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19세기'에 해당되는 글 21건

  1. 2009.06.29 19세기 조선에 국정을 비판하는 언론은 언제 등장하였을까?
  2. 2009.06.29 3인칭이 나오기 위해서는 100년이상의 세월이 흘렀다.
  3. 2009.06.28 마산은 언제 시작하였나?
  4. 2009.06.28 역사해석에서 주체와 자율
  5. 2009.06.26 19세기의 정치가 계속되고 있다.
  6. 2009.06.24 국가를 깨끗하게 만든 나라는 선진국이다.
  7. 2009.06.22 세력 균형이 사회를 지키는 해법이다.
  8. 2009.06.13 사회를 지키려는 자가 없었다.
  9. 2009.06.12 관리의 학정에 백성은 일할 의욕을 잃는다
  10. 2009.06.11 서울과 19세기 파리

19세기 조선에 국정을 비판하는 언론은 언제 등장하였을까?

역사/19세기 2009. 6. 29. 19:01

일본과의 공식적인 사신 교환은 1811년으로 끝나고, 이후에는 주로 대마도와의 교류만 이어져 왔다.  그러나 대마도와의 교류는 일본 본토에서의 정보도 별로 구할수 없었고,  조선이나 대마도 모두 주로 교역을 중시하였으므로, 본격적인 정보 교류는 없었다고 보아야 한다.  조선과 일본 간에 협약이 체결된 해인 1876년에 조선은 본격적인 근대적인 사절단을 보내어 정세를 탐색케 한다.  즉 과거에 일본에 보낸 사절단을 의례적인 것이라면, 1876년의 것은 국가의 정책을 결정하는 데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는 중요한 사절이었다.  이때 사절단은 일본에서 신문을 보게 된다.  자신들이 일본에 도착한 사실, 그리고 일본 정부에 대하여 각종 논란을 야기하는 기사를 신문에 게재하는 글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에 신문이 발간된 것은 재 조선 일본인이 1881년에 먼저 발간하고, 1882년에는 주로 관보 형식의 신문이나, 해외정보나 잡기등이 실리고 본격적인 정부에 논설을 펼치는 신문은 독립신문으로 1896년에서야 1876년에 일본의 신문을 본 이후 20년이 지나서야 가능하게 되었다.  이미 이때 정치의 계절이었다.    조선에도 학교가 생기고, 활판인쇄, 그리고 집안에도 석유등잔불이 들어오고 거리에도 가로등이 설치되던 시기였다.  따라서 어느정도 글을 아는 사람들이 생기고, 학생층, 기술적으로 그을 읽을 수 있는 조명도 도입된 시기였다.  이에 더하여 가장 중요한 시대의 변화속에서 이제는 기존의 과거 시험을 치루기 위해 보아야 했던 유학저술이 아니라 신학문을 배워야 했고, 청나라는 이미 조선을 보호해 줄수 있는 나라는 아니었다.  개인의 영달을 위해서나, 국가의 안위를 위해서도 새로운 형태의 배움이 등장했던 시기이다.

1900년 경에 전국에 서당이 1만여개, 소학교가 지방에 50여개가 생겼다고 하면, 1905년경으로 접어들면 전국에 일만여개의 소학교를 세우려고 하는 움직임이 싹트게 된다.  그러나 일본은 조선을 식민 통치하면서 우선적으로 신문과 언론을 막고, 인쇄물을 막았다.  학교도 막은 것은 물론이다.  즉 문자를 아는 사람을 기르지 못하게 하고, 인쇄물로 전국에 정보가 소통되는 것을 막았다.  물론 보안법도 만들었다.  조선인민의 교육열, 지식욕을 일거에 없애버리고, 정치에 무관심을 조장하게 된 것이다.

물론 이 시기 부터 정치나 역사 물로부터 재미난 소설로 독서의 경향이 옮겨가는 시기가 된다.  우민화 정책은 결국, 백성들이 비판적인 정치의식을 잠재우고, 현실과 사회로부터 도피하여, 기괴한 세계나 자아 속으로 침잠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식민은 사회성을 말살하고, 정치의식을 무디게하여 노예를 만들어 갔다.  요즘 자꾸 19세기 식민화되던 시기가 상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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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인칭이 나오기 위해서는 100년이상의 세월이 흘렀다.

역사/19세기 2009. 6. 29. 10:53

일인칭과 이인칭의 세상에서 3인칭의 세상으로의 변화는 객관적인 세계관의 변화에 훨씬 뒤늦게 나타났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내가 그리고 나와 이웃하고 있는 면접적으로 또는 열연과 지연과 같은 아주 친밀한 이들과 같이 살아가던 세상에서 천하의 대국이라고 믿었고, 우리가 그토록 작은 중화라고 자처하면서까지 중국화되었던 그러한 이념과 세계가 무너지는 사건은 이미 1840년에 결정적으로 발생하였다.  실은 그 이전에 이미 발생하였다.  우리의 경우에도, 임진왜란을 통해 우리가 무시하였던 왜에 의해 굴욕과 멸시를 당했고, 서학이나 가톨릭을 통해 혼란을 겪었고, 19세기 접어들면, 서양의 무력 함대들에 의해 굴욕이 예정되어 있었다.  서적을 통해, 여행을 통해 서양의 사정도 어느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조선의 조정정치는 세도정치의 틀을 벗어나지 못해 그저 남을 탓하기에 급급하고, 세계의 변화를 쭟지는 못했다.

