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영토 침탈과 외교력

역사/1900-1919 2010. 1. 14. 08:39
학교 연구실에 있다 보면, 불청객들이 자주 찾아든다.  대개는 구걸, 책이나 교육자료 판매, 카드나 보험상품판매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가장 오랫동안 목요일마다 정기적으로 방문하시는 주부들이 있다. 방학중에는 가족중의 자녀와 같이 주부가 찾아와서는 신문을 들여 놓고는 사라진다.  이 신문은 화광신문이다.  화광신문은 일본의 창가학회에서 발간하는 신문이다.  마산에는 해운동 세관 건너편에 돌로 지어진 웅장한 멋진 건물이 창가학회의 센터인 것 같다.  표시는 SGI로 되어 있다.  창가학회는 정보를 찾아보니, 일본의 일련정종의 교리를 따르는 집단이고, 남묘호랑교라고 불리는 주문을 외는 집단으로 알려져 있었다. 일본에서는 공명당을 지원하는 강한 정치력을 발휘하는 집단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해 말에 일본에서 천황과 중국 부주석의 회견과 담화발표가 있었다.  이는 일본인들에게 천황을 정치에 끌어들인다는 비판을 받아 현 민주당 정권의 최대 불만사항이 되었다.  그런데 이를 성사시킨 것이 창가학회라고 알려져 있다.  창가학회는 원래 평화를 주창하는 단체이나 조직운영에서는 매우 엄격하고,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자랑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은 이미 19세기 말에 오키나와 열도와 대만을 합병하고, 이어서 한반도를 합병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는 러일 전쟁에서의 승리, 승리의 댓가로 아쉽기는 하지만, 사할린의 절반과 만주의 절반을 할양받는다.   이어서 조선왕조의 외교권을 장악하고는 독도를 일본 영토로 편입하고, 간도를 중국에 넘기고는 만주에서의 잇권을 보장받는다.  나는 이러한 일본의 영토 팽창능력이 단순히 군사력의 우세로만 설명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왜냐하면, 일본이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내부의 무장세력들을 해외로 팽창시키는데 이용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전적으로 무력에만 의존한 것은 아니다.  즉 공식적인 그리고 민간 차원의 외교력이 강했다는 점을 여러면에서 드러내 주고 있다.  Shiosaki Satoshi, 2006, 日露戰爭: 또 하나의 戰, 아메리카世論을 動했던 5人의 英語名人, 祥傳社新書라는 책에 잘 묘사되어 있다.  중요한 점은 관리들이 아닌 이들이 나서서 러일전쟁에서의 일본의 입장을 미국의 여론에 호소하고 다녔다는 점이다.  물론 미국이 이들의 여론에 힘입어 일본에 잠수함을 비밀리에 판매하고, 일본의 전쟁 국채를 국제적으로 사들인 것은 아니라고 할 수있으나, 적어도 이러한 노력이 있었다는 점만은 일본 국가의 능력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미국이 참전한 것은 미국이 이제 태평양으로 진출하기 위해 일단 러시아의 진출을 저지하기 위한 목적이 일차적이었을 것이다.  이후에도 미국은 1907년 헤이그 만국 평화회의에 조선왕조의 대표를 러시아가 주도하여 초청하였으나, 이를 거절하는 절차로 가게되는 데, 당시에 미국은 러시아와 주도적으로 만국평화회의를 주최한 점을 감안하면, 미국의 영향력에 의해 이준열사의 참석이 거절당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영국은 일찍이 러시아가 남아시아 방명으로 진출하는 것을 막기 위해 극동아시아 지역에서 일본의 러시아 진출 저지를 막았고, 이러한 결과 러일 동맹이 형성되었다.  아울러 영국은 러시아 발틱함대가 극동지역으로 향할때 수에즈 운하의 통과를 불허한 것은 물론이고, 함대의 이동 경로를 일본에 통보해주고, 적대적인 행동까지도 서슴치 않았을 정도로 적극적으로 일본을 도왔다.  그런데 1905년 러일전쟁이 끝나갈 무렵, 일본은 영국에 대해서 한반도를 병합하겠다는 의사표현을 하고, 이를 보장해 달라고 요청한다.  이에 대해 당시의 영국 외무상은 한반도 내의 모든 강대국이 동등한 권리를 갖는 것으로 주장하나, 한반도와 일본에 주재하고 있는 영국 영사들은 한결같이 일본의 한반도 병합이 타당하다는 의견을 보낸다.  한반도의 영국 영사는 사실상 일본이 한반도를 지배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조선인들의 무능력을 지적하고 있다.  이에 영국 외무상도 한반도내의 일본의 독점적 지배를 허용하게 된다.  물론 이 때에도 일본측은 영국에 대해 러시아의 위협을 들고 나오나 이 당시의 러시아는 이미, 발틱함대과 극동함대가 괴멸당하고, 남은 것은 흑해함대정도 였으므로, 사실상 해양력을 약화된 상태였다.  오히려 일본의 해양력은 러시아를 능가하고 팽창하는 형편에 있었다.

프랑스는 이중적인 정책을 취하고있었다.  즉 러시아와 연대하면서 동시에 영국과도 연대하는 정책을 취하였으나, 결국은 프랑스와 일본은 동맹을 맺고 프랑승 영토내의 독립운동을 보다 적극적으로 탄압하게 된다.  아시아 인들은 일본이 황인종을 대표하여 백인종을 격퇴하는 장면을 보고, 열광하였으나, 곧이어서 일본은 아시아와 연대한 것이 아니라, 제국주의 서양인들과 연대하여 아시아인들을 침략하고 있음을 목격하게 되어, 그 허울을 보게 된다.  요즘 일본은 아시아 통화기금, 아시아 연대론을 다시 들고 나오고 있고, 중국 역시 아시아의 맹주로 발돋움하기 위해 역사, 사상, 경제, 무력 등의 다방면에 걸처 국가적인 공작에 착수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현재 내가 객관적으로 국가 능력을 살펴보면, 우리는 아직도 조선조 시대의 왕조 전통에 사로잡혀 국가를 중심으로 한 민족국가 관념이나 능력, 전통이 모두 부족하다.  다른 말로 하면 일본이나 중국, 그리고 다른 강대국들인 미국, 러시아 등에 속속들이 당하고 있고 이러한 현상이 지속될 것 같다.


참고문헌:
정애영, 2008, "러일전쟁 직후 일본의 간도 조사와 지역구상", 일본역사 연구, 28: 61-84
박선영, 2008, "중화인민공화국의 만주족의 역사적 정체성," 동북공정과 한국 학계의 대응논리: 1287-1358
김도형 기자, 2008, "연구자 기다리는 1430만건의 진실: 근대 일본 공문서 보고 아시아역사자료센터," 한겨레, 2월 1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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