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해당되는 글 139건

  1. 2008.12.04 한반도의 육지와 바다는 뚫려 있었다.
  2. 2008.12.04 부족이동이 로마 제국을 허물고, 근대 유럽의 기반을 만든다.
  3. 2008.11.15 선사시대의 교류는 자유로왔다.
  4. 2008.11.13 대학 교정의 나체 조각상들
  5. 2008.10.21 부마민주항쟁, 부마민중항쟁에 관한 조정관 교수의 발표와 청취 소감
  6. 2008.10.17 인류의 역사
  7. 2008.10.17 우주와 지구의 역사
  8. 2008.10.14 과거를 기억하기, 회상하기, 평가하기
  9. 2008.10.07 현실의 불안이 과거를 불러온다.

한반도의 육지와 바다는 뚫려 있었다.

역사 2008. 12. 4. 11:34
지난 11월 21일에 동료 교수님들하고, 수로왕릉, 봉황대, 김해패총, 구지봉, 허왕후릉, 김해 박물관을 구경하였다.  금관가야의 시기이니 아마도 0년정도에서 500년사이에 발생한 사건일 것이다.  특히 허왕후는 현재 인도의 부처가 태어난 곳과 가까운 지역에서 왔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보면, 직접 오기보다는 당시에 금관가야가 장악하고 있던 해상중 하나의 지역에서 상호간에 협력을 강화하기 위해 혼인 정치를 펼쳤을 것으로 해석된다.  금관가야는 아마도 인구 5만정도를 거느리는 해상 세력으로 성장한 것으로 유적을 보면 나온다.  따라서 금관가야가 거래했던 해상의 범위를 알아내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현대 또 다른 학설은 중국 남부에 인도에서 넘어와 마을을 이루어 살던 족이 있었고, 이들이 해상으로 진출하여(현재의 중국 광주 정도) 금관가야와 교루하지 않았나 싶다.  전혀 거래 없던 인도와 혼인 정치를 펼칠 가능성은 적지 않은가 싶다.
금관가야도 실은 북방에서 밀려온 부족들이 만들은 세력이라고 볼 수있다.  당시는 북방의 스키타이족이 문화적으로 앞서있었고, 중국의 문물도 어느정도는 북방을 통해 들어 왔기때문에, 북방의 부족들이 중국의 압력으로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한반도 남동부, 이어서 일본 큐슈나, 혼슈 남부지역으로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 산동반도 쪽은 한반도의 서해안과 교류를 많이 했을 가능성이 높다.
한반도에서 벌어진, 북방민족의 이동, 이들이 일본 규슈, 혼슈 남부까지 진출하고, 여기에 일본영토와 한반도내의 국가간 연합, 더 나아가 해상을 중심으로 한 교역과 상호 정복 등을 이해하여야 삼국시대, 더 나아가 통일 삼국시대까지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가끔 일본과 한국의 문명을 비교하면서 언제부터 일본이 한국을 앞서기 시작하였는가와 같은 치졸한 비교를 하기도 하지만, 아무튼 이런 문제에 대해 대부분 인정하는 것은 적어도 400-500년경까지는 한반도의 문명이 일본 열도보다는 우세하였고, 이후는 독자적인 발달을 하는 것으로 지적하고 있다.  백제가 망할때 일본이 도와주었다는 점, 백제의 후손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왕손을 이루었다는 점, 고구려가 가야와 연맹하기도 하고, 일본과 연맹하기도 한 점, 신라도 때로는 일본, 고구려, 가야, 백제 등과 연합과 갈등을 끊없이 계속하였다는 점은 당시의 대외정책이 믿을 수있는 연맹을 구축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는 점을 말하기도 한다.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중국, 일본, 한반도는 상호 각축을 벌이는 지리적인 공간일 뿐이자, 여기에 한민족이나, 일본족이나, 중국족이라는 관념이나, 이런 관념에 기초한 국가는 없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요즘 지구화나 국제화라는 말을 자주 하지만, 신라의 혜초를 비롯하여 혜초이전의 사람들도 당나라나, 수나라 등을 통하여 또는 바다를 건너, 중앙아시아 고원을 넘어 인도에 유학가기도 하고, 여행을 다니기도 하였다.  혜초는 삼년정도 걸린 모양이다.  아무튼 당시에도 바닷길과 육지 길 모두 상당히 자유로이 뚫려 있었다는 점을 알 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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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이동이 로마 제국을 허물고, 근대 유럽의 기반을 만든다.

