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에 해당되는 글 70건

  1. 2010.05.03 행정 경계선 확장의 정치
  2. 2010.04.07 신경민, 2009, 신경민, 클로징을 말하다 (참나무)
  3. 2010.03.27 현실과 상상력, 역사적 진실
  4. 2010.03.10 공산당 수법의 투표, 일제식의 탄압이 3.15를 불러 일으켰다.
  5. 2009.12.14 마찬진 행정통합의 전망 강좌 보고
  6. 2009.11.05 사회적 기업 (공개강좌 광고) 1
  7. 2009.10.07 4대강 살리기의 허와 실 (공개강좌 광고)
  8. 2009.09.15 공산당지배와 강남지배
  9. 2009.09.14 도시 말단 행정단위의 기능
  10. 2009.09.14 인접 국가와 사이 좋은 나라는 없는가?

행정 경계선 확장의 정치

시사 2010. 5. 3. 09:51
2010. 5. 1(토) 오전 11시 15분 - 35분, 전북대 사회과학대, 지역사회학회 2010년 춘계학술대회, "지역사회의 재구조화; 지역개발과 공동체"에서 발표한 내용.

전체적인 주제를 설정하고, 회원들이 각자 자기 지역의 현안주제중에 선정하여 해석을 가하는 형식의 발표가 둘째날에 이루어진다.  필자는 이날 마창진 행정통합을 주제로 받아서 이에 대한 해석을 요청받았다.  이에 대해서는 현재, 드러난 사실과 내밀하게 비공식적으로 논의되는 의제가 이중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겉으로는 행정효율의 문제로 논의되고, 주민들은 내면적으로 재정이나 경제활동이 앞선 창원의 것을 진해나 마산시민들이 무임승차하여 이익을 보려는 심리가 있다.  또한 정치인들의 경우에는 국회의원들이 지역장악력, 시장들, 공무원, 관변단체 등은 자신들의 자리의 보존과 자리에 대한 이해관계, 그러나 중앙정부의 입장은 중앙통치력의 강화에 촛점이 맞추어져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애초에 통합의 논의가 중앙정부에서 시작되었고, 지역민이 요청하거나, 주민투포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따라서 적어도 애초의 추진의 배경은 중앙정부나 중앙정치의 영향력과 의도가 진하게 배어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나 현재, 마창진의 주민 여론조사와 3개의 시의회의 절차를 통해 무난하게 통합이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는 다른 지역에서 보이는 시장들의 이해관계가 상대적으로 통합에 긍정적으로 작용했다는 점, 그리고 지역정치의 이해관계가 중앙정치인들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을 주목한다.  마산시장은 연임제한에 걸려 6.2선거의 출마가 불가능했다는 점, 진해시장은 식물인간으로 직무수행을 못하고있었다는 점이 특이 사안이다.  그렇다고 창원시장이 통합을 찬성한 것은 아니었다.  창원시는 상대적으로 재정과 경제력이 풍무한 상황에서 빼앗길 것이 많은 상황이었고, 나머지 시들의 채무나 열악한 재정과 경제상황을 감안하면, 창원시로서는 당연하게 통합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중앙정치의 입장과 과거에 마산과 통합되어 있었던 경험, 창원의 유력한 시민들 중 상당수가 마산연고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시민들의 입장에서는 마산과의 통합에 긍정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통합과정에서는 함의 삼칠지역이 사실상 마창권이었다는 점, 김해의 장유가 창원으로 출퇴근하고 있는 거주자가 많다는 점, 진해의 웅동지역은 부산권이라는 점등이 통합에 원심력으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아무튼 중앙정부의 의지와 이에 수동적으로 부화한 정당과 국회의원들에 의해 통합의 방향으로 방향이 잡혀졌다.  국회의원의 경우에는 많은 이들이 강력한 시장이 등장하여 국회의원의 권력에 도전할 것이어서 소극적일 것으로 지적하고 있었다.  이는 실제로 국회의원들이 초기에는 적극적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후에 마치 정부의 적극적인 추가적인 재정적 혜택이 있을 것이라는 암시가 뒤따르면서 여론이 조금씩 변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과정을 보면서, 애초에는 공공재 서비스의 효율성, 무임승차, 경제에서 규모의 문제로 논리가 진행되었지만, 이를 추진한 힘은 역시 정치사업가들의 경계선의 정치를 통해 통치를 강화하고, 시민들의 자치력(민주적 제어력)을 약화시키려는 의도가 강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1990년대 중반(김영삼 정부시절, 김덕롱 자치부 장관시절)에도 행정구역 개편의 논의가 있었고, 이때에는 경제력을 강조하면서, 행정계층을 단축하는 문제로 나아갔다.  이때도역시 자치력의 훼손이 효과로 나타나지만, 논리는 규모의 경제과 계층의 다단계로 인한 행정비효율의 제거였다.  그러나 실제로 생활에서 보면, 자치는 작은 단위를 요하고, 경제는 광역정도의 단위를 요하고, 행정은 결국 통치와 자치의 단위로 결절되는 지점이라고 한다면, 대개는 30만 이내가 좋다고 지적되고있었다.  무리한 수를 쓰면서까지 110만인구권의 통합창원시를 성립시킨 이유는 무엇인가? 

