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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의 대외관

역사/19세기 2009. 4. 6. 16:56
조선은 1600년경을 전후로 해서 일본이라는 섬나라와 그리고 대륙에 있는 청나라(처음에는 후금, 그리고 나라이름이 변하여 청나라)에 침략을 당하고, 많은 이들이 전쟁노예로 이들 나라에 끌려 갔다.  우리 지역(창원, 함안, 웅천)에는 주로 임진왜란와 정유대란때 일본의 남쪽지역(오사카)으로 끌려갔던 것으로 이해된다.  이들을 조선으로 송환하려는 움직임이 조선 정부차원에서 통신사로 갈때마다 이루어지고, 상당수의 포로들이 송환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다른 한편 벌써 10년이 지나면서부터는 설사 일본에 노예로 끌려갔다고 하여도, 조선에 돌아올려는 생각은 하지 않고 이미 정착한 일본에서 이미 가족을 형성하였으므로 그대로 살게된다.

일본은 당시에 이미 포르투갈과 무역을 하고 있었고, 왜구라는 이름으로 중국 남부해안가, 그리고 심지어는 인도네시아 지역까지 무역에 진출하고있었다.  1600년대의 덕천 막부에서도 네덜란드와의 교역을 지속하였고, 남부 중국 해안가와는 활발한 무역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리고 국가체제도 우리보다는 훨씬 질서있고, 문화도 발달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우리는 아직 세계지도를 갖고 않았던데 비해 일본은 이미 세계지도를 갖고 있었다.   물론 우리는 의도적으로 일본은 미개하고, 조선은 소중화의식을 갖고 있는 것으로 기록하지만.  특히 1763-4년에 일본에 통신사로 간 조엄과 김인겸은 그들의 일본 기행 기록을 통해 일본의 문물이 발달하였고, 이를 조선에 도입해야할 필요성을 강조한다.  따라서 조엄은 고구마를 도입하고, 뒤이어 수차(물레방아, 관개시설) 같은 것도 도입하려고 노력한다. 실제로 그것이 제대로 실행되지는 않았지만 노력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반면에 1866년에 청나라 북경에 간 홍순학은 그의 나이 57세에 국가 책무로 갔으면서도, 압록강을 건너면서 부모님 슬하를 떠나는 것, 그리고 경기지역을 떠나본일이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6개월에 걸쳐 북경을 다녀오면서 안전부절못하고, 북경에서 본 것은 강대국 청나라를 본다.  그러나 생가해 보면, 당시의 청나라는 아편 전쟁을 두차레 겪고 난후에 영국, 프랑스, 러시아의 공격에 완전히 쑥대밭이 된 상태였다.  이 중요한 시기에 북경을 갔으면서도, 국제정세파악은 제대로 보지못하고, 부모슬하를 떠나는 것만 걱정하는 모습을 본다. 

오늘 나는 세계지도를 본다.  북한이 쏘아올린 3단계 로켓 발사체가 어디에 떨어졌는가, 그리고 이를 둘러싸고 미국은 핵무기 확산저지의 기회로 삼고 있고, 일본은 해외팽창을 위한 군대보유를 금지한 헌법의 개정의 기회로 삼고 있다.  우리는 7월에 고층의 외나로도에서 인공위성을 쏘아올릴 것이다.  그리고 일부의 사람들은 미사일 300Km이상의 사거리를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중국은 북한을 자기네 경제권 내에서 통제하려 할 것이고, 러시아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아직도 우리는 지정학적으로 강대국에 둘러싸여 있다.  주변정세를 잘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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