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09.06.13 사회를 지키려는 자가 없었다.
  2. 2009.06.11 19세기 조선과 일본의 운명을 가른 것
  3. 2009.03.18 노예가 임금노동자가 되다

사회를 지키려는 자가 없었다.

역사/19세기 2009. 6. 13. 08:19
조선말기, 아니 말기가 아닌 한양에서 1천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부산에서 신의주 정도의 거리에 있는 북경에서 들려오는 서양세력의 중국 침탈, 그리고 일본을 통해 들어오는 서양의 침탈 소식을 몰랐을까?  아니면 알았고, 해결하려고 노력하였는데도 못했던 것인가?  알았으나, 무능하여 해결하지 못했는?  알았지만, 중국이 이를 해결해 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는가?

대체로 조선은 19세기 전반에는 영어를 할줄 아는 사람들이 없었고, 따라서 설사 외국인 표류하는 방식으로 들어온다고 해도, 이들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었고, 무조건 중국 북경으로 송환하는 방법 밖에 없었다.  또는 우리나라에서 일어나는 서양세력들과의 접촉에 대해서는 중국에 상세히 보고하였고, 이를 통하여 해결하려고 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잘 알다시피, 중국도 이미 1840년대에 접어들면, 서양세력에 유린당하는 신세가 되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실에 대해 중국은 조선정부에 제대로 알려준 적도 없고, 조선의 외교사절들이 이를 간취하여 제대로 신속하게 조선정부에 보고하지도 않았다. 조선 정부 역시, 이러한 것에 대한 조금은 불안해 하였지만, 이를 적극적으로 자신의 문제로 여기지도 못했다.  서양의 군대와 배들이 조선 영토에 침입하였어도, 이들의 배가 놀랍고, 무섭고, 위력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대처를 전혀 하지 않은 것은 무능 그 자체라고 볼수 있다.  물론 후에 대원군이 집권하면서, 함선을 건조하려는 노력도 하고, 물론 실패하였지만, 전통적인 군대라고 하더라고 군사력을 강화하려고 노력한 것은 높이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사대주의적인 정적들, 수구세력들에 휩싸여서 부국강병 정책의 실행에 실패하였다러도 이러한 시도 자체가 조선정부의 당시 관행에 비추어 보면, 매우 획기적인 것이었다.

이후에 결국, 조선은 청국의 중재로 서양 제세력들과 개방 조약을 맺는다.  이러한 개방 조약 역시, 우리 스스로 맺은 것이 아니라, 이미 서양 세력들의 먹이가 되어버린, 청국의 중재로, 청국이 거의 전적으로 주도하는 가운데 조선과 서양세력들의 개방조약이 맺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협약에 대해서도, 조선정부는 근대적인 국가 주권의 개념도 없이 마치 고종이 하나의 민사상의 당사자 자격인 것으로 생각하고, 협약을 맺은 것 같다.  즉 왕조 스스로 국가 개념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국가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었을까?  단지 몇몇 수구적인 유학자들만이 수구적인 사고만으로, 우리가 소중화이고, 세상의 예절을 지키는 사상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만으로 서구의 것은 야만이라고 판단한 것 같다.  예의 범절이 생각에만 있고, 스스로 수양에만 있을뿐, 현실의 일상생활이나, 국가 정책에까지 미치지는 못했다.  따라서 실제로 조선 사회를 지키려는 자는 없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 같다.

이후에도 조선 정부는 서구인들과 같이 금광사업, 해운사업, 유리공장, 성냥사업을 전개하려고 하나, 서양인들과 일본인들은 한결같이 조선정부나 조선 상공업 사업가들의 외화자금을 횡령하고, 떼어먹고, 도망치고, 이들이 국가 대리인인인 조선정부에 주재하고 있는 그들의 공사나 영사를 통해 범법자는 보호하고, 자신들의 국민들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조선정부에 협박하는 일을 서슴치 않는다.  당시에 조선정부는 대외적인 교섭업무의 상당부분을 외국인을 고용시켜 일을 처리함으로써, 스스로의 주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한다.  현재의 시점에서 당시를 되돌아 보면, 여전히 우리 사회에 만연한 한국사회의 주체가 없다는 점은 비슷한 것 같다.  그저 각자의 이익을 위해 해외로 진출하고 열심히 정보를 구하기는 하지만, 국가의 정보체계는 여전히 미흡하고, 대한민국의 주권을 고려한 정보수집과 대처를 하는 조직은 부족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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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조선과 일본의 운명을 가른 것

