕조는 입헌군주국으로 변모하고, 외세의 침탈을 막고, 아니 막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후세의 평가는 매우 긍정적인 것으로 변했을 것이다.  외국의 한반도 관찰자들이 한반도를 여행하면서 느낀 점은 바로 한가지, 한반조 인민들의 무지 몽매함과 무기력함, 조선왕조의 부패함와 타락성을 지적하는 것이었고, 바로 이점에서 일제의 침략에 대해 외세들은 자신들이 직접 이해관계가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조선반도 지배를 지지하였던 것이다.  조선반도를 지배하게 된 일제는 1905년이후에 조선국가체제를 정비하기 위한 시도를 하면서, 재정 체제의 정비(국가 독립 기구의 설치), 중앙국가가 미치지 못하는 범위의 지방에는 자치를 허용하는 것을 강구한 점, 지배를 위한 경찰,헌병, 군대의 파견, 지배자원을 파악하기위한 조사와 측량 사업의 전개를 시작한다.  이러한 점을 두고, 혹자는 일제가 한반도의 국가체제를 근대체제로 바꾸었으므로, 근대화에 공헌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중요한 점은 우리 스스로 자치를 할 능력이 있는가, 국가체제를 만들어낼 능력이 있는가에 대한 것이다.  따라서 개화파의 상당수는 이제 국권을 잃어버린 상황에서 교육운동이나, 상공업 진흥운동으로 나아간다.  자발적으로 학교를 세우고, 근대 상공업을 받아들이는 운동을 펼치는 것이다.  외세의 충격이 없이, 스스로 외부의 움직임을 보고 이를 선제적으로 판단하여 움직였다면, 국권 상실이라는 비극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마산의 조선인 초등학교 성호초등학교가 이때 생겼고, 같은 시기에 불종거리의 형무소가 만들어 져서, 읙병활동하던 이들이 갖히고, 1909년 일제는 순종황제를 마산에 보내어 일제의 침략기구들을 응원하고, 조선인민에게는 순종도 이제 일제에 항복하였고, 이들이 순종을 잘 대해주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데 협력하였다.  1909년 1월 순종이 마산을 방문한 시기는 의병활동이 가장 활발하던 때였다.  의병들은 1907-09년에 약 2만여명이 전쟁에서 사망하였다.

민중들은 어찌 보면, 일제에 의해 당하거나, 조선왕조에 의해 착취를 당하거나 큰 차이가 없었을 수도 있다.  조선왕조는 탐관오리들을 양산해 내었고, 그들에게 각종 수탈에 시달리고있었다.  또한 일제의 침탐에 의해 이미 조선왕조 후기부터, 버림 받은 백성들은 일제에 의해서도 상권, 군대, 이주민들에 의해 폭력을 당하고, 재산을 빼앗기고 있었다.  읻르은 왕권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왕조나 개화세력처럼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조선왕조도 이미 동학농민전쟁시기에 일제를 끌어들어 민중들을 말살하였고, 이어서 나타난 독립협회 세력들도 민중들와 연대하기 보다는 왕조와 개화시력과의 타협에 중점을 두고 의회 설립운동을 펼치고 있었다. 이들이 물론 당시의 국제적인 정세에서도 선진적인 아이디어이기는 하지만, 민중들의 세력까지를 포함하는 의회 설립이나, 입헌군주제를 주장하였더라면, 역사의 흐름은 달라졌을지 모른다.  역사는 모름지기, 지배받는 층의 대다수를 포괄하여, 이들의 마음과 노력과 아이디어를 활용하였을 때 융성할 수있다는 점을 알려주고 있다.  그러나 조선조 말기, 아니 대한제국 시기의 인민들은 더욱더 조선왕조로부터 배척당하고, 착취당하므로, 인민의 통합은 어려웠던 것으로 판단된다.

