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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2.02 철도가 마산에 남긴 흔적
  2. 2009.08.25 원시적 자본축적

철도가 마산에 남긴 흔적

역사/1900-1919 2010. 2. 2. 07:04
애초에 철도를 연구하려는 목적은 근대화의 역사에서 철도의 개발은 각 나라의 원시적 자본축적을 가능하게 하고, 시장의 발달과 자원 개발(수탈)을 촉진시켜 자본주의 발전을 가속화시켰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마산과 삼랑진 사이의 철도 건설이 갖는 의미를 탐구하여 하였었다.  물론 사회적으로는 철도의 등장은 철도를 매개로 한 좌석의 평등성(양반 상놈, 남녀노소에 관계없이 동일한 위치에서 앉아서 서로 담론을 나누거나, 아니면 적어도 눈을 마주치면서 장시간 있어야 된다는 사실 그 자체), 시간과 공간 개념의 변화도 중요한 인식세계의 변화를 촉진 시킨 것으로 되어 있다.  즉 당시 1904년 정도의 철도의 속도가 시간당 20Km, 최대 50Km까지 가능하였다고 하더라도, 아무튼 당시까지 나온 어떤 운송수단보다도 빠른 것이었다.  사람의 걷거나 달리는 속도가 최대 8Km정도, 따라서 대개 하루에 40-50Km가 최대한 속도였고, 말을 타고 달리더라도, 대개는 50Km 정도의 속도로 전진하였었다.  징기스칸의 말달리는 속도도 빠르다고 하더라도, 말이 휴식을 취하고, 먹이를 먹고, 적의 저항에 부딪치고, 말에 탑재한 무게를 줄이는 방식으로 속도를 빠르게 만들었었다. 아무튼 기차의 등장은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시공간의 변화를 가져온 획기적인 변화였다.  물론 이런 변화가 이미 영국에서는 1825년경 시작되었지만, 마산에서는 1905년에 마산선이 등장함으로써 시작되었다.

마산선은 애초에는 우리나라의 철도의 선각자인 이기종이 시작하였으나, 자금의 부족, 특히 외자가 필요한 상황에서 일본 자금에 의존하여여만 하는 상황에서 의지만 갖고 될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일본인의 자금, 조선왕조 세력의 후원으로 일을 진행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일본인의 자금이 필요한 이유는 당시는 일본의 경우에도 철도 선로 자재는 해외에서 수입하던 시기였고, 또한 철도 기관차나 수송용차 등 거의 모든 것을 해외에서의 수입에 의존하여야 하는 상황에서 외환이 필요하였다.  또한 측량기사, 터널 공사, 교량공사, 궤조부설, 기반조성 공사, 운영에 관한 상황 등 거의 모든 것이 이미 경인선을 개설하였고, 경부선 공사가 진행중이었지만, 이에 대한 노하우를 아직 갖지 못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 육군은 한일의정서에 의거하여 군용을 목적으로 한 것에 대핸 대한제국정부의 전폭적인 협조를 빌미로, 일본의 육군이 강제로 빼앗아서, 공사를 진행한다.  당시의 경부선, 경의선, 마산선 공사로 인해 일본의 철도건설업자들은 막대한 이익을 취하고, 그 근거는 한국인을 활용한 인력과 대한제국정부가 제공한 막대한 토지를 거의 아무런 보상도 하지 않은 정도의 상태에서 일을 진행하였기에 세계에서 당시까지의 기록에는 가장 싼 철도를 부설하였던 것이다.  그 이익은 대한제국 인민들의 원시적 자분축적이 아닌, 일본의 원시적 자본축적에 기여하였고, 철도 운영의 각종 기술을 익히는 장이 되었던 것이다.

일본외무성 기록을 보관하고 있는, 그 중에서도 아시아 관련 자료를 보관하고 있는 아시아 역사자료 센터의 인터넷으로 들어가면, 마산 사삼랑진간 군용철도 부설 1건이라는 114쪽 분량의 자료가 뜬다.  여기에는 1904년 8월 3일부터 1905년 8월31일까지 외무성이 주고받은 서류가 철해져서 보관되어 있다.  필자는 일본어의 붓글씨체로 쓰여져 있고, 독해에 능하지 못해 완전히 해석하면서 읽지는 못했다.  기회가 되면, 이 자료는 마산에서 번역, 해석하여 자료로서 공간했으면 한다.  지도도 5장이 첨부되어 있다.  마산의 정거장 부지에 관한 것들이다.  정거장 부지 지도를 보면, 장군천의 하류는 현재 시청 옆으로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현대 다파트 방향으로 흐르던 것을 시청방향으로 직선화 시킨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미 당시에 현재의 장군천 시장 앞의 길은 있었고, 새로 현재 시청 앞길을 만들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철도정거장 부지는 각국조계지를 경계선으로 하여, 현재의 시청앞 길과 철도가 만나는 지점까지 소위 신마산 전체를 아우르는 정도의 규모를 지녔었다.  정작 실제로 정거장 시설로 사용한 것은 시청옆의 부터 각국조계지 경계선까지 인것으로 보인다.  당시에는 이 부지는 대부분 논이었고, 여기에 정착한 사람들은 현재 추산동 무학국민학교 뒷산 중턱, 신월동(정거장 부지 경계선 바로 바깥), 그리고 반월동 부근에 마을을 이루고 살고 있었다.  따라서 정거장 부지 용지를 매입하려면 이들 소유의 부지와 마을을 매입하여야 하는 문제가 얽혀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조선정부와 협의를 해야하지만,사실상, 일본이 위협을 내세우고, 협상을 벌이는 양면적인 전략을 구사하였다.

