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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2.01 가족만 돌보다 나라를 망친 고종
  2. 2010.01.13 同文同種의 허위를 깨닫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가족만 돌보다 나라를 망친 고종

역사/1900-1919 2010. 2. 1. 16:43
한국 철도사 제 1권, 36쪽에 로일 전쟁 직전에 러일 사이에 벌어진 외교 상황을 서술하면서, 이런 의문을 제기한다.  "러시아와 일본 또한 청국이 한국을 가운데 두고 이렇게 요리할 때 한국은 과연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알길이 없으나 노일이 자기들끼리 한국을 요리할 타협을 맺지 못하자, 러시아는 러시아대로, 일본은 일본대로 서로 다투어 군비를 서두르며, 서로 힘을 뻐기다가 이윽고, 1904년 2월 6일로서 국교를 단절하고 칼싸움으로 번지게 되었다".

1894년 갑오경쟁 개혁시기부터, 일본은 이미 경부선 철도를 부설하기 위하여 측량을 시작하였고, 러시아는 1899년이 개항하자 마자, 극동함대 사령관과 주한 러사이 영사가 마산에서 회합을 하고, 마산을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과 여순을 잇는 중간 기착 항구로 개발하려고 서두르게 된다.  1903년이 되면, 압록강 하구의 용암포를 1만명이상의 러시아 군인이 점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1903년에 대한제국 정부는 일본 미쓰비시 조선으로부터 군함을 한 척 사들이나, 이 역시 재정부담이 크고, 운영할 해군력이 없어서 인천항국에 묵히고 만다.  이에 항의하는 군부대신의 의견에 대해 의정부 역시, 해군의 창설을 미루고, 군함은 군부의 물자 처리하는 곳으로 보내게 한다.

앞서 한국철도사를 집필한 필자의 질문에 답을 구하기 위해 고종실록의 1903년도 판, 특히 후반기의 기록을 훑어 보았다.  대부분, 인사 명령에 관한 것과 왕족의 상이나 혼례에 대한 기록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기록을 넘어서, 이와 관련 인사들에 대한 상훈이나, 노고를 치하하는 것, 그리고 재정을 후하게 배정하는 것이 등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는 가끔 정부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출근을 제대로 하라, 보고를 제대로 하나, 가렴주구를 하지 마라는 정도의 훈령을 내리는 정도로 통치에 임하고 있었다.  고종이 대한제국의 정부를 다스릴 능력이나, 대외적인 정보 수집과 대처능력이 제대로 되어 있는지 의심이 된다.  러일 전쟁이 벌어지자, 열강들은 기관총의 위력, 기마전의 취약성, 요쇄와 참호의 등장 등으로 새로운 전쟁 방식이 나타난 것으로 기록하고,이러한 전쟁방식이 앞으로 전쟁에서 등장할 것으로 예견하고 있다.  이때 대한제국 정부에서도 러일전쟁의 상황을 관찰하기 위해 시찰단을 보냈다.  이들이 고종에게 보고한 내용을 실록에서 보면, 상대방이 보여주지 않으려 하고, 구차하게 보지 않았다는 답이 나온다.  이것이 고종에게 보고한 내용이다.