요즈음 이명박 정부의 리더쉽을 보면, 국민들의 분열을 조장하여 정치적인 이익을 취하려는 경향이 강함을 알 수 있다.  51%의 지지만 받으면, 나머지는 적대적인 세력이 되어도 정권을 유지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다고 판단하는 듯하다. 그리고는 미국와 일본의 이익만 보존해 준다면 외세도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이다.   49% 세력을 무시하는 것은 무시를 넘어 분열, 그리고는 적대적인 세력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외세의 상황이 바뀌는 현금의 국제정세를 깨닫지 못하고, 국민 분열에 기반한 통치를 지속한다면, 20세기 초반에 벌어졌던 국권상실이라는 역사적인 비극이 다시금 재현될지 모르겠다는 우려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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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 행동의 역사적 평가

역사/1900-1919 2010. 1. 18. 10:59
역사적 전환기에 개인들의 행동은 후세의 평가에서는 엇갈리고, 모순적인 행동들이 자주 들어난다.  이를 두고는 지금도 역사상의 문제로서 왈가왈부하고 있다.  이는 역사적인 해석의 절대성을 숭배하는 사회적 분위가와도 연관되어 있고, 최소한도의 사회적 평가기분의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더욱 그러하다.  필자는 개인의 행동은 개인적으로 이해하고, 역사적인 행동은 역사의 관점에서 평가를 하여야 한다는 당연한 관점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관점은 이율 배반적인 것이 아니라, 당시에 자신의 이해관계를 냉철하게 파악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행동에 옮기는 정도를 합치된 평가의 기준으로 삼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자신과 남, 현재의 이익와 미래의 이익을 계산에 옮기고,이를 적극적으로 실현시키려는 의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지난 1월 9일 유장근 교수의 도시 탐방대를 따라 나서면서 유장근 교수는 1904년에 인근에서 한 무리의 떼를 지어서, 일본인과 부호들의 재산을 약탈한 사건이 발생하고, 이들에 대해서 산호동 산에서 처형했다는 기록을 발견하였다고 하면서, 이들의 성격을 무엇으로 규정하는 것이 옳으냐고 질문을 제기하였다.  즉 도적, 의적, 독립운동 등의 해석이 가능하므로, 이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는 것이다.  직업으로 보니, 어느정도 사는 사람들이었고, 떼를 지어서 다니는 것을 보니, 단순히 개인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집단적인 동의하여 여러지역 사람들이 모여서 한 짓이고, 부자나 일본인을 공격한 것으로 보니, 사람들을 괴롭히기 위함은 아닌 것으로 보였다.  따라서 보다 보편적인 목적을 지닌 다양한 지역의 사람들이 보편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한 행동이라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그러나 나는 당시의 상황을 추측해 보건대, 일본이 러일 전쟁을 벌이면서, 2월에 조선반도의 재산을 군용목적이라는 이름으로 사실상 강탈할 수 있는 권한이 생긴 것에 주목한다.  물론 이러한 조항은 전쟁목적이라는 단서가 붙기는 하지만, 사실상, 이를 빌미로 경찰권, 사법권, 그리고 재산 사용권을 지녔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를 애매모호한 상태에서 광범위하게 사용하였다.  따라서 일차적인 피해자는 조선반도의 재산을 지닌 자들이었고, 이외에도 이들은 군수물자로 동원하기 위해 재산을 강탈하였고, 전쟁을 빌미로 철보부설, 군용부지 부설, 군인들의 유지에 필요한 시설과 식량 등을 공급하는 사업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일본에서 몰려온 사업가들, 기술자자들, 노동자들, 심지어는 매춘부들까지 대거 들어오게 된다.  이들에 의해 조선반도는 사실상 설사 재산이 많은 자라도 그 피해를 입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따라서 필자는 당시에 유장근 교수에게 개인적인 이해관계가 조선왕조의 흥망이라는 역사적인 이해관계와 연과되어 있다고 느낀 사람들의 행동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을 것이라고 의견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견해는 실은 역사적인 이해에서 자주 등장한다.  일진회를 구성하여 한일 합방을 주장한 송병준은 미천한 출신으로, 조선왕조의 후원으로 출세한 사람이기도 하고, 동학교도이기도 한 사람이다.  해석하자면, 동학혁명을 일으킨 동학교도, 조선왕조의 은덕을 입었으므로, 조선왕조의 보존을 위하여 행동하여야 할 사람이다,  그런데 한일 합방을 주장하였다.  이토 히로부미를 격살한 안중근은 15세때 동학전쟁을 맞이하여서는 동학도들을 토벌하는데 앞장섰고, 이등박문을 죽일 때도 죽인 이유의 끝부분에 일본 천황의 뜻을 받들지 않았음을 주장한다.  그러나 실은 안중근은 오래 전부터, 일제의 피해를 받아 블라디보스톡, 만주로 떠 돌아 다니던 사람이다.  그러면서 이등박문 때문에 조선 반도의 운명이 나빠 졌다고 생각하게 된다.  안중근은 천주교도로서 프랑스 신부들을 불러 들여 죽을 때 기도를 하게 한다.  이때에 프랑스 신부는 한때의 잘못된 생각으로 이런 일을 하게되어 참회하라고 요구하고, 이에 대해 안중근은 별로 답이 없다.  당시 프랑스는 이미 일본과 손을 잡고 일본내의 베트남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던 때이다.  그런 상황에서 소극적으로 프랑스인 신부는 안중근의 뜻에 공감한 것으로 이해된다.

