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조합'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0.02.12 노동자와 볼세빅
  2. 2009.08.31 해외에서는 한국의 기업들도 노동조합을 인정하고 있다.
  3. 2009.03.24 임노동의 등장으로 취착당한 사람들

노동자와 볼세빅

역사/1900-1919 2010. 2. 12. 12:01

1917년 러시아 혁명은 기본적으로 노동자들의 힘을 배경으로 일어난 혁명이다.  이는 혁명의 이념면에서나, 그 조직 면에서도 그러하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지도적인 위치에 볼세빅이라는 지식인 그룹, 또는 직업적 혁명가 그룹이 존재하고 이들이 혁명의 리더로서 이끌어 간 데 문제가 있었다.  1차 세계대전은 대부분의 참전국가들에게는 이미 전국민적 역량을 동원하는 최초의전쟁이었던 만큼, 민중의 힘을 동원하지 않을수 없었다.   단순히 무기의 싸움이 아니라, 인민들의 희생을 전제로하는 싸움이었과 후방에서도 물자생산면이나, 이데올로기 면에서 전쟁에서의 죽음을 정당할 수 있는 국가 이데올로기가 있어야만 하는 싸움이었다.  그래서 미국도 군수물자 생산 분야에서는 8시간 노동제를 실시하였고, 영국이나 독일은 노동의무제를 통해서 노력 동원을 강제하고 있었다.  러시아의 경우에는 이를 무시하고, 오히려 평상시에 정상적으로 지급되던 식량 배급이 중지됨으로써 결국 2월혁명이 발생하고야 말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2월혁명의 최초의 성과는 공장내에서는 8시간 노동제의 도입, 그리고 공장위원회의 도입으로 나타났다.  8시간 노동제가 혁명적 상황을 매개로 도입되었다는 점은 대부분의 국가에서 노동운동의 고양과 억압의 과정에서 도입된 점을 감안한다면 전쟁이 갖는 국민동원의 의미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공장위원회의 도입은 조금은 복잡하다.  왜냐하면 이미 공장에서는 노동조합이 있었고, 노동자 소비에트가 조직되어 있기에 그렇다.  그러면 공장위원회와 노동조합, 그리고 노동자 소비에트가 무엇이 다른가를 이해하는 것이 관건이다.  러시아에서의 노동조합은 형식상으로 보면, 노동자의 근로조건 향상을 위해 만든 조직이기는 하지만, 실은 러시아에서의 노동운동의 탄압이 극심하였으므로, 노동조합이 실질적으로 기능했다기보다는 급진적인 지식인 운동으로 구성되어 있었던 상황이었다.  노동자 소비에트는 정치운동을 하는 노동자들의 모임이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공장위원회는 공식적으로 공장을 관리하는 기구로서 구성된 것이다.  공장주인이 있었지만, 공장주인이 공장을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공장을 운영하는 데 감독기구, 그리고 노동자들에게 그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하는 장치를 만든 것이 공장위원회이다.  이런 조직은 현재의 유럽연합에서 도입하고 있는 work council과 유사하다.

그러나 항상 제도가 도입되어도 기존의 관습의 영향은 무시할 수 없다.  공장의 운영은 실은 주인이나 경영자가 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인간적인 위계적인 질서에 의해 생산이 이루어 지던 당시의 상황에서는 중간 감독자(현장 감독자)가 실질적인 생산을 조직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러시아의 경우에도 현장 감독자는 임금의 결정, 해고의 결정 등 사실상 주인과도 같은 위치를 점유하고 있어서 사실상, 노동자들의 현장에서의 불만은 현장 감독자들의 자의적인 판단과 차별, 무시에 있었던 것이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은 이러한 관행에 대해 현장감독자를 단순히 기술 지도원의 위치로 격하시키게 된다.  그리고 이들도 노동조합을 구성하여 자신들도 노동자이므로 노동조합에 가입시켜 달라고 요청하게 된다.

