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1900-1919'에 해당되는 글 39건

  1. 2010.02.16 1910년대 조선인이 본 일본의 발전 1
  2. 2010.02.16 히로시마 1910년대 조선인의 노역흔적들
  3. 2010.02.16 고독한 개인, 浮游하는 대중의 형성
  4. 2010.02.15 1차세계대전은 공장에도 전쟁을 불러 일으켰다.
  5. 2010.02.13 일본의 이중성
  6. 2010.02.12 신해혁명과 러시아 혁명
  7. 2010.02.12 노동자와 볼세빅
  8. 2010.02.11 민중이 바라는 것 1
  9. 2010.02.11 혁명의 의외성과 필연성
  10. 2010.02.11 러시아 혁명의 현장

1910년대 조선인이 본 일본의 발전

역사/1900-1919 2010. 2. 16. 11:38
(1) 이인직, 1910, [자유종]에 부인들끼리 시국 토론을 하면서 나온 이야기
"일본도 삼십년전 형편이 우리나라보다 우심하여 혹 천하대세라 혹 자국전도라 말하는 이는 미친자라, 괴악한 사람이라 지목하고 인류로 치지 않더니, 점점 연설이 크게 벌리매 전도하는 교인같이 거리거리 떠나니 민족사세라, 이삼인 못거지라도 술잔을 대하기 전에 소회를 말하고 마시니 전국 남녀들이 십여년을 한담도 끊고 자담도 끊고 언필칭 국가라, 민족이라 하더니 지금 동양에 제일 제이되는 일대 강국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정치나 종교에 관심을 가치면 미친사람이라고 하다고, 30년전부터 일본인들이 거리에서 술집에서, 한담이나 자담도 끊고, 오직 민족사세, 국가, 민족을 말하더니, 강국이 되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2) 하와이 호놀루루 기독학원, 1919년 8월, [대한독립혈전기]에 수록된
합중국 필라델피아에서 대한국회 임원 일동의, 1919년 4월 14-16일에 쓴 글 중에
"세계대전이 개시되기 전에 덕, 아 등 모든 구라파 각국들이 권력이 의보다 승하고, 약한자의 고기를 강한자가 먹고 살찐다는 망령된 뜻을 가지고 교만한 태도를 부리다가 마침내 실패를 당하고, 그들의 상설같던 국위가 지금은 변하여 다만 무력한 한 정치기관에 불과하고, 그들의 망령된 몽상은 사방으로 흩어져 다시는 수합할 수도 없게 되었는데, 아직도 그대(일본)의 정부는 근간 구라파에서 꺼꾸러진 전제정부와 같은 욕망과 불의한 뜻을 버리지 못하니, 만일 그대의 백성들이 적이 총명과 지각성이 있어 우리의 생각하는 것과 같을 진데, 그대는 이 정책을 바꾸며 그대의 정부를 위하여 존귀스럽고 안락이 자재한 공화의 참뜻을 모방하기로 힘쓸 터이라.  만일 그대가 지금 사용하는 프루시아 정책을 그대로 계속할진대, 그대의 나라도 응당 멀지 아니하여 그대의 표준되는 구라파 몇나라와 같은 참화를 받게 되리라".

일본의 지각있는 민중들에게 호소하는 형태의 글이다.  일본은 실은 1차세계대전 당시에는 그다지 영향을 받지 않고, 오히려 미국과 거의 비슷하게 경제적 번영과 제국주의적 야욕을 달성하게 된다.  미국의 경우에도 경제적 성장을 구가하여 미국의 민중들은 안락을 취하고, 자국 중심적인 계급투쟁이 일어나더라도 오히려 애국주의에 호소하여 거의 해결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시기에 한인 독립가들은 일본에 대해 제국주의 정책을 버리라고 호소하고 있다.  독일을 예로 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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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 1910년대 조선인의 노역흔적들

역사/1900-1919 2010. 2. 16. 11:21
필자는 1996년 2월 14일에 히로시마에 계시는 타키오 에이지 선생(인권도서관, 히로시마 청구문고)의 집에 가서, 한센병의 역사, 일본 부락인들의 생활, 한인 징용에 관한 자료를 소개 받고 아루 저녁 잔 일이 있다.  이분은 스스로 자료를 모아서 한정본으로 자료집을 출간하고 계셨다.  1910년대 조선인들이 히로시마 부근에서 노역한 흔적들을 모은 자료가 있어서 사진으로 스캔해서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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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개인, 浮游하는 대중의 형성

