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마민주항쟁, 부마민중항쟁에 관한 조정관 교수의 발표와 청취 소감

역사 2008. 10. 21. 11:05
지난 10월 18일(토) 오전 11시 5분, 기념식이 끝나고, 31명의 발표자, 토론자, 사회자를 포함한 청중이 3.15아트 센터 국제회의실에 모여 전남대 5.18 연구소 전담교수로 계신 조정관 교수님의 발표와 토론을 들었다.  그의 결론은 "부마항쟁이 1970년대 유신하에서의 민주화운동의 최종형태로서 한국정치사에서 4.19나 5.18과 같은 비상한 항쟁이라고 생각하며, 유신체제를 종료시키고, 1980년대 민주화의 물꼬를 튼 중대사건이라고 본다"는 것이다.  따라서 1980년의 5.18 항쟁은 이미 유신체제와의 싸움이 아닌 더 높은 수준의 민주주의를 위한 싸움으로 전개되었다는 것이다.  즉 유신은 1979년의 싸움으로 사실상 종료되었고, 따라서 1980년대 전두환 정권도 유신으로의 회귀는 그들의 어젠다에 올려놓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때 유신이란 일인 종신독재를 의미한다.  발표자는 대개 정근식이나 임현진과 같은 사회학자들은 전두환 정권 치하를 유신체제와 일치한다고 지적하는 데 자신은 유신은 일단 1979년에 끝났다고 본다는 것이다.  이는 아마도 사회학자들은 일상생활의 억압성을 강조하고, 정치학자들은 정치제제의 변화에 강조점을 두기 때문이 아닌가 여겨진다.

조정관 교수는 또한 마산양서조합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차성환(2004)의 분석을 인용하면서, 마산 양서조합이 부산과 마찬가지로 지식인과 청년학생 상당수를 결집시키는 역할을 하면서 실제로 항쟁당시에 주도적인 인사들이 다수 배출되었다는 것이다.  이 양서조합은 서울와 부산, 마산의 지식인을 연계시키는 역할을 담당하고, "마산항쟁의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산실이었을 뿐만 아니라, 부산과의 연계점이었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서는 필자는 외부와의 연결점이라는 점은 인정하지만, 이들의 활동이 사실상 1979년 여름 이전에 중단되어 있었고, 따라서사적인 연결으로 무엇이 이루어졌는지는 몰라도, 10.18 마산항쟁과 직접 연계시키는 것은 과도한 해석이라고 본다.  즉 10.18의 시위는 학내 공개적인 학과 대표들의 조직과 학내 써클 조직이 연계되어서 조직적인 동원이 가능하였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외부와의 연계조직은 개별적으로 참여하고, 시위 과정에 거리에서 정열적으로 참여하고 조직하는 자원이 된 것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이도 전 시위를 통들어보면 매우 적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양서조합이 이후 1980년대 전두환 정권하에서도 문화운동으로 나아간 자산이 되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토론자로 나선 안철현 교수의 지적은 사뭇 도전적이었다.  즉 마산의 시위는 부산 시위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 같았고, 민중항쟁적 성격을 강조한 발표자에 대해서 민주운동적 성격 즉 중산층의 운동이었다는 점에 의미부여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10.18 해석에 매우 중요한 사안이므로, 앞으로 사실에 대한 검토와 역사적인 해석에 대해 심각한 토론이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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