그러나 볼세비키들의 생각은 달랐다.  특히 레닌이나, 트로츠키를 비롯한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한 세력들은 노동자들의 해방보다는 자신들의 권력 유지, 볼세비키들의 정권장악, 내전과 외세의 침입으로부터의 방어가 우선이었고,이를 위해서는 생산성의 향상과 생산력의 증강이 절대적이었다.  따라서 전시사회주의, 내전, 신경제계획을 통해서 공장내 노동자들의 권리는 유보당하고, 다시 과거의 공장주, 기술자, 중간감독자들의 복귀를 통해서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게되고, 실제로 이를 실행한다.  

결국 노동자 관리, 노동자 소유, 공장위원회, 노동조합, 노동자 소비에트와 같은 기구나 제도의 도입이 생산성 향상에 도움을 줄수는 없는 것일까이다.  대가는 공장의 소유주가 파산하거나, 국가 권력이 더이상 공장 소유주를 지챙해주지 못할 때 우리나라의 경우에나 다른 나라의 경우에도 공장에 대한 노동자 관리가 이루어 지는 경우가 많다.  우리 지역에서도 최근에 진주에서 버스회사가 파산상태에 이르자 버스회사의 종업원들이 인수하여 운영하는 사례가 있다.  나는 아직 완전히 지속적으로 노동자들이 운영하는 공장이 성공한 사례를 모르고 있다.  경향신문과 서울 신문이 아나도 사원지주제로 운영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유럽의 사례를 보면, work council은 종업원을 대표하면서 이사회에 참석하고, 감독위원회를 구성하여, 회사의 운영에 적극참여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관행이 독일의 패전이후에 독일 대자본들의 군국주의화 경향을 저지하기 위하여 성립되었다고 하더라고, 지금까지 운영되고 독일의 경제 발전에 기여한 것으로 보아서는 우리도 누여겨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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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에서는 한국의 기업들도 노동조합을 인정하고 있다.

시사/중국 2009. 8. 31. 19:37
유럽에서는  EU에 가입하면, 반드시 기업내에 노동자 위원회를 구성해야 한다.  물론 형식은 노동조합이 아니나 따지고 보면, 한국의 기업별 노조와 비슷하다.  즉 기업 내에 노동자 평의회의 전임인원을 두고, 사무실도 마련해 주어야 한다. 이 위원회의 대표자는 이사회에 참여하고, 기업의 감독위원회에도 참여하여 기업의 경영에 철저하게 참여하고 있는 셈이다.  애초에는 독일이 만든 제도였으나, 최근에는 이 제도를 EU가 채택하여, 대부분의 한국기업도 이를 받아들이고 있다.  한국에서는 죽어도 노조를 만들수 없다고 주장하는 삼성도 유럽의 공장에서는 이를 허용할 수 밖에 없다.  노조는 아니지만, 사실상 노조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조직이고, 경영 내역도 공개하고 있다. 

중국의 노조가입율은 공식발표와 차이는 있지만, 그래도 60%는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산동에 있는 한국기업들도 대대부분 중국의 노조인 공회의 설립을 허용하고 있다.  산동성의 한 기술 특구의 한국기업 33개의 15천여명의 노동자도 전원이 공회에 가입하였다.  물론 한국의 대기업들은 중국에서 노동조합격인 공회의 조직을 가느하면 회피하려고 애를 써 왔다.  그래서 한국의 노사협의회 격인 피용인 대표 회의 같은 것은 허용해도, 노조는 허용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왔다.  그러나 지난해부터 중국 정부는 공회를 통한 기업내 노동자 문제의 해결을 강제하고 있다.  물론 각 지역마다 노사정 3자 협의를 통한 해결도 도모하고 있다.  한국에 비해서는 상당히 빠른 속도로 노사관계의 틀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한편으로느 금년부터 시행된 노동계약제의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더이상 정부에만 기대게 해서는 해결이 난망하다고 판단한 이유도 있고, 지난해 부터 시작된 세계적인 금융위기로 시발된 기업들의 감원, 임금체불 등의 사회적인 불안 요인을 해결하기 위한 제도적인 장치이기도 하다.  한국은 노동자를 억누름으로써 해결하려고 하는데 반해, 중국은 일단 제도적인 장치를 통해 노사간의 자율적인 해결을 유도하고 있는 점이 다르다.