현재의 마산의 도시구조를 보면, 구마산(원마산)에서 3.,15의거탑을 지나면서 부터 정거방 부지, 각국조계지, 그리고 경남대학교 부근부터는 공터, 다시 일본인 전관거류지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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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적 자본축적

시사/중국 2009. 8. 25. 07:48
중국에서 사영기업이 발전하기위해서는 자본이 필요하다.  이런 자본들이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누가 공장을 소유하고 설립하고 운영하게 되었을까?  오랜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한 러시아의 경우에는 자본이 없었고, 독자적인 경영능력과 운영경험이 없었으므로, 초기에 경쟁적 시장에서 사업체를 운영하는 것은 매우 생소한 그래서 카오스적인 상황이 출현하였다.  반면에 중국의 경우에는 현재까지 알려지기는 매우 순조롭게 자본주의체제로 진입하고있는 것으로 판단되고있다.  그러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자본이 형성되고, 경영능력과 훈련이 이루어졌는가에 대한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중국 사회주의 역사를 보면, 지주들, 공장의 주인인 자본가들, 그리고 독자적인 노동조직을 당이나 국가 체제에 두려는 시도에 저항하는 노동자들의 저항으로 얼룩져 있다.  물론 여기에 지식인들과 학생들의 부패한 관료나, 정치인에 대한 저항의 역사도 기록되어 있다.  1949년직전과 직후에 일어난 노동자들의 저항, 1956년에 발생한 노동자들의 파업, 그리고 이어진 대약진 운동에서의 우익에 대한 척결운동, 백화... 운동,  문화혁명, 문화혁명 기간중에 발생한 노동자들의 저항(1966-69), 주은래의 서거후에 발생한 1976년 천안문 시위, 1979-80년의 민주의 벽 사건, 1980-81년의 노동조합의 독립화 운동, 1989년 6월 4일의 천안문 사건 등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사건의 배후에는 여러가지 이유로 노동자, 지식인, 학생들의 저항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1980년대의 중국은 기존의 협동 농장을 가족단위의 토지책임제로바꾸었고, 이에 따른 잉여노동력은 농촌에 기업을 개인이든, 집체형태, 또는 주식이나, 마을 정부와 협력하여 공장을 짓게하여 고용하게 하였다.  이 공장들은 일차적으로 농산물 가공, 그리고 도시 부근에서는 도시의 공장들에 납품하는 부품이나 재료 공장, 하청공장으로 기능하였고, 해안지대의 특수경제구 부근에서는 이 곳에 투자한 기업에 납품하는 형태로 운영되었다.  당시에 국영기업들은 노동계약제, 경영자 책임제, 해고제도가 도입되어 사실상 운영이 국가의 통제 범위를 벗어나서, 적자에 시달리고, 국가의 보조금에 유지되는 형태에 있었다. 또한 경영자들의 독단이 심해지고, 경영자들은 인펠레이션하에서 독점적인 정보를 이용해 사재기를 통해 투기적 이익을 보기도 하고, 노동자들의 불만을 무마시키기 위해서는 노동자들에 대한 혜택을 높이는 각종 수당이나 물질적 공급을 인상시키는 방식을 취하였다.  기본급은 국가가 정하므로 인상시키기 어렵게 되었다.  또한 경영자에게 부여된 노동자 인센티브 제도를 활용하여 노동자들의 불만을 무마시키는 정책을 취하였다.  상대적으로 국영기업의 노동자들은 그래도 상대적으로 안정되고, 총공회(노동조합)에 의해 보호되는 형태였으나, 그럼에도 하강(해고)에 대한 불안이 심하였다.  그러나 직접적인 소요의 원인은 농민공과 같은 불안정한 노동계층에 의해
발생하게 된다.

결국은 도시지역의 경영자들이 일차적으로 그들의 지위와 정보를 이용한 자본축적(공적 지위를 이용한 사적인 이익을 취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와 유사하게 아마도 관료나, 당의 지위를 가진 사람들이 같은 방식으로 국영기업의 자율화, 인플레이션, 국가의 보조금 등의 형식이 많았으므로, 정치적인 방식의 부의 축적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런 형태는 중국에서만 발생한 것은 아니나, 이를 오랜 기간에 걸쳐 이루어짐으로써 다른 사회주의 국가와는 다른 형태의 민족 자본가의 발생이 가능하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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