나는 현재를 살아가면서 대의라는 것이 무엇인가? 무엇이 역사적으로 옳은 것인가를 고민하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의 나의 답은 현재와 미래, 나와 주위의 이해를 고려하여 즉각적이고 단호하게 행동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런 행동이 역사적으로 옳은 행동으로 이어질 것으로 본다.  자신의 이익을 주장하지 못하는 자는 남의 이익을 주장하지 못하며, 역사의 흐름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때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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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영토 침탈과 외교력

역사/1900-1919 2010. 1. 14. 08:39
학교 연구실에 있다 보면, 불청객들이 자주 찾아든다.  대개는 구걸, 책이나 교육자료 판매, 카드나 보험상품판매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가장 오랫동안 목요일마다 정기적으로 방문하시는 주부들이 있다. 방학중에는 가족중의 자녀와 같이 주부가 찾아와서는 신문을 들여 놓고는 사라진다.  이 신문은 화광신문이다.  화광신문은 일본의 창가학회에서 발간하는 신문이다.  마산에는 해운동 세관 건너편에 돌로 지어진 웅장한 멋진 건물이 창가학회의 센터인 것 같다.  표시는 SGI로 되어 있다.  창가학회는 정보를 찾아보니, 일본의 일련정종의 교리를 따르는 집단이고, 남묘호랑교라고 불리는 주문을 외는 집단으로 알려져 있었다. 일본에서는 공명당을 지원하는 강한 정치력을 발휘하는 집단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해 말에 일본에서 천황과 중국 부주석의 회견과 담화발표가 있었다.  이는 일본인들에게 천황을 정치에 끌어들인다는 비판을 받아 현 민주당 정권의 최대 불만사항이 되었다.  그런데 이를 성사시킨 것이 창가학회라고 알려져 있다.  창가학회는 원래 평화를 주창하는 단체이나 조직운영에서는 매우 엄격하고,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자랑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은 이미 19세기 말에 오키나와 열도와 대만을 합병하고, 이어서 한반도를 합병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는 러일 전쟁에서의 승리, 승리의 댓가로 아쉽기는 하지만, 사할린의 절반과 만주의 절반을 할양받는다.   이어서 조선왕조의 외교권을 장악하고는 독도를 일본 영토로 편입하고, 간도를 중국에 넘기고는 만주에서의 잇권을 보장받는다.  나는 이러한 일본의 영토 팽창능력이 단순히 군사력의 우세로만 설명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왜냐하면, 일본이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내부의 무장세력들을 해외로 팽창시키는데 이용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전적으로 무력에만 의존한 것은 아니다.  즉 공식적인 그리고 민간 차원의 외교력이 강했다는 점을 여러면에서 드러내 주고 있다.  