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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 -> 후금 -> 청 나라로 가는 동안 조선은 무엇을 하였는가?

역사/17-18세기 2009. 2. 8. 16:27
조선반도는 지정학적으로 북에는 만주대륙에 면한 나라들, 서해를 건너 중화대륙에 움트고 있는 세력들, 물론 중국대륙은 남을 향하고 있기는 하지만, 기본으로 만주를 통해 육지로 연결되어 있고, 황해를 통해 바다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는 동쪽에 일본이 면해 있다.  물론 남에는 유구열도가 있기는 하지만, 우리에게 위협이 될 정도는 아니었다. 1500년대 후반과 1600년대 초반은 동아시아를 비롯하여 세계적으로도 각나라의 세력을 겨루는 시기였다.  일본은 전국시대를 거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을 통일하여 국가체제를 완성하고 대외적인 팽창을 통해 내부의 무장세력들의 탈출구를 마련하는 시기였다.  만주 대륙에서는 과거의 몽골 세력 일부가 만주의 여진을 압박하여 조선과 명나라를 위협하고 있었다.  이들은 명나라와의 무역을 위해 각 부족세력들간의 다툼과 경쟁, 그리고 이를 통한 실력배양에 나서게 되어 결국은 후금으로 통일된 세력이 나타나게 된다.

조선은 항상 세력균형과 동시에 명나라에의 사대를 통해 자신의 생존을 보존하려는 대외정책을 취하고있었다.  그러나 이미 일본의 침입으로 드러난 군사군능력과 국가 통치능력의 약화는 결국 1600년대 초반에 이르르면 실질적인 군사력의 약화를 추래할 수 밖에 없었다.  여기에 대외정보수집과 이를 기반으로 한 대외정책의 수립과 이를 집행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즉 외부의 위협을 감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대비를 할 수 없었던 틸레마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이를 우리는 국가능력의 부족이라고 표현하기는 하지만, 당시의 상황을 본다면 전적으로 왕조 보존과 당시 정치 엘리트들의 능력 부족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더구나 이미 선조때 부터 나타난 왕위계승의 정통성 확보가 부족한 상황은 끊임없이 왕위계승을 둘러싼 무장세력들간의 다툼으로 번지고, 이를 빌미 삼아, 소위 주자학에 기반한 각종 예의 논쟁을 통한 정쟁은 정상적인 정보판단을 흐리게 할수 밖에 없었다.

광해군의 왕조위엄을 살리기 위한 지나친 낭비, 인조반정을 통해 나타난 무장세력에 의존한 왕위 계승의 결과 국가 병력의 기강약화, 광해군이 보낸 명나라 연합군이 후금에 투항하면서 조선의 최정예부대가 모두 후금의 군사가 되어 버리고 나아가, 후에 후금이 조선을 침입할 때 투항한 조선군이 조선침입의 최전선에서 활약한 점을 보면 당시 조선의 불행이라기보다는 정쟁을 일삼는 정치엘리트들, 왕의 정치적 능력 부족을 탓하지 않을 수 없다.  후금의 3만군대가 개성에 이르도록 오직 정쟁만을 일삼고, 군사적인 판단을 유보시키고 있는 상황은 현재 우리가 되돌아 보아도 정상적인 통치행위로서는 이해할수 없는 대목이다.

더구나 후금과 청은 수차례에 걸쳐 조선과의 전투를 회피하기 위한 타협책을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명나라와의 의리를 내세우고 전투력은 준비되지 않은 척화책은 결국 항복이라는 치욕적인 행태를 드러내게 된다.  말만 앞세운 의리, 백성들은 안중에 두지 않는 정책, 오로지 자신들의 정치적인 세력의 보존과 확대만 염두에 두는 정치인들은 바로 아무리 제대로 정보를 갖고 있고, 대외적인 타협책의 여러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치욕, 그리고 국가의 약화, 백성들의 고생으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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