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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7.06 중화는 패권과 제국으로 유지된다.
  2. 2009.07.05 사는 곳이 중국으로 바뀐 조선족
  3. 2009.07.03 화교 꽌시(관계) 힘의 근원
  4. 2009.07.02 중화는 누구를 가리키고, 어디에 있는가?

중화는 패권과 제국으로 유지된다.

시사/중국 2009. 7. 6. 07:16
중국의 대외정책은 일관성을 찾기가 어렵다.  중국의 대외정책은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군사와 정부의 외교분야, 그리고 이를 조정하고 최종결정을 하는 공산당의 세 군데에서 이루어 진다.  따라서 일관성이 있기 위해서는 최고지도자(최고지도자란 당주석, 대통령, 군사위 주석을 동시에 한 사람이 가지고있을 때)의 일관된 의사가 중요하다.  그래서 중국의 정치에서는 최고지도자의 언사가 항상 중요한 정책의 징후가 된다. 중국은 수 많은 나라들로 둘러싸여 있고, 이들과 끊임없이 국경선 분쟁을 야기해 왔다.  때로는 소련, 베트남, 인도, 대만 등과 전쟁을 통해 국경선 문제를 해결해 왔고, 이런 과정에서 같은 공산주의 국가와도 전쟁을 불사했고, 공산주의에 대한 적인 미국이나 일본과도 수교하는 전략을 사용해 왔다.  따라서 공산주의 보다는 자신의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이념을 이용하였다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북한이 공산주의 국가이면서 동시에 주체 사상을 강조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중국도 모택동의 사후 등소평이 등장하면서, 경제건설을 중심에 놓고, 가능하면 국경선 분쟁을 줄이거나 연기 시키는 전략을 사용한다.  따라서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공식적인 이념으로 빛을 가리고 어둠을 드러내는 전략, 또는 분쟁은 미루고, 공동으로 협력한다는 기본적인 전략을 구사한다.  물론 이것은 겉으로 드러난 전략이다.  이것이 그대로 실행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공식적으로 이런 전략을 채택했다는 것 자체도 중요하다.  과거에는 이런 유연한 전략보다도 주권에 대한 강조가 더 강했던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외부의 국경선 문제나 대외적인 힘을 과시하는 전략을 주로 구사하였기 때문에 그렇다.  이런 와중에 1989년을 기점으로 사회주의 국가들이 몰락하고, 미국 중심의 단극 체제가 힘을 발휘하기 시작하자, 중국은 일단 100년 동안은 참고 경제 건설에 몰입하지는 정책을 만들어 낸다.  당시에는 일인당 국민 소득이 1천달러 수준이 안되던 시기이다. 100년을 참자는 뜻에 조금 섬뜻한 인상이 든다.  다른한편 100년의 목표를 세운다는 점에서 놀랍기도 하다.

그러나 최근에 국민 소득이 3천 달러 수준을 돌파하고, 미국의 경제위기가 시작되고, 세계경제에서 국가의 총생산의 수준이미국, 일본의 다음으로 3위로 떠오른 현금의 상황에서는 중국은 새로운 전략을 구사하는 것 같다.  이미 화평굴기, 또는 책임 대국이라는 표현에서 드러나듯이, 중국은 이제 국제적으로 다른 나라의 일에 개입하겠다는 뜻을 보이고 있다.  이는 일단, 중국이 지구상의 분쟁 지역에 개입하고(최근에는 수단과 버마에 언어로서라도 개입하고, 국제 평화유지군에 동참하였다), 미국도 중국에 대해 국제통화기금에 더 많이 출자하기를 요구하고 있다.  중국이 실제로는 미국에 대해서도 재정적자를 줄일 것으로 요구하는 방식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중국은 이미 항공모함을 증강시키고, 이를 통해 자신들의 에너지 통로인 남아사아에서의 영향력을 강화시키고 있다. 물론 인도 등이 상당한 경계심을 갖고있지만, 아직은 인도는 중국에 상응한 군사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 남사군도의 영유권 분쟁에 이르르면, 이미 중국은 아시아의 해양을 미국을 대신하여 장악하고 있는 보인다.  물론 현재 미국이 이 지역에 손을 놓고 있는 것은 아니나, 적어도 미국이 남중국해에서 중국보다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있다고 볼수는 없다.  미국은 이미 필리핀의 수빅만에서 물러났고, 이제는 오키나와에 주둔하고있고, 한국의 제주도에 건설을 시도할 것 이다. 중국은 이미 한국의 제주도 남난 이어도에 대해서도 중국 해군에서 영유권을 주장한 바 있다.  황해상에서는 북한과 남한 모두에게 해저에 뭍힌 석유 채굴권에 대해 상호 갈등의 요인이 매우 크다.   혹자는 최근에 북한이 이미 황해상에서 석유 개발에 중국과  공동으로 성공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아니면 해저 대륙붕과 연결된 육상에서 석유개발에 성공하여 상당량의 석유를 자체 생산으로 소비한다고 한다.  아무튼 에너지 자원을 둘러싼 분쟁에 의해 이락 전쟁이 발발하였다고 이해한다면, 앞으로 에너지를 둘러싼 분쟁은 더 심화될 가능성이 높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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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곳이 중국으로 바뀐 조선족