Shiosaki Satoshi, 2006, 日露戰爭: 또 하나의 戰, 아메리카世論을 動했던 5人의 英語名人, 祥傳社新書라는 책에 잘 묘사되어 있다.  중요한 점은 관리들이 아닌 이들이 나서서 러일전쟁에서의 일본의 입장을 미국의 여론에 호소하고 다녔다는 점이다.  물론 미국이 이들의 여론에 힘입어 일본에 잠수함을 비밀리에 판매하고, 일본의 전쟁 국채를 국제적으로 사들인 것은 아니라고 할 수있으나, 적어도 이러한 노력이 있었다는 점만은 일본 국가의 능력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미국이 참전한 것은 미국이 이제 태평양으로 진출하기 위해 일단 러시아의 진출을 저지하기 위한 목적이 일차적이었을 것이다.  이후에도 미국은 1907년 헤이그 만국 평화회의에 조선왕조의 대표를 러시아가 주도하여 초청하였으나, 이를 거절하는 절차로 가게되는 데, 당시에 미국은 러시아와 주도적으로 만국평화회의를 주최한 점을 감안하면, 미국의 영향력에 의해 이준열사의 참석이 거절당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영국은 일찍이 러시아가 남아시아 방명으로 진출하는 것을 막기 위해 극동아시아 지역에서 일본의 러시아 진출 저지를 막았고, 이러한 결과 러일 동맹이 형성되었다.  아울러 영국은 러시아 발틱함대가 극동지역으로 향할때 수에즈 운하의 통과를 불허한 것은 물론이고, 함대의 이동 경로를 일본에 통보해주고, 적대적인 행동까지도 서슴치 않았을 정도로 적극적으로 일본을 도왔다.  그런데 1905년 러일전쟁이 끝나갈 무렵, 일본은 영국에 대해서 한반도를 병합하겠다는 의사표현을 하고, 이를 보장해 달라고 요청한다.  이에 대해 당시의 영국 외무상은 한반도 내의 모든 강대국이 동등한 권리를 갖는 것으로 주장하나, 한반도와 일본에 주재하고 있는 영국 영사들은 한결같이 일본의 한반도 병합이 타당하다는 의견을 보낸다.  한반도의 영국 영사는 사실상 일본이 한반도를 지배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조선인들의 무능력을 지적하고 있다.  이에 영국 외무상도 한반도내의 일본의 독점적 지배를 허용하게 된다.  물론 이 때에도 일본측은 영국에 대해 러시아의 위협을 들고 나오나 이 당시의 러시아는 이미, 발틱함대과 극동함대가 괴멸당하고, 남은 것은 흑해함대정도 였으므로, 사실상 해양력을 약화된 상태였다.  오히려 일본의 해양력은 러시아를 능가하고 팽창하는 형편에 있었다.

프랑스는 이중적인 정책을 취하고있었다.  즉 러시아와 연대하면서 동시에 영국과도 연대하는 정책을 취하였으나, 결국은 프랑스와 일본은 동맹을 맺고 프랑승 영토내의 독립운동을 보다 적극적으로 탄압하게 된다.  아시아 인들은 일본이 황인종을 대표하여 백인종을 격퇴하는 장면을 보고, 열광하였으나, 곧이어서 일본은 아시아와 연대한 것이 아니라, 제국주의 서양인들과 연대하여 아시아인들을 침략하고 있음을 목격하게 되어, 그 허울을 보게 된다.  요즘 일본은 아시아 통화기금, 아시아 연대론을 다시 들고 나오고 있고, 중국 역시 아시아의 맹주로 발돋움하기 위해 역사, 사상, 경제, 무력 등의 다방면에 걸처 국가적인 공작에 착수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현재 내가 객관적으로 국가 능력을 살펴보면, 우리는 아직도 조선조 시대의 왕조 전통에 사로잡혀 국가를 중심으로 한 민족국가 관념이나 능력, 전통이 모두 부족하다.  다른 말로 하면 일본이나 중국, 그리고 다른 강대국들인 미국, 러시아 등에 속속들이 당하고 있고 이러한 현상이 지속될 것 같다.