현재 마산이나 진해 시민들은 상당한 정도의 박탈감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시청청사, 통합시 이름, 한나람당의 시장후보자 등이 모두 창원으로 정해졌기에 그렇다.  여기에 구체적으로 통합시 선거 공보에 창원시 가나다라 등은 창원시를 가리키고, 창원시 차카타파하 등은 마산시, 창원시 거너더러 등은 진해를 가리키게 되면서, 이제 마산이나 진해를 잃어버렸다는 상실감과 동시에 순서기호에서 나타나는 창원시의 주변부로 전락되었다는 느낌을 동시에갖게 되었다.  여기에 일부 구창원 시 인근의 마산이나 진해의 지역민의 추가적인 이익을 기대하는 것에 비해서, 다른 지역의 경우에는 경제가 더욱 주변화할 것이고, 구체적으로 마산이나 진해 시청인근은 이제 상권이나 유흥음식업, 행정서비스 사업이 침체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도 현재로서는 경계선을 확장하는 것은 결국, 새로운 지역 정체성을 형성하고, 이를 기반으로 울산이나, 다른 대도시와의 경계선을 새로이 긋는 작업이며, 적대적인 감정을 기반으로 통치의 권력을 넓힘으로써 중앙권력의 강화하고, 대신에 주민들의 정치적인 참여와 저항을 쉽게 진압하고, 시민들은 관료제의 더 기다란 고리에서 무력감을 맛보고, 결국은 주민들의 참여의지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대규모화의 정치가 그렇듯이, 실제로 이런 효과가 나올 지는 장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대규모의 정치는 다른 한편 대규모의 저항을 잉태하고 있기에 그렇다.
:

신경민, 2009, 신경민, 클로징을 말하다 (참나무)

시사 2010. 4. 7. 10:52
신경민 앵커가 그만 두던날, 나는 그에게 이메일을 날렸다.
고생했다, 시간되면 마산에 한번 와라.

지금 복잡하다.  나중에 보자라는 식으로 답이 온 것으로 기억한다.
최근에 책도 나오고 해서, 다시 한번 저자와의 대화 형식으로 한번 오는 것으로 추진했더니,
잘 될 듯하다, 다시 무산되었다.

예전에 경남대 사회학과 학생들의 진로를 위한 강의에 한 번 초대한 일이 있었는데,
그 때 강의에서도, "화면의 사실과 현장의 진실"에대해 말한 기억이 있다.
그래서 언론게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사실을 통해 진실을 파악하는 시각과 훈련이 필요하고
그런 의미에서 사회학적 시각이 유용한다고 강의한 것 같다.

오늘 그의 책을 읽어 보았다.
책은 라디오 뉴스 진행자와 테레비젼 앵커로서 한 클로징을 모아놓으면서, 그 이면에 깔린
그의 생각을 넣는 형식으로 쓰여져 있었다.
그는 국제전문기자로서 활동을 많이하였으므로, 해외의 언론, 정부의 위기대처나 발표방식, 정보의 수집과 해석 등에 대해 꿰 뚫고 있다.

그런 내용들이 최근에 발생한 사건을 중심으로 서술되어 있다.
우리가 놓쳐버리기 쉬운 사건의 정보, 사실, 진실이 기록되어 있다.
현실을 보는 방식을 배울 수 있었다.
뉴스를 듣기만 하지 말고, 읽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

