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 객고를 푼 기록들

역사/19세기 2009. 4. 6. 21:07
조선시대에도 관료들의 기록을 보면 다모, 관기, 가창자 들이 등장한다.  즉 관료들이 지방에 가면 다모가 와서 방안일을 도와준다.  아마도 부억일, 청소, 세탁을 도와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외의 일을 더 했는지는 모르겠다.  다모도 관의 고용인으로 활동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관청에는 또한 관청의 기생이 노비로서 존재했다.  관기에 대한 기록을 많이 나오는데, 1500년대에 나온 홍랑과 최경창의 사랑 이야기가 유명하고, 임진란 때 동래인가 양산에서 전쟁이 벌어졌을 때 사랑하던 관기가 와서 같이 싸우다 죽은 사건이며, 진주의 촉석루에서 왜장을 껴안고 투신한 논개도 관기였을 것이다.  관기는 노비로서 바깥나들이를 할 수 없다고 규정되어 있으며, 유일한 탈출구가 젊고 생생한 관리를 사랑하여 첩으로 들어가 노비를 대신 내는 것이 유일한 신분탈출구였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관기는 상대적으로 노래와 춤, 그리고 악기를 다루는 예인의 역을 담당하였으므로, 상당한 정도의 훈련을 거쳐서 교양을 어느정도 갖춘 사람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들이 주로 부른 노래는 시조를 포함하여, 12가사 들이었을 것이다.  일본의 통신사로 가거나, 북경에 연행을 갈 때에도, 각 지방을 지나면서, 특히 압록강이나 부산진의 항구에서 이국의 국경선을 넘어서는 경우에는 때로는 다른 지방에서 만났던 관기들이 와서 이별을 아쉬워 하는 경우도 많았고, 서로 눈물을 흘렸다는 기록이 많이 나온다.  멋진 낭만이라고 해야할까?  아니면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노래방에서 도우미 여인들을 불러놓고 질탕하게 놀은 것으로 해석해야 할까?  다만 아쉬운 것은 일본의 통신사나 북경에 간 연행사들이 그들의 임무를 좀 더 철저히 해서 해외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이를 토대로 국내의 준비태세를 강화하고, 국내 개혁을 촉진시키는 일을 했으면 좋았을걸하는 아쉬움은 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순신의 난중일기 기록에도 지방의 수령이나 현감이나 아무튼 부하들이 자신을 찾아올때 대개는 맨손으로 오지 않고, 지방의 술이나 고기, 또는 토산품을 지니고 온다.  그럴 때 혹 기생도 동반하여 데리오 오는 경우도 있었던 것같다.  그 중에 한 여인에 이순신이 상당히 빠져 있었던 기록도 나온다.  이순신은 매우 꼼꼼 하여 이를 일기책의 빈자리에 몇번 만났는지도 기록하고, 같이 잠을 잔 다음날에는 모이 피곤하다는 말도 솔직하게 기록하고 있다.  기록을 철처히 하는 이순신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준다.

여인들 외에도 상당한 가창 전문 집단이 존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서울을 중심으로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조선후기로 접어들면 지역의 재산가들도 자신의 집에 가창자들을 불려들어 노래를 즐겼다.  초기에는 시조, 나중에는 긴 시조들(가사), 그리고 후기에 접어들면 판소리로 바뀐 것으로 이해된다.  1500년대부터 노래 가사에 나오는 사랑이야기는 한편으로는 낭만주의, 개성과 감정의 표현을 의미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조금 더 일찍 유학이 과학과 사실주의로 흐른 후에 낭만주의가 나왔다면 조선의 역사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았을까 싶다.  노래가 그냥 현실의 당파싸움, 유학적 현실 구속, 어려운 경제생활에 대한 체념의 한 방식으로 등장했다면 별로 생산적이지는 않았다고 볼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