역사 2008. 12. 4. 11:04

유럽의 역사에서 기원후 1천년간은 지중해가 중심이었다.  즉 로마제국이 유럽의 거의 전역을 장악하였던 것이다.  직접적으로는 프랑스와 영국, 그리고 스페인 반도 지역을, 간접적으로는 유럽 중동부를 장악하였다.  그러나 중국의 한나라가 흉노족을 압박하고, 흉노족은 서쪽으로 밀려나면서 서부에 영역을 틀고 있던 세력들을 더 서쪽으로 지금의 유럽 대륙으로 몰아붙였다.  물론 이전에 이미 상당수의 유럽 북부의 세력들이 유럽 남부와 동부로 이동하여 그들의 세력범위를 넓혔었다.
중국의 힘이 느껴진다.  대개 역사학자들은 서기 1300년경 이전에는 중국이 일인당 국내 생산액이 유럽보다 높았었다고 지적한다.  중국이 유럽을 압도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중국의 움직임에 의해 유럽이 재편되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은 당시의 상황에서는 그리 신기할 것 까지는 없다.  다만 문제는 로마제국이 왜 멸망하게 되었는가에 있다.  로마제국의 멸망은 소수인이 상당한 정도의 변경을 가진 곳에 군대를 배치시키면서 자신들의 영토를 방어하는 문제와 연결된다.  당시의 군대는 초기에는 로마인들로만 구성되었으나, 이후에는 호전적인 게르만 민족이나 다른 민족을 사용하여 군대를 편성하거나, 아니면 피지배민족중에서도 군대에 편입시키게 된다.  이들 무장한 이민족들은 서서히 부족 의식이 깨우치게 되면서, 서서히 각성하여 로마에 대항하는 세력으로 자라난다.  자라난다고 표현한 것은 하루 아침에 부족들이 단결하는 것이 아니라, 초기에는 부족간의 다툼이 심하여 단결이 되지 않고, 오히려 로마의 분열정책에 휩쓸리게 되지만, 상당한 시간이 지난후에, 아니면 몇몇 부족들은 계기를 만나고, 위대한 지도자들을 만나면 부족들이 힘을 합쳐 로마에 저항하게 된다.
로마의 자체 군대들도 월급제로서 운영되고, 심지어는 튀직후에는 연금을 주는 식으로 보상을 약속하지만, 초기에는 어느정도 문제가 없지만, 로마에 와서 정착하는 군대들이 늘고, 자신들에 대한 보상을 제대로 해주지 않으면, 정치적인 세력으로 바뀌면서 로마 내부의 혼란을 야기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로마의 정치인들은 이들 군대들의 불만을 이용하여 자신의 야심을 채우기도 하고, 군대들은 로마에 들어와 변경의 땅들을 빼앗아 차지하고 이곳에서 살기도 한다.  이럴 경우에는 원래거주하던 이들과 분규가 생길 수밖에 없다.  아무튼 로마는 서서히 로마인들이 누리던 식민지의 혜택을 누리던 관료조직, 공화적인 정치체제, 군대의 와해 등으로 몰락의 길을 걷게된다.
이 자리에 북방에서 내려온 야만족들이 로마의 전통을 이어받고, 부족별로 새로운 국가건설을 시작하게 된다.  현재의 프랑스, 독일, 영국, 스페인, 러시아 등의 기초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여기에서 지적해야 할 것은 왜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수많은 부족들이 남, 동으로 내려와서 정착하게 되었고, 이들이 강력한 힘을 발휘하게 되었는가에 있다.  학자들은 이들이 인구를 증가시키는 가족제도를 가지고있었고, 식량이나, 경제적인 부양을 위해 자원이 부족한 상태에서 부족끼리 싸우는 것이 아닌, 부족을 나누어서 일부는 이동하여 정착하도록 하는 제도적인 상호 부조의 장치를 가지고 있었다고 지적한다.
여기에서 나는 젊은이들이여 해외로 나가라는 이명박대통령의 말을 들으면서, 한편으로는 미네르바가 말했다는 한국은 끝났어 영어배워서 빨리 한국을 탈출하라는 말과 중복되면서, 다른 한편 200-300년경에 북구 유럽의 민족들이 민족이동이 가능하게된 제도를 생각하게 된다.  민족이동이나 해외로의 진출은 자국의 사정이 좋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고통과 기회를 공유 분담할 수 있는 체제가 있을 때 제대로 기능한다는 점을 배우게 된다.  한국이 싫어서 나가든, 진취적인 기상을 갖고 있어서 나가든, 한국내 공동체적인 진단과 대안이 있을 때 성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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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시대의 교류는 자유로왔다.