현실과 상상력, 역사적 진실

시사 2010. 3. 27. 10:58
어제 밤에 서해해상에서 우리 초계함이 침몰한다는 뉴스를 간간히 보면서, 동시에 누나의 3월을 시청하였다.
필자는 지난 17일에도 3.15아트 센터에서 뮤지칼 "삼월이 오면"을 보았다.  필자는 이미 3.15의거에 대해 필자가 참여한 3.15의거사의 후사 부분을 집필하고, 3월 15일의 사건에 대한 2편의 논문,  그리고 2차 의거와 대강을 노트하여, 한권의 책 [근대마산](2004, 경남대 출판부)를 출간한 바 있다.  또 현재 3.15 50주년 기념사업 분야 중 학술편찬 분과를 맡아 일을 하고 있어, 상대적으로 다른 이에 비해 세세한 사실부터, 역사적 진실을 찾는 제 주력하고 있는 편이다.  따라서 뮤지칼이나, 드라마는 분명이 부분적 사실에 근거하여, 작가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현재 우리가 부딪친 역사적 정신을 되살리려는 의미가 있다고 보고 있다.  우리가 살면서 경험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어느 누구의 삶이든, 만나서 얘기하면, 그야말로 한편의 장편 대하 소설감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대하 소설을 만들만한 역사적 배경을 깔아야 가능한 것이다.  그냥 혼자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사고방식, 대한민국의 지배층의 동향, 미국에의 의존도, 주변 세계의 동향을 동시에 파악하여 그 의미를 찾는다면 대하소설이 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뮤지칼의 구성은 기본적으로 보리수 다방의 마담-오성원-방직공장 여직공을 축으로 스토리가 진행되고, 누나의 삼월 역시 다방 레지-동생(북마산 방화범으로 몰린 민주당 당직자 자제분)-민주당의 젊은 당원-경비주임이자 당시 김주열의 시체를 유기한 박종표로 이어지는 스토리를 축으로 삼고 있다.  흥미로왔던 점은 두편 모두 다방의 마담과 레지를 나레이터로 등장시켜, 마산의 역사는 다방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역사적 진실을 어느정도 보여주고 있다.  신마산의 외교구락부 같은 다방은 강자들의 거래처로, 구마산의 다방들은 서민들의 애환이 벌어지는 곳이라는 진실을 담고있다.  뮤지칼이 상대적으로 마산의 떠돌이들을 주축으로 삼은데 비해, 누나의 삼월 역시, 마산의 지식인(민주당의 젊은 당원)과 하층민(레지와 그의 동생), 그러나 아마도 박종표는 마산 사람은 아니었을 것이므로, 외부의 억압을 담당하는 세력으로 등장하는 셈이다.  그래서 대결구도를 외부인의 억압과 지식인과 하층민 내부인의 대결구도로 그려놓았다.  어느정도 진실이다.  그러나 내부의 지배자들인 반공청년단, 내부의 정치인들(자유당), 공무원들의 강력한 도움이 있었다는 점도 기억하는 것이좋을 것이다.  반면에 내부의 저항자 그룹 중에 하층민과 학생들이 부각되고 있어 상대적으로 역사적 진실에 부합되는 것으로 볼 수있다.

3.15의거에 대한 기록은 김태룡(1962)의 것이 가장 내부자의 관점에서 객관적으로 전체를 조망하는 방식으로 서술되고 있다.  외부자의 관점에서 3월 15일 의거 소식을 서울에서듣고 동아일보 기자로서 취재한 이강현(1960, 새새벽 5월호 소수)의 글은 외부자가 마산에 도착한 16일부터 13여일을 머물면서 취재한 것을 서술하고 있는데, 이 역시 외부자의 관점이기는 하지만, 가장 충실한 기록으로 볼 수있다.  마산일보사의 책(1960. 6. 15일까지의 기록을 신문기사와 자료를 중심으로 모은 것)은 당시의 신문 보도를 통한 인쇄된 기록을 수집하여 놓은 것이다.  이들 세가지 자료가 원자료로 볼수 있으며, 그후의 증언과 일기를 읽어보면, 현실은 실은 이번에 나타난 작가의 상상력보다도 더 진실하다는 점을 알 수있다.  상상력은 있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사실감)이 아니라, 이를 통해 당시 사람들의 감정과 느낌과 고뇌, 공포감과 용감성, 이웃에 대한 정의를 보여준다고 한다면, 보다 피비린내, 총성과 고문의 신음소리, 총을 쏠때의 공포감, 경찰과 반공청년단의 무자비한 폭력을 보여주는 것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공산당 수법의 투표, 일제식의 탄압이 3.15를 불러 일으켰다.

시사 2010. 3. 10. 10:44
어제 오후에 KBS창원 방송에서 3.15의거 국가기념일 제정 토론회에 참석하러 갔다.  이 프로그램을 담당한 방송작가가 김주열의 시체사진과 또 다른 사진을 들고 시민들에게 물어 보았더니, 일제시대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냐고 응답하였다고 한다.  듣고 보니, 그렇다.  왜냐 하면 3인조 5인조의 상호 감시 투표를 생각해 낸 사람은 공산교육을 받고 그 수법을 모방한 것이고, 김주열을 사살하고, 시체를 유기하여 바다에 넣은 자도 일제시대에 한인을 고문하고 유기한 경력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이다. 