중국은 한국의 비정규직에 해당하는 보호받지 못하는 농민공문제 해결을 위해 농민공을 도시호구와 동일하게 다루려는 시도를 하고 있고, 공회의 조직에 가입시키는 절차를 진행시키고 있다.  이에 따라 적어도 20-40% 정도의 농민공이 이미 조직된 것으로 보고 있다.  중국의 노조는 기업에 설사 노조가 조직되지 않았어도, 임금의 2%를 공회에 납부하여야 한다.  그리고 공회가 조직되었다면, 노동자들이 임금의 1%를 공회에 다시 납부한다.  따라서 한국의 경우에 대개 1% 수준이 노동조합에 들어가는데 비해 중국에서는 임금의 3%가 공회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중 60%는 당해 노조(공회)에서 사용하고, 나머지 40%가 상급 공회로 넘어간다.  한국에 비해서는 공회의 중앙조직(상급조직)이 엄청난 힘을 발휘하는 셈이다.  한국에서 아직도 산별 노조도 잘 인정하지 않으려는 기업가들이 많은데 중국에 가면 많은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한국의 기업들은 이미 80년대부터 노동조합활동에 대해 많은 것을 경험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이러한 경험로 배우지 못한 것 같다.  노조를 제대로 배우지 못한 한국의 기업들은 이제 세계 어디에 가도 제대로 행동하기 어렵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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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노동의 등장으로 취착당한 사람들

역사 2009. 3. 24. 08:27
19세기 세계적으로는 임노동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면서, 이의 피해를 입은 계층의 반발이 확산되던 시기였다.  18세기부터 임노동이 본격적으로 영국에서 등장하고, 이에 따라 봉건제 농촌에서 소농이나 예속농으로 일을 하던 농민들이 도시에서 임노동에 종사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대부분의 유럽대륙, 신대륙, 그리고 나머지 제국주의 침탈의 대상이 되거나 아직 되지 않은 나라들의 경우에는 여전히 장안노동, 노예노동, 농촌 노동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었다.  따라서 19세기는 임노동이 서서히 그러나 강고하게 등장하면서 공장에서 아니면 플랜테이션의 농장에서, 또는 거리에서 임노동의 형태와 동시에 존재하던 노예 또는 자유 노동자의 본격적으로 등장하던 시기이다.

임노동의 본격적인 등장으로 가장 먼저 타격을 입은 계층은 공장제도의 등장으로 말미암은 장인노동자들이다.  이들은 가내 수공업의 형태로 장인과 도제제도를 통하여 제조직종의 특정분얄르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상공인들이 공장제도를 통하여 기계를 도입하여 이제는 어린이나, 부녀자가 하는 노동으로 전환시켜 놓았다. 잘 아시다시피, 기계파괴운동이 간헐적으로 그러나 이들의 반발에 의하여 즉흥적이고 본능적으로 일어났다.  19세기가 되면 일단 영국이나 유럽대륙에서도 장인노동은 사라졌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그 정도는 분명히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영국은 가장 먼저 사라진 나라이고, 유럽대륙은 그래도 서서히 파괴되지 않았나 싶다.  재미난 것은 미국이다.  미국은 이들 장인 노동자들이 TRADE UNION을 세운다. 현재 우리나라 노동조합이 사용하고 노동조합의 명칭이다.  trade union이라는 말은 실은 장인노동자들의 단체임이도 불구하고 미국에서 소극적인 그리고 반동적인 노동운동을 주로 한다는 이유로 도입된 것이 아닌가 싶다.  아무튼 미국은 이들 장인노동자들이 독자적으로 19세기 노동운동을 격렬하게 주동한다.  이후에 서서히 숙련노동자들이 등장하지만, 이것은 19세기 말에가서야 나타난다.