시사/중국 2009. 7. 5. 14:43

사람들이 자신들이 거주하는 곳을 떠나 낯선 지역에서 정착하는 것은, 유목민의 이동과는 다른 개개인들의 인생에서 중대한 결심을 요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살던 곳이 가족과 친척, 오래사귄 이웃들이 살고 있으므로, 이런 곳을 떠난다는 것은 이사하는 사람들에게는 천지가 바뀌는 사태가 발생하지 않는 한, 아니면, 이들에게 더 나은 세상이 있다는 확신이 있다는 점이 없으면 좀 처럼 떠나지는 않게 된다.  조선족이 중국의 동북 3성 지역인 만주 지역으로 이주하게 된 역사를 보면, 그저 자발적으로 떠났다기보다는 한반도의 현 거주지보다 못한 지역이었으나, 자신이 살고 있는  19세기 조선의 상황이 핍박하기에 떠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1860년대의 중국은 이미, 중국 자체적으로 내부적인 통치체계가 와해될 지경에 이르렀고, 더구나, 동북부 지역은 중앙정부보다는 군벌에 의해 지배되는 지역이 되었다. 더구나 1880년대에 접어들면, 청나라는 조선에 군대와 상인들, 그리고 조선에서 경제적 기회를 엿보며 대거 진출하지만, 반면에 한반도의 조선인들은 새로운 살곳을 찾아 만주와 연해주로 떠나게 된다.

조선역시 일제에 의해 강점 당한 후에는 조선의 토착 양반들의 일부는 일제에 편입되지만, 상당수는 일제에 의해 지역 지배 권한이 박탈당하고, 새로운 희망을 찾아 만주로 찾아 나서게 된다.  경북의 북부 지역에 있던 유림들이 만주로 이동하게 된 것은 그러한 이유일 것이다.  한반도에서는 교육, 산업진흥, 언론 등이 모두 질식되던 상황이었고, 이런 차라리, 러시아에서는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고, 새로운 기운이 싹트고 있었으므로,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였는지도 모른다. 일제가 한반도를 점령한 상황은 이제 만주로 향하고, 만주에서는 조선인들을 만주로보내, 만주의 현지인과 한족들의 중간자로서 사용하려고한다.  마치 영국인들이 동남아에서 현지인들을 내버려 두고, 중국인들을 들여와서 이들을 중간자로 이용하였듯이.  이런 상황은 만주거주 조선인들에게 이중의 어려움을 안겨 준다.  이전에는 조선인들은 경제적인 어려움을 피하기 위해 만주에 건너와서, 항일 운동도 하던 세력이, 이제는 일본의 만주국 건설에 이용되면서 한족이나 만주족이 조선족을 공격하거나, 배척하는 일이 발생하게 된다.  이는 일제가 노리는 수였을지도 모른다.  피지배의 설움과 치욕을 조선족을 통해 토로하게 유도하는 정치적인 계략을 사용하였을 것이다.  아무튼 이런 사태는 여러차레 일제 강점기에 조선족의 몰살을 가져온다.