1960년 3월 15일 투표 당시의 상황에 대해 마산일보사, 1960, [민주혁명: 승리의 기록, 마산의거와 4월 혁명의 성공(마산일보사)의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16-17쪽).
"3.15 정부통령선거의 새벽 동녁은 텃다.  이날 아침 시내 47개 투표구에서는 상오 7시 부터 일제이 투표가 개시되었다.  투표소부근 및 10미터 통로지점에는 새끼줄을 늘려 놓고, 정복경찰관과 완장낀 종사원이 통행인들을 점검하였고, 투표소 경내와 입구부근에는 공무원 완장을 낀 종사원들과 사복경관들이 감시하는 가운데, 일부 투표소에서는 유권자들이 산발적인 투표를 했는가 하면, 일부투표소에서는 삼엄한 분위기속에 조직적인 시간별 방별투표로써 흰 자유당 완장의 남녀노장유권자로 장사진을 이루었다.
반월동 제 1투표소의 경우는 그야말로 빈틈없는 방별투표가 진행됨으로써 급한 용무로 아침 일찍 투표소에 간 유권자의 개별적인 투표로 거부했고, 번호표도 방장이 장악하고있는 관계로 시간전에는 개별적인 투표행동은 있을 수 없었다.  반월동 제 2투표소에서는 산발적인 투표진행을 했으나, 기자의 투표광경 취재의 요청에는 불응했다.  간혹 사복경찰관들의 순찰차량이 오고가고 했는가 하면, 공무원 완장을 종사원들은 '뉴스맨', '후랫슈'를 극도로 저지하면서 투표소 부근에 오래 머물고 있는 것마저, 꺼려하는 경향으로 전체 선거 분위기는 전례없는 공포 속에 몰아넣는 가운데 진행되었고, 일부 투표소에서는 야당참관인을 강제축출 한데 대해 소동을 야기시키는 등 어색한 일면도 보였다".

이러한 선거를 기획한 사람은 당시 자유당 조직위원장 이존화다(마산일보사, 1960: 118).  이존화는 "3.15 부정선거 강행에 있어서 3인조 및 5인조 공개투표의 창안자로 일약 유명해졌다.  애당초 별로 알려져 있지 않은 그가 자유당의 조직위원장으로 지명되었을 때 자유당 내에서도 놀라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는 3인조의 실시로 조직위원장으로서의 권위를 과시했고, 이정권의 공신으로 등장했다.  이기붕은 그후 그를 지극히 신임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공산교육을 받아온 자다.  남로당원으로서 대구 10.1 폭동 주모자라고까지 알려져 있다.  19세시에 고향인 완주를 떠나 만주에서 봉천학원을 졸업했다.  그는 거기에서 공산당식 훈련을 받으며, 공산주의 정신에 침투되었든 자라 한다.  그래도 그는 독립운동을 했다고 했다고 자부하면서 8.15이후 남로당원으로 암약을 해 왔던 것이다.  그후는 보도연맹에 가입되어 6.25 당시에는 겨우 생명을 유지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3인조도 그의 공산당식 수법이 되살아난 결과인 것이다.  어쨌든 그가 관제공산당 조직의 명수인 자유당의 조직원장까지 되었으니 자유당 안하는 사람은 모조리 빨갱이로 몰렸을지도 모를일이다.  어쩌면 이러한 공산당식 수법을 채용하면서까지도 정권을 연장해 보겠다는 자유당의 지긋지긋한 저의는 이미 민의가 그들과는 먼 거리에 있었다는 것을 너무도 잘알고 있었기 때문일까?"(1960. 5. 29일 국제신문을 인용).

김주열을 살인하고, 시체를 유기한 자도 역시 일제시대의 악덕 경관이었다(사단법인 3.15의거 기념사업회, 2004, 3.15의거사: 394-395).   박종표는 일본 헌병출신이었다. 일정 때 그의 이름은 아라이(新正 )로서 아리이 고조라고 불리웠다. "그에게는 허다한 죄상이 있으나, 그 중에 정장호 학살사건이 유명하다".  1945년 6월 어느날, 부산에 거주하고 있는 정장호의 집에 가서, 정장호를 체포하고, "닷새동안 모진 고문으로 빈사상태에 이르게 만들고"는, 탈옥도주를 가장하여 헌병대 뒷담으로 밀어던지고 말았다.  "집대문간에 들어서자 마자 정장호는 피를 토하고 쓰러진 정장호는 조국 광복을 보지 못한채, 저승길로 떠났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박종표에게 김주열을 죽이고, 시체를 유기하는 것은 일제때부터 내려온 경찰의 관행이었던 것이다.
:

마찬진 행정통합의 전망 강좌 보고

시사 2009. 12. 14. 11:48
지난 금요일 12월 11일 오후 7-9시, 시와 자작나무에서
경남대 행정학과 옥원호 교수님을 모시고,
당일 오전에 창원시 의회의 결의로 거의 확정된
창마진 (요즘 주요 신문에 이렇게 부른 답니다)의 통합의 전망과 과제에 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첨부 사진은 김경년씨가 촬영한 것입니다.
저는 목요일 저녁에 창원에서 사람들을 만났을 때,
토요일에 이선관 시인의 추모 행사를 마치고 창동의 장안 갈비에서 동료분들과 식사하면서,
그리고 어제 일요일에는 무학산을 완월폭포, 능선, 벚꽃나무 샘에서 하산하여 둘레길로 돌아오면서
산행하시는 분들의 마창진 통합에 대한 관심이 뜨거움과 동시에 해결하여야 할 일도 많구나하는 점을 느꼈습니다.  주로 통합 도시의 명칭, 그리고 통합시 청사에관한 것이더군요.  조금 더 시간이 흐르면, 이제 조직다툼이 심해질 것입니다. 공무원, 관변단체들, 시의회 의원들, 국회의원들... 그 동안 각 시청과 맺은 인연이 많은 각종 기업들 (시청에 납품하는 업자들, 시내버스, 청소관련, 아니 각종 평가등과 관련된 용역서비스 제공하시는 분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

