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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6.28 마산은 언제 시작하였나?
  2. 2009.04.04 1803년 진동의 사회세계

마산은 언제 시작하였나?

역사/19세기 2009. 6. 28. 20:33
한 지역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거주하고, 자신들의 생계를 유지하게 위해 어떤 일을 하였고, 모자라는 물건들은 어디에서 구했고, 오고가는 사람들의 지리적, 사회적 범위는 어느 정도였는가를 이해하는 것일 필요할 것이다.  19세기 마산이라는 도시를 보면, 인근에 창원 도호부가 있었고 창원도호부는 창원면지역이다,  전에는 교통이 낙동강과 바다를 중심으로 이루어 졌으니, 낙동강 가인 현재의 동읍이나, 대산면(당시에는 아마도 김해지역)이 번창하였을 수도 있다.  그리고 바닷가는 마산포쪽에 세금을 거두는 창고가 있었고, 18세기에 접어들면서 생긴 원산 울산 방면의 교역을 위해 마산항이 동해와 서남해를 연결하는 포구 시장으로서 기능하였을 것이다. 물론 현재의 마산은 포구와 다른 항구와의 시장 정도로서 기능하였다.  마산의 중심지는 진동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진해가 오히려 중심지였다.  따라서 현재의 마산은 하나의 마산이라기 보다는 진동지역의 진해와 신마산에 들어닥친 러시아, 영국, 일본의 조차지와 전관 거류구역들, 그리고 구마산은 포구와 세곡항, 창원도호부, 진해 동부의 웅천, 현재 함안 지역인 칠원 지역등이 나뉘어져 있었다.  이는 당시의 교통이 아직 걸어다니거나, 아니면 보부상, 수레나 우마차 정도였다는 점을 이해한다면 거리감이 현재보다 더 컸을 것이라는 점은 이해라 수 있을 것이다.

창원 도호부는 조선 19세기에는 여전히 상당한 경남의 중심지 역할을 담당하였다. 물론 진주나 진남(통영)정도에 미치지는 못했지만, 여전히 광공업, 염업의 중심지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여좌역(북면), 낙동강변의 교통 수로가 활발했던 점을 감안하면 창원의 중요성은 이해할 수 있다.  반면에 마산의 행정 중심지는 진동(진해현)이었고, 현재의 진해는 웅천이었다.  현재의 진해는 일제가 만든 전형적인 도시였고, 마산의 일본인 전관지역이나, 조차지 역시 일제가 만든 전형적인 일본식 도시였다.  따라서 진해와 신마산은 사실상 한반도에 존재하는 도시 형태 중에서 가장 일본적으로 계획되어 만들어지 도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면 진해현(진동)은 10일장도 서고, 주위의 중심 시장으로 기능하였고, 상당한 정도 다른 지역과도 연계되는 시장의 중심지 기능을 수행하였다.

19세기 역사의 이해에서 어려운 점 중의 하나는 객관적으로 상설 시장이 없었고, 5일장 내지 10일장, 아니면 포구에 있는 부정기 시장만 존재했다고 하는 사실, 그리고 18세기에 비해서 시장의 숫자가 거의 늘지 않았다는 사실을 두고 시장이 발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실제의 생활을 보면 시장과 화폐에 관한 것이 일상생활 속에 침투하였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시장이 늘지 않았고, 거래되는 물품이나 화폐(곡물, 동전, 은)이 포편적이지 않았다는 점과 주요 대외무역품은 은, 인삼, 곡물 등으로 한정되었다는 점을 인정하여도, 국내 시장은 상당한 부분 이미 화폐화되어 화폐에 대한 수요가 매우 높았다는 점만은 분명한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 마산은 포구와 세곡선의 항구, 그리고 동해안과 서남해안을 연결하는 교역장소로서 중요해서 도시로서 발전했다는 점을 인정한다.  이는 또한 인근의 지역과 연계가 되어있었다는 점을 추측할 수 있다.  진동과 창원도호부가 역시 그런 독자적인 역할을 담당했다을 것이다.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의 조선조 지리정보시스템에 현재의 구산면이 따로이 행정구역이 설정되어 있다.(칠원으로 쓰여져 있는데 아마도, 구산의 착오인 것 같다).  구산은 창원이나 진해와는 다른 행정구역을 가지고 있었으며, 진해도 현재 당황포가 진해 영역으로 되어 있다.  구산은 아마도 거제와 연계되는 봉수대나 연락처로서 중요한 지점을 차지한 것으로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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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3년 진동의 사회세계

역사/19세기 2009. 4. 4. 11:01
지난 3월 26일 참여연대 행사가 끝나고, 창동 훌러건 뒤자리 자리에서 우무석 시인이 김려의 우해이어보를 읽어보기를 권유받았다.  진동에 유배온 학자가 스스로 표현하기에는 심심풀이로 바다의 어물과 풍경을 기록한 것이다.  김려는 아마도 현재 진동면사무소 부근인 진해현청사 부근에 살고 있으면서, 조그만 배를 타고 며칠씩 나가기도 하고,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보고 들은 바, 그리고 정취를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이를 톨해 당시의 사회세계의 범위를 파악할 수 있을 것 같다.

진동은 매우 어로활동이 활발하고, 그래서 거제도에서 젓갈을 싣고 와서 모시와 바뀌어 가고, 고성에서도 와서 젓갈을 팔고 그랬던 것으로 보아 상당한 정도의 시장이 형성되어 있던 것으로 보인다.  더 적극적으로는 동래의 장사들에게 일본 수출용 어물을 팔기도 하고(대개는 껍질이나 말린 것), 인근 함안, 칠원, 영산까지는 직접 어물을 팔러가기도 했다. 서울의 상인들이 오기도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팔지 않았다고 되어 있다.  그 이유는 세금매길 것이 두려워서 그렇다고 기록되어 있다.  인근의 섬들에서는 어획한 물고기들을 진동으로 가지고 와서 거래하였다.

이러한 활발한 진동에는 많은 외지의 사람이 살기도 하고 거쳐가기도 한다.  우해이어보에 많이 등장하는 인물들은 떠돌이 중과 주막의 여인들이다.  그리고 아마도 저자 김려와 같은 유배온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상당수의 외지인들이 진동에 머물다 떠나고, 이들을 대상으로 주막, 식당, 여인들 장사가 행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진동의 당시 사회는 어장에 대한 소유권이 확립되어 있어 아무나 바다 어장을 차지할 수는 없었고, 가난한 사람들도 부유한 사람들에게 팔수 있는 채소같은 것을 채취하여 화폐로 교환하여 다시 이를 갖고 식량을 구입하는 교환이 발달한 것으로 파악된다.  이로 미루어 보면 진동의 1803년 시기는 화폐경제가 상당한 정도 발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김려는 서울에 비해서 이곳 사람들의 치장에 대해서 촌스럽다고 표현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서울 사람들 흉내를 내기 위해 여러가지 치장을 하는 모습이 보이는 것으로 미루어 외부세계에 대한 상당한 정도의 지식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우리가 봄 도다리라고 부르는 것을 이곳에서는 가을 도다리로 부르고 있다는 점, 그리고 거의 현재의 마산과의 거래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진동과 현재의 마산(당시에는 그래도 마산창이 있었고, 어항도 발달되어 있을 테인데)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이다.  상식적으로는 거래가 있을 법한데도 마산과의 거래에 대한 표현이 전혀 없다는 점은 의아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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