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이 바라는 것

역사/1900-1919 2010. 2. 11. 16:47
러시아 혁명의 성공은 민중이 혁명을 통해서 얻으려고 하는 것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볼세비키는 권력을 소비에트로 이양하는 것에서, 즉각적인 전쟁의 중단, 그리고 토지의 처분을 각 농민위원회에 맡기는 것을 10월 혁명의 첫날에 결정하였다.  물론 이러한 결정들은 전쟁터에 나가 죽음에 몰려 있는 병사들, 혁명적 사회주의자로 뭉쳐있는 농민계층을 향한 것이었다.  혁명은 병사와 노동자 소비에트에 의해 이루어 졌으나, 노동자들은 이미 자신들의 노동자 소비에트에서 공장의 관리를 시작한 상황이었으므로, 법률적인 효력을 발하는 결정은 필요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결정이 나오기 까지의 과정은 볼세비키들이 민중들의 욕구를 면밀하게 특히, 레닌이 파악한 결과로서 해석될 수 있다.

지도층이나, 관료들, 왕조들, 유산계층, 유식자들은 논란을 많이 하나, 민중들의 즉각적인 욕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  2월혁명을 군대에서 맞이한 사람들이 받은 첫번째 통신은 권력이 바뀌었으니, 왕조가 아닌 새로운 임시정부에 복종하라는 것이었고, 두번 째 명령은 군인들을 억압하지 말고 자유를 주라는 것(침을 뱉거나, 담배를 피운는 것, 계급을 부르지 않고 친구처럼 호명하는 것 등)이었고, 세번째 명령은 군의 최고 지휘는 장교가 아닌 소비에트가 맡는다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군대는 동요하지 않고, 이 명령을 따르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명령을 누가 내리느냐가 불명확한 상황, 그리고 전쟁이라는 상황에서 명령계통이 불확실하면 전쟁을 할 수 없다는 상황을 지적한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볼세비키가 그토록, 독일의 스파이라는 죄목으로 탄압을 받아가면서도, 나중에 강화조약을 맺는 것은(1918년에  독일이 이미 정복한 모든 영토를 포기하는 것) 전쟁에서 이길 가능성이 없다거나, 혁명의 와중에서 내외부의 적을 동시에 싸우기에는 전투력이 모자라거나 하는 문제보다도 병사들의 희생을 줄이는 것이었을 것이다.  적어도 1917년 혁명의 열기속에서는 그런 생각이 우선이었을 것으로 해석되고, 이를 통해서 혁명이 성공했다.

물론 토지의 분배는 이미 19세기 말의 농지개혁이나, 러시아 고유의 미르라는 농민 공동체를 통해서 형식적으로는 이루어지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농지를 각 개인들에게 나누는 형태를 염두에 둔 농민들의 욕구를 자극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의 정책에서는 농토를 즉각적으로 농민 개개인에게 나누기 보다는 각 지역의 농민위원회를 구성하여 이들이 대토지 소유자의 농토를 압수하고, 공유지를 관리하게 함으로써 대토지 소유자들에게만 손해를 입히는 정책을 가져온다.  또한 실제로 많은 농민들이 혁명적 사회주의자(정당이름) 당에 가입하게 된 것은 농토의 부족과 동시에 농장주나 국가의 가렴주구, 신분상의 차별이 더 큰 문제였을 것이다.  아무튼 볼세비키는 자신들의 지지기반을 강화하기 위하여 가장 먼저 농토의 분배에대한 정책을 확정하여 선언하였다.

공장은 이미 공장관리위원회나, 노동자 소비에트에 의해 많은 부분이 장악된 상태였다고 보여진다.  이러한 상태에서 노동자 소비에트가 병사소비에트와 더불어 가장 선두에 서서 러시아 혁명을 이끌게 된다.  그러나 혁명의 비극은 이들 혁명적 노동자들이 내외부적인 전투에서 너무나 많은 희생을 치루고, 전쟁과 혁명과 내전의 기간중에 노동자가 줄어들고, 따라서 혁명적 의식을 가진 볼세비키들이 사라졌다는 점이다.  이는 Chris Harman같은 영국의 사회주의자 역사학자가 해석하는 러시아에서 어떻게 혁명이 사라졌는가를 설명할 때 사용하는 방식이다.  아무튼 중요한 점은 숫자상으로는 볼세비키가 정권을 장악하고, 세력이 늘어난다고 하더라도, 그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줄어듦으로써 혁명의 정신이 사라졌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이는 혁명이란 한편으로는 제도로서 완결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정신을 가진 사람이 없으면, 혁명의 유지가 어렵다는 점이다.  또한 국가 권력을 잡았으나, 이를 운용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적어서 운용에 어려움을 겪고, 국가 체제를 구성하는 이들의 특히 관료들과 군대를 다룰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기 어려워서 결국은 특히 스탈린 시대에 접어들면, 타협하게 된다. 물론 내전 기간의 전시 경제체제를 지나 신경제프로그램을 통해서 재건을 시도할 때에도 트로츠키와 레닌을 비롯한 국가를 책임진 이들은 결국 과거의 기술자, 군인전략가, 관료들을 재 기용한다.  결국 이들을 재대로 통제하지 못함으로써 혁명은 배신되었다고 역사는 평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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