19세기는 실은 임노동자의 시기도 아니었고, 장인노동자의 시기도 아니었다고 말할수 있을지도 모른다.  여전히 노예노동이 판을 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하지않을까 싶다.  아프리카에서의 노예거래가 19세기 중엽되면 대부분의 나라에서 중지되지만, 밀무역은 여전히 판을 치고 있었고, 플랜테이션에서는 노예제도를 선호하고 있었고, 매매춘이나, 상당수의 가내노예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때로는 채무노예라고 불리우는 노예들은 자본주의 시대에도 성행하고 있었다.  지금으로 치면 신체포기각서를 쓴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노예는 아니지만, 이제 막 노예의 상태에서 벗어난 사람들이나, 농촌이나 다른 나라에서 일거리를 찾아 온 이들은 자유노동자로 살아갔다.  자유 노동자라는 뜻은 이념적인 뜻이 아니라 어디에서도 일을 하고 먹을 것을 구할 수 없다는 뜻에서 자유이다.   따라서 이들은 자유로운 만큼 도시내의 각종일을 처리할 수 밖에 없었다.  물장사, 오물치우는 일, 거리에서 사람들을 나르는 일, 짐을 나르는 일, 음식물 장사 등은 거의 세계적으로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심할 경우에는 매매춘으로 들어가거나, 그래도 편하게 다시 노예상태나 다름없는 가내일꾼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기계를 사용하는 공장의 등장으로 고용된 신규 노동력은 어린아이들과 부인노동의 등장이다.  이들은 남성노동의 감소를 가져와 상당수의 가정에서는 가장 선호하는 전략의 하나로 일단 아이들의 노동을 추진하는 경우가 많았다. 부인 노동의 등장은 가족의 전략에서는 가장 최후의 전략의 하나였다.  물론 일부 선진적인 영국의 도시에서는 부인노동자들이 선진 여성운동가의 도움을 받아 노동운동을 벌인 일이 있지만, 이 역시 매우 아이러니칼한 일이었다.  가장 노동운동이 덜 필요한 이들이 나선 노동운동이라는 것이다.  즉 임금노동의 필요성이 적은 여성들이 나서서 노동운동을 하는 것은 어쩔수 없는 인간 인식과 행동의 한계일수 밖에 없다.  즉 인간은 자신의 객과적 처지를 알수는 없고, 그들의 불만은 항상 상승하는 신분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고, 이를 다른 집단과 비교하고, 그럴때 불만이 최고조에 달한다.  따라서 아주 피곤하게 종일 일을 하고 남들과 말할 기회도 없고, 세계의 흐름에 대한 지식이나, 인적인 조직적인 네트워크에서 소외된 사람들은 불만을 느낄 시간도 없거니나, 설사 불만을 느꼈다고 하더라고 고립되어 집합행동을 일으키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아무튼 영국에서 일찍이 여성노동과 어린이 노동에 대한 규제를 시행하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노동시간은 19세기 초에는 하루에 12시간을 넘어섰고, 일주일에 70시간 이상 일을 하는 제도였다.  이런 제도에서는 자신의 생물학적 생존외에 다른 생각이나 사회적인 네트워크를 맺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19세기 후반이 되면 독일을 선두로 해서 노동자들을 위한 정당이 등장한다.  맑스주의 이념이 공식적으로 인터내셔널을 통해 채책되고, 엥겔스, 그리고 카우츠키와 베른쉬타인을 통해 정치세력화하는 데에까지 나아간다.  현재의 독일의 사민당은 바로 1890년에 세워진 것으로 기록된다.  당시에 사민당은 전체 유권자의 20%정도의 득표를 기록했다.  물론 이후 노동운동의 노선을 둘러싼 농업문제, 수정주의 문제를 전환점으로 기폭을 기록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노동자들의 정당으로 지금도 유럽과 영국에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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