역사/1900-1919 2010. 2. 16. 07:16
1차세계대전이 대량살상무기에 의한 인민의 대량 희생을 야기하고, 이에 따라 민족주의, 민주주의, 복지문제가 등장하였다면, 경제적으로는 대량생산체제, 대량 소비사회가 나타났다.  이러한 대량 생산과 소비는 포드의 T자동차의 년간 1백만대 이상 판매, 집보다도 차의 소유를 우선 원하는 세태가 나타났다.  적어도 미국은 고립주의 외교전략의 고수로 적어도 1917년 전쟁 개입을 하기 전까지는 유럽의 전쟁물자를 공급하고, 유럽의 보호주의와 해상봉쇄를 통해 생산력을 늘리고, 이로 인해 경제성장을 구가할 수있었다.  따라서 미국의 국내는 1차세계대전의 피해로부터 한옆에 물러나 있으면서, 소비사회의 도래를 향유하는 입장이었다.

대량생산은 물질적인 면에서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었다.  미국의 자본도 19세기 말을 통해 합병과 독점체제를 궂히고 있었고, 광고, 박람회, 놀이터, 영화, 소설, 춤과 노래 등이 흥행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명실공히 세계의 산업생산국이자, 경제대국으로서의 입지를 완성하는 시기라고 보면된다. 이 시기는 따라서 한편으로는 대중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찾기 위해 유리한 조건으로서 민족국가를 통한 민주주의와 전쟁에 필요한 총력전 동원, 대량생산에 따른 산업합리화와 소비능력의 제고를 통해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한층 드높일 수 있는 시기였고, 공장주나 경영주의 입장에서는 합리화에 따른 댓가를 노동자들에게 강요해야 하는 입장에서 충돌을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  노동자의 고통과 부유층의 놀이가 동시에 등장하는 시기였지만, 소위 경영, 판매, 재무, 기술개발, 회계와 법률, 의료, 등의 분야에서 소위 중산층의 획기적으로 팽창되던 시기이다.  이들은 참정권, 남녀 평등과 여성해방, 고급문화의 향유를 주장하는 세력이었다. 

이들을 대상으로 여성들의 머리와 치마는 짧아지고, 바지 차림이 등장하며, 얼굴화장이 진해지기 시작하고, 여성의 벗은 모습이 서서히 영화(무성)에 등장하기 시작한다.  춤의 시대였던 1910년대(미국의 경우)는 탱고와 같은 좀더 육감적이고, 템포가 빠른 춤이 유행하고, 소설에서도 노골적인 성적인 묘사가 등장한다.  물론 이에 대해 사회나 정치적으로는 용납하지 못하고, 이를 판매금지하는 세태, 술을 금지하는 법안, 표현물에 대한 사후적 검열, 미국에 대한 애국심의 고양, 타민족에 대한 경멸(인종전시관을 통해 다른 열등민족을 구경하는 전시회)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고 이는 하나의 국가사회적인 희스테리 현상으로 나타났다.

19세기 말에 프로이드가 무의식을 발견한 이후에 이를 통한 교육이론, 인간 세뇌이론 등이 교육과 소설에 본격적으로 도입되는가하면, 반면에 전쟁 놀이에서는 아직 인간의 사기, 사회적인 속성 등이 고려되지 않은채, 전쟁전략을 세우고 있고 그대로 실천되었다.  따라서 일차 세계대전에서의 민중의 희생은 전력자원으로서의 인적자원의 형태로만 고려되곴고, 아직 인간의 내면적 능력을 감안한 전략은 선보이지 못했다.  심리소설의 등장은 의식의 흐름, 고독한 인간, 차별받는 인간, 인간성의 해방을 부르짓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으로는 고독하고, 한편으로는 휩쓸리는 개인들과 대중이 나타난 것이다.  이는 결국 기존의 공동체인 가족, 마을, 술집에서 얼굴을 마주대하는 동료들의 영향력보다는, 영화, 신문과 소설, 방송, 공연 등이 더 큰 영향을 발휘하는 세상을 만들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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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세계대전은 공장에도 전쟁을 불러 일으켰다.