해방후에 민주에 살던 조선족들은 한반도로 대거 이주한다.  상당수는 지주로서 살다가 중화인민공화국의 토지개혁을 피해, 이주하였을 것이다.  그래도 현재 중국 점유 영토에 거주하는 조선족이 200만 가까이 살고 있다.  1950년 한국전쟁과 1950-60년대에 걸친 북한의 경제 재건 시기에는 조선족들이 대거 북한에 들어가서 북한의 경제 건설의 일역을 담당하였다.  같은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과 북한은 민족의 차이에 대해 매우 관대하게 대했다고 한다.  이는 한편으로 사회주의의 특성이라고 볼수도 있지만, 중국과 북한의 특수한 민족관에 의해 발생했다고 볼 수 있다.  즉 소련의 경우에는 다양한 민족들을 모두 러시아 사람으로 동화시키려는 정책을 취했지만, 중국과 북한은 다른 민족들의 특성을 유지하고, 인정하는 정책을 취했다. 그러나 중국의 문화혁명 기간중에는 상당수의 조선족들이 문혁의 피해를 보았다.  아무래도 혁명의 대중열기에서 가장 희생하기에 좋았던 것이 소수민족인 조선족이었을 것이고, 이들은 사회주의의 보편성, 즉 러시아 식의 동화되지 않은 사람들로 여겼을 것이다. 1992년 중국과 한국이 국교를 맺은 이후에는 중국에는 다시 동북 3성, 그리고 더 많은 숫자가 산동성에 머무르고 있다.  이들 지역은 한반도와 역사적으로 오랜 교류를 해오던 지역이어서 매우 친숙한 지역이다.  중국으로서는 더구나, 한족으로 일컬어지는 양자강과 황허강 사이의 한족의 입장에서는 동북 3성은 항상 중국의 평원을 침략하는 지역이었고, 변경으로서 완전한 통치를 하지 못했던 지역이다.  따라서 이들 지역에 조선족과 이제는 한국인들이 들어서고, 최근에는 북한의 난민들이 들어서는 현상이 염려스러울 것이다.  그래서 이들 지역에 대한 동북 공정, 고구려의 역사와 몽고의 역사를 중국의 역사의 하나로 편입시키고, 중국은 다만족 국가로서의 이미지로 세계 자체가 중국이었던 세계사를 다시 편찬하려고 하고있다.

조선족 역시, 화교와 비슷하게 밀집하여거주하고, 교육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장사도 열심히하는 사람들이다.  그래ㅔ서 동북 삼성에서 오랜 기간 조선말을 사용하면서, 조선의 풍습을 보존하면서 살아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인과 화교는 많은 차이도 있는 것 같다. 조선인의 네트워크는 아직도 편협한 네트워크, 그리고네트워크의 네크워크, 또는 조직화의 기술과 확산정도가 넓지 않아 편협되어 있다.  사업과 금융의 크기도 그다지 크지 않아, 현재의 국제적 상황에 비해서는 적은 규모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한국의 국가나 기업과 중국내 조선족과의 관계가 지나친 기대와 의존, 그리고 이것이 결과하는 실망과 좌절과 배신의 감정을 발생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상호의존은 각자의 힘과 실력이 전제될 때 가능한 것이다.  한국은 보다 보편적인 사회관계를 발전시킬 수 있는 지구적인 규범을 과시하는 데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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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교 꽌시(관계) 힘의 근원

시사/중국 2009. 7. 3. 11:40

중국인이라는 표현이 애매하기는 하지만, 전세계적으로 어느 나라를 가든 중국인들을 만난다.  물론 중국음식, 중국인 밀집지역, 중국인들이 장악한 소매상 등의 중간 유통망을 목격할 수 있다.  중국인이라는 것은 인구가 13억이나 되는 대단히 많은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고, 때로는 전혀 다른 언어와 역사적 배경을 갖고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인들이 뭉친다는 점은 한편으로 편협된 상태가 아니라, 적어도 세계 인구의 1/5을 뭉칠 수있게 하는 어떤 사회관계의 특이성, 아니면 보편성이 있다는 증거가 될 수도 있다.  따라서 관계(꽌시)는 편협성이면서도 동시에 보편적인 어떤 사회관계의 특성일수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중국인들이 모이는 양상을 보면 대개는 혈연, 지연, 업연이라는 전자 두개의 편협한 축과 동시에 이를 바탕으로 업연으로 나아간 데 특성이 있다.

한반도에 들어온 중국인들은 대개 지구상에 퍼져 있는 복건성 출신도 많이 있지만, 상당수는 인접한 산동성 출신이 많다.  그러나 동남아의 중국인들은 복건성과 광동성 출신들이다.  한국의 중국인들은 대개 1882년 청나라의 구대 주둔과 더불어 들어온 경우가 많고, 동남아의 경우에는 서구 식민지 세력들이 의도적으로 노예노동을 대체하고, 피식민지층과의 직접 거래가 어려운 상황에서 들여온 경우가 많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보면 지구상의 중국인들을 모드 같은 틀로 보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튼 중국인들이 세계에 퍼져서 사는 양상은 한편 그형태에서는 매우 같은 점이 많다.  그것이 바로 혈연, 지연, 그리고 업연을 기본을 삼아 정착한다는 점일 것이다.