역사/BC 2008. 11. 15. 13:17
역사서술 이전 시대를 선사시대라고 한다면
우리의 경우에는 아마도 삼국 초기 이전단계는 거의 선사시대에 속한다.
그리스의 경우에는 BC700년경부터 역사시대라고 칭할 수있을 지 모르지만.
선사시대에 대한 역사 해석은 순전히 발굴된 유물과, 드문드문 남은 중국이나, 일본의 사서들, 아니면 민담으로 전해내려오는 설화, 기록된 설화 들을 보고 해석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문제는 이 정도의 시기에 이르르면 같은 땅에 살았다는 것 외에 나와 같은 핏줄을 지녔는지에 대해서는 매우 모호해 지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선사시대에는 국경선 통제가 거의 없었고, 아니 국경선이라는 개념도 없었고, 한반도의 경우에는 국경선 내에 주민들을 가두어 놓는 주민등록제도도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주민들은 국경선의 개념이 없이 자유롭게 필요에 따라 이동하면서 살았을 것으로 추정할 수있다.  또한 정착식 농업이 완전히 자리 잡기 전에는 토지의 비옥도에 따라 이동하고, 기후에 따라 이동하고, 수렵과 채취를 곁들인 생활이었다면 당연히 이동을 전제로 자시의 삶을 꾸렸을 것이다.

이동의 범위가 어느정도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석기시대, 청동기 시대의 유물, 벽화의 비슷함, 다른 지역의 산물이 이동하여 나오는 정도 등을 파악한다면 일본의 큐슈지역은 가야에 해당하는 지역고 교류가 있었을 것이고, 중국의 산동반도는 우리나라의 서해안과 인근의 섬들과 이동이 많았을 것이고, 중국의 요서지방은 요동을 거쳐 대동강변까지, 아니 더 나아가 울산지역까지도 비슷한 바위에 새겨진 조각을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이동은 대규모로 정치나, 기후상의 변화로 인해 발생했을 것이다. 단순히 한 부족 단위로 경제를 위해 이동하는 정도의 거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중요한 점은 선사시대의 주민들은 국경의 거리낌이 현재보다 거의 없었다는 점에서 보다 이동의 자유를 누렸다고 볼 수 있다.  현재의 우리는 이동의 수단을 가지고 있지만, 이동할 때마다 국적을 의식하고, 강요당하고, 민족의식을 재현하는 각종 인공건조물에 세뇌당하고, 따라서 우리는 좁은 영토주의에 사로 잡히는 결과를 초래한다.  오히려 선사시대의 사람들은 좁은 영토라는 의식 자체가 없었을 것이고, 필요에 따라 자유롭게 이동하는 한층 cosmopolitan 적인 사고와 생활을 영위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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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교정의 나체 조각상들

역사 2008. 11. 13. 16:29
지난 금요일 춘천의 한림대에서 지역사회학회가 열려 병원쪽의 정문으로 들어섰다.
마침 학회가 열리는 장소가 대문 옆에 있어 학회시간보다 일찍 온 셈이 되었다.  고령연구센터와 같은 역할을 하는 건물인데 회의장이 원형으로 되어 있어 다른 학교에서는 볼수 없는 구조이다.
모든 참석자들이 똑같은 위치에서 사회, 발표, 토론을 진행할 수 있다.  자리의 앞, 뒤, 서열이 없는 구조이다.
지난해에 몽골국립대학의 회의장이 이와 비슷하게 그러나 반원형의 형태로 생겼었다.  반원형은 앞이  있어 앞에서 발표하고, 반원형의 계단구조의 청중석을 향해 발언하게 되어 있었다.  따라서 발표자에게 집중해야 하는 형태로서 적합하였다.

