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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공합작과 항일 구국전선

시사/중국 2009. 8. 5. 16:47

일본은 조선반도를 침략하고, 이어서 만주 (현재의 동북 3성 지역)을 1932년에 침략한다.  이에 대해 중국은 대부분 제대로 된 반응을 보이지 않고, 다만 만주의 군벌인 장작량이 싸우다 패하고, 장개석 군대에 편입되고, 동북의 젊은 이들은 북경에 대학을 이동하여 이곳에서 학업을 계속하게  된다.  일본은 이제 화북지방, 즉 북경(당시에 장개석 정부는 남경에 수도를 정하고 북경은 북평으로 이름을 바꾼다.  즉 수도가 아니라 하나의 도시로 폄하한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장개석 정부는 일본의 침략에 맞서기 보다는 수도를 피난 시킴으로써 벌써 국민들로 부터 항일전에 적극적이지 않다는 인상을 주게 된다) 지역을 향해 침략을 하게 된다.  이런 와중에 공산당은 1935년 1월에 국공합작을 제안하고, 북경의 젊은이들, 특히 동북 대학 출신들 적극적으로 항일 통일 전선을 구축할 것을 촉구한다(1935년 12월).  그러나 장개석 정부는 여전히 공산당과의 싸움을 일차적으로 두고, 항일 전쟁은 후차적인 문제로 다룬다.  나라를 잃어버리는 상황에서도 내전에만 열중하는 셈이다.

장작량의 만주 군대는 장개석 치하에 있지만, 자신들은 만주의 주권을 회복해야만 고향으로 돌아갈 수있는데, 일본과의 싸움에 소극적으로 되자, 휘하의 15만명의 군인들중 많은수가 이미 공산당(홍군)으로 넘어가기 시작한다.  장작량은 내부 군인들의 이탈, 그리고 외부적으로 일본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야 만주의 주권을 찾을 수 있다는 명분 속에서 홍군과 공산당의 근거지 부근인 서안에 장개석 군대의 본부를 차리라는 명령을 받고, 또한 장개석이 서안을 방문하는 계기를 맞게 된다.  1936년 12월이다.  장개석은 이곳을 방문하고, 이곳에서 장작량에 의해 화청지에서 감금당하게 되고, 일주일 만에 풀려나, 장작량과 같이 남경으로 가게 된다.  아무튼 장개석은 남경에서 국공합작을 선언하고, 장작량은 평생 구금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장개석 정부가 실질적으로 공산당과 협력한 것은 아니지만, 공개적으로는 협력을 선언하였고, 홍군도 팔로군으로 개편하였고, 공산당 지배지역은 자치를 실시하는 형식으로 공산당과 국민당의 동거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신사군도 하나의 독립된 게릴라 세력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일본은 남경을 점령하고, 괴뢰 정부를 수립한다.  이런 상황은 중국이 만주국, 공산당 지배지역, 남경 괴뢰 정부 수립지역, 북경 괴뢰 정부, 또하나의 일본 정부, 국민당 정부 등으로 나뉘어져 지배되고 있고, 여기에 게릴라 활동에 의한 군벌 지배가 횡행하고있었다고 보여진다.

중국 국가 몰락의 위기에서 공산당은 일본 지배세력의 바로 코밑에 활동 근거지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선거에 의한 자치정부의 수립, 남경과 상해가 일본에 점령됨으로써 야기된 산업생산의 위기에서 생산자 협동조합 활동의 강화, 공산당의 지배 세력을 전체 지배 세력의 1/3이내로 유지하고, 무기의 부족은 일본군의 무기를 빼앗아서 활용하는 전략 등을 통해 물 속ㄹ에서 헤엄치는 전략을 구사한다.  물론 지도부의 도덕성과 미래에 대한 과학적이고 낙관적인 전망과 믿음, 교육과 주거, 의료 등에 대한 평등 등에 정책이 철저히 실행됨으로써 물과 물고기의 공생이 가능해 진 것으로 볼 수있다.  아무튼 국공합작이란, 실질인 완전한 협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두 체제의 공존을 의미하고, 공통의 적을 맞이하여 힘을 합친다는 점을 의미하는 것 이상은 아니었다.  궁극적인 승리는 이러한 공동의 적을 맞이하여, 인민들을 위한 정책을 개발하고, 마음을 얻었느냐가 중요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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