역사/1900-1919 2010. 2. 15. 10:54
1차세계대전은 기본적으로 국가간의 전쟁이다.  국가 간의 전쟁이라고 하더라도, 대량샐상무기에 의해 민중의 대량 죽음, 이를 뒷받침 하기 위한 군수역량과 이념적 동원이 필요하기에 국가내부의 이데올로기와 국가의 국민 동원능력, 산업 역량이 총동원된 전쟁이었다.  그래서 1차세계대전은 국가의 재정능력, 대외 무역 루트가 봉쇄된 가운데 국가들의 산업역량이 최대한 개발된 시기였다.  국가의 재정능력은 대내적인 저축과 희생니마, 징세능력과 과세 부담의 증가는 물론이고, 이에 따른 국민들의 생활고, 국가의 재정 착취능력, 국민들의 국가의 희생요구에 헌신할 수 있는 가능성에 기반을 두어야 했다.  또한 대외적으로는 이미 해상봉쇄가 이루어지고, 각 나라들이 자기들의 국채 발행을 통해 해외 자금을 조달하고, 보호무역주의가 활개를 치던 시기이기에, 각 나라들은 최대한 생상량을 늘려, 군수장비는 물론이거니와, 민수물자의 수급에도 만전을 기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여기에 각 국가의 산업체들은 과거에 수입에 의존하던 산업들을 국내에서 생산하여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영국이 이 시기에 섬유산업의 쇄퇴를 가져오고, 일본이 섬유산업의 발전을 가져오게 된다.  일본응 이 시기에 특히 전쟁을 피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아시아 지역에서 독일이 점령한 영토를 가볍게 쟁탈하고, 섬유 산업의 발전을 가져오게 된다.  영국의 쇠퇴와 일본의 일등국가로의 발돋움이 완성된 것이다.  각 국가들은 이제 인민들의 필수품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대량생산체제로 들어가고 이를 위해 산업의 기계화, 합리화, 대규모화에 들어가게 된다.  이에 성공한 국가들은 미래의 강자가 되었고, 이를 수행하지 못한 국가들은 쇠퇴의 길을 가게되는 분수령이 된 시기이다.

또 하나의 산업체내의 갈등은 계급간의 갈등시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산업화가 진행되고, 대량생산체제가 들어서면서 과거의 숙련노동자는 점차로 일자리를 잃게 되고, 대신, 반숙련노동자나, 미숙련노동자들이 대거 노동자로 참여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숙련노동자들의 저항, 미숙련노동자들의 착취에 대한 항거가 본격적으로 일어나게 된다.  이미 1차세계대전 전에 시작되었던 노동자들의 저항은, 1차대전 기간과 1917년의 볼세비키 혁명이라는 유리한 고지를 맞이하여, 전세계적으로 노동조건의 향상(특히 8시간노동자가 미국의 전시기간에 군수물자 생산 산업에 도입되고, 러시아의 2월혁명 후에 곧바로 8시간 노동제가 확립되었으며, 이제 전세계의 노동자들은 자연스럽게 8시간 노동제를 주창하게 된다), 작업장내에서의 억압에 대한 불만 토로, 공장관리운동, 공장 소유운동등이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이에 대해 비단 혁명이 성공한 러시아만이 아니라, 독일과 오스트리아, 불란서 등에서도 공장 관리운동이 부분적으로 등장하고, 미국에서도 자비로운 사업주에 의해 선도적으로 부분적으로 도입되게 된다.  이제 노동운동은 단지 작업장의 문제로서가 아니라, 기업내의 복지, 즉 노동자 식당, 노동자 주택, 노동자 건강 보험(산업재해), 퇴직기금 등이 도입되는 계기가 된다.  공장이나 기업만이 아니라, 국가 차원에서의 노동자 복지제도도 이제 서서히 도입하려는 움직임과 실제의 도입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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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이중성

역사/1900-1919 2010. 2. 13. 21:19
최근에 토요타 사태를 바라보면서 나는 일본인들을 특징짓는 이중성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했다.  일본의 기업들은 소비자가 흠이 있다고 가져온 물건에 대해 절대로 안된다고 거절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곧 고쳐주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대개는 오랜 시간이 걸려서 고치게 된다.  그리고 하나 하나 비용을 받거나, 따져서 고쳐주게 된다.  일본인을 말할 때에는 인간은 누구나 그런 면이 있지만, 겉으로 드러내는 것과 안에서 생각하는 것의 차이를 말한다.  한국인들이 일본에 가서 겪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친절한 미소이면서 동시에 돌아서면 아주 차거운 표정들이다.  아무도 걸들떠 보지도 않으면서도, 직무에 관련된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친절하게 대답해 주는 것을 말한다.