고령연구센터를 나오니 길 건너편에 아마도 도서관과 같은 건물이 있고, 민망하게도 건물 앞에 남자 벌거벗은 조각상이 불알을 내놓고 서있다.  아마도 로마나, 그리스, 아니면 서양의 유명한 조각가의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이들 조각상이 무엇을의미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름다움, 균형미, 인간미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한다.  이런 조각상은 우리 경남대학에도 본관 건물앞에 높여 있다.  물론 성기 모양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은 아니지만, 벌거벗은 모습의 조각이 본관 입구 올라가는 계단 양편에 놓여있다.  학교 도서관 앞에는 생각하는 사람의 조각상(로댕)이 높여 있다.  그것도 벌거벗은 모양이다.  무언가 우리네 실정하고는 안맞는 것 같다.   조용히 사색하는 학교에 벌거벗은 조각상이라.

기원전 4-5세기의 그리스 조각상에 기초를 둔 인체 조각상은 실은 신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이를 로마가 이어받았고, 나중에 르네상스를 거쳐, 19세기에 유럽이 그리스를 본격적으로 자기네 것으로 만든 후에 그리스의 조각상을 열심히 파내오고 그래서, 현재 유럽에는 많은 그리스 유물들이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실은 유럽과 그다지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나, 유럽의 민주주의, 철학, 예술의 원천으로 간주하고있다.   스스로 그렇게 주장할 뿐이다.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왜 그리스, 유럽의 조각상의 모조품을 대학에 들여놓아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우리 대학의 이념과 맞는것인지, 무엇이 맞는 것인지, 대학을 상징할 수있는 조각인지?  몽골국립대학의 반 원형 회의장에는 벽면에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학자들으 모습을 걸어놓았다.  그다지 어울리지는 않지만, 대학의 모습과는 어울린다고 볼수 있다.  비엔나 대학의 구내 정원에는 그 대학 출신의 유명한 교수들의 부조상과 이름을 새겨놓은 공원이 있다.  그것은 더욱 이해할 수 있다.

우리의 대학의 위상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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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마민주항쟁, 부마민중항쟁에 관한 조정관 교수의 발표와 청취 소감

역사 2008. 10. 21. 11:05
지난 10월 18일(토) 오전 11시 5분, 기념식이 끝나고, 31명의 발표자, 토론자, 사회자를 포함한 청중이 3.15아트 센터 국제회의실에 모여 전남대 5.18 연구소 전담교수로 계신 조정관 교수님의 발표와 토론을 들었다.  그의 결론은 "부마항쟁이 1970년대 유신하에서의 민주화운동의 최종형태로서 한국정치사에서 4.19나 5.18과 같은 비상한 항쟁이라고 생각하며, 유신체제를 종료시키고, 1980년대 민주화의 물꼬를 튼 중대사건이라고 본다"는 것이다.  따라서 1980년의 5.18 항쟁은 이미 유신체제와의 싸움이 아닌 더 높은 수준의 민주주의를 위한 싸움으로 전개되었다는 것이다.  즉 유신은 1979년의 싸움으로 사실상 종료되었고, 따라서 1980년대 전두환 정권도 유신으로의 회귀는 그들의 어젠다에 올려놓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때 유신이란 일인 종신독재를 의미한다.  발표자는 대개 정근식이나 임현진과 같은 사회학자들은 전두환 정권 치하를 유신체제와 일치한다고 지적하는 데 자신은 유신은 일단 1979년에 끝났다고 본다는 것이다.  이는 아마도 사회학자들은 일상생활의 억압성을 강조하고, 정치학자들은 정치제제의 변화에 강조점을 두기 때문이 아닌가 여겨진다.