과거의 중국은 서구 식민세력에 의해 잡혀가고, 속아서가고, 자기가 살던 곳이 어려워서 가고, 그리고 중국 정부도 이를 방치하던 상태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정착지에서 살아가기 위해 몽치면서 살아 갔다.   현재의 상황과는 매우 다르다.  현재는 중국 인민대표자 회의에서도 화교 위원회가 구성되어 있고, 상무위 정치위원회에도 화교위원회가 구성되어 있어, 의도적으로 해외 화교의 금융과 상업 네트워크를 활용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에 맞추어서 해외 거주 화교들도 중국 투자의 반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적극적으로 중국에 대해 투자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투자가 모두 중국인이기 때문에 하는 자선적인 투자는 아니다.  대부분은 중국 투자에 막대한 이윤이 보장되어 있다고 판단하였기에 하는 투자이다.  그러나 적어도 해외 거주 중국인들이 중국에 대한 투자는 다른 외국인이 하는 투자에 비해서는 다른 점이 있다.  즉 그들을 대하는 중국 정부의 태도가 다르고, 중국도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려는 의지가 있기 때문이다.

한국인과 비교한다면, 중국인들은 해외에서 적어도 싱가포르와 홍콩을 통해 중국인들의 국제 금융을 장악하고있다는 점, 이들은 오랜 기간 동안 정착된 국가에서 상당한 정도의 금융과 상업과 무역을 장악하고있다는 점, 그리고 때로 거주국가에 동화되지 않고, 때로는 정치적 박해를 받으면서 그들의 네트워크를 유지하였다는 특징이 있다.  이러한 네트워크의 특징은 무엇일까?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적어도 이들 사이의 신용, 조정, 통합 능력이 뛰어 나다는 특징을 지닌 것이다.  그리고 한국인들이 상대적으로 개인적으로 사업을 하지만, 중국인들은 가족, 고향사람, 지역 사람들의 길드와 비슷한 사적이면서 공적인 모임을 통하여 사업 분야, 신용공여, 거래 등을 지원하는 체제를 갖고있다는 점이다.  한국 정부는 아직까지 해외 거주 한국인들에 대한 본격적인 지원체계를 갖춘 것으로 보이지는 않으나, 오히려 이것이 해외거주 한국인들이 스스로 자립하고, 그곳에서 한인네트워크를 갖추는 계기가 될 가능성은 없는지 관심꺼리이기도 하다.

중국인 네트워크의 또다른 특징은 작은 단위의 화교 집단이 모여서 커다란 화교조직으로 바뀐다는 점일 것이다.  즉 화교의 대부분은 복건성과 광동성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이들 지역내의 도시나 마을을 중심으로 일차적인 네트워크가 구성되고, 이러한 작은 집단이 다시 커다란 조직으로 바뀐다는 데에있다.  이점은 화교 네트워크의 개방적인 속성이라고 해석할 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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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는 누구를 가리키고, 어디에 있는가?

시사/중국 2009. 7. 2. 07:47
중화는 중국을 세계의 중심으로 여기는 생각이다.  물론 중국이라는 표현은 고유명사라기 보다는 일반 명사이다.  그래서 가운데 나라라고 생각하면 중국이라고 이름을 붙일 수 있다.  마산에 중앙동, 중성동 등이  가운데 동네, 성의 가운데 동네라는 뜻을 지닌 것 같가.  일본의 혼슈 남쪽에도 중국이라는 지명이 있다.  나라의 지명은 대개  역사적으로 자신들의 피치자와 대외적으로 자신들의 위치를 나타내기 위해 고안해낸 말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중국이라는 이름은 한족이 양자강과 황하강 사이를 중심에 두고 자신들의 세계를 외부에 나타내기 위해 역사적으로 형성한 용어이다.

