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혁명'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09.09.04 중국에서 상류계층 되기
  2. 2009.08.29 사람이 제도를 만든다.
  3. 2009.07.05 사는 곳이 중국으로 바뀐 조선족

중국에서 상류계층 되기

시사/중국 2009. 9. 4. 14:21
상류계층되기는 사회적 상승이동 통로를 의미한다.  중국의 사회이동에 자료를 읽다보면, 두가지 특이한 현상과 보편적인 현상도 발견된다.  특이한 현상은 문화혁명기간과 그 이후의 시장사회주의 시대는 분명히 다른 기준이 적용되었다는 것이다.  즉 문화혁명이전에는 교육이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다.  즉 교육이 관계가 없다는 점이고, 이는 시장사회주의로 넘어오면서 교육이 중요한 사회이동 통로, 특히 시장체제와 관료체제에서는 특히 중요한 요소가 된다.  아마도 문화혁명 기간에는 대중운동 위주의 사회이동이므로, 당성을 평가하기도 여려웠을 것이고, 어찌 보면 가장 적나라한 대중의 폭력적 또는 감성적 성향이 두드러 진 시기라고도 볼 수 있다.  그렇다고 이러한 점이 역사적으로 부정적으로만 평가할 것은 아니다.  중국의 문화혁명기간중에 프랑스의 부르디외는 교육을 폭력이라고 규정하였고, 라틴 아메리카의 종속이론을 이용한 교육학자들(프레이리 등)은 교육을 체제 순응적인 수간이라고 비판하였다는 점을 보면, 당시의 시대적인 상황을 알 수있다.  또한 유럽에서도 68혁명이 대학에서 비롯되면서, 교육의 체제순응적인 성격을 비판하고, 자율적인 학습을 강조하던 시기였다.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이므로, 당연히 당성이나, 당에서의 위치가 사회적으로 중요한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다.  즉 당은 국가 관료체제, 국영기업을 운영하는 것은 물론, 기층 공동체나 조직에서도 어찌되었던 결정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당원이 되는가는 분명치 않다.  다만 당에 대한 충성도, 가족의 당성, 지속적인 당의 대중운동에의 동참 등이 당에서 평가되어 결정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당에 대한 투자를 따라서 상당히 불확정적인 수 밖에 없다.  즉 공산당이 중요한 세력이 지속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진자만이, 이러한 투자를 계혹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일단 당원이 되면, 이제는 사회적인 가능성이 열리게 된다.  도시에 살 기회, 교육받을 기회, 국가의 재분배 기구에서 유리하게 자원을 분배받을 수 있는 기회, 각종 사회적인 혜택을 받을 수 있는기회가 주어지고, 정책 변화의 시기에는 이를 이용하여 자신의 사회적 네트워크를 확산시키거나, 아니면 가족의 다른 구성원들이 사회의 상위계층에 지속적으로 머무를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할 수 있게 된다.  이에더하여 시장사회주의로의 전환의 시기에는 기업의 경영자가 되거나, 사유화과정에서 소유권을 갖게 되거나, 주택의 사유화에서도 이미 다른 이들보다 좋은 질의 주택이나,, 도시에서의 주택을 소유하고 있으므로, 사유화되는 순간 시장가격에서 이익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교육이 보편적으로 사회상승 이동통로가 되는 대개 보편적인 현상이다.  이럴 경우에는 교육받을 기회가 공평한가가 문제가 된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이념적으로는 9연간의 교육이 무상으로 제공되므로, 사실상 교육이 모두에게 공평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많은 이들은 교육이 가정의 재산에 의해 결정되므로, 교육기회가 불공평하다고 말한다.  중국의 경우에도 겉으로는 상대적으로 각 정부의 추천에 의해 국립대학에 입학자격이 주어지고, 이들이 서로 시험을 통하여 경쟁하여 입학하므로, 상대적으로 공정한 기회가 주어지는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실은 도시에 거주하고, 국영기업에 거주하는 이들의 자녀가 교육받을 기회가 더 많고, 집에서 일하지 않고 공부할 기회가 많이 주어지며, 이들을 스크린하여 대학에 입학자격을 줄때에도 역시 사회적 관계가 많고, 당성이 좋은 가족의 자녀들이 입학자격을 획득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따라서 당성과 교육이 상호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이는 한국으로 치면 재산과 강남에 거주하는 것이 자녀 교육의 기회에 영향을 준다고 주장하는 것과 거의 비슷한 논리가 된다.