역사/19세기 2009. 6. 11. 08:03
19세기 역사에서 안타까운 점은 왜 조선은 같은 조건 (쇄국)에서 일본과 다른 길을 걸었느냐일 것이다.  분명히 조선과 일본은 쇄국의 측면에서는 거의 비슷한 수준이거나 일본이 더 쇄국이 심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즉 국내 총생산 대비 무역 규모를 보면 조선왕조와 일본 토쿠가와 막부의 일본은 비슷한 정도의 2%를 기록하고 있다.  일본이 부분적으로 화란(네덜란드)과 대외창구를 유지하고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같은 수준이라고 보면 된다.  그러나 문제는 쇄국 이전과 이후의 국가의 능력의 문제였던 것으로 보인다.  국가 역량이 아닌 민간의 역량은 거의 비슷한 방향으로 나가고 있었고, 물론 일본이 시장경제, 문화적인 활성화, 마을 공동체의 역동성이 더 도드라진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즉 국내 경제의 활성화, 해외 문화의 유입과 국내의 고급문화의 융성, 마을 단위에서 보여지는 공동체 유제의 존속 등은 일본이 더 강고한 것으로 분석된다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서 일본의 국가 능력, 즉 과세와 징수, 강병정책, 이를 유지하기 위한 해외 사례의 학습, 국민의 여론을 의식한 정치라는 면에서 일본은 한국의 정국(왕조 또는 국가 능력)에서 훨씬 강했던 것으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  조선의 과세는 이미 1400년대에 최고의 융성을 보였다가, 1600년대에 전쟁을 기점으로 그 능력이 현저히 떨어졌고, 이러한 ㅅ상태를 1800년대까지 이어진다.  군대 역시, 고종도 여러차례, 서양의 무기체제를 도입하려고 시도하였으나, 왕실의 안위도 보존하기 어려울 만큰 사실상 와해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해외의 사례를 배우기 여러차례 정부주도로 파견하였으나, 이들이 정부에 보고한 것은 현실적이라기 보다는 도덕적이었고, 정략적인 경우가 많아 실제로 사용할 수가 없어었다.  일본의 경우에 어찌되었던 의회를 구성하였으나, 1897년 독립협회가 요구한 의회의 설립에 대해 고종은 거부하고, 오히려 탄압하였다.  일본측은 부국 강병을 위해서는 과세를 강화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국내 인민들의 여론을 존중하여야 한다고 생가하였다.  또한 일본은 천주교가 일본에 의료와 교육사업에 진출하는 것에 대해서, 경계하고 국가가 나서서 인민의 마음이 천주교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 국가 나서서 의료에 교육사업을 선점하는 전략을 취한다.  이쯤 되면,그것이 아무리 진정으로 국민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정략적으로 위민 정책을 취했다고 하여도 결과적으로 여론 정치를 도입하였다는 점을 의미한다.

우리의 경우는 여전히 국가의 능력을 키우기 필요한 것에 대해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다.  이미 대외적인 관계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종속이론가들 뿐만 아니라, 세계체제론에서도 강조하고 있다.  부국은 강병에서 오고, 강병은 대외관계의 전략적 조절 능력에서 온다고 보고 있다.  중요한 점은 자주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국내적인 정치적 사회적 통합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국내적인 통합이 되지 않고, 경제적인 능력이 없는 경우에는 적대와 증오의 정치가 판을 친다.  물론 객관적인 사회적 불평등이 그 기반이 되기도 한다.  아무튼 국내 여론의 통합이 대내외적으로 중요한 관건이 되는 점은 공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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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가 임금노동자가 되다

역사 2009. 3. 18. 08:19
19세기 노동자들의 삶을 보노라면, 한편으로는 노동자들의 노동시간단축, 그리고 임금의 향상이라는 문명의 진보를 말할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문명의 진보라는 것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소수의 사람만을 대상으로 한 것을 곧 알 수 있다.  즉 소위 자유 노동자들 또는 자유인들에 대한 이야기는 현재의 시점이나, 당시 자유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서술된 측면이 강하기 때문이다.  자유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분명히 귀족이나 지주계급은 아니었고, 이제 장거리 무역을 통해 자산을 축적하기 시작한 이들, 그러면서도 봉건의 속박에서 풀려난 계층이 주로 사용하는 용어였다.