사회적 기업 (공개강좌 광고)

시사 2009. 11. 5. 14:31
2009년 11월 13일(금) 오후7-9시
마산시 구 중앙극장 맞은 편 김형준 치과 옆 건물 1층 시와 자작나무 카페에서

최영숙 (마산시청), "사회적 기업의 현황과 전망"

경남대 NGO협동과정 동문회와 전공이 공동 주최하는
공개강좌가 있습니다.  많은 관심과 참여를 기대합니다.
사회적 기업은 아마도 5-6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도입된 제도로서,
시장 거래의 대체적인 수단의 하나로 공공 분야에서 도입되었습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느끼고, 지적하고 있듯이 시장 거래에서는 물질적인 거래와 투입을 강조하고 있으므로
공동체의 삶이나 개인의 삶의 질이나, 행복에 도움이 되는 성과나, 장기적인 지속가능성과는 전혀관계가 없고,
때로는 해독을 끼치기도 합니다.  이런 점에서 사회적 기업은 시장경제에 대한 하나의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이번 기회에 삶의 불안함과 불편함을 느끼시는 분들은 사회적 기업에 관심에 대한 정보를
얻기를 기대합니다.

경남대 NGO협동과정 동문회장 이정국
주임교수 이은진

당일 사진 모습을 김경년씨가 어제 저에게 보내주셨습니다.
김경년씨 (창동아주메)가 전언한 바에 따르면, 당일 주부님들의 관심이 많았었고, 조용두씨가 함안에서 싱싱한 딸기를 가져와서 더욱 빛이 났다고 합니다.


:

4대강 살리기의 허와 실 (공개강좌 광고)

시사 2009. 10. 7. 17:45

10월 9일(금) 오후 7-9시, 시와 자작나무(구 중앙극장 맞은 편, 김형준 치과 옆 건물)에서
경남대 NGO협동과정 동문회에서 주최하는
공개강좌, 양운진 (경남대 교수)의 "4대강 살리기의 허와 실"가 진행됩니다.

잘 아시다시피,
법률적인 환경평가, 재정 평가(조달 및 경제성) 등도 무시한채
미래세대에 회복될 수 없는 피해를 줄수 있는 4대강 살리기 사업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운하-> 살리기로 바뀐채 사업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우리 말을 다시 배우고 있습니다.  죽이기가 살리기로 별다른 설명없이 하루만에 바뀌어서 사용되고 있고, 공무원의 전조직과 막대한 재정을 투입하여 이를 홍보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논의는 없고, 일방적인 홍보만을 일삼고 있는 형편이라고 이에 대한 제대로 된 정보를 구하기 힘든 상황입니다.
이에 물에 대해서는 우리 지역의 전문가이신 양운진 교수님을 모시고, 공개강좌를 개최하게 되었습니다.
아무쪼록 이를 기회로 우리지역에서도 과연 앞으로 칠서정수장에서 낙동강 물을 취수할 수 있는지, 살리기 사업을 하면 주변에 개발이되어 땅값이 뛸지, 자연은 어떻게 훼손되는지, 수익성은 있는 사업인지 등에 대해 들으실수 있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경남대 NGO협동과정 동문회장 이정국
주임교수  이은진

:

공산당지배와 강남지배

시사/베트남 2009. 9. 15. 22:07

필자가 1997년 7월에 베트남 호지민 시 근교의 송베에 소재한 open university의 캠퍼스에 한달간 머무르는 기간중인 7월 20일에 베트남의 국회 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당시 선거는 아마도 조국인민전선에서 후보자를 국회의원 정수의 1.5배를 내놓고, 이를 대상으로 주민들이 중선거구제 정도의 투표를 실시하는 형태이었다.  투표권자는 18세이상이고, 피선거권은 21세였다.  물론 스스로 후보자가 되는 방법도 있으나, 현실적으로는 매우 불가능한 상황이다.  전국에서 아마도 5명미만이 당선된다고 한다.  조국인민전선은 공산당이 주도하면, 대중조직들(여성동맹, 노동조합 등)이 공동으로운영하는 조직이다.  이들 조직은 물론 공산당원 뿐만 아니라, 비공산당원들의 후보자 추천도 받아서 후보자를 유권자들에게 제시한다.  그러나 역시 공산당원이 아닌 사람이 당선될 비율은 전체 국회의원 중에 10% 미만이다.  1997년에 당시의 국회의장은 비공산당원의 비율을 20%정도까지높이는 방안을 강구한다고 말했지만, 그후 5년마다 실시되느 선거를 보면(2002년, 2007년 5월 20일) 오히려 비공산당원의 비율은 줄어들었다.  공산당원들의 국회의원 진출이 더욱 늘어나는 추세인 것이다. 전체 인구의 3% 만이 공산당원이면서, 이들이 나머지 97%에 해당하는 비공산당원들에게 국회의원자리를 주는 것은 쉽지 않은 것 같다.