'시사 > 중국'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적표 훔치기  (0) 2009.09.07
중국의 계급구조  (0) 2009.09.07
해외에서는 한국의 기업들도 노동조합을 인정하고 있다.  (0) 2009.08.31
농민공이 의지할 곳  (0) 2009.08.31
숙련 축적이 가능할까?  (0) 2009.08.31
:

사람이 제도를 만든다.

시사/중국 2009. 8. 29. 07:37

중국 사람들은 그들의 역사와 경험에 따라 그들의 제도를 만들어 간다.  그들의 경험, 공산주의, 문화혁명의 역사가 그것이다. 현재 공산당 총서기인 호금도는 사천성에서 공산당 대중조직인 청년동맹의 책임자로 있었던 사람이다. 즉 대중의 의견을 중시하는 사람이다.  그는 2002년부터 정권을 장악하기 시작했고, 물론 많은 이들이 완전히 정권을 장악하지는못했다고 하더라도, 일단 그의 등장과 더불어 화개사회가 주창되었다.  과거의 성장위주에서 대중들의 삶의 균등한 발전을 강조한 것이다.  법률적으로는 2007년에 사유재산권을 보장하는 물권법도 전인대 상무위를 통과하여 시행되었지만, 또한 노동계약법도 통과되어 2008년 1월부터 시행되게 되었다.  노동계약법의 내용은 한편으로 기업측의 ㅇ의견을 많이 반영하였지만, 주된 내용 중의 하나는 공회(노동조합)의 독점적인 권한을 많이 인정하고, 노동자들의 권리를 감시, 보호하는 제도적인 틀로 만들었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중국에서 노동조합은 직업별, 지역별로 이루어져 있고, 전국적인 수준에서도 구성되어 있다.  이들의 장은 대개 각 지역의 정치협상회의(일종의 상원 격이라고 칭하는 사람들도 있다)의 부의장을 겸하는 경우가 많다.  현재 정치협상의 회의의 5%정도는 기업가들이 아마도 노동자 공회대표자들은 10%정도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 지고 있다.  노동자들의 경우에는 과거의 거의 50% 수준에 비하면 많이 줄어 들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이러한 회의를 통해서 노동자나 기업가들의 이해관계가 표출되고, 타협하는 장으로 기능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아무튼 중국의 공회는 공산당의 하부기구이면서도 동시에 2007년도 노동계약법 제정과정에서 나타났듯이, 그들의 이해관계를 관철시키는 능력을 과시하였다는 점도 분명하다. 이는 중국이 당면한 노사관계(노자관계)가 공회의 통제 범위를 벙서아는 위험한 수준에 도달하였으며, 노동자들도 공회에 거는 기대가 날로 줄어들고 있다는 점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공회의 책임자들의 상당수가 기업측의 일방적인 이익을 옹호하는 사장이나, 부사장, 노무담당자들이 담당하는 것을 보면, 이들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회는 공산당의 하부 조직 기능을 담당하고 있어, 설사 사기업이라고 하더라도 공산당의 입장에서는 공산당에 사기업의 정보가 입수되고, 이들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현실에서는 물론 기업가들이 장악하고 있는 공회, 그리고 공산당 하부기구로서의 공회라는 점의 갈등이 어떻게 진행될지는 관심꺼리이기도 하다.