현실 역사에서는 중국은 단일의 민족이 동일한 장소에서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중국이 다시 세계적으로 부상하면서 중국은 자신의 중국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세계 속의 위상을 재정립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노력은 제도나 체제면에서 이루어지기 보다는 대내적 통치 이데올로기와 대외적인 국가간의 관계의 측면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가 각별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  중국은 역사적으로 서북부의 침략을 받아왔지만, 900년경의 거란 이후에는 동북부의 침략을 받아,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 청나라가 들어섰다.  한민족의 중국 역사에서는 이를 침략으로 해석하고 한족의 민족 자부심에 상처를 내는 사건으로 여겼다.  그래서 항상 북방의 이민족에 의해 지배를 받았을 때에는 어김없이 양자와 황하강 주변의 한족을 중심으로 저항운동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 중국은 자신의 역사책을 펴 내면서 이러한 이민족의 지배를 중국의 역사 내로 편입시켰다.  이제 징기스칸의 지배도 중국이므로, 중국 역사책의 표현에 따르면, 중국 역사상 최대의 제국을 건설하였다고 표현한다.  2007년에 몽골 국립대학교를 방문하여 중국교수와 몽골 교수 간의 논쟁을 들은 경험이 있다.  중국 교수는 중국의 내몽골은 몽골말을 가르쳐서 몽골의 풍습을 지니고있는데, 몽골에서는 오히려 자신들의 말을 잃어버리고 러시아 말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징기스칸의 후예를 자처한다는 점을 비판한 것이다.

조금 더 나아가 중국의 동북 삼성으로나아가 보면, 실은 동북 삼성은 중국의 영토라고 보기에는 제대로 통치한 경험이 거의 없었다.  따라서 지금도 동북 삼성은 중국의 입장에서 보면 일제가 만든 만주구 시절의 광산 개발과 중공업의 유산이 그대로 남아 이를 발전시키려는 전략은 있으나, 중국의 중심 산업화는 역시 중국의 중심 해안가에서 이루어지고있다.  동북 삼성은 서부의 발전 이후에 마지막으로 발전 계획이 세워진 정도이다.  따라서 한족의 중국 중앙정부의 사고에는 동북부는 변방에 속하는 지역이다.  다만 이 지역에서 조선인들이 항일 무장 투쟁을 벌였으므로, 중국의 공산당 입장에서는 중국을 방어해준 조선인이라는 매우 중국 중심적으로 보아서 고마운 조선인이었다.  그러나 동북부의 중국인들(아마도 만주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은 별로 중화중심적인 사고를 갖고 있지는 않은 것으로 판단하는 것 같다. 항상 이곳에는 중국의 중심에서 파견된 통치자가 지배하는 인사원칙을 갖고 있다.  이러한 원칙은 소수민족에게도 적용되어 소수민족 자치구의 책임자는 중앙정부의 책임자이고 그 바로 아래 서열에 자치족의 대표가 자리를 잡는다.

중국은 자신의 직접 통치를 위해서도 통치영역을 넓혀 나갔다.  특히 1700년대에 서부지역과 연해주 지역을 자신의 통치 영역으로 편입시켰다.  그러나 동시에 1800년대 중반이후부터는 통치 영역이 외부의 힘에 의해 짤려나가기 시작한다.  일본은 대만에 대해 중국이 아무런 통치를 하지 않으므로, 우리가가져 간다고 선언하고, 유구 열도에 대해서는 중국에 대한 조공을 중지하라고 명령하고 점령하여 버렸다.  베트남는 프랑스가, 버마는 영국이 가져갔다.  중국은 자신의 국가 수도가 1860년 서구 제국의 군대에 의해 파괴당하고, 점령당한다.  조선이 일본에 의해  1876년 강제로 독립된 국가의 지위를 확보하자 이를 막기 위해 1882년에 3천여명의 군사를 주둔시킨다.  조선에 대해서는 북경과 근거리에 위치하여 일본의 침입을 막기 위해 조선을 지키려고노력하였으나, 이러한 힘이 없었다.  궁극적으로 조선은 청나라와 1899년에 독립적인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그러나 1905년에 일본에 의해 외교권일 박탈당함으로써 청나라와의 독립적인 외교관계를 끝을 맺고 만다.  이후에 1992년이 되어서야 한국은 중국과 독자적인 외교관계를 맺는다.  한국과 중국이 독립적이고 대등한 외교 관계를 맺은 것은 극히 짧은 기간이었고, 대부분의 시기에는 조공관계였고, 무력관계였다. 조공관계란 중국은 조선을 무시하였으며, 조선은 외교적으로 중국에 의존하였다.  이런 역사적인 사실은 현재 남북한, 그리고 중국, 일본, 이에 더하여 미국과 러시아까지 끼어든 현금의 한반도 정세를 내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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