내부적으로도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백성들 내부의 평등의식을 높아졌고, 기득권층이 외부 세력에 의해 힘없이 무너지자, 이들의 권위는 사라져갔다.  전쟁기에 그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도망가기에 바쁜 이들이 사회적인 존경과 지배의 정당성을 유지하기는 어렵게 되었다. 이제는 경제적인 부와 이를 이용한 관직의 매입이 가능해진 시기였다.  백성만이 아니라, 조선의 지배층 역시 정당성 보다는 이기적인 부의 축적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었다.  이시기는 다른 면에서 보면, 세상 사람들이 돈앞에서 평등해진 시기였다.  신분의식은 사라져갔고, 그저 재화, 그리고 재화를 벌수 있는 능력이 중요한 세상이 되었다.  재화는 한편으로 매우 평등한 세상을 만드는 힘을 지니고 있다.  모든 실력이 간단한 원리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재화의 범위가 넓어지고, 재화를 벌기 위해서는 다양사람들이 연결되어야 하는 시기, 객관적인 세상도 상품의 고리를 통해 확산되는 시기가 되자, 세계관 자체의 확산이 필요해지는 시기가 되었다.  상대방을 알기 위해서는 자신도 알아야 되는 시기, 즉 주체가 형성되는 시기였다. 과거에는 그저 누구의 자손, 어느 마을 사람이었으면 되었으나, 이제는 어떤 능력을 가진 사람, 어느 정도의 돈벌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줄 수 있어야 했다.  그러나 그 시기는 시공간이 확산되고 압축되는 시기, 그리고 한반도의 왕조가 멸망한 시기에서야 비로서 자아와 주체의 싹이 텄다고 말하여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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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은 언제 시작하였나?

역사/19세기 2009. 6. 28. 20:33
한 지역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거주하고, 자신들의 생계를 유지하게 위해 어떤 일을 하였고, 모자라는 물건들은 어디에서 구했고, 오고가는 사람들의 지리적, 사회적 범위는 어느 정도였는가를 이해하는 것일 필요할 것이다.  19세기 마산이라는 도시를 보면, 인근에 창원 도호부가 있었고 창원도호부는 창원면지역이다,  전에는 교통이 낙동강과 바다를 중심으로 이루어 졌으니, 낙동강 가인 현재의 동읍이나, 대산면(당시에는 아마도 김해지역)이 번창하였을 수도 있다.  그리고 바닷가는 마산포쪽에 세금을 거두는 창고가 있었고, 18세기에 접어들면서 생긴 원산 울산 방면의 교역을 위해 마산항이 동해와 서남해를 연결하는 포구 시장으로서 기능하였을 것이다. 물론 현재의 마산은 포구와 다른 항구와의 시장 정도로서 기능하였다.  마산의 중심지는 진동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진해가 오히려 중심지였다.  따라서 현재의 마산은 하나의 마산이라기 보다는 진동지역의 진해와 신마산에 들어닥친 러시아, 영국, 일본의 조차지와 전관 거류구역들, 그리고 구마산은 포구와 세곡항, 창원도호부, 진해 동부의 웅천, 현재 함안 지역인 칠원 지역등이 나뉘어져 있었다.  이는 당시의 교통이 아직 걸어다니거나, 아니면 보부상, 수레나 우마차 정도였다는 점을 이해한다면 거리감이 현재보다 더 컸을 것이라는 점은 이해라 수 있을 것이다.

창원 도호부는 조선 19세기에는 여전히 상당한 경남의 중심지 역할을 담당하였다. 물론 진주나 진남(통영)정도에 미치지는 못했지만, 여전히 광공업, 염업의 중심지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여좌역(북면), 낙동강변의 교통 수로가 활발했던 점을 감안하면 창원의 중요성은 이해할 수 있다.  반면에 마산의 행정 중심지는 진동(진해현)이었고, 현재의 진해는 웅천이었다.  현재의 진해는 일제가 만든 전형적인 도시였고, 마산의 일본인 전관지역이나, 조차지 역시 일제가 만든 전형적인 일본식 도시였다.  따라서 진해와 신마산은 사실상 한반도에 존재하는 도시 형태 중에서 가장 일본적으로 계획되어 만들어지 도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면 진해현(진동)은 10일장도 서고, 주위의 중심 시장으로 기능하였고, 상당한 정도 다른 지역과도 연계되는 시장의 중심지 기능을 수행하였다.