조정관 교수는 또한 마산양서조합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차성환(2004)의 분석을 인용하면서, 마산 양서조합이 부산과 마찬가지로 지식인과 청년학생 상당수를 결집시키는 역할을 하면서 실제로 항쟁당시에 주도적인 인사들이 다수 배출되었다는 것이다.  이 양서조합은 서울와 부산, 마산의 지식인을 연계시키는 역할을 담당하고, "마산항쟁의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산실이었을 뿐만 아니라, 부산과의 연계점이었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서는 필자는 외부와의 연결점이라는 점은 인정하지만, 이들의 활동이 사실상 1979년 여름 이전에 중단되어 있었고, 따라서사적인 연결으로 무엇이 이루어졌는지는 몰라도, 10.18 마산항쟁과 직접 연계시키는 것은 과도한 해석이라고 본다.  즉 10.18의 시위는 학내 공개적인 학과 대표들의 조직과 학내 써클 조직이 연계되어서 조직적인 동원이 가능하였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외부와의 연계조직은 개별적으로 참여하고, 시위 과정에 거리에서 정열적으로 참여하고 조직하는 자원이 된 것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이도 전 시위를 통들어보면 매우 적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양서조합이 이후 1980년대 전두환 정권하에서도 문화운동으로 나아간 자산이 되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토론자로 나선 안철현 교수의 지적은 사뭇 도전적이었다.  즉 마산의 시위는 부산 시위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 같았고, 민중항쟁적 성격을 강조한 발표자에 대해서 민주운동적 성격 즉 중산층의 운동이었다는 점에 의미부여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10.18 해석에 매우 중요한 사안이므로, 앞으로 사실에 대한 검토와 역사적인 해석에 대해 심각한 토론이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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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역사

역사/BC 2008. 10. 17. 15:26

역사라는 표현이 인간이 인간의 과거에 대해 말한 것이라고 한다고해서, 현재의 인류(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 슬기슬기 인간)가 스스로 기록하지 않은 과거에 대해 호기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 인간이 동물과 아니 유사한 다른 동물과의 또 다른 특징이 있다면, 그리고 이러한 특징이 언제부터 나타났는지에 대한 호기심이 생길 수 밖에 없다.  슬기 인간 중에 현존 인류를 표현하는 슬슬기인간이 아닌 또 다른 현존 인류의 친척인 Homo sapiens idaltu (나이들은 현명한 인간)은 오래 사라졌다. 다만 현존 인류는 20만년전에 아프리카에서 발생하여(화석으로는 13만년전 것이 발견되었다), 유라시아에는 4만년전에 넘어 온것으로 되어 있다.  현재의 한반도 인의 직접적인 조상은 아니지만, 우리 조상 중의 하나로 북한의 덕천군 승리산과 평야의 만달리 유적에서 발굴된 유골을 치고있다.  현재 우리의 직접 조상이라고 여겨지는 북방 몽골 인종은 약 2만 7천년전에 바이칼 호에서 사방으로 이동한 것으로 추정한다.  이들은 1만년전에 한반도로 들어와 신석기 문화를 일으킨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물론 북방 몽골족이 들어오기 전에 토착인이 이미 살았을 것이나,이들은 신석기 몽골족의 신석기 문화에 동화되어 현재의 우리의 모습이 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구석기 문화는 현존 인류와는 수백만년전에 이미 갈라져 나온 네안데르탈인이 발달시킨 것으로 보이고, 이들 네안데르탈인은 약 3만년전에 현존 인류와의 경쟁에서 져서사라진 것으로 생각한다.