참고문헌:
정애영, 2008, "러일전쟁 직후 일본의 간도 조사와 지역구상", 일본역사 연구, 28: 61-84
박선영, 2008, "중화인민공화국의 만주족의 역사적 정체성," 동북공정과 한국 학계의 대응논리: 1287-1358
김도형 기자, 2008, "연구자 기다리는 1430만건의 진실: 근대 일본 공문서 보고 아시아역사자료센터," 한겨레, 2월 1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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同文同種의 허위를 깨닫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역사/1900-1919 2010. 1. 13. 08:39
1904-5년에 발생한 러시아와 일본의 전쟁은 동아시사의 역사적 지평을 바꾸어 놓은 사건이었다.  나는 러시아 전쟁을 이해하는 데 왜 조선반도에서 하나의 주권국가의 허락도 없이 외세들이 마음대로 전쟁을 일으키고 난리를 칠수 있는가 하는 소박한 의문을 가졌었다.  그리고는 청소년들에게 권장 도서의 하나로 지정되고는 하던, 인도의 네루가 1930녀대에 국민들을 계몽시키기 위해 쓴 세계사편력이라는 책에 러일전쟁을 미화하는 것으로 보고, 역사의 해석에 혼란이 발생하였다.  아무도 공개적으로 러일전쟁에 대해서는 정확한 평가를 해주는 것이 없었던 우리 교육의 결과였다.
네루의 글을 인용하면, "아시아의 일국인 일본의 승리는 아시아의 모든 나라에 영향을 주었다.  나는 소년시절, 얼마나 그에 감격했던가를 네게 자주 얘기했다.  수많은 아시아의 노소년소녀, 그리고 어른들이 같은 감격을 경험했다.  우럽의 일 강대국은 패배했다.  그렇다면 아시아는 그 옛날 때때로 그런 일이 있었던 것 처럼 지금도 유럽을 쳐 부술수 있을 것이다.  내셔낼리즘은 한층 급속도로 퍼져 아시아인의 아시아라는 외침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 내셔날리즘은 단순한 복고도 구래의 습관이나 신앙의 고집도 아니다.  일본의 승리는 서양의 신산업방식을 채용한 덕택이라고 풀이되고 있다. 이 이른바 서양의 관념과 방법은 이와 같이 해서 더 한층 전동양의 관심을 모으게 되었다"(저와하랄 네루 , 1933/1972, 세계사 편력, 삼성문화재단:269-270).  우리 존경해 마지 않는 네루의 조국은 당시에 영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고, 영국은 일본과 동맹을 맺고, 러시아 발틱 함대가 수에즈 운하를 거치는 것을 불허하고, 일본의 군자금을 런던 체권시장에서 국가채권을 발행하는 것을 도와준 나라이다.  어찌 보면 당연하게 영국의 지배를 받는 네루의 입장을 표명한 듯하다.

한국과 비슷한 입장에 놓여 있던 중국에서도 일본의 승리를 기원하였다.  물론 러시아와 변경에 접하고, 러시아가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환성시킬 즈음, 블라디보스톡 함대를 여순(아더 항으로 러시아는 개명하였다)에 정박신 상태였으므로, 러시아에 대한 적개심과 동시에 일본에 대한 우호적인 태도는 일반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손문의 경우에는 여기에 더하여 일본이 승리하면, 일본의 도움으로 서양세력을 물리칠 생각까지 하였다.  이러한 생각은 청나라의 본거지인 만주를 포기하고, 아니 만주의 중국인들이 러일전쟁의 와중에서 약 2만명이 죽어간 상황을 마다하고, 나온 것이었다.  아무리 한족 중심의 중구을 구상하였다고 하더라도, 좀 정세파악에 감정이 많이 개입된 것으로 보인다.  극히 소수의 사람들만이 일본의 제국주의적 속성은 결국은 중국을 향할 것이라고 예견하였다(노신은 당시에 일본에 거주하며, 일본인이 만주의 중국인을 처형하는 장면을 보고는 러일전쟁의 실상을 깨달았다).  결국 1919년 54운동당시가 되어서야 일본의 속성을 깨닫게 된다.