19세기 역사의 이해에서 어려운 점 중의 하나는 객관적으로 상설 시장이 없었고, 5일장 내지 10일장, 아니면 포구에 있는 부정기 시장만 존재했다고 하는 사실, 그리고 18세기에 비해서 시장의 숫자가 거의 늘지 않았다는 사실을 두고 시장이 발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실제의 생활을 보면 시장과 화폐에 관한 것이 일상생활 속에 침투하였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시장이 늘지 않았고, 거래되는 물품이나 화폐(곡물, 동전, 은)이 포편적이지 않았다는 점과 주요 대외무역품은 은, 인삼, 곡물 등으로 한정되었다는 점을 인정하여도, 국내 시장은 상당한 부분 이미 화폐화되어 화폐에 대한 수요가 매우 높았다는 점만은 분명한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 마산은 포구와 세곡선의 항구, 그리고 동해안과 서남해안을 연결하는 교역장소로서 중요해서 도시로서 발전했다는 점을 인정한다.  이는 또한 인근의 지역과 연계가 되어있었다는 점을 추측할 수 있다.  진동과 창원도호부가 역시 그런 독자적인 역할을 담당했다을 것이다.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의 조선조 지리정보시스템에 현재의 구산면이 따로이 행정구역이 설정되어 있다.(칠원으로 쓰여져 있는데 아마도, 구산의 착오인 것 같다).  구산은 창원이나 진해와는 다른 행정구역을 가지고 있었으며, 진해도 현재 당황포가 진해 영역으로 되어 있다.  구산은 아마도 거제와 연계되는 봉수대나 연락처로서 중요한 지점을 차지한 것으로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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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해석에서 주체와 자율

역사/19세기 2009. 6. 28. 06:06
19세기 역사 논쟁중의 하나가 자본주의 맹아론, 외세의존적 통치자들에 대한 평가, 민중 항쟁에 대한 해석 등일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상반되는 사실들을 서로가 자기 주장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므로, 실은 사실 그 자체에 대한 논쟁은 없다.  역사의 사실들은 이미 여러가지로 해석될 수 있을 만큰 다양하고 풍부할 수록,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게 조직되어 질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주체, 자율, 외세 의존 등의 표현은 내외의 구분과 내외의 차이에 따른 행동 작용이 분명할 때 성리될 수 있는 표현이다.  따라서 만일, 내외의 구분이 될수 있는 사회인가, 그리고 내외의 구분에서 말하는 내외의 범위가 어디인가, 외부 의존의 차원이나 의존의 진실성(의례, 시간성, 부분성)에 대한 의문을 해결하지 않고는 항상 이런 문제에 부딪친는 것은 당연하다.

예를 들어 역사의 주체가 없으면, 역사를 주체적인가 아니면, 의존적인가를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은 없어진다.  조선왕조의 주체가 왕조인가, 외척세력들인가, 유교 도덕주의자들인가, 양반들인가에 따라 그 해석은 달라 질 수 밖에 없다.  즉 왕조가 주체라고 보면, 대부분의 정책은 사실상 고종과 대원군이 거의 자신들의 의사대로 왕권의 강화를 위해 행동하였으므로, 사실상의 주체로서 활동하였고, 그 정도도 그다지 한계를 느끼지는 못했던 것 같다.  다만, 왕권을 위해 군사를 기르고, 세금을 징수하고, 때로는 외세에 의존하여 끝까지 왕권만은 지키려고 하였으나, 이에 실패하여 일본에 병탐되었다.  어찌보면 우리가 말하는 역사의 주체는 실은 고종의 왕권을 지키려는 노력을 평가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왕의 외척세력들, 대부분은 민비 일가들이 1880년대 이후에는 세력을 장악한다.  초기에는 개화파들나 수구파들이 세력을 장악하였다면, 고종은 1882년 임오군란, 1884년 갑신정변, 1894년 갑오경장과 농민전쟁을 통해 결국은 민비 일족에게 나라를 맡기는 통치를 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은 국가의 중요한 근대적 산업을 자신들이 독점하면서 운영하고, 국가가의 관직을 매관매직하느 데 앞장 선 것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이들 중에 나중에 1905년, 1910년의 일제의 통치로 넘아가는 과정에서 결사항전한 이들도 많다.  그러나 결국 이들은 자신들 일족의 이익이 손상을 당하자 이를 막기 위해 노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유교 도덕주의자들은 자신을 작은 중국으로 생각하였고, 지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상황이었으므로, 왕권의 유지가 적어도 도덕적으로 자신들의 사회적 존경을 유지하는 수단이었다.  따라서 애초에는 대원군의 사원 철폐에 반대하고, 대원군이 고종을 대신하여 통치하던 것을 끝장내는 만인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리고 나중에는 민비의 시해를 가장 원통해 하고, 조선왕조의 왕권이 완전히 넘어가던 1905년이후의 의병운동에서 목숨을 건 투쟁을 한 세력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들의 전략에 도덕적으로는 우세하였다고 보더라도, 이들이 현실세계에서 구국의 영향력이 있었을 것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은 없다.  따라서 유교 도덕주의자들은 후에 대부분, 대쪽같은 심정으로 말을 하거나, 아니면 술로서 자신을 황폐화시키거나, 때로는 현실에서 변절한 경우도 많이 나타난다.  현실에서는 그다지 많이 잃을 것이 없으므로, 변절하더라도 그다지 손해 볼 것은 없었던 것이다. 양반들은 이미 그들의 특성이 사라져 버린 경우이지만, 이들은 이미 돈에 의해 관직이 매매되고 있었고, 사회적 특성도 많이 사라진 뒤였다.  그리고 지주일 경우에는 외세도 초기에는 이들롤부터 개인적으로는 소유권을 빼앗고, 세금도 많이 부과하여야 하는 경제적인 부담을 컸었지만, 외세의 지배가 일본의 지배로 넘어가는 상황에서는 민중의 반란이 일어나서 양반이나 지주로서의 계급적 이해가 무너지는 것 보다는 오히려 외세의 지배가 유리하다고 판단하였을 것이다.