아무튼 우리는 여기에서 신석기 문화의 등장이 바로 현존 인류의 등장과 가장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점, 현존 인류는 약 7만년전에는 물론 아직 유라시아까지 오지 않은 시절에는 지구상에 약 2천이 생존하고있었다.  1만 2천년 전에는 이미 지구상에 1백만명으로까지 개체가 늘어났다.  약 1만년전에는 약 5백만명으로 늘어나서 지구를 지배하기 시작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때 지구를 지배하였다는 말은 인간이 기본적인 특성인 뇌의 용량과 직립으로 다닌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인간의 특징은 바로 이 두가지 생물학적인 특징에서 비롯되었다.  인간은 불을 사용하고, 음식을 요리하며, 자신의 옷을 지어입는 유일한 동물이다.  현재 생존해 있는 인간과 가장 가까운 동물은 침팬지이다.  침팬지와 인간과의 차이는 현재 살아있는 인간간의 차이보다는 10배정도 크며, 들쥐와 생쥐와의 사이보다는 1/10정도 차이밖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유전자는 유사하다. 

그러나 현존하는 67억명의 인류는 자연 생태계에서 가장 탐욕스러운 공격자이며, 인간을 먹이로 삼는 동물이 없는 상황에서 아마도 인류 생태계는 수백년 사이에 파괴될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인간의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는 단순히 인간간의 역사를 공부하기 보다는 이제는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도 살펴야 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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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와 지구의 역사

역사/BC 2008. 10. 17. 14:54
우주와 지구의 과거를 말하는 것에 대해 역사라는 표현이 적합한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아무튼 우리는 자연의 역사에 대한 호기심을 숨길 수 없다.  왜냐하면 현재 인간이라는 자연 피조물은 지구의 자연을 가장 잔인하게 약탈하는 종족으로 기록되어 곧 대규모의 자연변화를 야기시킬 것으로 예상하고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스위스와 프랑스의 접경지역에 건설된 거대 강입자 가속기가 가동에 들어감에 따라 우주가 탄생한 최초의 1조분의 1초의 사이에 일어난 일을 재생하는 실험이 금년말에 일어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일부 유럽에서는 여기에서 불랙홀이 생겨서 지구가 삼켜질 것이라고 믿고 있어서 지구 종말론이 새삼스럽게 거론되는 모양이다.  물론 과학자들은 이런 것이 나타난다고하여도 그 규모가 작아서 지구를 삼킬 정도는 아니라고 평가하고 한다.  아무튼 우주의 탄생이 재현된다는 점에서 우리나라의 과학자들도 일부가 이 실험에 참여하면서 관심이 증폭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우주는 137억년전에 탄생한 것으로 1927년경부터 빅뱅이론에서는 주장하고있고, 이를 대부분 정설로 받아들이고있다.  물론 최근에 호킨스는 여러개의 우주를 가정하고 있지만, 아무튼 우리가 사는 우주는 137억년정에 탄생한 것은 하나의 정설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후 대폭발후 1조분의 1초: 우주의 가장 기초적인 원소인 Quark, 이들간의 상호작용을 매개하는 Gluon, 그리고 전자와 neutrino(중성미립자)가 뒤섞인 상태.  이때의 온도는 10의 32승의 섭씨 도로 추정한다.
이후 10만분의 1초 - 3분: 우주는 식어서 1조 섭씨 도가 된다. quark가 3개씩 짝을 이루어 양성자와 중성자로 변화, 이들은 다시 서로 결합하여 원자핵을 이룬다.
38만년후: 원자핵이 전자와 합하여 원자가 되고, 수소와 헬륨 상태가 된다.
2억년후: 중력에 의해 수소와 헬륨이 뭉쳐져서 수많은 별들이 탄생한다.

45억년 전에 지구의 탄생: 별로서 탄생하고 남은 잔해들이 미쳐 별로 뭉치지 못하고, 굳어져서 행성으로서 지구가 탄생하게 되었다.
지구가 현재와 같은 기온을 갖는 상태가 되기까지에는 약 5억년전이 되어서야 가능했다.  즉 이때 부터 지구에는 산소를 통해 숨쉬는 생물이 만들어 진것이다.  이후 약 4억 5천만년전 부근, 3억년전 부근, 1억 5천만년전 부근부터 최근 1만년전 사이에 빙하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는 대체로 현재의 기후와 비슷한 상태를 유지하게 된다. 