베트남은 당시에 프랑스의 지배를 받고 있었고, 프랑스는 러시아와 연대하여 일본과 전쟁을 수행하고 있었으므로, 베트남 독립운동을 이끌고 인사들은 더욱더 일본의 승리에 환호성을 지르고, 일본의 도움으로 프랑스를 물리치려는 계획을 세운다.  그리하여 실제로 일본의 정치인들에게 무력의 제공을 요청하나, 거절당하고, 이어서 1907년이 되면, 프랑스와 일본이 상호 도움을 주는 협정을 맺고, 일본내의 베트남 독립운동가들은 추방당하게 된다.  이들의 환상은 3년이 가지 않아 깨어지게 된다.

조선의 국왕인 고종은 자신의 부인(명성황후)가 9년전에 죽었건만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해 우선 도망갈 궁리를 한다.  그러나 국제정세는 이미 냉혹해져 있어, 아무도 고종을 받아줄만한 강대국을 발견하지 못한다.  그래서 고안해 낸 것이 중립화 정책이다. 중립화 정책에 대해 각국의 영사관들은 공문을 접수하였다고 통보하나, 이를 고종은 인정한 것으로 오해한다.  접수한 것 자체를 인정이나 승인으로 해석한 것은 봉건적인 질서에서 나온 관행에 따른것으로 보인다.  아직도 고종은 근대적인 서양외교를 이해하지 못하고, 오해한다.  그러나 끝내 일본은 며칠뒤 경성을 점령하고, 한반도에 군사시설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의정서를 맺는다.  고종은 이제 어쩔 수없이 일본에 대한 협력을 국민들에게 정부에게 강요한다.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는 어쩔 수없는 조치였지만, 군자금을 내고, 축하사절단을 보내고, 궁정 악단이 축하 쇼를 하는 장면으 좀 심하다 싶다.  그러나 결국 1905년에 을사보호조약이 맺어지고, 사실상 조선왕조는 대외적으로 한반도의 인민을 대표하는 권한을 상실한다.  망한 것이다.  고종은 중립화가 무효된 것이 며칠만이고, 나라가 망한 것은 1년 6개월정도만이다. 고종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일본, 중국, 조선, 베트남을 묶는 이데올리기가 바로 동문동종이라는 단어였다.  같은 문자(한자)를 쓰고, 같은 종족이라는 것이다.  이에 중국은 거의 15년후에나, 베트남은 3년후에, 조선은 단 며칠 후에 일본이 주창하는 이데올로기가 제국주의 침략의 속성을 지녔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다른 나라의 사례를 삼아 자신의 처지를 깨닫는 것이 더딘 나라는 발전할 수 없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유용태, ?, "환호속의 경종: 전장 중국에서 본 러일전쟁," 역사교육, 90: 51-83
노영순, ?, "러일전쟁과 베트남 민족주의자들의 유신운동: 동유운동과 동경의숙을 중심으로", 역사교육, 90:127-154
전갑생, 2007, "러일전쟁, 고종은 일본 승리를 원했나", 오마이 뉴스, 11월 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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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뀌는 세상을 감지 하지 못한 자의 운명

역사/1900-1919 2010. 1. 12. 10:17
20세기로 넘어가는 시점은 지구상의 정치, 경제, 세계관이 뒤바뀌던 시기였다.  과거의 사람을 믿고, 과거의 세계관을 고집하고, 그래서 이런 데 의존해서 행동전략을 구사하던 국가와 사회는 사라지거나, 기껏해야 강한자의 종살이로 넘어가던 시기였다.  19세기 말의 유럽은 국내적으로는 평온과 안정과 쾌락의 시기였다.  그러나 이러한 안정의 시기는 내부의 불만을 외부로 넘길 침략의 야욕, 기업의 비대화, 국가체제의 완비, 공동체의 파괴에 따른 국가적인 차원의 새로운 이념과 공동체의 신설, 일상생활의 파괴를 통한 상업문화의 정비 등이 나타나기 시작한 시기였다. 

