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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에 저항하여 청년들이 마산을 이끌어가다.

역사/1920-29 2010. 3. 11. 10:03



일제 시대의 마산에서 지역사회를 이끌은 조직은 단연 마산 청년회가 눈에 뜨인다.  눈에 뜨이는 모습은 1926-29년 사이의 중외일보 기사를 읽으면 분명하게 드러난다.  청년회는 단순히 청년들의 모임이 아니라, 지역의 다른 조직을 돕고, 지역의 중요한 행사를 주관하고, 또한 그들의 미래를 위하여 가장 선두에 서서 한국지역사회의 문제를 고민하고 이를 해결하려 하였다는 점이다.  지역사회의 문제에는 물론 민족차별에 대한 저항, 독립국가에의 열망, 새로운 세계적인 조류를 파악하려는 노력등이 포함되어 있다.  마산의 지역 1920년대 민족해방운동을 연구한 이귀원 (1996, "1920년대 전반기 마산지역의 민족해방운동", 지역과 역사, 1호: 7-34)은 전반기의 흐름을 잘 요약해주고 있다.  "한편 비밀결사운동과 문화 종교운동, 3.1운동에 참여했거나 사립학교나 교회 청년조직 등을 통해 민족의식을 배양했던 지식인들과 청년들은 문화운동 속에서 활로를 모색하였으나, 조선의 자본주의적 발전이 조선인의 경제를 파멸로 몰아가는 식민지 현실에서 자본주의적 실력양성론이라는 문화운동 노선의 무망함을 실망하고, 그 일부는 사회주의 사상을 수용한다"(33쪽).  즉 초기의 문화운동, 그리고 후기의 사회주의 운동으로 흐른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즉 1920년 6월경에 마산지역 문화운동의 구심적으로 마산구락부가 창립되는 데, 이는 당시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던 청년회 운동의 일환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조직에는 노장년층의 친일자본가들이 자리를 잡고 있어서, 전투적 민족해방운동을 지향하는 청년층과는 융화되기 어려웠다.  이후 청년 중심의 조직으로 바꾸려는 움직임이 1922-23년에 있었으나, 실패하고 만다.

이에 1924년 6월에 마산구락부 청년들을 중심으로 마산청년회가 창립된다.  마산청년회는 18세-35세로 연령를 규제함으로써 원천적으로 노장년층의 참여를 봉쇄하였다. 마산청년회는 주로 마산구락부 출신들이지만, 상당수는 3.1운동 등 민족해방운동의 경력을 가진 전투적 활동가들이며, 사회주의자나 상업자본가도 들어 있었다.  활동 내용은 마산구락부와 크게 다르지 않았고, 다만, 계몽내용에 반제 반봉건, 사회주의 사상을 포함시키고 있었다.  주된 활동은 강연회, 토론회, 웅변대회, 체육대회, 음악연예회, 동화회 등이었다.  현재로 치면 시민사회단체의 활동과 유사하다.  오히려 건강한 시민단체의 모습을 풍기고 있다.  1925년에 접어들면, 마산청년회 (회원 90여명), 수양청년회 (1925년 1월 창립, 회원 40여명), 형평 청년회 (1923년 5월 창립, 회원 20여명), 어시공조 청년회 (1924년 7월 창립, 회원 55명)의  4개 단체가 연합하여 마산청년회 연합회를 만들었다.

1920년대 후반기의 활동(1926-29년)은 아래에 중외일보에 보도된 것을 참조하면 된다(송성안, 2007, 일제강점기 중외일보 속의 마산, 마산문화원).
마산청년 토론, 성황리에 개최, 26. 12. 8일자 - 토론 주제: 신여성?
마산토론회 성황, 28. 5. 23일자 - 대중교화에 말이냐 글이냐?
마산청년동맹 임시대회, 28. 5. 25일자
마산청맹, 임시대회, 28. 5. 30일자 - 그동안의 무책임한 운영에 대한 인책사퇴시키고 새로이 시작한다.
마산청년동맹, 웅변대회 준비 28. 6. 17일자
마산청년동맹 집행위원회, 28. 2. 20일자
마산청년동맹 임시총회, 29. 2. 21일자
마산청년동맹 집행위원회, 29. 2. 24일자
마산청년동맹, 국제부인데이, 기념강연금지, 29. 3. 10일자
마산서 검거한 마산 정명복, 김형윤 창원손조등, 거제도 권오진등 4명을 석방 (3월 8-9일에 검거), 29. 3. 18일자
마산청맹, 정기위원회 반조직, 29. 3. 19일자
마산 청년동맹이 주최하는 마산시민 춘기 대운동회, 준비회 경과, 29. 3. 20일자
마산청맹 정기대회연기, 경찰의 간섭으로 29. 4. 1일자
마산청맹, 정기집행위원회, 29. 4. 5일자
마산청맹 정총 선언 축문 압수, 29. 4. 9일자
마산청맹, 집행위, 29. 4. 9일자
청맹 간부 구류, 마산서 고등계에서, 29. 4. 15일자 - 김환을 구속, 진주, 동래, 고성의 청년동맹에 축문을 보낸 것
마산청맹, 집행위, 29. 9. 23일자
마산청맹, 추석간담회 금지, 금지 일관의 마산경찰서, 29. 9. 24일자
마산청맹, 재동포 강제귀환 반항과 마산경찰서 고등계 주임의 기괴한 집합금집 이유, 29. 9. 27일자
마산청년동맹 위원회 연기, 경찰의 간섭으로, 29. 10. 19일자
마산청맹, 집행위, 29. 11. 5일자
경남도 청련, 위원회 준비, 29. 11. 16일자 - 29년 6월 이후로 박람회 개최로 당국의 억압이 심해졌다.
공산당원 귀래의 광고첩지도 압수, 이유는 민심소란이다 28. 10. 10일자 - 석방된 공산당원이 청년동맹에서 환영하려는 사건
마산청맹위원회, 29. 8. 13일자

1926년-29년 사이의 청년동맹의 활동을 보면, 일제 경찰의 감시를 지속적으로 받으면서 활동을 하였다는 점, 그리고 마산의 여론을 주고하고 있다는 점, 지역의 다른 사회활동도 결국은 청년동맹의 연게망 속에서 행해지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마산의 주도적인 활동은 이외에도 노동운동이 있다.  이것 역시 상당부분은 청년동맹과의 연계속에서 시작되었고, 조직적으로 발전된 요인이 많다.  물론 노동자와 농민들의 권익을 위한 것이었으므로, 노동자와의 연대, 그리고 자본가는 일본인도 있었지만 한인 자본가와도 다투어야 했으며, 보다 더, 계급의식이 있어서 지역내의 활동이 가능한 영역이었다.

그러면 왜 청년들이 나서게 되었을까?  필자는 노장년층은 한일 합방을 통하여 변절자도 발생하고, 그 책임감에서 자율로울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에 새로운 지역사회의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또한 새로운 청년운동을 주창한 사람들은 그들의 신분적 배경을 본다면 어느정도 유산자이기는 하지만, 새로운 선진 사상을 학습하고 받아들인 사람들이었으므로, 일제라는 상황이 그들의 앞날의 발전에 벽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미래의 발전이 가로 막힌 이유는 바로, 일제의 식민지 라는 사회상황이라는 점을 깨달은 결과로 보인다.  청년들이 이제 지역사회의 미래를 개척하는 주인으로 나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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