바다의 깊이를 보면, 약 2만년전부터 급격히 수면이 상승한다.  즉 현재보다 120미터 정도 낮은 상태에서 약 1만 5천년전에는 2만년전보다 30미터 정도 상승하였고, 그 이후 급격한 상승이 이루어 진다. 약 8천년전에는 현재보다 14미터 정도 낮은 상태였고, 그후 1천년을 통해 급격히 수면이 상승하여 많은 땅이 침수된다.  아마도 빙하기가 끝나면서 얼음이 녹은 결과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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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기억하기, 회상하기, 평가하기

역사 2008. 10. 14. 13:49
초등학교 친구로부터 연락이 와서 초등학교 카페를 만들었다.  나는 고향에서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아직 직접 만나지는 않고 있다.  몇몇 친구들은 직접 만나자고 야단이다.  그러나 실은 400여명의 졸업 동창들 중에 아는 사람들끼리 만나고 있었다.  다만 동창회라는 이름으로 공식적으로 명칭된 일반화된 모임을 하지는 않고 있었다.  나 역시 자주는 아니지만, 일년에 한 두차레 정도 세네명씩 만나서 같이 저녁이나 먹고 이 얘기 저애기 나누는 동창모임은 있었다.

그러나 곧 이 공식적이 카페 모임과 여기에 모이자라는 광고에 대해 주의를 주는 친구가 생겼다.  즉 모임의 성격, 식사하고 난 다음의 식비 문제, 모임이 정기적으로 회비를 걷는 문제, 동창들의 상조 범위와 상조비 등이 문제가 된 것이다.  카페를 운영하는 나의 입장에서는 가능한한 편안한 모임을 가지려고 하나, 조금이라도 공식화하는 순간이 문제가 발생할 소지를 안고 있는 것만은 틀림 없어 보인다.  몇년 전에 초등학교 시절의 친구를 만나, 그 친구가 사는 동네를 가 본일이 있다.  내가 살던 동네와는 다른 동네이다.  아니 내가 초등하교시절에 가본이 없던 동데를 가보았다. 

실은 누구나 자기의 기억을 갖고 있지만, 자기의 조그만 범위를 넘어서지도 못하면서, 자신의 기억을 공식적인 기억과 일치시키려는 경향이 있다.  즉 남의 기억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다. 특히 공식적으로 인정된 역사를 서술할 경우에는 특히 심하다.  요즘 나의 과거를 뒤돌아보거나, 돌아아가신 아버님의 행적에 관한 기록을 스스로 정리하면서, 공식적으로 내세우는 역사, 또는 세계사와의 흐름 속에 어디에 위치시키고,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의 문제 부딪치게 된다.

요즘 대학에 90년에 출생한 세대가 들어와서 수업을 듣고 있다.  이들이 배운 한국사와 내가 배운 한국사는 방향이 일치하지않는다.  또한 사실도 일치하지 않는 것이 많다.  나의 아이들도 마찬가지이다.  이들에게 나의 과거를 이야기하기도 겁이 많이 난다.  왜냐하면 나 자신도 나의 과거를 정리해본 일도 없고, 나의 과거를 한국사나 세계사에 연결시켜 본 일도 없고, 더구나 평가해본일도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내가 어느정도 사회의 프레임에 맞추어서 스스로의 행적을 고백한 것은 있는 것 같다.  중앙일보사의 넥스크라는 월간지에 게재된 '50대 진보의 이야기'는 내가 왜 남들의 눈에 진보의 경향을 띠게되는가에 대한 스스로 답을 한 것이고, 경남대학교에서 간행한 공부하는 이야기 중에 '삐딱 하게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기르는 사회학 이야기'를 하면서 공부의 역정을 기록한 일이 있고, 영남노동운동 연구소의 잡지 연대와 실천이라는 잡지에서 1980년대 미국 LA에서 있었던 한인노동운동에 관여한 이야기를 다룬 적이 있다.  그리고 아마도 내가 왜 지역에서 시민운동을 하게 되었나를 다룬 마산 문화방송 라디오 프로그램의 1시간 이상 대담 프로그램도있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나는 나의 과거의 생각과 행동을 너무 현재의 그들의 시각으로 재단하려는 시각에 부딪쳐서 내가 왜소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이 카테고리에서는 인류의 역사 속에서 우리민족의 역사, 나의 역사를 융합시켜 정리해보는 시도를 해보고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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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의 불안이 과거를 불러온다.

