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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을 조장하는 자는 외세에 의존하는 자들이었다.

역사/1900-1919 2010. 1. 19. 09:23

조선왕조가 일제에의해 강제 합방을 당하기 까지 조선내의 세력들을 왕권수호세력, 개화세력, 민중세력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즉 왕권수호세력을 자신들의 기득권 수호를 위해 조그마한 양보도 허용치 않고, 심지어는 외세에 빌붙어서 왕조를 유지하려던 세력이었다.  고종은 1904년의 한일의정서까지만 해도, 일본이 자신의 조선지배권을 보호해줄 것을 믿고, 일제에 빌붙어서 러시아 전쟁시기에 조선의 모든 물자와 영토와 인민들을 동원하여 협력하였다.  그러나 그 결과가 1905년의 을사 보호조약으로 귀결되자, 자신의 외교권을 잃어버리고, 사실상 내치권도 상실되었다고 생각하자, 이 시기부터 반격에 들어 간다.  그러사 이 당시의 반격이라는 것은 고작 독일 황제에게 편지를 보내고, 물론 이때 독일 황제는 이를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영국의 헤럴드 트리뷴 기자를 불러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하고, 이는 영국의 신문에 1906년 3월경에 게재되었다.  헤이그 만국 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하여 만국의 공법에 의거하여 해결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었다.  이러한 무모한 일은 단순히 자신들의 민중이나 개화파들과 협력하여 외세를 몰아내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는 정도를 넘어서서, 이미 일본와의 협력 체제에들어간 회세에게 왕권의 수호를 의탁하려고 한 정세의 어두움과 판단력의 부족함에 있다.  조선왕조가 어떻게 보면, 이 정도의 수준으로 왕조를 유지하여왔는가에 이르르면 통치술의 한계를 직감하게 된다.  결국 고종은 1907년에 군대해산, 순종에게로 왕위를 물려주고, 자신은 덕수궁에 눌러 앉고, 순종을 왕위를 받고 창덕궁으로 들어간다.  순종은 이제 철저하게 일본에 의존하여 왕실의 재산을 유지하는 세력으로 전락하게 된다.  그러나 실은 1907년부터 1090년까지 사이에 조선반도에서는 의병들이 일어나 일제와 전쟁을 벌인다. 이때 전쟁이라고 표현한 것은 일제로서는 경찰과 헌병에 더불어, 군대를 파견하여 정식으로 의병들과 전쟁을 벌이기 때문이다. 의병들이 응집되고, 중앙집중화된 의사결정체제는 없었다고 하더라도, 왕권의 몰락에 의해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이들과 이념적으로 의존하던 향리 세력등이 협력하여 일어난 전쟁이었다.  이들에 대해서만이라도 고종이나 순종이나 조선왕조가 응원하였더라면, 그나마도 왕조는 이후의 역사에서 다르게 평가받았을지도 모른다.  바로 이 시점이 왕권사상에서 넘어와 한반조의 인민들이 민족의식이 싹트고, 이를 기반으로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나려는 생각을 가지게 된 시기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개화세력은 일본에 협력하는 자들이 많았다.  개화란 바로 국가체제, 산업화, 사회의 근대화를 노리는 세력이었다.  이들의 생각이 세밀하고, 미래를 내다보는 선지자적인 시각을 갖고 있지 못하다하더라도, 이들은 시대의 움짐익을 포착하고, 이를 기반으로 무엇인가 개혁하지 않으면, 무너질 수 있다는 점을 깨달은 사람들이라고 볼 수있다.  따라서 처음에는 이들이 자주적으로, 아니면 외세에 빌붙어서 개화를 이루려고 시도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들이 성공하지 못하자, 최종적으로 한일 합방을 주도하는 세력으로 나아가기도 했다.  이들 세력들을 조선왕조, 아니 대한제국이 흡수하였더라면, 조선왕조는 입헌군주국으로 변모하고, 외세의 침탈을 막고, 아니 막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후세의 평가는 매우 긍정적인 것으로 변했을 것이다.  외국의 한반도 관찰자들이 한반도를 여행하면서 느낀 점은 바로 한가지, 한반조 인민들의 무지 몽매함과 무기력함, 조선왕조의 부패함와 타락성을 지적하는 것이었고, 바로 이점에서 일제의 침략에 대해 외세들은 자신들이 직접 이해관계가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조선반도 지배를 지지하였던 것이다.  조선반도를 지배하게 된 일제는 1905년이후에 조선국가체제를 정비하기 위한 시도를 하면서, 재정 체제의 정비(국가 독립 기구의 설치), 중앙국가가 미치지 못하는 범위의 지방에는 자치를 허용하는 것을 강구한 점, 지배를 위한 경찰,헌병, 군대의 파견, 지배자원을 파악하기위한 조사와 측량 사업의 전개를 시작한다.  이러한 점을 두고, 혹자는 일제가 한반도의 국가체제를 근대체제로 바꾸었으므로, 근대화에 공헌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중요한 점은 우리 스스로 자치를 할 능력이 있는가, 국가체제를 만들어낼 능력이 있는가에 대한 것이다.  따라서 개화파의 상당수는 이제 국권을 잃어버린 상황에서 교육운동이나, 상공업 진흥운동으로 나아간다.  자발적으로 학교를 세우고, 근대 상공업을 받아들이는 운동을 펼치는 것이다.  외세의 충격이 없이, 스스로 외부의 움직임을 보고 이를 선제적으로 판단하여 움직였다면, 국권 상실이라는 비극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마산의 조선인 초등학교 성호초등학교가 이때 생겼고, 같은 시기에 불종거리의 형무소가 만들어 져서, 읙병활동하던 이들이 갖히고, 1909년 일제는 순종황제를 마산에 보내어 일제의 침략기구들을 응원하고, 조선인민에게는 순종도 이제 일제에 항복하였고, 이들이 순종을 잘 대해주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데 협력하였다.  1909년 1월 순종이 마산을 방문한 시기는 의병활동이 가장 활발하던 때였다.  의병들은 1907-09년에 약 2만여명이 전쟁에서 사망하였다.

