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당 수법의 투표, 일제식의 탄압이 3.15를 불러 일으켰다.

시사 2010. 3. 10. 10:44
어제 오후에 KBS창원 방송에서 3.15의거 국가기념일 제정 토론회에 참석하러 갔다.  이 프로그램을 담당한 방송작가가 김주열의 시체사진과 또 다른 사진을 들고 시민들에게 물어 보았더니, 일제시대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냐고 응답하였다고 한다.  듣고 보니, 그렇다.  왜냐 하면 3인조 5인조의 상호 감시 투표를 생각해 낸 사람은 공산교육을 받고 그 수법을 모방한 것이고, 김주열을 사살하고, 시체를 유기하여 바다에 넣은 자도 일제시대에 한인을 고문하고 유기한 경력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이다. 

1960년 3월 15일 투표 당시의 상황에 대해 마산일보사, 1960, [민주혁명: 승리의 기록, 마산의거와 4월 혁명의 성공(마산일보사)의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16-17쪽).
"3.15 정부통령선거의 새벽 동녁은 텃다.  이날 아침 시내 47개 투표구에서는 상오 7시 부터 일제이 투표가 개시되었다.  투표소부근 및 10미터 통로지점에는 새끼줄을 늘려 놓고, 정복경찰관과 완장낀 종사원이 통행인들을 점검하였고, 투표소 경내와 입구부근에는 공무원 완장을 낀 종사원들과 사복경관들이 감시하는 가운데, 일부 투표소에서는 유권자들이 산발적인 투표를 했는가 하면, 일부투표소에서는 삼엄한 분위기속에 조직적인 시간별 방별투표로써 흰 자유당 완장의 남녀노장유권자로 장사진을 이루었다.
반월동 제 1투표소의 경우는 그야말로 빈틈없는 방별투표가 진행됨으로써 급한 용무로 아침 일찍 투표소에 간 유권자의 개별적인 투표로 거부했고, 번호표도 방장이 장악하고있는 관계로 시간전에는 개별적인 투표행동은 있을 수 없었다.  반월동 제 2투표소에서는 산발적인 투표진행을 했으나, 기자의 투표광경 취재의 요청에는 불응했다.  간혹 사복경찰관들의 순찰차량이 오고가고 했는가 하면, 공무원 완장을 종사원들은 '뉴스맨', '후랫슈'를 극도로 저지하면서 투표소 부근에 오래 머물고 있는 것마저, 꺼려하는 경향으로 전체 선거 분위기는 전례없는 공포 속에 몰아넣는 가운데 진행되었고, 일부 투표소에서는 야당참관인을 강제축출 한데 대해 소동을 야기시키는 등 어색한 일면도 보였다".

이러한 선거를 기획한 사람은 당시 자유당 조직위원장 이존화다(마산일보사, 1960: 118).  이존화는 "3.15 부정선거 강행에 있어서 3인조 및 5인조 공개투표의 창안자로 일약 유명해졌다.  애당초 별로 알려져 있지 않은 그가 자유당의 조직위원장으로 지명되었을 때 자유당 내에서도 놀라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는 3인조의 실시로 조직위원장으로서의 권위를 과시했고, 이정권의 공신으로 등장했다.  이기붕은 그후 그를 지극히 신임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공산교육을 받아온 자다.  남로당원으로서 대구 10.1 폭동 주모자라고까지 알려져 있다.  19세시에 고향인 완주를 떠나 만주에서 봉천학원을 졸업했다.  그는 거기에서 공산당식 훈련을 받으며, 공산주의 정신에 침투되었든 자라 한다.  그래도 그는 독립운동을 했다고 했다고 자부하면서 8.15이후 남로당원으로 암약을 해 왔던 것이다.  그후는 보도연맹에 가입되어 6.25 당시에는 겨우 생명을 유지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3인조도 그의 공산당식 수법이 되살아난 결과인 것이다.  어쨌든 그가 관제공산당 조직의 명수인 자유당의 조직원장까지 되었으니 자유당 안하는 사람은 모조리 빨갱이로 몰렸을지도 모를일이다.  어쩌면 이러한 공산당식 수법을 채용하면서까지도 정권을 연장해 보겠다는 자유당의 지긋지긋한 저의는 이미 민의가 그들과는 먼 거리에 있었다는 것을 너무도 잘알고 있었기 때문일까?"(1960. 5. 29일 국제신문을 인용).

김주열을 살인하고, 시체를 유기한 자도 역시 일제시대의 악덕 경관이었다(사단법인 3.15의거 기념사업회, 2004, 3.15의거사: 394-395).   박종표는 일본 헌병출신이었다. 일정 때 그의 이름은 아라이(新正 )로서 아리이 고조라고 불리웠다. "그에게는 허다한 죄상이 있으나, 그 중에 정장호 학살사건이 유명하다".  1945년 6월 어느날, 부산에 거주하고 있는 정장호의 집에 가서, 정장호를 체포하고, "닷새동안 모진 고문으로 빈사상태에 이르게 만들고"는, 탈옥도주를 가장하여 헌병대 뒷담으로 밀어던지고 말았다.  "집대문간에 들어서자 마자 정장호는 피를 토하고 쓰러진 정장호는 조국 광복을 보지 못한채, 저승길로 떠났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박종표에게 김주열을 죽이고, 시체를 유기하는 것은 일제때부터 내려온 경찰의 관행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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