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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항을 위한 수심측량, 철도를 위한 측지가 침략의 징후였다.

역사/1900-1919 2010. 1. 23. 21:27

조선왕조와 대한제국은 애초에, 그리고 지속적으로 길을 내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이는 외침의 길이 될 것을 걱정한 것이었다.  또한 지도의 발간도 지형보다는 사람과 산출물 위주로 지도를 발간하다보니, 토지의 성질이나 자원의 량을 알아내기 위한 지도는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실은 내치를 위한, 또는 산업화를 위한 지도, 아니 부국강병책을 마련하기 위한 측량과 지도가 없었다고 ㅍ여가할 수 있다.

한반도를 침략하려는 19세기 초반에는 프랑스와 독일, 이어서 영국, 미국, 러시아, 급기야는 일본까지 가세하여, 일단 바다의 수심을 측량하여 침략의 배가 (군함) 바다에 상륙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기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19세기 초반부터 이양선들이 등장하여 바다의 수심은 이미 대부분 측량을 끝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육지를 측량하고 관찰한 것은 실제로 이를 실행에 옮긴 것은 일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상황에 따라 철도건설을 위해, 도로 건설을 위해, 자원파악을 위해, 그 목적에 따라 부분적으로 이루어지면서 한일합방이 이루어 진 후에는 전국토를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완전한 수탈을 목적으로 이루어 진 점이 특징이다.

지난 1월 초 유장근 도시 탐험대 기회에서 허정도 박사는 19세기 말에 일본이 제작한 지도에 상세하게 마산의 모습이 그려진 것을 입수했다고 전언했다.  이는 1895년 12월에 부산에 도착하여 경주로 향하던 러시아 군사시찰단의 기록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이때 러시아는 군함 여러척을 부산에 정박시켜서 시찰단을 통해 전국 방방 곡곡을 돌아보았던 것이다. 이 기록에는 1896년 4월경에 고성을 통해 마산, 창원, 김해, 부산으로 여행하면서 관찰한 장면이 나오고 있다. 
카르네프 외 4인, 2003, 내가 본 조선, 조선인 (러시아 조선장교 조선 여행기), 가야넷: 142-146쪽을 보면 흥미로운 장면이 나온다.

물론 이후에도 일본 육군이 러일전쟁기간 중에 마산과 삼랑진 간의 철도 건설을 위해 부산, 제물포, 마산에 직접 군사조직내의 측량단이 등장하여 마산과 삼랑진 간의 철도 부설을 위한 측량에 착수하여, 삽시간에 완성하고, 1904년 7월경부터 기반 공사에 들어간다.  후에 일본은 한일 합방을 전후하여 본격적으로 츨량사를 전국적으로 보내서, 체계적으로 측지를 하게 된다.  경상남도의 경우에도 비교적 한반도에서는 이른 시기에 측량이 시작되고, 이를 보조하기 위한 측량사로 조선인들을 양성하기 시작한다.

19세기 후반만해도 아직 우리나라의 정부 관료들이 측량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즉 일본이 1892년에 측량한 것은 협약상 권한 밖이지만, 그렇지만, 일본은 경부선을 부설하기 위하 무지한 조선왕조의 외부대신이나 관료들을 상대로 조선의 새들을 잡아서 전세계에 이를 소개하겠다고 하면서, 이를 위해서는 총을 쏘아서 잡아야 하고, 이럴 경우 조선인들이 다칠 위험이 있으므로, 부근에 줄을 쳐서 못들어오게 한다고 하자, 조선의 관료들은 일본의 측량팀이 조선인들의 생명을 위하는 마음이 갸륵하다고 고마움을 전한다.  그러나 실은 이 때 일본은 경부선 부설을 위한 사전 측량을 실시하였던 것이다.
이현희, 2001, 한국철도사 (한국 학술정보): 342-244

측량을 이해하지 못한 조선왕조의 상황을 잘 보여준다.  적어도 50년 이상 바닷가를 측량한 것, 이미 일본과 서구에서 30녀이상 전에 시작한 측량이란 것을 이해하지 못한, 그리고 그들의 침략 의도를 이해하지 못한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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