일본의 근대사중에서 하나의 중요한 사건을 러시아 혁명의 와중에 만몽, 그리고 시베리아 연해주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벌린 시베리아 출병이다.  이는 1918년에 이루어지는데 중요한 것은 외교에서의 이중전략이 시작된 시점으로 친다는 점이다.  이때 이중전략이라는 것은 이미 한국의 경우에는 1904-5년의 러일전쟁시기에 일본이 대한제국에 대해 취했던 이중적인 정책에서 드러난 것이기는 하지만, 서구 열강들에게는 1918년 러시아 출병을 통해 드러난다.  즉 미국의 랜싱국무부 장관과 미국 주재일 일본대사 사이에 체결된 중국 문제에 대한 일본의 이권보장을 보호받는 조약(다른 한편에서는 중국의 문호개방 조약이라고도 표현한다)을 말한다.  러시아와는 이미 1908년에 만몽지역에서의 일본의 이권을 보장받았고, 러시아 혁명중에는 러시아 주재 일본 대사와 만주철도회사를 통해서 러시아 혁명상황의 정보를 입수하고, 이를 통해 1918년의 러시아 출병, 그리고 다른 서구열강들은 모두 러시아에서 철수한 후에도 남아서 (약 7만명) 거의 1923년정도까지 싸우다가, 곧바로 다른 나라에 앞서서 소련을 인정하는 조약을 맺는다(1926년).  이때부터 일본은 미국과도 갈라지기 시작한다.  물론 일본이 1차세계대전이 끝나는 시점에는 일본인들이 스스로 일컫듯이 일등국가가 되었다.  즉 1차세계대전후에 해군 군축을 논의하면서 미국, 영국의 톤수가 5, 그리고 일본이 3의 비율로 세번째로 강한 해군을 보유하게 된다.  이로서 일본은 소위 일등국가가 되는 것이다.

결국은 미국은 1941년 12월 진주만 기습을 당하면서, 바로 그 전날에는 미국과 평화를 논하던 일본에게 당하게 된다.  이로서 일본의 이중성은 세계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일본은 대개 전쟁을 일으킨 후에 선전포고를 감행하는 관행을 지닌 것 같다.

일본의 내부를 보면 이러한 이중성은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된다.  1910년대의 일본의 초등학교 교과서를 분석한 것을 보면, 일본은 처음부터 국가 지상주의를 가르치는 흔적이 역력하다.  이에 더하여 가족과 친척, 마을 사람을 가르친다.  따라서 사회성을 기를 수가 없게 된다.  이는 일본의 교육에서도 경제학이나 국제관계학 같은 것을 배우지 못함으로써, 남을 배려하고 이해하는 태도를 학습할 기회를 갖지 못하고, 오로지 천황과 국가를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치는 것이 절대적인 선이라는 식으로 배우게 된다.  물론 이와 배치되는 경향이 존재한 것은 사실이지만, 설사 해외에서 배운 사람들도 다시 일본에 돌아와서는 대개 국가의 중요성을 개인보다 더 강조하고, 사회성에 대한 이해를 강조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러한 경향은 일본이 소위 일등국민이 된 후에도 바뀌지 않은 채 지금껏 내려오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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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혁명과 러시아 혁명