역사에서의 주체라는 것은 외부세계와의 노출, 그리고 자신의 이익이 손상을 받을 때 본격적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국가나 민족이라는 개념이 역사에서 등장하기 위해서는  역사의 주체가 민중 또는 보다 광범위한 보편적인 존재로서 등장할 때 가능한 것이다.  만일 외부의 침입이 있는 데 모두가 도망간다면, 그때는 역사의 주체가 없다고 보는 것이 옳다.  따라서 역사의 주체를 말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주체의 세력이 많을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는 민주, 또는 민중이 주체가 되는 상황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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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의 정치가 계속되고 있다.

역사/19세기 2009. 6. 26. 08:13

오늘의 정치를 보면 강고하게 대한민국의 전통은 역시 끈질기구나 하는 심정을 갖게 된다.  나는 지속적으로 왜 조선이 일본과 따지고 보면, 별로 경제력 그 자체만 본다면, 별로 차이가 나지 않던 19세기에 강대국과 약소국으로 갈리게 된었나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오늘날  적어도 일본이 대한민국 보다 일인단 국민 총샌산 면에서 2배이상 차이가 난다면, 조선조 시대에는 그저 20% 정도 더 많았던 수준이었던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일본의 국가는 강하고, 도시는 번창하고, 사람들은 규율이 잡히고, 대외 문화의 유입도 풍부했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러한 요소들이 곧바라고 생산력의 발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조선은 외세에 의존하고, 나아가 스스로의 능력을 믿지 못하고, 개인들의 이익 만을 위해, 고종도 오직 종묘 사직의 보전과 일척의 안일을 위해, 유학자들은 국가보다는 종묘 사직의 안위를 걱정하였던 것이다.  이완용도 독립을 주장하기도 했지만, 결국 그는 현재 여의도 2배 정도의 이익을  취하면서 일본에 붙어 매국 행위를 자행하였다.  직접 세금을 일선에서거두는 수령이라는 직책을 팔고, 따라서 이들 수령들은 돈을 주고 산 수령직책에서 이익을 벌기 위해서는 더 많는 세금을 거두어 들이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심지어는 일년에 5번정도 수령이 바뀌었다고하니, 수령의 매관 매직을 통해 국가의 관료들이 이익을 취한 정도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국가를 지키는 병사는 없었고, 오직 서울을 지키기 위한 강화도 병사와 서울의 궁궐을 지키는 병사만 있었고, 나머지 백성들을 지키지는 못해, 청군과 일본군, 프랑스군, 미군, 영국군, 러시아군들의 백성들에 대한 약탈을 지켜줄 수 있는 조선의 군인들은 없었다.

관료들은 때로는 스스로 관변 단체를 구성하여 독립협회를 때려잡고, 다시 이들을 백성들이 몰아내는 상황이 연출되고있었다.  이는 독립이라는 말도 쓰지 못한던 때를 지나, 이미 외세에 찢기고 찢긴 조선왕조의 말기에 대한 제국을 세우고, 중국은 자주라는 말은 허용해도 독립은 혀용하지 않던 시기에 독립협회가 만들어져, 만민공동회도개최하고, 독립신문도 만들고, 중국 사신을 접대하던 영은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우던 기개를 북돋아 이를 국가의 기틀로 만들려는 시도는 하지 못하고, 이를 오히려 국가 관료들이 조직한 관변단체에서 폭력적으로 진압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며칠 전에 발생한 폭력적 관변단체가 시민들이 자발적 행위를 몰아낸 사건이 그대로 현재에도 재현되고 있다.

조선왕조 시대의 백성들은 사법, 입법, 집행을 모두 책임진 수령에 의해 완전히 농락당하고있었다. 수령의 행위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이의를 제기하면, 그 자체가 범죄가 되어 벌을 받게 된다.  따라서 백성들은 수령의 가학, 양반들의 농간, 지주들의 지세 징수 등에 의해 이중 삼중으로 어려움을 겪고있었다.  현재 우리가 정부에 비판적인 의사를 표현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공개적인 토론을 하는데 겪는 어려움이 이미 조선왕조때무터 존재했고, 이러한 상황은 현재 계속되고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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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를 깨끗하게 만든 나라는 선진국이다.

역사/19세기 2009. 6. 24. 08:02

개인이 잘 사는 나라는 많다.  설사 그 나라의 백성은 곤궁에 처해도 그 나라의 특정 개인이 잘사는 나라는 많다.  그러나 빈구격차가 큰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인간간의 적대감, 연대감과 인간성의 상실, 자연에대한 생태적관점의 부족, 신에대한 광적인 숭배가 자리를 잡고 있다.  19세기에 일본과 한국은 개인들의 삶은 그다지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즉 일본이 조금 더 잘 살았다고 하더라도, 그저 조금, 약 20%정도 더 일인당 국내 총생산이 높은 정도이다.  현재에 비해서도 오히려 더 작은 격차를 보이고 있다. 현재는 화폐가치로만 보면 2배이상의 경제적 격차를 보이고 있다.  쇄국의 측면에서 본다면, 국내 총생산 대비 무역의 규모로 본다면 적어도 조선이나 일본은 거의 비슷한 수준이거나, 아니면 일본이 더 쇄국의 정도가 큰 것으로 되어 있고, 시장의 발달 수준도 비슷했다고 분석되고 있다.  현재도 일본에 비해 한국은 해외 개방의 정도가 훨씬 높다.  즉 국내 총생산 대비 무역량을 비교해 보면 일본은 한국에 비교가 되지 않ㅇ을 정도로 국내 소비의 비율이 높은 나라이다.  따라서 쇄국이나 개방이 경제발전을 가져온다고 보는 것도 적합하지 않다.