현재 중국의 노동관련 기사를 보면 크게 두가지 면에서 과거의 문화혁명 당시와 연관시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하나는 문화혁명 당시에 하방했던 지식인들이 농촌에서 나와 도시에서 기업가로 변신하고 있다는 기사이다.  아마도 이들은 문화혁명의 피해자이면서, 등소평 이후의 개방정책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신변의 상승을 꾀할 수있는 기회가 생긴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이들은 도시에서 사영기업을 설립하는 사람들로 등장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와 반대로 문화혁명을 기억하는 또다른 방식은 문화혁명 당시에는 기업에서 노동자들의 조직을 만들고 스스로 운영하였다는 점에서 현재 기업내에서 기업가들에게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는 현실과 비교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많은 이들은 현재의 정권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어서 현재의 호금도 공산당 총서기 정권에서도 노동법에서 공회에게 기업내의 영향력을 강화하게 하여, 과거의 기억을 가진 사람들에게 현 정권도 노동자를 위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려고 하는것 같다.

'시사 > 중국' 카테고리의 다른 글

농민공이 의지할 곳  (0) 2009.08.31
숙련 축적이 가능할까?  (0) 2009.08.31
지구적 수준의 노동착취  (0) 2009.08.27
농촌에서 산다는 것  (0) 2009.08.26
원시적 자본축적  (0) 2009.08.25
:

사는 곳이 중국으로 바뀐 조선족

시사/중국 2009. 7. 5. 14:43

사람들이 자신들이 거주하는 곳을 떠나 낯선 지역에서 정착하는 것은, 유목민의 이동과는 다른 개개인들의 인생에서 중대한 결심을 요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살던 곳이 가족과 친척, 오래사귄 이웃들이 살고 있으므로, 이런 곳을 떠난다는 것은 이사하는 사람들에게는 천지가 바뀌는 사태가 발생하지 않는 한, 아니면, 이들에게 더 나은 세상이 있다는 확신이 있다는 점이 없으면 좀 처럼 떠나지는 않게 된다.  조선족이 중국의 동북 3성 지역인 만주 지역으로 이주하게 된 역사를 보면, 그저 자발적으로 떠났다기보다는 한반도의 현 거주지보다 못한 지역이었으나, 자신이 살고 있는  19세기 조선의 상황이 핍박하기에 떠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1860년대의 중국은 이미, 중국 자체적으로 내부적인 통치체계가 와해될 지경에 이르렀고, 더구나, 동북부 지역은 중앙정부보다는 군벌에 의해 지배되는 지역이 되었다. 더구나 1880년대에 접어들면, 청나라는 조선에 군대와 상인들, 그리고 조선에서 경제적 기회를 엿보며 대거 진출하지만, 반면에 한반도의 조선인들은 새로운 살곳을 찾아 만주와 연해주로 떠나게 된다.

조선역시 일제에 의해 강점 당한 후에는 조선의 토착 양반들의 일부는 일제에 편입되지만, 상당수는 일제에 의해 지역 지배 권한이 박탈당하고, 새로운 희망을 찾아 만주로 찾아 나서게 된다.  경북의 북부 지역에 있던 유림들이 만주로 이동하게 된 것은 그러한 이유일 것이다.  한반도에서는 교육, 산업진흥, 언론 등이 모두 질식되던 상황이었고, 이런 차라리, 러시아에서는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고, 새로운 기운이 싹트고 있었으므로,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였는지도 모른다. 일제가 한반도를 점령한 상황은 이제 만주로 향하고, 만주에서는 조선인들을 만주로보내, 만주의 현지인과 한족들의 중간자로서 사용하려고한다.  마치 영국인들이 동남아에서 현지인들을 내버려 두고, 중국인들을 들여와서 이들을 중간자로 이용하였듯이.  이런 상황은 만주거주 조선인들에게 이중의 어려움을 안겨 준다.  이전에는 조선인들은 경제적인 어려움을 피하기 위해 만주에 건너와서, 항일 운동도 하던 세력이, 이제는 일본의 만주국 건설에 이용되면서 한족이나 만주족이 조선족을 공격하거나, 배척하는 일이 발생하게 된다.  이는 일제가 노리는 수였을지도 모른다.  피지배의 설움과 치욕을 조선족을 통해 토로하게 유도하는 정치적인 계략을 사용하였을 것이다.  아무튼 이런 사태는 여러차레 일제 강점기에 조선족의 몰살을 가져온다.