역사/1900-1919 2010. 2. 12. 23:03

신해혁명은 중국 청나라 왕조를 무너뜨리고, 아시아 최초로 공화정을 수립한 획기적인 사건이다.  1911년에 무창에서 일어난 무장군인들의 도움을 받은 혁명세력들의 반란이 성공을 거둔 것으로 해석된다.  물론 이들은 내부의 각종 혁명세력들이 외부 중국인들의 도움을 얻어 성공한 것으로 평가된다.  다른 한편 청 왕조의 입장에서 보면, 반란을 진압하라고 명령을 받은 군부가 반란편과 타협을 하고 자신들이 정권을 장악함으로써 반란을 완성시킨 것이다.  이로써 청왕조는 아편전쟁이후 쇠약해진 틈을 타, 만주족을 무너뜨리려는 중화민족에 의해서 멸망당한 것이다.  중화 한족들은 청왕조가 흥했을 때에는 숨을 죽이고 있다가, 청왕조가 쇠약해진 이후에는 태평천국의 난을 통해, 그리고 의화단 사건을 통해 외세에 지리멸렬한 청왕조를 보고, 1904-5년의 로일 전쟁시기에는 자국에서 발생한 전쟁에서 단지 중립을 지키면서 다른 나라끼리의 전쟁터로 변하고, 여기에서 발생하는 중국인민들의 희생에 대해서 한마디도 못하는 처지를 보면서 오랑캐 왕조인 청왕조에 대한 적대감을 키워나갔다.

청왕조의 입장에서 보면 19세기 후반기에 이미 청일 전쟁의 패배후에 근대화의 의욕을 불태우고, 해외에 거의 2만명가까이를 보내어 훈련시키고, 실패하기는 하였지만, 변법자강을 시도하였으나, 결국은 망하고 만 것이다.  특히 해외에 내보낸 국비 유학생들이 대부분 혁명운동에 가담하였으니, 국비로 청나라를 망하게 만든 것이나 다름 없는 것이 되어 버린셈이다.  1906년에는 과거제도를 없애 과거의 신사세력의 싹을 없애고 보다 근대적인 관료총원을 시도하였다.  군인의 경우에는 팔기군을 개편하고, 근대적인 군대로 만들면서 군벌이 만들어지는 계기가 된다. 군벌의 존재는 러시아와 다른 특이한 형태이다.  즉 러시아의 군대는 절대적으로 중앙의 군수지원을 받고 명령을 받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청나라의 군벌은 마치 지역의 깡패조직처럼, 작은 지역 단위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가지면서, 세금을 거두고, 명령권을 가지고 세력을 불려나가고있었다.  결국 청의 마지막 왕조는 가장 큰 군벌인 북양군벌인 원세개에 의존하려한다.  그러나 원세개는 청왕조나 중화민국을 팽게치고 오직 자신의 이익과 황제가 되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  1차세계대전 기간에는 일본에게 독일의 이권을 전부 넘기고, 러시아 혁명기간에는 중국군이 오히려 일본군의 지휘아래로 들어가 일본군 7만여명이 내몽고, 만주, 연해주에서 마음껏 러시아 적군과 대적하게 만들어 준다. 

중국은 한편으로 오랑캐 정권을 한족 정권으로 교체하는 것, 그리고 외세와의 대결을 통해 국가의 주권을 세우는 것이 초미의 과제가 된다.  손문은 심지어 만주를 포기하는 방안을 강구할 정도로 위험하게 한족 위주의 중화민국을 구상하였다.  일본은 이중적인 외교전략을 통해 한편으로 일본 재벌의 자금과 군부내의 정부부서를 통해 중국의 혁명세력을 손을 대고, 다른 한편으로는 청나라나 원세개 북경정부를 통해 혁명을 공격하게 하여 궁극적으로는 두개의 중국을 만들고, 그 틈을 타 만주와 몽고를 자신들의 손에 넣으려는 전략을 구사하게 된다.  이는 2007년 10월 1일자 아사히 신문을 통해 기사화되었다.

중국내의 각종 지역적 혁명조직들과 상인세력들이 서서히자라고 있었고, 해외의 손문과 같은 중국 통일 세력들이 손을 잡고 있었으나, 아직 중국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혁명조직이 부재하고 군사력을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나 손문의 3민주의는 민권, 민주, 민생은 당시의 이론을 쉽게 통합시킨 이론이라고 볼수 있다.  국권을 수립하는 것, 그리고 민주까지는 드러낼 수 있었지만, 민생이론은 사회주의나 미국의 공산주의 이론을 받아들인 것으로 해석된다.  링컨의 게티스버그 연설(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조지 소로의 이론, 레닌의 러시아 혁명을 소화한 이론이다.  아무튼 손문은 무장봉기, 해외자금을 활용한 국내 혁명지원, 이론화를 통해 혁명에 헌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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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와 볼세빅