그러면 무엇이 조선과 일본의 미래를 가르게 되었을까?  현재까지 드러난 것만 본다면, 국가의 대외 통제 능력, 국가내의 지방분권의 정도, 다르게 표현한다면 국민들의 활력의 정도에 달려 있는 것을 보인다.  일본의 국가는 대외적으로 매우 개방적인 지정학적 구조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국가는 쇄국을 하여도, 적어도 나가사키에서는 네덜란드와 청나라 무역선이 기항하고 있었고, 이를 철저히 관리하고 여기에서 적극적으로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  1853년에 미국과 무역을 시작한 후 부터는 매우 적극적으로 서양의 산업기술을 받아들여, 국가 주도의 산업화를 시작한다.  물론 이러한 산업화가 성공했다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의지를 가지고 산업화를 시작하였고, 1840년의 중국의 아편전쟁(중-영전쟁), 1860년의 베이징 함락이라는 사건에 대해 일본은 군사력이 중요하다는 점을 간취하였다.  이어서 1868년에 메이지 유신을 단행하여 근대국가체제로 나가는 데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조선의 정한론도 이후에 적극적으로 등장한다.  반면 조선은 대외적으로 중국에 매년 조공을 보내고, 일본에 대해서는 1811년에 통신사를 마지막으로 보냈고, 대마도에는 1855년 1858년, 1860년에 걸쳐 사신을 보내나, 여기에서 별로 중요한 정보를 수집하고, 이를 통해 내적인 대처를 하는 능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이미 망해가는 청나라에 기대는 정책, 자율적으로 대외적인 대처를 하려는 의지의 부족이 드러나는 장면이다.  일방적인 정보, 위기를 대처하기 보다는 모면하려는 자세가 조선정부의 능력이었다.  이는 당시에 세도정치에 의해 정부가 유지되는 정통성없는 정치인들의 한계였던 것이다.  국가의 이익보다는 몇몇 개인들의 이익을 위해 국가의 정책을 좌지 우지 했던 것이다.

대내적인 정치의 형태에서 조선은 내부의 능력을 호라용하지도 못하고, 소수가 의사결정을 장악하고, 이를 곗혹유지하기 위해 유능한 이들의 정치 진출을 막았다.  백성들의 진취성을 살리지 못하고, 오히려 폐색시키면서, 백성들은 국구의 정권, 왕조와 완전히 격리되거나, 적대적인 입장을 취하게 된다.  일본의 경우에 어찌되었든, 신문을 통한 의사표현, 귀족원과 중의원의 구성, 헌법의 제정, 지방 각지의 번 세력들의 저항과 의사표출 등이 조선과는 다른 점이다.  이들 번들을 현으로 바뀌기 전까지 매우 독자적으로 대외적으로 교섭하고, 무기도 제조하고, 비공식적인 무역도 발전시키게 된다.  국가가 단일 명령체제가 아니라, 분권화된 체제에서 각자의 활력을 키워나갔던 것이다.  현재 우리의 상황을 보면, 지방의 활력을 살리고, 국가가 대외적으로 유연하면서도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능력이 필요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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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력 균형이 사회를 지키는 해법이다.

역사/19세기 2009. 6. 22. 14:36

한 사회의 공공적 또는 집단적 이익을 옹호하는 정책적 판단이 가능하기 위한 조건은 무엇인가?  모든 사회 구성원들이 사회를 위하는 또는 다른 구성원을 배려하면서 행동을 하는 것이 가능한가?  설사 개인적으로는 자신의 사적인 이익보다는 공공적인 이익을 위하여 행동한다고 하여도 그것이 공공적이라는 평가를 할수 있는 자신이 있는가? 이러한 의문은 어찌 보면 극히 당연한 것들이다.  19세기 조선은 국제적으로 중국에 대한 사대 의존이라는 관념. 실제로 매년 중국에 사신을 파견하여 수집하는 정보의존, 유사시에는 군대의 파견까지도 요청하는 무력 또는 대외 교섭의 의존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단순히 이러한 대외의존의 구조만으로 조선이 일본과 중국에 비해 대외 정책의 유연성과 효율성이 적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엇인가, 주체적인 요인을 간과하여 우리의 잘못을 가리게 하고, 따라서 별로 교훈을 얻지 못하는 우를 범하는 것 같다.

