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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7.14 중국 공산당과 노동자
  2. 2009.03.26 시장에 포섭되는 군중들

중국 공산당과 노동자

시사/중국 2009. 7. 14. 10:29
중국의 공산당은 명시적으로 과거에는 노동자 계급의 이익을 지향하는 정당이었다.  그러나 2002년을 넘어서면서고 일단 공산당 중앙의 이념에서 노동자를 비롯하여, 경제발전에 기여하는 자본가의 이익을 포함하였다.  즉 노동자의 정당이 아니라, 경제발전의 정당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이는 이념의 문제이고, 실제로는 2002년 이전에도 이미 사영기업(비국유부문)의 경영자들은 상당수가 공산당에 가입하고 있었고, 그 비율로 본다는 다른 어떤 계층 보다도 높은 비율로 신규 공산당 가입이 늘고 있었다.  2002년의 공산당 대회를 기점으로 이는 한층 가속화되는 경향이 있다.  즉 실제로, 경영자의 가입이 늘어나는 현상을 사회적으로 보면 그리 이상하지는 않다.  왜냐하면 사영부문 또는 비국유부문의 경영자들은 실은 이전에 관료 또는 국영부문의 경영자급들이었으므로,대부분 공산당원이었기 때문이다.

이와 반면에 노동자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공산당원이 주는 헤택이 줄어드면서 가입 자체를 꺼리거나, 가입 사실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한다.  설사 공산당원이라고 하더라도, 해고의 위험은 항존하고, 다른 기업에 입사를 하려고 해도 공산당원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잘 고용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사 공산당원이라고 하더라도 가입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은 기존의 공산당원이었던 도시의 노동자 뿐만이 아니라, 적어도 사영부문 노동자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농민공(민공, 외래공)들의 경우에는 이미 1989년의 천안문 사태시에 노동자의 이익을 공산당이 대변하지 못한다고 선언하며, 자율적인 노동조직의 건설을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이때에도 학생들은 노동자와의 연대를 주저하였고, 나중에 자신들이 국가의 인민해방군이 동원되어 위기에 부딪쳤을 때에서야 노동자들의 도움을 요청하였다.  법률적인 대응에서도 노동자들은 더 가혹한 사법적 대접을 받았다.  따라서 중국의 개혁이 가져온 농민공들의 문제는 공산당 차원을 넘서선지가 오래 된 것 으로 볼 수있다.

물론 최근에는 2008년부터 발효된 노동계약법을 통해 노동자들을 보호하려는 국가의 개입을 강화하고 중국 노동조합(공회)의 조직과 이를 통한 노동자들의 보호를 강화하려는 현상이 많이 생겼다.  그러나 원칙적으로 중국의 노동조합은 한국의 1945년직후의 상황과 비슷하거 공산당의 군중조직의 하나로서 기능한다.  따라서 독자적인 조직과 대표이익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공산당의 방침이 공장의 노동자에게 퍼지게 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오히려 하나의 공장에서 공장장이 경영자이자, 공산당 서기를 차지하는 경우가 많고, 노사협력을 강조하면서 노무관리 또는 생산량을 채우기 위한 사기를 진작시키는 역할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따라서 공산당의 조직 강화를 위한 수단으로 공회(노동조합)이 기능한다고 보고, 또한 중국 정부 역시 공산당원을 중심으로 노동조합을 구성하려는 움직임이 강하다.   이와는 별도로 직공대포자 회의라는 공회와는 다른, 우리로 치면 직원협의회(과거에 삼성중공업의 직원협의회 같은 것, 노사협의회와도 비슷하다고 볼수 있다)를 선출하여 자율적으로 노동자의 이익대변기관을 만들어 놓은 것도 있다.;  그러나 아무튼 이럴 경우에라도 노동자의 이익이 공산당이나 공회를 통하여 대변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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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에 포섭되는 군중들

역사 2009. 3. 26. 18:05
19세기 서양사는 대체로 여러종류의 사람들이 도시와 시장경제라는 무대에 등장하면서, 착취와  저항, 은폐와 드러내기, 즐기기와 억압이 뒤얽히면서 정치적인 타협과 대결, 그리고 자유와 탄압이 지속된다.  물론 그 중심적인 영역은 개인들이면서, 동시에 한 가족의 적응, 그리고 이웃과의 연대전략이 동원되었다.  이러한 해석의 뒷받침에는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반의 영국의 노동자 생활을 연구한 톰슨에 의해 분석되는 것을 차용한 것이기도 하지만, 우리와 같이 임노동자라기 보다는 양반계층, 귀족 계층, 상인층, 장인(제조업자), 공장노동자, 자유로운 노동자 들이 얽혀 있었던 시기의 일반 평민들의 삶을 분석하는데에는 한층 더 유용한 것이다.