역사/1900-1919 2010. 2. 12. 12:01

1917년 러시아 혁명은 기본적으로 노동자들의 힘을 배경으로 일어난 혁명이다.  이는 혁명의 이념면에서나, 그 조직 면에서도 그러하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지도적인 위치에 볼세빅이라는 지식인 그룹, 또는 직업적 혁명가 그룹이 존재하고 이들이 혁명의 리더로서 이끌어 간 데 문제가 있었다.  1차 세계대전은 대부분의 참전국가들에게는 이미 전국민적 역량을 동원하는 최초의전쟁이었던 만큼, 민중의 힘을 동원하지 않을수 없었다.   단순히 무기의 싸움이 아니라, 인민들의 희생을 전제로하는 싸움이었과 후방에서도 물자생산면이나, 이데올로기 면에서 전쟁에서의 죽음을 정당할 수 있는 국가 이데올로기가 있어야만 하는 싸움이었다.  그래서 미국도 군수물자 생산 분야에서는 8시간 노동제를 실시하였고, 영국이나 독일은 노동의무제를 통해서 노력 동원을 강제하고 있었다.  러시아의 경우에는 이를 무시하고, 오히려 평상시에 정상적으로 지급되던 식량 배급이 중지됨으로써 결국 2월혁명이 발생하고야 말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2월혁명의 최초의 성과는 공장내에서는 8시간 노동제의 도입, 그리고 공장위원회의 도입으로 나타났다.  8시간 노동제가 혁명적 상황을 매개로 도입되었다는 점은 대부분의 국가에서 노동운동의 고양과 억압의 과정에서 도입된 점을 감안한다면 전쟁이 갖는 국민동원의 의미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공장위원회의 도입은 조금은 복잡하다.  왜냐하면 이미 공장에서는 노동조합이 있었고, 노동자 소비에트가 조직되어 있기에 그렇다.  그러면 공장위원회와 노동조합, 그리고 노동자 소비에트가 무엇이 다른가를 이해하는 것이 관건이다.  러시아에서의 노동조합은 형식상으로 보면, 노동자의 근로조건 향상을 위해 만든 조직이기는 하지만, 실은 러시아에서의 노동운동의 탄압이 극심하였으므로, 노동조합이 실질적으로 기능했다기보다는 급진적인 지식인 운동으로 구성되어 있었던 상황이었다.  노동자 소비에트는 정치운동을 하는 노동자들의 모임이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공장위원회는 공식적으로 공장을 관리하는 기구로서 구성된 것이다.  공장주인이 있었지만, 공장주인이 공장을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공장을 운영하는 데 감독기구, 그리고 노동자들에게 그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하는 장치를 만든 것이 공장위원회이다.  이런 조직은 현재의 유럽연합에서 도입하고 있는 work council과 유사하다.

그러나 항상 제도가 도입되어도 기존의 관습의 영향은 무시할 수 없다.  공장의 운영은 실은 주인이나 경영자가 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인간적인 위계적인 질서에 의해 생산이 이루어 지던 당시의 상황에서는 중간 감독자(현장 감독자)가 실질적인 생산을 조직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러시아의 경우에도 현장 감독자는 임금의 결정, 해고의 결정 등 사실상 주인과도 같은 위치를 점유하고 있어서 사실상, 노동자들의 현장에서의 불만은 현장 감독자들의 자의적인 판단과 차별, 무시에 있었던 것이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은 이러한 관행에 대해 현장감독자를 단순히 기술 지도원의 위치로 격하시키게 된다.  그리고 이들도 노동조합을 구성하여 자신들도 노동자이므로 노동조합에 가입시켜 달라고 요청하게 된다.

그러나 볼세비키들의 생각은 달랐다.  특히 레닌이나, 트로츠키를 비롯한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한 세력들은 노동자들의 해방보다는 자신들의 권력 유지, 볼세비키들의 정권장악, 내전과 외세의 침입으로부터의 방어가 우선이었고,이를 위해서는 생산성의 향상과 생산력의 증강이 절대적이었다.  따라서 전시사회주의, 내전, 신경제계획을 통해서 공장내 노동자들의 권리는 유보당하고, 다시 과거의 공장주, 기술자, 중간감독자들의 복귀를 통해서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게되고, 실제로 이를 실행한다.  