해방후에 민주에 살던 조선족들은 한반도로 대거 이주한다.  상당수는 지주로서 살다가 중화인민공화국의 토지개혁을 피해, 이주하였을 것이다.  그래도 현재 중국 점유 영토에 거주하는 조선족이 200만 가까이 살고 있다.  1950년 한국전쟁과 1950-60년대에 걸친 북한의 경제 재건 시기에는 조선족들이 대거 북한에 들어가서 북한의 경제 건설의 일역을 담당하였다.  같은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과 북한은 민족의 차이에 대해 매우 관대하게 대했다고 한다.  이는 한편으로 사회주의의 특성이라고 볼수도 있지만, 중국과 북한의 특수한 민족관에 의해 발생했다고 볼 수 있다.  즉 소련의 경우에는 다양한 민족들을 모두 러시아 사람으로 동화시키려는 정책을 취했지만, 중국과 북한은 다른 민족들의 특성을 유지하고, 인정하는 정책을 취했다. 그러나 중국의 문화혁명 기간중에는 상당수의 조선족들이 문혁의 피해를 보았다.  아무래도 혁명의 대중열기에서 가장 희생하기에 좋았던 것이 소수민족인 조선족이었을 것이고, 이들은 사회주의의 보편성, 즉 러시아 식의 동화되지 않은 사람들로 여겼을 것이다. 1992년 중국과 한국이 국교를 맺은 이후에는 중국에는 다시 동북 3성, 그리고 더 많은 숫자가 산동성에 머무르고 있다.  이들 지역은 한반도와 역사적으로 오랜 교류를 해오던 지역이어서 매우 친숙한 지역이다.  중국으로서는 더구나, 한족으로 일컬어지는 양자강과 황허강 사이의 한족의 입장에서는 동북 3성은 항상 중국의 평원을 침략하는 지역이었고, 변경으로서 완전한 통치를 하지 못했던 지역이다.  따라서 이들 지역에 조선족과 이제는 한국인들이 들어서고, 최근에는 북한의 난민들이 들어서는 현상이 염려스러울 것이다.  그래서 이들 지역에 대한 동북 공정, 고구려의 역사와 몽고의 역사를 중국의 역사의 하나로 편입시키고, 중국은 다만족 국가로서의 이미지로 세계 자체가 중국이었던 세계사를 다시 편찬하려고 하고있다.

조선족 역시, 화교와 비슷하게 밀집하여거주하고, 교육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장사도 열심히하는 사람들이다.  그래ㅔ서 동북 삼성에서 오랜 기간 조선말을 사용하면서, 조선의 풍습을 보존하면서 살아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인과 화교는 많은 차이도 있는 것 같다. 조선인의 네트워크는 아직도 편협한 네트워크, 그리고네트워크의 네크워크, 또는 조직화의 기술과 확산정도가 넓지 않아 편협되어 있다.  사업과 금융의 크기도 그다지 크지 않아, 현재의 국제적 상황에 비해서는 적은 규모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한국의 국가나 기업과 중국내 조선족과의 관계가 지나친 기대와 의존, 그리고 이것이 결과하는 실망과 좌절과 배신의 감정을 발생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상호의존은 각자의 힘과 실력이 전제될 때 가능한 것이다.  한국은 보다 보편적인 사회관계를 발전시킬 수 있는 지구적인 규범을 과시하는 데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