개인들의 처지 역시, 임노동자라는 표현보다는 무산자 계층들, 즉 점차 공장이 들어서면서 본격화된 제조업자들의 힘에 눌린 장인층들(소규모 자영적인 성격을 가진 제조업자들), 장인층의 아래에서 기술을 배운 숙련노동자들, 또는 이미 기계가 들어오기 전의 공장에서 숙련을 가지고 있었다가 기계가 등장하면서 어린이와 부녀자들에게 일자리를 위협받고 있는 숙련노동자들, 단순한 저임 노동자들, 도시에 왔지만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비공식 분야에서 일하고 있는 자유노동자들 모두가 아니, 농촌에서 도시로 가기위해 대기하고 있는 소농 소작자들 역시 무산자 층에 속할 것이다.  이들 모두는 19세기의 산업혁명이 가져다준 시장경제체제에서 그 고통에 적응하고, 타협하고, 저항해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한 개인에게 결혼은 과거의 농촌시절과는 달리 어느정도의 사회적응과 돈벌이가 가능해야 혼사문제를 풀수 있기에 결혼연령은 늦어 질 수 밖에 없다.  또한 결혼 역시 하나의 가족 생계전략을 우선시 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대부분 키가 크고 영양이 풍부하다고 인정되는 여성은 일찍 좋은 조건에서 결혼 기회를 가질 수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결혼기회가 협소하였다.  여성의 신체와 결혼을 연구한 논문(영국의 사례)에 따르면, 신체의 크기는 과거의 영양상태를 표시해주고, 또한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고 한다.  따라서 결혼한 후에도 공장에서 채용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당시의 일이 그래도 어느 정도의 육체적인 강인함을 요구하기 때문에 허약한 육체 보다는 강한 육체조건을 선호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러한 증거를 임금이나 채용가능성과 연관시키고 있다.

가족은 아직도 말이 부인들이 노동한다고 하였지만, 부인들이 노동에 나서는 것은 거의 최후에야 나서는 것이었고(미국의 사례), 우선적으로는 아이들이 어느 정도 크면 노동에 나서서 가족의 생계에 도움을 주어야 했다.  우리의 1960년대에 농촌의 처녀들이, 그리고 소년들이 중학교와 일하는 것을 선택해야 하는 상태와 유사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리고는 도시에서는 자기 집이 있는 경우에는 대부분 하숙을 통해서 가족의 생계에 도움을 주려는 전략이 우세하였다.  부인들이 노동에 나가는 것은 거의 최후의 수단이었고, 이런 관행도 19세기 후반이 되어어야 가능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부인이 공장이나 노동에 나서는 경우에는 주위의 온갖 멸시에 시달려야 되는 상황이었다.  에밀 졸라의 소설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그들이다.

군중들은 산업화가 본격화되기 이전에는 상당한 정도의 자율성을 가지고 자신들의 놀이를 조직하고, 공동체에서 지주(젠트리)나 자본가(제조업자나 상공인들)을 야유하는 축제가 발달하였지만, 19세기 중반이후에 접어들면, 노동자들의 놀이는 이제 자본가의 상품 영역속으로 편입되게 된다.  즉 개별화되고, 상품화되고, 조직화된다.  따라서 개인간의 사적인 상호작용은 줄어들고, 영화나 프로 스포츠를 즐기게 됨으로써 활동적이고 스스로 만들어낸 여가를 즐기기는 어렵게 되었다.  즉 노동자는 오히려 여가를 즐기기 위해 다시 노동을 더 해야하고, 이웃들보다는 고립된 상태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아지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의 노동시간 단축을 논의할 때 왜 사람들이 노동시간을 단축시키려 하지 않고, 더욱 많은 노동을 통해 화폐임금을 획득하려 하나고 질문하면, 대개는 쉬는 시간에 돈이 없으므로 할일이 없다고 한다.  바로 서구로 따지면, 19세기 후반을 기점으로 공동체적인 놀이가 사라지고, 돈에 의해 여가가 향유되어야 하는 시대로 접어든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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