반면에 1904년에 들어서면, 고을의 관리들이 문제가 생기면, 벌써 외국군에게 의존하여 처리를 요청하고, 일본 상인이나 일본군인들, 그리고 철도를 건설하면서 생긴 문제로 조선인을 처벌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있다.  이에 대해 고종은 일본군인을 접대하고, 일본군인이나 일본인들에게 상해를 입히거나 방해를 한 사람들에 대해 처벌을 내리고는 일을 주고하고 있다.  갖은 아부를 다하고 있는 셈이다.  이에 대해 가끔 대한제국의 우국 지사들이 고종에서 의견을 올리지만, 이에 대해서는 의정부에서 논의하라고 하는 정도에서 처리를 미루고 있다.   오히려 일본대사 하야스 곤노스께나 미국 대사를 만나는 횟수가 늘어나고, 이들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요즘 뉴스를 보면, 대통령이 자신의 가족을 국가 재정을 사용하여, 국가의 행사에 데리고 다니는 문제가 제기되었고, 이에 대해 청와대는 미국의 예를 따른다고 말한다.  미국에서는 개인 용도의 전화와 공적인 전화까지도 구분해서 사용하는 나라이고, 영국도 수상이 시장을 가거나 아이를 등교시키는 것은 개인 차를 사용하고, 공용차를 사용하지 않는다.  이럼 점을 더욱 본받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한다.  그리고 남북 정상회담에 대한 논의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는 데, 실은 남북관계는 어찌 보면, 최근들어 더구나 중국이나, 미국, 일본 등의 외교관계의 종속적인 측면이 너무나 큰 상황이다.  더구나 이명박 정부들어서서는 강대국 외교의 종속적인 위치로 스스로 위치지운 것으로 이해된다.  중요한 점은 강대국 외교의 각축 속에서 우리의 정보력이나 외교력, 그리고 군사력을 더욱 잘 호라용하여야 하는 데, 그것도 잘 안된다는 점에서 자꾸 러일전쟁 시기의 고종정부의 처지가 떠오른다.  일본의 해군력은 한국의 3배이상이고, 미국의 태평양 함대에 비해서는 반정도 된다고 보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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同文同種의 허위를 깨닫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역사/1900-1919 2010. 1. 13. 08:39
1904-5년에 발생한 러시아와 일본의 전쟁은 동아시사의 역사적 지평을 바꾸어 놓은 사건이었다.  나는 러시아 전쟁을 이해하는 데 왜 조선반도에서 하나의 주권국가의 허락도 없이 외세들이 마음대로 전쟁을 일으키고 난리를 칠수 있는가 하는 소박한 의문을 가졌었다.  그리고는 청소년들에게 권장 도서의 하나로 지정되고는 하던, 인도의 네루가 1930녀대에 국민들을 계몽시키기 위해 쓴 세계사편력이라는 책에 러일전쟁을 미화하는 것으로 보고, 역사의 해석에 혼란이 발생하였다.  아무도 공개적으로 러일전쟁에 대해서는 정확한 평가를 해주는 것이 없었던 우리 교육의 결과였다.
네루의 글을 인용하면, "아시아의 일국인 일본의 승리는 아시아의 모든 나라에 영향을 주었다.  나는 소년시절, 얼마나 그에 감격했던가를 네게 자주 얘기했다.  수많은 아시아의 노소년소녀, 그리고 어른들이 같은 감격을 경험했다.  우럽의 일 강대국은 패배했다.  그렇다면 아시아는 그 옛날 때때로 그런 일이 있었던 것 처럼 지금도 유럽을 쳐 부술수 있을 것이다.  내셔낼리즘은 한층 급속도로 퍼져 아시아인의 아시아라는 외침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 내셔날리즘은 단순한 복고도 구래의 습관이나 신앙의 고집도 아니다.  일본의 승리는 서양의 신산업방식을 채용한 덕택이라고 풀이되고 있다. 이 이른바 서양의 관념과 방법은 이와 같이 해서 더 한층 전동양의 관심을 모으게 되었다"(저와하랄 네루 , 1933/1972, 세계사 편력, 삼성문화재단:269-270).  우리 존경해 마지 않는 네루의 조국은 당시에 영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고, 영국은 일본과 동맹을 맺고, 러시아 발틱 함대가 수에즈 운하를 거치는 것을 불허하고, 일본의 군자금을 런던 체권시장에서 국가채권을 발행하는 것을 도와준 나라이다.  어찌 보면 당연하게 영국의 지배를 받는 네루의 입장을 표명한 듯하다.