북한이 전 인구의 10% 정도, 중국이 7% 정도가 공산당원이라고 한다면, 베트남은 상대적으로 적은 셈이다. 그 대신, 제도상으로는 조국인민전선이 추천하지 않고 스스로 자천하여 후보자가 되어 유권자가 선출한 국회의원이 1명이 있고, 비공산당원의 비율도 7%정도는 되므로, 한편으로는 중국보다는 개방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중국은 공산당원의 비율은 더 높고, 그 대신 공산당원 끼리의 경쟁을 강화하는 형태로 나아가는 것 같다.  베트남은 또한 국회, 그리고 성단위, 그리고 아래도 2개의 하부 지방단위에서도 선거를 통해 의원을 선출하고 이들이 다시 인민위원회( 즉 지방정부)를 구성하는 제도이므로, 중국보다는 더 민주적인 선거가 많은 것으로 보인다.  흥미로운 점은 한국도 끝자리가 2. 7자가 들어가는 해 12월에 대통령선거가 행해진다.  중국도 바로그해에 아마도 10월경에 공산당의 정권교체가 발생한다.  베트남은 국회의원선거가 실시된다.  한국, 중국, 베트남 모두 5년마다 선거가 행해지는 주기를 갖고 있다.  시기는 베트남이 5월 또는 7월에 중국이 10월에 한국이 12월에 선거가 행해진다.  국제적인 선거를 통한 정권의 교체가 강대국의 영향을 받아서 다른 나라로 성향이 바뀌는 것을 감안한다면, 앞으로 한국의 선거는 중국의 영향을 받을 가능서이 높아지고 있다.  한국의 2007년 12월 선거가 미국 부시의 강경노선을 본받은 정당한 한나라당 후보자가 당선되었지만, 미국의 2008년 하반기의 선거에서는 민주당이 당선되어 한국인이 선택한 정당의 성향과 어긋나 버렸다.  이어서 일본은 최근에 민주당으로 정권을 바꿈으로써 미국의 정권교체와 보조를 맞추었다.

공산주의 국가의 경우에 시장사회주의 체제로 넘어가면서도, 정치면에서는 끝까지 공산주의 일당체제를 고집하고 있다.  그리고 과거의 공산당 간부들이 그 혜택을 독점하고있다고 학자들은 분석하고있다.  따라서 사실상, 공산주의 시러이나, 그 이후의 시기에 지속적으로 국가 지배체제의 윗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의 경우, 국회의원이나 정부의 관료들을 보면, 대개 강남거주자들이 많고, 대통령을 비롯하여 위장전입을 통하여 강남으로 몰려 들었다.  강남의 인구의 대한민국 전체인구의 1%정도가 된다면(48만명정도?), 나는 대한 민국이 사실상 1%가 지배하는 나라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곳에 살든, 살지 않든, 실제로거주하든 위장으로 거주하든 강남에서 살아야만 지배층이 될수가 있기에 그렇다.  독일이나, 영국의 경우에는 부자는 경제를 지배하고 운영하고, 경제적 약자는 정치를 지배하고 운영하고 하는 분업체제를 통해서 국가의 통합을 유지하고 있는 점을 보면, 어느 나라의 정치가 더 사회통합과 안정에 유리한가를 판정할 수 있을 것 같다.

'시사 > 베트남'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접 국가와 사이 좋은 나라는 없는가?  (0) 2009.09.14
:

도시 말단 행정단위의 기능

시사/중국 2009. 9. 14. 22:07
중국에는 공산당의 조직이 말단 행정단위까지 구성되어 있다.  우리로 치면 동단위 정도가 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행정단위인 가도판사처가 있고, 주민들의 자율적인 조직 격인 거민위원회가 있다.  거민위원회는 자율 방범대, 마을의 분쟁 조정, 과거의 통반장처럼 이사오는 사람에 대한 등록확인 등의 다양한 기능를 수행한다.  이들 거민위원회는 중국의 일부 성시에서는 주민들이 선출한다.  주민들의 선출제도는 이미 농촌의 경우에는 실시되고있으나, 도시에서는 지방정부의 결정에 의해 실시여부를 결정하고 있다. 물론 거민 위원회의 경우에도 공산당의 말단 조직이 이를 통제하고, 상당수의 경우에는 공산당원들이 주요 직책을 장악하거나, 직전 진출하는 경우가 많다.  최근에는 중국 공산당 서기와 같은 직책도 주민들이 선출하는 제도로 바꾸고 있다.