결국 노동자 관리, 노동자 소유, 공장위원회, 노동조합, 노동자 소비에트와 같은 기구나 제도의 도입이 생산성 향상에 도움을 줄수는 없는 것일까이다.  대가는 공장의 소유주가 파산하거나, 국가 권력이 더이상 공장 소유주를 지챙해주지 못할 때 우리나라의 경우에나 다른 나라의 경우에도 공장에 대한 노동자 관리가 이루어 지는 경우가 많다.  우리 지역에서도 최근에 진주에서 버스회사가 파산상태에 이르자 버스회사의 종업원들이 인수하여 운영하는 사례가 있다.  나는 아직 완전히 지속적으로 노동자들이 운영하는 공장이 성공한 사례를 모르고 있다.  경향신문과 서울 신문이 아나도 사원지주제로 운영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유럽의 사례를 보면, work council은 종업원을 대표하면서 이사회에 참석하고, 감독위원회를 구성하여, 회사의 운영에 적극참여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관행이 독일의 패전이후에 독일 대자본들의 군국주의화 경향을 저지하기 위하여 성립되었다고 하더라고, 지금까지 운영되고 독일의 경제 발전에 기여한 것으로 보아서는 우리도 누여겨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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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이 바라는 것

역사/1900-1919 2010. 2. 11. 16:47
러시아 혁명의 성공은 민중이 혁명을 통해서 얻으려고 하는 것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볼세비키는 권력을 소비에트로 이양하는 것에서, 즉각적인 전쟁의 중단, 그리고 토지의 처분을 각 농민위원회에 맡기는 것을 10월 혁명의 첫날에 결정하였다.  물론 이러한 결정들은 전쟁터에 나가 죽음에 몰려 있는 병사들, 혁명적 사회주의자로 뭉쳐있는 농민계층을 향한 것이었다.  혁명은 병사와 노동자 소비에트에 의해 이루어 졌으나, 노동자들은 이미 자신들의 노동자 소비에트에서 공장의 관리를 시작한 상황이었으므로, 법률적인 효력을 발하는 결정은 필요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결정이 나오기 까지의 과정은 볼세비키들이 민중들의 욕구를 면밀하게 특히, 레닌이 파악한 결과로서 해석될 수 있다.

지도층이나, 관료들, 왕조들, 유산계층, 유식자들은 논란을 많이 하나, 민중들의 즉각적인 욕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  2월혁명을 군대에서 맞이한 사람들이 받은 첫번째 통신은 권력이 바뀌었으니, 왕조가 아닌 새로운 임시정부에 복종하라는 것이었고, 두번 째 명령은 군인들을 억압하지 말고 자유를 주라는 것(침을 뱉거나, 담배를 피운는 것, 계급을 부르지 않고 친구처럼 호명하는 것 등)이었고, 세번째 명령은 군의 최고 지휘는 장교가 아닌 소비에트가 맡는다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군대는 동요하지 않고, 이 명령을 따르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명령을 누가 내리느냐가 불명확한 상황, 그리고 전쟁이라는 상황에서 명령계통이 불확실하면 전쟁을 할 수 없다는 상황을 지적한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볼세비키가 그토록, 독일의 스파이라는 죄목으로 탄압을 받아가면서도, 나중에 강화조약을 맺는 것은(1918년에  독일이 이미 정복한 모든 영토를 포기하는 것) 전쟁에서 이길 가능성이 없다거나, 혁명의 와중에서 내외부의 적을 동시에 싸우기에는 전투력이 모자라거나 하는 문제보다도 병사들의 희생을 줄이는 것이었을 것이다.  적어도 1917년 혁명의 열기속에서는 그런 생각이 우선이었을 것으로 해석되고, 이를 통해서 혁명이 성공했다.