일단 1840년에 발생한 아편 전쟁은 중국이 결정적으로 서양 외세인 영국의 무력에 굴복한 사건이다.  물론 이러한 무력 굴복에 대해 중국의 청왕조는 서양의 한 나라에게 무역을 허용했다는 정도의 의미를 부여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정보를 조선의 헌종도 수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선의 헌종 왕조는 당시에 두개의 세력에 의해 세도정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통치 형태도 비변사라는 비정상적인 기구에 의해 단순하고 간략하게 운영되고 있었다.  이들은 조선왕조의 위기감을 강조하는 것이 세도정치의 실패를 자인하고 나아가 정상적인 정치로의 복귀를 요청할 가능성 따문에 가능하면 왕조의 위기감을 약화시키려는 노력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청 왕조와 조선의 세도정치는 위기감의 둔화로 나타났고, 이것은 실제로 대외 침략에 대한 방비를 허술하게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중국은 결국 조선-일본과의 강화도 조약이 성립된 1876년 이후에, 갑신정변 1882년을 계기로 조선에 3천여명의 병력을 주둔한다.  이전의 청나라-조선의 관계가 사대의 관례였다면, 1882년 이후의 조선-청의 관계는 속국의 관계로 나타난다.  즉 조선의 외교권, 국방을 청에 의존하는 체제인 것이다.  이는 청국의 강압에 의한 면도 있지만, 고종정부내의 외세를 이용한 파벌들의 상호 작용에 의해 나타난 것이다.  심지어는 청국이 그다지 군대의 주둔을 원하지 않는 상황에서도 고종 정부 치하의 민씨 일파과 고종 자신은 청국에 의존하려는 성향을 지니게 된다.  고종은 왕조의 보존이 중요한 관심사일뿐 국가의 개념을 없었다.

일본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아직 명치 유신 이전인 1840년경에 이미 나가사키에서 청나라 상인들과, 화란 상인들을 상대로 적극적으로 아편전쟁에 대한 정보를 구한다.  이들 정보의 특성은 상인들의 정보라는 점과, 영국의 정보를 구할 수있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비교적 서로 이해관계가 대립되는 정보를 구할 수있었고, 이를 기반으로 당시에 내부 역학에서(에도를 중심으로 한 중앙 막부와 서남부 지역의 지방 번 세력) 경쟁적으로 무력을 키우고 있었던 점, 그리고 경쟁이란 국가 능력의 경쟁으로 나타나고, 이는 결국 2년정도의 개혁으로 실패했다고 평가되더라도, 서양 무력에 대응하는 국방체제의 구축을 노력했다는 점이다.

19세기의 조선과 일본의 경우에 가장 중요한 특징은 일본의 지방정부의 활성화, 일본 중앙국가의 적극적인 정보 수집과 이에 대한 대응책 모색이 우리와 다르다.  중국의 실패를 곧바로 배울 수 있는 정치체제의 구축이 시급하다.  이는 내부의 다양한 세력들이 그들의 이해관계에 기반하여 의견을 개진하고, 이를 종합, 합의하여 정책으로 바꾸고 이를 집행할 수 있는 능력에 따라 국가의 운명이 좌우된다는 점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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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를 지키려는 자가 없었다.

역사/19세기 2009. 6. 13. 08:19
조선말기, 아니 말기가 아닌 한양에서 1천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부산에서 신의주 정도의 거리에 있는 북경에서 들려오는 서양세력의 중국 침탈, 그리고 일본을 통해 들어오는 서양의 침탈 소식을 몰랐을까?  아니면 알았고, 해결하려고 노력하였는데도 못했던 것인가?  알았으나, 무능하여 해결하지 못했는?  알았지만, 중국이 이를 해결해 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는가?

대체로 조선은 19세기 전반에는 영어를 할줄 아는 사람들이 없었고, 따라서 설사 외국인 표류하는 방식으로 들어온다고 해도, 이들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었고, 무조건 중국 북경으로 송환하는 방법 밖에 없었다.  또는 우리나라에서 일어나는 서양세력들과의 접촉에 대해서는 중국에 상세히 보고하였고, 이를 통하여 해결하려고 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잘 알다시피, 중국도 이미 1840년대에 접어들면, 서양세력에 유린당하는 신세가 되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실에 대해 중국은 조선정부에 제대로 알려준 적도 없고, 조선의 외교사절들이 이를 간취하여 제대로 신속하게 조선정부에 보고하지도 않았다. 조선 정부 역시, 이러한 것에 대한 조금은 불안해 하였지만, 이를 적극적으로 자신의 문제로 여기지도 못했다.  서양의 군대와 배들이 조선 영토에 침입하였어도, 이들의 배가 놀랍고, 무섭고, 위력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대처를 전혀 하지 않은 것은 무능 그 자체라고 볼수 있다.  물론 후에 대원군이 집권하면서, 함선을 건조하려는 노력도 하고, 물론 실패하였지만, 전통적인 군대라고 하더라고 군사력을 강화하려고 노력한 것은 높이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사대주의적인 정적들, 수구세력들에 휩싸여서 부국강병 정책의 실행에 실패하였다러도 이러한 시도 자체가 조선정부의 당시 관행에 비추어 보면, 매우 획기적인 것이었다.

이후에 결국, 조선은 청국의 중재로 서양 제세력들과 개방 조약을 맺는다.  이러한 개방 조약 역시, 우리 스스로 맺은 것이 아니라, 이미 서양 세력들의 먹이가 되어버린, 청국의 중재로, 청국이 거의 전적으로 주도하는 가운데 조선과 서양세력들의 개방조약이 맺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협약에 대해서도, 조선정부는 근대적인 국가 주권의 개념도 없이 마치 고종이 하나의 민사상의 당사자 자격인 것으로 생각하고, 협약을 맺은 것 같다.  즉 왕조 스스로 국가 개념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국가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었을까?  단지 몇몇 수구적인 유학자들만이 수구적인 사고만으로, 우리가 소중화이고, 세상의 예절을 지키는 사상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만으로 서구의 것은 야만이라고 판단한 것 같다.  예의 범절이 생각에만 있고, 스스로 수양에만 있을뿐, 현실의 일상생활이나, 국가 정책에까지 미치지는 못했다.  따라서 실제로 조선 사회를 지키려는 자는 없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 같다.