중국의 도시는 이제 많은 이동민들이 살아가고 있다.  전체 도시민중에 반 이하가 도시호구로 등록되어 있고, 나머지는 농촌이나 다른 곳에서 이주온 사람들이다. 따라서 동네에는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고, 설사 오래 살던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과거처럼 거민위원회 사무실에 잘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상당수의 거민위원회는 사구별로 소비협동조합식으로 가게를 운영하기도 하고, 놀이를 활성화시켜서 마치 우리나라의 노인당처럼, 차대접도 하고, 마작같은 것도 하고, 약간의 도박같은 것도 하는 경우가 많으나, 여전히 주민들의 참여율은 낮은 편이라고 한다.  중국 정부의 입장에서 보면, 과거처럼 단위를 통한 주민들에 대한 이동 파악이나, 등록상황 파악이 어려운 상황에서 이제 사구 단위에서의 국가 통치체계를 만드는 것은 국가유지를 위해 필수적인 상황이 되어 가고 있다.  그럴수록 인구의 이동상황을 파악하기가 어려워지고있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나라의 겅우에는 동네에는 반장과 통장이 행정의 입장에서 보면 가잘 말단의 행정단위라고 표현하고있다.  물론 본인들 이것을 행정공무원이라고 생각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튼 행정의 지시를 받아, 매달 일정 급여를 받고, 자녀들에 대한 학자금 지원도 받고, 명절때는 약간의 선물도 받고, 관공서 이용때 수수료 면제나 할인을 받는 것으로 보상을 받는다. 따라서 온종일 근무하는 체제는 아니라 행정의 명령을 수행한다는 점에서 말단 조직이라고 표현한다.  중국은 이것을 실은 가도판사처, 그리고 주민조직인 거민위원회가 하는 것이다.  일본의 경우에는 우리의 동과 같은 조직은 없으나, 정내회라는 마을 단위의 자치조직이 있어 그들 스스로 회비를 걷고(대개는 한달에 1천엔 정도, 우리돈으로 1만 2천원 정도), 행정과 마을 주민의 가교 역할을 담당한다.

우리는 지금은 거의 행해지지 않고 있는 반상회가 있어 주민들의 의견을 행정에 전달하는 체제가 있었다.  그러가 중국이나 일본은 이러한 제도는 더 발달한 것 같다.  물론 미국의 경우에는 이런 전통적인 방식은 없으나, 자치행정 조직인 시의 형태로 발달되어 있고, 독일도 자치 의회와 자치 행정부가 우리로 치면 통단위로 구성되어 있다.  통단위 정도의 자치 정부는 실제로 대표들(의원들)이 전일근무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본 직업이 있고, 부수적으로 주민들을 대표하는 일을 일과후에 처리한다. 대개는 월요일 저녁시간의 2시간정도 근무하는 형태를 취하기도 한다. 시장도 마찬가지이다.  시장의 급여도 파트타임 식으로 주고, 전일제가 아니다.  따라서 서구의 경우에는 보다 제도화된 자치조직의 형태로 통단위의 자치가 행해진다고 보면, 한국, 일본 중국의 경우에는 행정과 자치의 중간적인 상태에서 조직이 구성되어 있다고 할 수있고,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서 한국은 행정력이 더 강한 편이고, 자치의 성격이 약한 편이라고 평가할 수있다.

'시사 > 중국'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도시인 주택 소유의 불평등  (0) 2009.09.14
중국의 노인문제  (0) 2009.09.09
도시의 땅을 갖고 장난치기  (0) 2009.09.09
성적표 훔치기  (0) 2009.09.07
중국의 계급구조  (0) 2009.09.07
:

인접 국가와 사이 좋은 나라는 없는가?