노예들에 비해서는 노동자들의 근로조건이나 삶이 나아졌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일수도 있고,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  19세기는 전세계적으로 대부분의 노예제도가 철폐된 시기이다.  물론 프랑스는 조금 일찍, 미국은 남북전쟁을 통해서, 그리고 조선은 갑오경장을 통해서 공식적으로 사라졌다고 본다.  그러나 다른 한편 노예가 조선의 경우에는 실질적으로 해체되고 있었고, 미국의 경우에도 이미 19세기에 접어들면 아프리카에서 들여오는 노예의 수도 격감하고, 그 값도 비싸진 상태에 있게 된다.  따라서 노예제도의 폐지와 별도로 실질적인 사회관계 속에서 노예제도는 존속하기 어려워진 상태에 있다는 점을 감안하고 사건을 이해아는 것이 좋을 것이다.

노동시간의 역사에서 독자들을 혼란시키는 것은 중세시대나, 원시사회가 근대 문명의 발전단계보다 훨씬 적은 시간의 노동과 풍족한 삶을 이루고 있었다는 사실에 대한 것이다.  짧은 근대의 관점에서 보면 노예 상태에서 하루에 12시간이 넘는 해가 뜨면 일하기 시작하고, 하가질 때까지 일하고, 겨울에는 초롱불을 켜놓고 적어도 15분씩은 추가로 일하는 상태가 근대 초기의 모습으로 보면 될 것이다. 이는 19세기 초에 들어서서 하루 12시간 노동을 주장하는 노동자가 등장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즉 19세기 초 이전에는 12시간 노동이 대부분이었고, 19세기 초에 일부 선진적인 자각을 가진 노동자가 노동시간을 제한을 말할 때에도 엥겔스의 영국 노동자의 상태에서 표현된 바와 같이 부녀자, 아동 가릴 것없이 장시간 노동에 시달렸던 것이ㅏ.

가장 심한 착취가 일어나고, 가장 일찍 근대 공장이 발달한 영국에서 비로서 정책적으로 노동자의 재생산을 위협하는 부녀자 노동, 아동 노동에 대한 규제를 시작한 것이 12시간 노동제의 도입니다.  아이를 낳고 기를 새도 없는 부녀자, 어릴 때부터 공장에 들어와 10살이 넘으면 늙어버려 생식 능력이 사라져 버리는 아이들을 두고는 건강한 노동자를 다시 생산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는 사실상 말로만 자유노동자이지, 실은 노예의 특징과 아주 유사한 것이었다.  노예제도가 유지될 수 없었던 이유 중에 하나도, 아무리 쾌적하고 일생이 보장되는 삶을 누린다해도 노예들은 자신들의 희망이 없었고, 결혼의 자유도 없었고, 그래서 가능하면 자신의 일대에서 이승의 고통이 종식되기를 바랬던 것이다.

노동시간은 그렇다고 그렇게 쉽게 줄어들지는 않는다.  하루임금제도를 채택한 곳에서는 하루에 가능한한 많은 시간을 일을 시키는 것만이 고용자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태양이 오래 떠서 오랫동안 일을 시킬 수있는 여름에는 하루 임금제도를 채택하고, 낮이 짧은 겨울에는 성과급제를 실시하였다.  오늘날 5월 1일이 노동절이 된 것은 미국에서 1886년(?)에 8시간 노동제를 주창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실패하였다.  현대인들은 일에 중독되어 사는 형태가 되었다,  이러한 관습은 주로 미국, 영국의 청교도들이 만들어낸 관습이다.  일어나서 해가 떠 있을 동안에는 일을 하는 것은 청교도들에게는 하나의 하나님의 소명처럼 여겼다.

현대인들은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이 일을 많이 하고, 돈을 적게 버는 사람이 일을 적게하는 사회라고 미국의 사회학자들은 그들의  사회를 관찰하고 주장한다.  아마도 미국도 그렇지는 않을 것 같은데, 분명히 과거에 비해서는 노동에 대한 관념과 여가에 관념이 서로 경쟁하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조선은 아직 19세기에 그다지 시간에 대한 관념이 발달되어 있지 못했다.  일본에 지난해 말에 방문해서 오오다와라 성의 박물관에 가보니, 일본인들은 에도시대에 휴대용 해시계같은 것을 들고 다니고 있었다.  시간관념이 일찍 발달한 것을 알 수있다.  우리의 경우에 조선시간 조정의 시간관념은 아직 아침부터 일찍 3-4시간 근무하고, 나머지 시간은 독서와 오락으로 보낸 것으로 기록된다.  따라서 현재의 근무체제와 조선시대의 관료들, 아니면 공식 기관의 근무체제는 많이 다른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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