이후에도 조선 정부는 서구인들과 같이 금광사업, 해운사업, 유리공장, 성냥사업을 전개하려고 하나, 서양인들과 일본인들은 한결같이 조선정부나 조선 상공업 사업가들의 외화자금을 횡령하고, 떼어먹고, 도망치고, 이들이 국가 대리인인인 조선정부에 주재하고 있는 그들의 공사나 영사를 통해 범법자는 보호하고, 자신들의 국민들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조선정부에 협박하는 일을 서슴치 않는다.  당시에 조선정부는 대외적인 교섭업무의 상당부분을 외국인을 고용시켜 일을 처리함으로써, 스스로의 주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한다.  현재의 시점에서 당시를 되돌아 보면, 여전히 우리 사회에 만연한 한국사회의 주체가 없다는 점은 비슷한 것 같다.  그저 각자의 이익을 위해 해외로 진출하고 열심히 정보를 구하기는 하지만, 국가의 정보체계는 여전히 미흡하고, 대한민국의 주권을 고려한 정보수집과 대처를 하는 조직은 부족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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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의 학정에 백성은 일할 의욕을 잃는다

역사/19세기 2009. 6. 12. 08:01
19세기 조선의 역사에서 외국인들이 조선을 바라보면서 지적한 가장 뼈아픈 것은 조선의 백성들이 가난하고, 일할 의욕이 없으며, 다른 한편 허식과 과시에만 힘을 쏟는다는 점이다.  이런 문제의 원인으로 관리들의 탐학을 지적한다. 관리들은 백성들이 조금이라도 잘 살게 되면, 빼았아간다는 것이다. 물론 빼앗는 방식은 세금, 징병과 노역, 그리고 물자를 빌려주고 되갚게하면서 막대한 이자를 물리는 방식이다.  그외에도 수령이 갖고 있는 사법권을 사용하여 인신구속과 고문을 자행하는 것이다.  사실상 이런 상황에서는 누구도 일할 의욕이 생기기는 어려울 것이다.  설사 기회가 있다고 하여도 우선 이런 관리들과 결탁하려 돈을 벌려하거나, 즉 기생적으로, 일을 하지 않으면서 돈을 버는 방법을 먼저 생각할 것이다.  자본주의를 논하면서 법에 의한 공정한 경쟁이 보장되지 않으면, 열심히 일을 하기 어렵다는 점은 이미 막스 베버도 사회경제사에서 지적한 바 있다.  지금도 민주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법의 공정한 집행, 공권력의 자의적인 집행이 없어야 인민들이 열심히 일한다는 것이다.  오늘의 시점에서 점차 우리나라가 활력을 잃고 있는 것은 느낌이 드는 것은 바로 열심히 일하는 것보다, 지대이익을 추구하며, 권력에 의존하는 것이 잘사는 길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인식하고 그렇게 행동하고 있는 것이 문제이다.

19세기 조선은 한편으로는 지방의 수령들에게 자의적인 징세, 노역부과, 금전 수탈, 인신구속, 사법권을 주었으면서도, 대외적인 교섭의 권한은 철저히 막았다.  즉 대외적인 무역이나, 교섭이나, 바다를 이용하여 개척할 수있는 여지는 없앴던 것이다.  설사 개별 수령들은 외국과의 교섭을 원했다고 하더라도, 고종의 서울 정부는 적극적으로 이를 막았으므로, 해양을 통한 개척에 소홀하였다.  관리들의 부패와 지방 수령들에게 해양교류를 중앙정부의 이름으로 막은 것은 일본과는 사뭇 다른 양상이었다.  즉 일본은 관리들의 부패를 막았고, 비록 중앙정부는 해양과의 교류를 막았지만, 토쿠가와 막부가 지방 토호들의 해양 교류를 적극적으로 막거나, 그럴 힘을 갖고 있지 않아, 지방 토호들은 비교적 적ㄱ극적이고 활달하게 해양을 이용하여 교류를 확대하여 나갔다.  오늘의 우리도 지방분권을 강화하여 지방을 모아서 구성하고 있는 우리나라 전체의 활력을 살려야 한다.  중앙정부의 방침이 시대적으로 제대로 방향으로 가지 않는 시대에는 더구나 다양하게 지방정부가 활동하여 미래에 대비하여야 한다.