민중들은 어찌 보면, 일제에 의해 당하거나, 조선왕조에 의해 착취를 당하거나 큰 차이가 없었을 수도 있다.  조선왕조는 탐관오리들을 양산해 내었고, 그들에게 각종 수탈에 시달리고있었다.  또한 일제의 침탐에 의해 이미 조선왕조 후기부터, 버림 받은 백성들은 일제에 의해서도 상권, 군대, 이주민들에 의해 폭력을 당하고, 재산을 빼앗기고 있었다.  읻르은 왕권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왕조나 개화세력처럼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조선왕조도 이미 동학농민전쟁시기에 일제를 끌어들어 민중들을 말살하였고, 이어서 나타난 독립협회 세력들도 민중들와 연대하기 보다는 왕조와 개화시력과의 타협에 중점을 두고 의회 설립운동을 펼치고 있었다. 이들이 물론 당시의 국제적인 정세에서도 선진적인 아이디어이기는 하지만, 민중들의 세력까지를 포함하는 의회 설립이나, 입헌군주제를 주장하였더라면, 역사의 흐름은 달라졌을지 모른다.  역사는 모름지기, 지배받는 층의 대다수를 포괄하여, 이들의 마음과 노력과 아이디어를 활용하였을 때 융성할 수있다는 점을 알려주고 있다.  그러나 조선조 말기, 아니 대한제국 시기의 인민들은 더욱더 조선왕조로부터 배척당하고, 착취당하므로, 인민의 통합은 어려웠던 것으로 판단된다.

요즈음 이명박 정부의 리더쉽을 보면, 국민들의 분열을 조장하여 정치적인 이익을 취하려는 경향이 강함을 알 수 있다.  51%의 지지만 받으면, 나머지는 적대적인 세력이 되어도 정권을 유지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다고 판단하는 듯하다. 그리고는 미국와 일본의 이익만 보존해 준다면 외세도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이다.   49% 세력을 무시하는 것은 무시를 넘어 분열, 그리고는 적대적인 세력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외세의 상황이 바뀌는 현금의 국제정세를 깨닫지 못하고, 국민 분열에 기반한 통치를 지속한다면, 20세기 초반에 벌어졌던 국권상실이라는 역사적인 비극이 다시금 재현될지 모르겠다는 우려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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