우리로 치면, 아픈 흔적만이 남아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나, 당시에 한반도에 거주하던 우리의 선조들은 이러한 위기감이 그리 컸던 것 같지는 않았다.  물론 일부 선각자들만이 위기로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직접적인 피해 당사자들만이 자신과 가족과 가문의 위기를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왕조는 재산과 황제의 권위를 보장받기에 급급했고, 상업권과 재산권을 박탈당한 위기에 처한 상인들은, 현재의 시점에서 보면 상권수호를 통한 국권회복운동을 벌렸고, 지역의 유지들은 향리의 지배체제를 유지히기 위해 학교도 세우고, 효자 효녀를 위한 각을 세우고, 조상들의 무덤을 돌보고, 족보를 세탁하는데 열중하였다.  돈이 있으면, 가능하면 국가의 직위를 사서 이를 통해 가문의 영광을 빛내려 하였다. 후세의 사가들은 이러한 행위중에 보다 근대적이고, 국가나 왕조의 유지에 기능하였던 것을 가려서 애국적인 행위로 각색하였다.

미국은 내부적으로 기업들이 성장하여 이제, 중소기업 수준이나, 작업장 내부의 작은 집단으로 이루어진 작업체제를 넘어서서 대규모의 트러스트 소유체제, 경영자본주의 체제, 그리고 법인 자본주의체제를 갖추기 시작한 해이다.  국갖거으로는 해외로의 팽창을 시도하였고, 아메리카 대륙을 넘어서서 이제 태평양으로 뻣엇고, 다른 지역에도 눈길을 돌리기 시작한 시기였다.  과거의 장인들은 대기업의 노동자로 전락하는 상황에서 나온 노동자들의 직업관의 위기는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로 각색되어 그 직업관을 토철하게 하는 데 동원되었다.  세계적인 공황은 이제 슘페터의 창조거 파괴이론에 힘입어 보다 긍정적인 것으로 해석되어, 위기는 위기가 아니라 기회로서 인식되는 이론이 등장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이 시기는 내부적으로 노동자들의 위기감이 고조되고, 노동자들의 정치적인 행위가 등장하여 사회주의가 극성을 부린 시기이다.  일부는 국가의 개조를 통한 사회주의로, 일부는 작업장내의 자율을 고수하려는 신디칼리즘이 등장한다.  농민들의 경우는 국가의 침탈에 대항하여 무정부주의가 침투하여, 국가에 대한 폭력적 저항과 동시에 자율적인 공동체 주의를 유지하려고 시도한다.  아무튼 농민 노동자들에게는 직장이 변화하고, 과거의 기술이 가치가 없어지고, 노동의 산물의 가격을 하락하고, 정치적으로는 자산가들에게는 선거권이 허용되었으나, 아직 노동자들에게는 온전한 선거권이 주어지지 않던 시기였다.  세계의 정치는 흔들렸다.

이런 상황은 아주 자연스럽게 공동체 보다는 자유주의를 옹호하고, 이를 토대로 국내외적으로 이념적인 공세와 더불어 해외 침략이 개시된다.  개인들의 자유, 상업의 자유, 공동체의 이익보다는 개인의 중시하는 경향이 등장하는 것이다.  곧이어서 상업적인 문화의 등장과 동시에 지식생산에서도 자산가들이 장악하여 세계관도 친 자산가적인 성향을 드러내게 된다. 이것이 세기말에서 세기초로 이어지던 시기의 일이다.  내부적인 혼란은 외부적인 침략을 통해 그 불만이해소되는 경향이 발생한다.  이것의 극치가 1차 세계대전이다.  1차세계대전을 기점으로 노동자 계급의 국가주의는 국가 옹호주의로 급변하고, 전쟁과 외부적인 위협이라는 효과가 영화를 통해 보급된다.  내가 살기 위해 남을 침략해야 하는 상황은 실제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상호기대에 의해 증폭된 효과였다.

이런 와중에 한반도의 조선왕조는 아주 뒤늦은 산업화와 제국주의 참여자인 일본에 의해 멸망당하고, 마산은 일본 육군의 기지로 바뀌게 된다.