조선은 해양세력으로부터 노출되지 않기 위해 해안가를 일부러 나무도 없고, 민가도 없고, 황폐하게 보이려고 시도했다는 지적이 있다.  이에 대해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아무튼 이러한 것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매우 무모한 시도였다고볼 수 있다.  해양은 실은 국가의 주권이 매우 불명확한 영역이다.  따라서 국가가 단순히 해안가를 척박하게 보임으로써 해양세력의 침략을 막으려 했다는 것은 적극적으로 바다를 포기한 것이오, 해양자원을 활용하고, 해양시대를 뒤늦게 대처함으로써 국가 멸망의 한 원인이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를 위장이라고 한다면, 위장한 후에 이에 대한 대비를 하여야 하는 데, 이러한 노력도 없었다.  오늘도 우리는 아직 바다를 두려워 하는 것 같다.  바다에 대한 쟁탈권이 격화되는 현상도 나타나고있다.   바다를 가까이하고, 즐기고, 바다의 개방성을 배우고, 그럼으로써 지키는 방법을 찾는 것이 중요한 시점이다.  오늘의 바다는 여전히 다가가기 어렵게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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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과 19세기 파리

역사/19세기 2009. 6. 11. 10:11
지난 5월 초 주말에는 오랜 동네 친구들, 미국에서 온 친척, 독일인 부부를 각각 만나기 위해 서울에 갔다.  그리고 5월 말에는 서울에 소재한 고려대학에서 대학문제에 대해 발표하고, 밤에는 서울의 초등학교 친구들과 만날 기회가 있었다.  5월의 서울 방문은 전체적으로 5건의 모임에 참여한 셈이다.  이중 2건은 미국에 살다 온 친구와 친척, 그리고 한 건은 오랜 친구들(미국에 살다온 친구의 만남은 동네 친구의 모임과 겹친다), 교수들과의 모임, 그리고 독일 부부와의 만남이었다. 이런 모임을 하게 되면, 나는 대개 오랜 친구들을 만나는 것에 매우 마음이 설레면서 간다.  그런데 만나고 나면, 친한 것의 순서에 반해서 만족감이 온다.  즉 독일인 부부와 만나서는 선물도 교환하고, 얘기도 일본 대학생들, 한국에 정치와 외교 문제를 유럽인의 입장에서 보는 것, 그리고 헤어지면서 또 언제 어딘가에서 만나자고 기약없이 헤어진다.  그럼, 대개는 학회에서 일 이년에 한번은 보게되는 것 같다.

고려대에서의 발표에서는 서울과 지방에서 겪는 교수들의 일상적인 생활, 대화, 그리고 학문적 분위기에 대해 평가하였다.  솔직한 심정이다.  서울이라는 곳은 현재, 만나면 지나치게 정치화, 그리고 지대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경쟁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객관적으로 사태를 분석하고, 즐기기 보다는 전투적인 자세로 현실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나의 토론을 맡은 분도 동감을 표한다. 자기가 지방에 가서 같이 차를 동행할 기회가 있었는데, 동료 교수들의 주제가 개를 기르는 것에 대한 것이었다고 한다. 거의 한시간 이상을 서로 즐겁게 개에 대해 말하는 것을 보고 약간은 놀랐다고 한다.  서울에서는 교수들이 만나면, 국가와 정책, 누가 힘이 있고, 누구를 통해야 잘되고, 그런 얘기나 아니면, 집값과 같은 주제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나 역시 그런점을 지적하려고 하였다.

미국에서 온 친구와 친척도 오랜 만에 만난 사람들이다.  그래 나는 그사람들로 부터 최근의 미국 얘기를 듣고 싶었으나, 전혀 듣지못하고, 한국의 정치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이중국적 또는 한국의 시민권을 회복하는 문제에 대해 공통적으로 대화하는 모습을 볼 수있었다. 나는 미국에 80년대에 살면서 미국에 사는 한국분들이 가능하면 미국 사회에서 열심히 살고, 힘을 모으고 협력하여 미국에서 당당한 한 몫을 하는 모습을 보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미국에 계신 한국계 분들이 지나치게 고국 격정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즐겁지는 않았다.  독일에 1년 가 있을 때에도, 한국을 그리워 하는 것 까지는 괜찮지만, 독일의 정치, 사회, 문화에 당당하게 적응하기 보다는 고국의 문제에 집착하는 듯한 모습에 답답해한 적이 있다.  독일의 일본인들은 국제 교류퍼레이드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일본 문화의 밤도 있으나, 한국은 당시 오스나부룩과 광명시가 자매결연 도시였으나, 사실상 교류가 중단된 상태였고, 교민들도 적극적으로 독일 사회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었다.

오랜 친구를 늦게 만나 맥주와 치킨을 즐겼다.  초등학교 친구들은 60년대에 만났으므로, 지금 만나면 사실 그때 잘 몰랐고, 이제서야 새로 사귀는 셈이 되는 것이다.  그래도 우리가 같이 살던 동네가 있으니, 그런 얘기하고, 세월이 변한 것, 각자 살아온 것을 말하는 즐거움이 있다.  그러나 때로는 서로 현재의 상태를 비교하기 시작하면, 끝나고 나서도 무엇인가 깨림직하다.

19세기 프랑스 파리 사회를 묘사한 작품 중에 발자크의 인간희곡이 있다. 여기에 보면, 파리 사람들의 생활을 묘사한다.  돈에 물들고, 생산적인 일보다는 정치와 권력에 기대어 돈을 버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래도 당시의 모습은 수전노 같은 삶을 묘사한 것이지만, 현재 서울의 삶은 수전노가 아닌 착취자, 흡혈귀, 기생자의 모습으로 비쳐진다.  앞으로 서울과 지방의 삶은 어떤 형태로 개념화할 수 있을지모르지만, 내적 식민지, 아니면 생산자와 기생자, 지대추구자와 생산자 등의 개념이 나올 것 같다. 사회학을 하는 입장에서 보면 학문의 혁신은 지방에서 가능할 것 같다.  서울은 학문 외적으로 에너지를 쓸 것이 너무나 많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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