역사 2008. 10. 7. 14:11

사회현상을 이해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시간과 공간, 그리고 제도나 사회관계를 꼽는다. 물론 시간이란 물리학적인 기계적인 시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회관계가 누적된 사회적 시간을 가리킨다.   인생을 살아가는 개인은 자신의 시간에 대해 알고 싶어한다.  내가 살아 왔으면서도, 내가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시간들.  내가 살아온 세계마저도 내가 이해할 수 없다면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세계란 어느 세계인가? 라는 의문.   현재의 삶에 대해 적응하지 못하면서, 우리는 과거의 삶을 다시 말하고 싶고, 돌아보고 싶고, 과연 내가 현재는 변하지 않았는데, 내가 잘못해석하면서 살았는가, 아니면 세상이 변하여 내가 적응하지 못하는가?  이런 의문을 갖게 된다.

아마리 우리가 시간과 역사, 지역과 공간, 사회제도와 관행들에 영향을 받으면서 산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현실은 과거보다는 더 오랜 과거, 내가 알 소 있는 지방보다는 더 넓은 세계를 알아야 세상을 이해하면 살아 갈 수있는 세상이 되었다.  현재의 시간은 점차 불안정해지고, 자연의 섭리도, 자연의 규칙도 사라지고, 인간이 만든 제도들 대부분이 흔들리는 세상이 되었다.  가족도, 직장이나 직업도, 이웃도, 고향사람들도 모두 흔들리고 있다.  내가 모르는 것들이 나를 흔들고, 영향을 주는 세상이 된 것이다.  이럴때 우리의 현재는, 그리고 현재에 기반을 둔 미래는 흔들린다.  나의현재는 어떤 과거의 산물인가?  이런 질문이 고루한가?  현재의 과거의 산물이라는 물리학적 진실, 그리고 미래는 현실의 결과일 것이라는 시간의 불가역성의 진실도 흔들릴 것으로 생각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제 과거를 돌아볼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현재가 너무도 혼란스럽기에!

이런 나의 생각은 김영목, 2004, "집단적 기억과 역사: 19세기 전반의 독일 역사담론"(독어교육, 29집: 456에는 하버마스를 인용하면서, "불안의 원천으로서 미래를 목적론적 역사기획으로 다시 채워보려는" 시도라고 정하였다.  이를 따라서 김영목도 "역사는 원칙적으로 방향성 상실과 위기의식에 대한 일종의 보상으로 기획되고 있다"(457)라고 진술한다.  물론 이러한 역사 서술을 인정한다면 매우 주관적인 역사 서술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나는 이점을 인정한다. 각자의입장에 따라 서술이 달라지고, 강조점이 그리고 해석하는 방식이 달라진다는 점을 인정한다.  따라서 나는 역사란 하나의 역사가 아닌 각자의 입장에 따른 역사 있을 뿐이고, 중요한 것은 개인에 갖힌 역사를 통해 보편적인 세계관을 공유할 수 있는가의 문제일 것이다.  같은 맥락을 Beredetto Croce(1866-1952)는 "역사상의 사실은 기록자의 마음을 통하여 항상 굴절된다"고 주장하게 한다.  이렇게 역사가 주관적으로 해석된다는 명제, 또는 이 명제를 실제의 역사에서 적용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전체주의 사회일수록, 다양한 역사 해석을 부정하고, 국가주의적인 단일한 역사 해석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가족도, 하나의 인간도 마을과 이웃도 부정된다.  단지 국가의 정통성을 강조하는 역사만이 드러난다.  다양한 역사 해석이 가능한 사회는 그 자체로서 다원성, 다양성을 인정하는 사회이고, 미래를 위해 다양한 가능성의 씨앗을 보유한 사회이므로 어떠한 불확실성과 위험에도대처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회가 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다양한 역사 해석의 하나를 서술할 것이다(전제주의 사회에서는 공적인 기억을 사적인 기억으로 환원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권귀숙, 2006: 12; Hosking, 1989; Marques, Paez & Serra, 1997을 참조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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