참고문헌
DimitraDoukas, 1997, "Corporate CApitalism on Trial: The Hearings of the Anthracite Coal Strike Commission, 1902-1903", Identities, 3, 3: 367-398
Patrick M. Regan, 1994, "War Toys, War Movies, and the Militarization of the United States, 1900-85", Journal of Peace Research, 31, 1: 4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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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업 파괴자로 동원된 대학 체육 선수들

역사/1900-1919 2010. 1. 11. 15:24
20세기 초의 미국 대학생은 아직 대중 교육이 시작되기 전이었고,
Veblen이 지적한 대로 고등교육이란 하나의 사치품이나 신분상징을 의미하는 수준의 것이었다.
물론 이 당시에 현존하는 대부분의 대학이 이미 세워졌다.
그러나 대중들이 입학할 수 있는 수준의 대학은 아니었다.
따라서 대부분 상류층의 남성 대학생들이 주류를 이루게 된다.

미국은 20세기 초는 전 세계적인 차원에서와 같이 특히 1900년을 전후하여 파업이 극심하게 발생한다.
이들 파업은 주로 탄광, 부두, 철도 노동자 들이 중심이 되었다.
이들 노동자들은 아직 프롤레타리아트적인 계급의 보편성을 획득하지는 못했지만
자신들의 주거지를 기반으로, 그리고 노동자들의 작업조건의 동질성을 기반으로 연대의식을 형성해 나갔다.
여기에 부두와 철도 노동자들은 이동하는 노동자로서 보편적인 세계관을 형성해 나가는 노동계급의 전위부대를 이루었다.

또한 20세기 초는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 (1930년대의 대통령이 아닌)이 본격적으로 대외 팽창 특히 태평양으로의 진출을 공식화하였고, 하와이를 침탈하고, 필리핀 전쟁을 통해 미국령으로 만들었으며, 동시에 일본을 지지하여 러시아의 진출을 막아내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고종은 미국의 약속을 믿고 끝까지 미국이 조선왕조를 도와줄 것으로 예측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은 1800년대 말부터 시작하여 이미 1900년에 들어서면, 먼로주의의 태평양적용을 선언하고, 이는 곧 태평양 연안이 미국의 안보에 절대적으로 중요하므로, 불안 요인에 적극 개입하겠다는 것이었다.   미국은 현재 하와이에 대해서는 병합 100주년을 맞이하여 대통령의 이름으로 사과하였다.  반면에 1910년에 일본은 조선을 병합하였지만, 금년이 100주년을 맞이하는데 전혀 사과의 움직임은 없고, 다만, 더욱 적극적으로 동아시아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대동아 공영권을 만들려는 움직이 가속화되는 것으로 보인다(일본 세카이 잡지 2010년 1월호의 특집은 한일 병합 100주년이다.  와다 하루키, 강상중, 그리고 젊은 다른 교수 한분의 대담이 첫 페이지를 장식한다).

대학생들 특히 대학의 체육선수들이 자발적으로 남성적인 우월성을 내세우며 1900년대 초반의 미국에서 파업 파괴자로 등장한다.  이러한 현상을 아르바이트이기도 하지만, 계급이익의 발현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당시에는 아직 대학에 노동자 계층의 자녀가 입학하지 못했으며, 교수들도 신분보장이 되지 않았으므로, 사회운동에 참여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더우기 체육선수들은 남성성을 과시하고, 자신들의 육체적 능력을 과시하는데 만족하고 있었다.  당시의 언론도 이를 부추기고 있다.  당시의 노동자들의 파업을 대규모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므로, 대부분 이들에 의해 쉽게 파괴되었고, 사업주들도 체육선수들의 근육적 능력을 신뢰하여 자주 요청하었다.

나는 같은 맥락을 아니지만, 1999년 9월 마산시 코아 양과점앞에서 발생한 사건을 떠 올린다.

참고 자료:
최정수, "T. 루즈벨트의 먼로 독트린과 '세계전략'", 서양사론 73호: 29-57
Stephen H. Norwood, 1994, "The Student as Strikebreaker: College Youth and the Crisis of Masculinity in the Early Twentieth Century", Journal of Social History, Winter: 331-349
Melvyn Dubofsky, 1995, "Labor Unrest in the United States, 1906-90", Review XVIII, 1: 12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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