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나라'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9.07.02 중화는 누구를 가리키고, 어디에 있는가?
  2. 2009.01.03 열린 바다를 통해 무역과 침략이 동시에 이루어졌다.

중화는 누구를 가리키고, 어디에 있는가?

시사/중국 2009. 7. 2. 07:47
중화는 중국을 세계의 중심으로 여기는 생각이다.  물론 중국이라는 표현은 고유명사라기 보다는 일반 명사이다.  그래서 가운데 나라라고 생각하면 중국이라고 이름을 붙일 수 있다.  마산에 중앙동, 중성동 등이  가운데 동네, 성의 가운데 동네라는 뜻을 지닌 것 같가.  일본의 혼슈 남쪽에도 중국이라는 지명이 있다.  나라의 지명은 대개  역사적으로 자신들의 피치자와 대외적으로 자신들의 위치를 나타내기 위해 고안해낸 말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중국이라는 이름은 한족이 양자강과 황하강 사이를 중심에 두고 자신들의 세계를 외부에 나타내기 위해 역사적으로 형성한 용어이다.

현실 역사에서는 중국은 단일의 민족이 동일한 장소에서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중국이 다시 세계적으로 부상하면서 중국은 자신의 중국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세계 속의 위상을 재정립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노력은 제도나 체제면에서 이루어지기 보다는 대내적 통치 이데올로기와 대외적인 국가간의 관계의 측면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가 각별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  중국은 역사적으로 서북부의 침략을 받아왔지만, 900년경의 거란 이후에는 동북부의 침략을 받아,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 청나라가 들어섰다.  한민족의 중국 역사에서는 이를 침략으로 해석하고 한족의 민족 자부심에 상처를 내는 사건으로 여겼다.  그래서 항상 북방의 이민족에 의해 지배를 받았을 때에는 어김없이 양자와 황하강 주변의 한족을 중심으로 저항운동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 중국은 자신의 역사책을 펴 내면서 이러한 이민족의 지배를 중국의 역사 내로 편입시켰다.  이제 징기스칸의 지배도 중국이므로, 중국 역사책의 표현에 따르면, 중국 역사상 최대의 제국을 건설하였다고 표현한다.  2007년에 몽골 국립대학교를 방문하여 중국교수와 몽골 교수 간의 논쟁을 들은 경험이 있다.  중국 교수는 중국의 내몽골은 몽골말을 가르쳐서 몽골의 풍습을 지니고있는데, 몽골에서는 오히려 자신들의 말을 잃어버리고 러시아 말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징기스칸의 후예를 자처한다는 점을 비판한 것이다.

조금 더 나아가 중국의 동북 삼성으로나아가 보면, 실은 동북 삼성은 중국의 영토라고 보기에는 제대로 통치한 경험이 거의 없었다.  따라서 지금도 동북 삼성은 중국의 입장에서 보면 일제가 만든 만주구 시절의 광산 개발과 중공업의 유산이 그대로 남아 이를 발전시키려는 전략은 있으나, 중국의 중심 산업화는 역시 중국의 중심 해안가에서 이루어지고있다.  동북 삼성은 서부의 발전 이후에 마지막으로 발전 계획이 세워진 정도이다.  따라서 한족의 중국 중앙정부의 사고에는 동북부는 변방에 속하는 지역이다.  다만 이 지역에서 조선인들이 항일 무장 투쟁을 벌였으므로, 중국의 공산당 입장에서는 중국을 방어해준 조선인이라는 매우 중국 중심적으로 보아서 고마운 조선인이었다.  그러나 동북부의 중국인들(아마도 만주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은 별로 중화중심적인 사고를 갖고 있지는 않은 것으로 판단하는 것 같다. 항상 이곳에는 중국의 중심에서 파견된 통치자가 지배하는 인사원칙을 갖고 있다.  이러한 원칙은 소수민족에게도 적용되어 소수민족 자치구의 책임자는 중앙정부의 책임자이고 그 바로 아래 서열에 자치족의 대표가 자리를 잡는다.

중국은 자신의 직접 통치를 위해서도 통치영역을 넓혀 나갔다.  특히 1700년대에 서부지역과 연해주 지역을 자신의 통치 영역으로 편입시켰다.  그러나 동시에 1800년대 중반이후부터는 통치 영역이 외부의 힘에 의해 짤려나가기 시작한다.  일본은 대만에 대해 중국이 아무런 통치를 하지 않으므로, 우리가가져 간다고 선언하고, 유구 열도에 대해서는 중국에 대한 조공을 중지하라고 명령하고 점령하여 버렸다.  베트남는 프랑스가, 버마는 영국이 가져갔다.  중국은 자신의 국가 수도가 1860년 서구 제국의 군대에 의해 파괴당하고, 점령당한다.  조선이 일본에 의해  1876년 강제로 독립된 국가의 지위를 확보하자 이를 막기 위해 1882년에 3천여명의 군사를 주둔시킨다.  조선에 대해서는 북경과 근거리에 위치하여 일본의 침입을 막기 위해 조선을 지키려고노력하였으나, 이러한 힘이 없었다.  궁극적으로 조선은 청나라와 1899년에 독립적인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그러나 1905년에 일본에 의해 외교권일 박탈당함으로써 청나라와의 독립적인 외교관계를 끝을 맺고 만다.  이후에 1992년이 되어서야 한국은 중국과 독자적인 외교관계를 맺는다.  한국과 중국이 독립적이고 대등한 외교 관계를 맺은 것은 극히 짧은 기간이었고, 대부분의 시기에는 조공관계였고, 무력관계였다. 조공관계란 중국은 조선을 무시하였으며, 조선은 외교적으로 중국에 의존하였다.  이런 역사적인 사실은 현재 남북한, 그리고 중국, 일본, 이에 더하여 미국과 러시아까지 끼어든 현금의 한반도 정세를 내재되어 있다.
:

열린 바다를 통해 무역과 침략이 동시에 이루어졌다.

역사 2009. 1. 3. 14:52
고려시대를 읽노라면, 태조 왕건의 웅대한 기상과 동시에 중국에 기대어서 권력을 유지하려는 세력의 등장, 그리고 이에 대한 반동으로 나타난 무신정권, 1200년대 들어 무너져 버린 고려의 역사를 복합적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한마디로 고려는 중국과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려 했다는 제국이라는 성격과 동시에 거란과 금의 침입, 원나라, 홍건적, 왜구의 침입에 시달린 허약한 나라라는 두가지 이미지가 동시에 겹쳐온다.

그러나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할 것은 고려시대는 세계적으로 바다라 열린 시대였다는 점이다.  이 열린 바다를 매개로 해서, 중국의 송나라 시기에 해당하는 고려 초기에는 멀리 아라비아 상인들까지 개경에 들어와서 무역을 했다는 사실, 그래서 개경에는 낙타와 코끼리도 보였다는 점, 우리나라 성씨중 외래에서 귀화한 성씨가 반정도 인데, 그중 다시 반정도가 고려시대때 귀화한 성씨라는 점(고려때 귀환한 사람들이 지은 사대부 문학가으로서는 변안열, 이자란, 설손, 설장수, 설순 등이 있다), 압록강과 두만강변은 뚫려있어서 사실상, 사람들은 넘나들면서 세력다툼을 벌리고 있었다는 점 등을 알수 있다.  물론 최근에는 진도에서 항몽의 기지로 사용된 성에서 발견된 기와와 같은 기와가 오키나와에서 발견되어 아마도 삼별초의 일부가 오키나와(유구)로 피난했을 가능성을 말하고있다.

고려 초기의 거란과 진나라(금나라)가 서양에서 중국을 부르는 이름인 Cathay(China라는 명칭이 정착되기 전에는 Cathay즉 거란이라는 명칭으로 중국 영토를 불렀다.  거란은 중국의 중심지에서 서쪽으로 밀려나서 서양인들에게 중국을 부르는 이름으로 정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와 Chin(현재 중국을 부르는 명칭인 China는 진나라에서 시작했다)으로 시작했다는 점은 당시에 중국에 대해서 서양으로 그 지리적 존재가 부각되던 시기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물론 본격적으로 마르코폴로가 1300년경 원나라의 북경에 체류한 경험을 기록한 책에서 알려지지만, 아무튼 서양과 동양이 본격적으로 만난 시기임에는 틀림없다.  이때 Korea(고려, 현재의 대한민국을 가리키는 말)라는 명칭도 그리고 Japan(일본은 원래 닛폰이라는 명칭으로 일본에서는 불리운다)이라는 명칭도 서양에 들어갔다.

고려시기가 한편으로는 중국대륙과 일본으로 부터 밀려오는 세력들에 의해 유린당한 역사라고 평가할 수도있지만, 동시에 우리가 이에 맞서 해양세력으로 진출하고, 만주의 벌판을 넘나들면서 국가의 자존심을 지키려는 시도를 한 역사로도 기록된다.  또한 중앙국가 체제가 지방에까지 미치지 못하고 날씨가 온화한 시기적인 잇점, 중국의 문물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잇점을 살려 지방농민들은 비록 고립적이기는 했지만, 생산력을 많이 발달시킨 시기였다. 아쉽게도 1200년대이후의 원나라, 홍건적, 왜구의 침입으로 만신창이 되었지만, 지방의 신층사대부들이 고려의 명맥을 이을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음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당시의 마산은 고려시대의 끝자락에서 세금을 거두어 들이는 창고가 있었고, 이를 운반하던 배가 머무르던 곳이었다.  마산의 명칭도 원나라의 말을 기르던 산(아마도 자산동 또는 산호동)에서 비롯된 것으로 전해진다. 마산포는 산호동 방향을 일컫는 것으로 비정되고 있다. 김해에서는 김해에서 원의 요동정벌을 위한 말을 길렀다고 말한다.  마산은 배를 모아서 거제를 거쳐 일본 대마도 규슈로 출발하던 기지역할만 했다는 것이다.  아무튼 마산이 출발기지였으므로, 이곳에 2차레엘 걸쳐 중국의 남쪽 사람들, 원나라 사람들, 고려사람들이 적어도 3만명 정도가 모였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