한국과 비슷한 입장에 놓여 있던 중국에서도 일본의 승리를 기원하였다.  물론 러시아와 변경에 접하고, 러시아가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환성시킬 즈음, 블라디보스톡 함대를 여순(아더 항으로 러시아는 개명하였다)에 정박신 상태였으므로, 러시아에 대한 적개심과 동시에 일본에 대한 우호적인 태도는 일반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손문의 경우에는 여기에 더하여 일본이 승리하면, 일본의 도움으로 서양세력을 물리칠 생각까지 하였다.  이러한 생각은 청나라의 본거지인 만주를 포기하고, 아니 만주의 중국인들이 러일전쟁의 와중에서 약 2만명이 죽어간 상황을 마다하고, 나온 것이었다.  아무리 한족 중심의 중구을 구상하였다고 하더라도, 좀 정세파악에 감정이 많이 개입된 것으로 보인다.  극히 소수의 사람들만이 일본의 제국주의적 속성은 결국은 중국을 향할 것이라고 예견하였다(노신은 당시에 일본에 거주하며, 일본인이 만주의 중국인을 처형하는 장면을 보고는 러일전쟁의 실상을 깨달았다).  결국 1919년 54운동당시가 되어서야 일본의 속성을 깨닫게 된다.

베트남은 당시에 프랑스의 지배를 받고 있었고, 프랑스는 러시아와 연대하여 일본과 전쟁을 수행하고 있었으므로, 베트남 독립운동을 이끌고 인사들은 더욱더 일본의 승리에 환호성을 지르고, 일본의 도움으로 프랑스를 물리치려는 계획을 세운다.  그리하여 실제로 일본의 정치인들에게 무력의 제공을 요청하나, 거절당하고, 이어서 1907년이 되면, 프랑스와 일본이 상호 도움을 주는 협정을 맺고, 일본내의 베트남 독립운동가들은 추방당하게 된다.  이들의 환상은 3년이 가지 않아 깨어지게 된다.

조선의 국왕인 고종은 자신의 부인(명성황후)가 9년전에 죽었건만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해 우선 도망갈 궁리를 한다.  그러나 국제정세는 이미 냉혹해져 있어, 아무도 고종을 받아줄만한 강대국을 발견하지 못한다.  그래서 고안해 낸 것이 중립화 정책이다. 중립화 정책에 대해 각국의 영사관들은 공문을 접수하였다고 통보하나, 이를 고종은 인정한 것으로 오해한다.  접수한 것 자체를 인정이나 승인으로 해석한 것은 봉건적인 질서에서 나온 관행에 따른것으로 보인다.  아직도 고종은 근대적인 서양외교를 이해하지 못하고, 오해한다.  그러나 끝내 일본은 며칠뒤 경성을 점령하고, 한반도에 군사시설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의정서를 맺는다.  고종은 이제 어쩔 수없이 일본에 대한 협력을 국민들에게 정부에게 강요한다.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는 어쩔 수없는 조치였지만, 군자금을 내고, 축하사절단을 보내고, 궁정 악단이 축하 쇼를 하는 장면으 좀 심하다 싶다.  그러나 결국 1905년에 을사보호조약이 맺어지고, 사실상 조선왕조는 대외적으로 한반도의 인민을 대표하는 권한을 상실한다.  망한 것이다.  고종은 중립화가 무효된 것이 며칠만이고, 나라가 망한 것은 1년 6개월정도만이다. 고종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일본, 중국, 조선, 베트남을 묶는 이데올리기가 바로 동문동종이라는 단어였다.  같은 문자(한자)를 쓰고, 같은 종족이라는 것이다.  이에 중국은 거의 15년후에나, 베트남은 3년후에, 조선은 단 며칠 후에 일본이 주창하는 이데올로기가 제국주의 침략의 속성을 지녔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다른 나라의 사례를 삼아 자신의 처지를 깨닫는 것이 더딘 나라는 발전할 수 없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유용태, ?, "환호속의 경종: 전장 중국에서 본 러일전쟁," 역사교육, 90: 51-83
노영순, ?, "러일전쟁과 베트남 민족주의자들의 유신운동: 동유운동과 동경의숙을 중심으로", 역사교육, 90:127-154
전갑생, 2007, "러일전쟁, 고종은 일본 승리를 원했나", 오마이 뉴스, 11월 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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