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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3.29 인디언의 학살과 흑인노예를 통해 자유를 얻은 백인들
  2. 2009.01.29 노예의 땀으로 이루어진 자본주의

인디언의 학살과 흑인노예를 통해 자유를 얻은 백인들

역사 2009. 3. 29. 08:11
제목이 자칫 인종주의적인 표현이다.  물론 모든 백인이 모든 인디언과 흑인의 희생위에서 자유를 얻은 것도 아니었다.  상당수의 백인들도 노예, 특히 채무 노예로 살았고, 유럽대륙에서도 채무 노예와 동부 유럽에서는 농노가 발달해 있었다.  그러나 주요한 흐름, 즉 대채적인 흐름은 아프리카의 서중부의 해안가에서 잡해온 흑인 노예들이 아메리카 신대륙으로 유입되었고, 이들이 남미의 광산과 북미의 목화 플랜테이션, 아니 더 나아가 북미의 공장지대에서도 노예들은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혹자는 노예는 아주 오래된 전통적인 제도이므로, 노예가 신대륙으로 유입된적이 그리 특이한 사건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점은 아프리카의 노예들이 부족간의 전쟁을 통해 잡혀서 거래되었고, 실제로도 신대륙으로 백인 상인들에 의해 팔려간 흑인 노예들도 이들 아프리카의 부족들간의 내지 거래를 통해 수집되어 수송된 것은 사실이지만, 신대륙에서의 새로운 수요가 대규모의 노예를 만들어 낸 것만은 사실이었다.

자본주의 체제는 여러가지 의미가 있지만, 가장 핵심적인 동인은 자본의 등장, 돈을 버는 돈의 등장이다. 즉 돈을 벌기 위해 온갖 착취가 가능한 수단이 동원된다는 것이다.  임노동이 추상적인 논리에서는 자본주의의 착취의 기본 원리인 것으로 보이지만, 노예 노동이 가장 기본적인 원리라고도 말할 수있다.  특히 영국이나 미국, 유럽대륙의 일부 발달한 자본주의를 제외하고는 노예노동이 가장 기본적인 공장노동 또는 플랜테이션, 광산 노동의 형태였다고 까지 말할 수도 있다.  자본주의의 등장은 상당수의 백인들이 농촌에서 쫓겨나고, 도시에 몰려들어 무산자로서 살아가게 된다.  이중 성공한 이들이 임노동자가 되었고, 성공하지 못한 이들은 자유노동자, 채무 노예가 되어간다.

흑인 노예들은 실제로 하나의 상품으로 여겨졌다.  영화 만딩고를 통해 보면 잘이해할 수 있듯이, 이들은 아프리카에서 잡혔다고 다 신대륙으로 끌려가는 것은 아니었다.  19세기에 들어서서 상당수의 국가들이 노예무역을 금지하고, 노예 제도 자체를 금지하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여전히 노예의 숫자는 급격히 증가한다.  즉 공식적인 금지가 현실적인 금지는 아니었고, 오히려 증가한다는 말이다. 잡힌 노예들 중에서 가장 일을 잘할 것 같은 흑인들만 노예로 팔려간다.  실제로 노예들의 키를 기록한 것에 따르면, 신대륙에 도착한 노예들은 당시의 백인들보다도 키가 더 컸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강인한 노예들도 보름내지, 한달정도 걸리는 신대륙으로의 여행에서 거의 선반에 쌓아놓듯이 운반하는 체제에서, 똥오줌을 가릴 수 있는 화장실 시설도 없었기에 상당수 아마도 30-40%정도는 죽거나 병들어 버렸다고 한다.  그래도 노예 장사가 이익이 많이 나기에 상당히 성행했던 것 같다.

남미의 경우에는 일찍이 노예제도가 발달하여, 광상이나 농장에서 일을 하기도 하였다. 노예가 많은 도시들의 경우에는 대부분 노예가 전체 도시 인구의 반 이상을 차지하기도하였다.  노예들중 일부는 채무를 갚거나, 노예들도 백인과 결혼하여 새로운 신분이 상승되는 경우도 있었다.  따라서 순수한 백인들 보다는 백인과 결혼한 흑인들이나, 인디언들도 상당수의 노예를 거느리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에 노예를 거느리는 수는 많게는 수백명씩 거느리면서 사업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20여명을 거느리고있었다고 한다.  아무튼 노예가 삶에서 매우 보편적인 현상이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즉 가내 노동을 위한 노예도 상당수가 있었던 것이다.