시사/베트남 2009. 9. 14. 20:59
베트남의 역사는 애초에 베트남 북부가 중국의 남부지역과 통합된 역사를 지녔다가 10세기 경에 중국에 대해 하롱베이 지역에서 격퇴한 후에 독립을 쟁취한다.  그러나 이후 원나라의 침입, 그리고 다시 명나라 초기에 침입을 당하고 이를 격퇴한 후에 계속하여 독립을 유지한 나라를 갖고 있다.  물론 프랑스에 의해 19세기 중반에 식민지로 떨어지고, 이후 2차 세계대전중에 일시적으로 일본에 의해 침입을 당하고 2차대전 후에는 독자적으로 프랑스에 대항하여 독립을 당성한다.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것이다.  그러나 곧 1955년부터 남부 베트남에서는 미국의 지배에 대항하여 자체적으로 독립운동이 발생하고, 이를 북베트남이 도우면서 소위 베트남 전쟁이 벌어진다.  이는 결국 1973년의 미국 닉슨대통령의 휴전협정 조인, 그리고 미군의 철수, 이에 더하여, 1975년에는 북부 베트남 군에 의해 결국 남부 베트님은 함락되고 만다.  달리 표현하면, 미국을 이긴 것이다.  이후에도 남베트남 측의 주장에 의하면 남부 베트남에 대해 보복조치가 없었고, 단 한명도 전범으로 죽이지는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남베트남의 전쟁 종사자들에(경찰과 군인들, 그리고 그들의 가족) 대해서는 어느 섬이나, 산 속으로 보내 강제 노동을 통해 교화작업을 벌인 것으로 되어 있다.  아마도 3-4년정도씩을 일을 한 것 같다. 이 와중에 중국인에 대한 차별적인 대우에 중국인들이 탈출하고, 이것이 중국측과 외교적인 문제를 야기하여 결국 중국은 분베트남을 침략하게 된다.  당시 중국은 모택동이 1976년에 죽고, 등소평이 개혁정책으로 권력을 장악하는 와중에 있었다.  아마도 대외적인 유화정책을 취하기에는 내부적으로 너무 취약하지 않았나 싶다. 결국 베트남은 캄보디아를 침략하여 친 베트남 정부를 세우고, 이를 못마땅히 여긴 중국은 베트남을 침략하게된다.

베트남은 한편으로 중국의 영향을 깊게 받아서, 베트남의 왕조들은 유교의 영향을 받아 통치체제를 정비해 나간 나라이고, 과거시험을 치뤄 관료를 등장시킨 나라이며, 한자를 사용하는 나라이다.  지금도 베트남 문자는 프랑스 선교사가 19시기후반에 만들었다는 알파벳을 이용한 문자를 사용하지만, 상당수의 문자를 읽는 언어는 한자음을 사용하고 있다.  특히 북부 베트남의 경우에는 민족주의적 의식이 강한 것이 중국의 유교의 영향을 받았음을 즉각적으로 느낄 수 있다.  남부 베트남의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캄보디아, 남방계의 계통을 이어서인지 개방적이고, 열대지방 사람들의 형태가 많이 나타난다.  지도를  보념 중국의 하이난 섬은 바로 베트남의 수도인 하노이나, 하노이의 직접 연결되는 항구인 하이퐁을 가로 막고 있다.  그리고 서사군도와 남사군도가 바로 베트남의 앞바다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베트남의 지도에는 베트남 영토로 중국의 지도에는 중국의 영토로 표시되어 있다.  그럴 정도로 지금도 베트남과 중국은 서로 앙숙인 관계이다.

중국과 베트남의 관계에서는 항상 베트남이 약자로서 당하는 입장에 있었고, 중국을 격퇴하면, 대국을 격퇴했다는 자부심을 니끼고 있지만, 반면에 베트남은 인접국인 라오스나 캄보디아에 대해서는 강대국의 역할을 한다.  베트남은 인구 87백만 정도의 인구 강국이다. 남북한을 합친 인구보다도 많은 강국이다.  현재 순수 소비 능력을 기준으로 한 일인당 국내총생산은 3천불을 넘어섰다.  물론 순수 국내 총생산은 1천불 미만이지만, 실질적인 삶의 경제적 수준으 높다는 말이다.  1979년에 베트남은 인근 라오스와 캄보디아에 군사를 파견하여 준둔시키고, 그들의 입맛에 맞는 정권을 만들어 냈다. 결국 동구권과 러시아의 몰락, 그리고 중국의 개혁개방의 추세에 맞추어 1986년에 개혁정책을 시작하였고, 이어서 캄보디아에서도 군대를 철수하게된다,  이는 소련이 그들의 연방해체국에서, 그리고 아프카니스탄에서 군대를 철수하는 시점과 같은 시기이다.

베트남의 인구는 베트남 전쟁을 반영하고있다.  기본적으로는 후진국 스타일인 피라밋 형태이나, 이중에서 50-70년대에 전쟁으로 군인으로 차출된 세대, 그리고 이들이 아이를 낳은 세대는 인구가 줄어들고 있다. 그러나, 베트남이 미국으로부터 승리한 후에 제대군인들이 고향에 돌아오고, 1980년대 후반에 동구와 러시아에 파견되었던 노동자들이 귀환되고, 이어서 중동지역에서 일하던 노동자들도 1991년의 걸프전때 베트남에 돌아옮으로써 베트남 인구는 급속한 증가를 기록할 수 밖에 없었다.  이는 높은 실업율을 야기하고 정치 경제적인 어려움을 초래하게 된다.  그러나 현재의 시점에서는 상대적으로 베트남은 높은 경제성장율을 기록하여 성공적인 개혁을 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있다.

'시사 > 베트남'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공산당지배와 강남지배  (0) 2009.09.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