미국의 경우에도 소작제도나 임차농이 발달해 있었다. 소작제도는 대개 수확량의 1/3을 지주에게 주고, 1/3은 농지 경작의 비용으로, 나머지 1/3을 소작농이 갖는 제도였다.  따라서 미국의 소작제도도 조선에 비해 전혀 착취의 정도가 적은 것은 아니었고, 오히려 더 심한 착취제도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차지농은 땅을 돈을 주고 빌려서 농사를 짓는 제도이다.  공장이나 상점에서 일하는 경우에는 회사로부터 채무를 지게되고 이러한 채무는 자섹에게까지 이어지게 되어 결국 대를 이어서 채무노예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이제도는 미국에서도 거의 1960년대까지 이어지다가 법률적으로 불법화되고 사라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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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의 땀으로 이루어진 자본주의

역사/17-18세기 2009. 1. 29. 13:24

지난 구정 설명절에 히스토리 채널에서 방영하는 1620년에 영국에서 미국으로 건너간 청교도들이 타고 간 Mayflower호에 관한 영화를 보았다.  북아메리카의 뉴잉글랜드지방에 청교도들(영국 국교회를 반대하는 종교도)이 정착하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이 때 설명중에 하나는 당시 북미대륙에는 인디언이 5천만이 살고 있었고, 유럽인들은 2천명정도가 정착하고 있었다고 한다. 물론 1501년인가에 최초로 아프리카의 서부해안가에서 브라질 지역으로 흑인 노예가 팔려가기 시작했다고 전하기는 하지만, 아직 본격적으로 아프리카의 중서부 해안가의 흑인들이 미국 신대륙으로 본격적으로 판매되지는 않던 시기였다.  그럼 대체 언제부터 왜 아프리카의 노예들이 아메리카 신대륙으로 팔려갔을까?

아메리카 신대륙은 미지의 땅이었고, 이곳에서는 광활한 토지에 유럽에서 건너온 백인들이 고국에서 채무노예의 상태로서 밀려서 떠나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상당수는 유럽의 고국을 떠나 앞서 본 종교나 정치적인 이유로 대륙으로 건너온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곧 미지의 대륙에서 농장 주인이 되고, 이들 농장 주인들은 현지에 거주하고 있는 인디언들을 노예로 사용하여 브라질 부근에서 금광을 개발하고, 이어서 은광, 그리고 캐리비안 연안과 부미 대륙에서는 사탕수수, 목화를 재배하기 시작한다.  이에 열대 기후에 강하고, 질병을 잘 견디는 아프리카 노예들을 대량으로 들여오기 시작한다.  1700년대에 가장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현재 추정치로는 아메리카 대륙에 1명의 노예가 오기 위해서는 현지에서는 3명정도의 인명 희생이 따랐다고 한다.  즉 노예를 잡는 전쟁, 내륙에서 잡은 노예를 항구까지 행진시키고, 항구에 보관하고, 배를 태워 보내고, 새로운 지역에 도착한 노예들이 현지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적어도 3명의 희생 후에 1명의 노예가 팔릴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 현재 사학자들이 계산하는 1천2백만(과거에는 1천 5백만명이라고 추정하였다)명이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하기 위해서 약 4천 8배만명의 아프리카 인들이 잡혔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아프리카는 생산인구의 감소, 전쟁 능력의 약화가 이루어져서 결국은 유럽의 국가들에게 식민지화되고 만다. 물론 이 과정에서 유럽의 식민제국들은 아프리카 내부의 균열, 상호 전투를 부추키는 전략을 사용하였다.  현재의 아프리카는 결국 유럽의 식민제국이 만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노예를 많이 잡은 부족, 노예로 많이 잡힌 부족들은 지금도 여전히 상호 갈등을 일으키고 있다고 볼수 있다(유럽 중부 콩고, 앙골라, 나이지리아, 니제르 등 아프리카 서부 중부 연안국가들).

노예들의 활용은 산업혁명전에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영국의 노동자들도 점차 과거보다 많은 노동을 하고, 휴식시간을 짧아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산업혁명 전단계에서 지구상의 노동자들은 더욱 많은 착취에 직면하고 있었다는 점은 분명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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