물론 토지의 분배는 이미 19세기 말의 농지개혁이나, 러시아 고유의 미르라는 농민 공동체를 통해서 형식적으로는 이루어지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농지를 각 개인들에게 나누는 형태를 염두에 둔 농민들의 욕구를 자극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의 정책에서는 농토를 즉각적으로 농민 개개인에게 나누기 보다는 각 지역의 농민위원회를 구성하여 이들이 대토지 소유자의 농토를 압수하고, 공유지를 관리하게 함으로써 대토지 소유자들에게만 손해를 입히는 정책을 가져온다.  또한 실제로 많은 농민들이 혁명적 사회주의자(정당이름) 당에 가입하게 된 것은 농토의 부족과 동시에 농장주나 국가의 가렴주구, 신분상의 차별이 더 큰 문제였을 것이다.  아무튼 볼세비키는 자신들의 지지기반을 강화하기 위하여 가장 먼저 농토의 분배에대한 정책을 확정하여 선언하였다.

공장은 이미 공장관리위원회나, 노동자 소비에트에 의해 많은 부분이 장악된 상태였다고 보여진다.  이러한 상태에서 노동자 소비에트가 병사소비에트와 더불어 가장 선두에 서서 러시아 혁명을 이끌게 된다.  그러나 혁명의 비극은 이들 혁명적 노동자들이 내외부적인 전투에서 너무나 많은 희생을 치루고, 전쟁과 혁명과 내전의 기간중에 노동자가 줄어들고, 따라서 혁명적 의식을 가진 볼세비키들이 사라졌다는 점이다.  이는 Chris Harman같은 영국의 사회주의자 역사학자가 해석하는 러시아에서 어떻게 혁명이 사라졌는가를 설명할 때 사용하는 방식이다.  아무튼 중요한 점은 숫자상으로는 볼세비키가 정권을 장악하고, 세력이 늘어난다고 하더라도, 그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줄어듦으로써 혁명의 정신이 사라졌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이는 혁명이란 한편으로는 제도로서 완결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정신을 가진 사람이 없으면, 혁명의 유지가 어렵다는 점이다.  또한 국가 권력을 잡았으나, 이를 운용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적어서 운용에 어려움을 겪고, 국가 체제를 구성하는 이들의 특히 관료들과 군대를 다룰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기 어려워서 결국은 특히 스탈린 시대에 접어들면, 타협하게 된다. 물론 내전 기간의 전시 경제체제를 지나 신경제프로그램을 통해서 재건을 시도할 때에도 트로츠키와 레닌을 비롯한 국가를 책임진 이들은 결국 과거의 기술자, 군인전략가, 관료들을 재 기용한다.  결국 이들을 재대로 통제하지 못함으로써 혁명은 배신되었다고 역사는 평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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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의 의외성과 필연성

역사/1900-1919 2010. 2. 11. 15:38
러시아혁명을 설명하는 가운데 설사 혁명을 의도하고 디자인한 사람들이나 역사가들의 설명은 항상 혁명이 일어날 가능성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혁명 특히, 러시아 혁명과 같은 당사자들은 혁명이 발발하고 성공할 가능성이 적어서, 대부분, 대중 봉기를 반대하고 회의한 경우가 많았다. 특히 1917년 여성의 날에 벌어진 대규모의 봉기는 당시 혁명에서 가장 앞장선 볼세비키 조차도, 이러한 대중봉기의 성공 가능성에 의문을 표시했다 (Leon Trotsky, 1930, The Russian Revolution에 서술된 것에 의하면).  이날의 봉기를 성공시킨 것은 여성 노동자들이었다.  여성의 날, 여성 노동자, 그러나 상당수의 남성 중공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은 별로 확신하지 않았다.

여성노동자들의 대규모 봉기에의 참여는 실은 1차세계대전에 참여하고 있는 남성 군인들과의 연대때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즉 1차 세계대전은 특히 대규모 살상무기가 사용되었던 전쟁이었고, 특히 러시아는 전쟁에서 죽는 것도 두려웠지만, 전쟁에의 물자 보급이 거의 끊기고, 군인들에 명령에 복종치 않으면, 즉석에서 처형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실제 1차 세계대전은 러시아에 5백만명에 달하는 군인들의 희생이 뛰따랐음을 알 수있다.  그러므로, 남성들의 의미없는 죽음과 이를 강요하는 정권에 대한 저항은 어찌보면, 이들의 가족의 입장에서 보면 이들을 대신하여 죽음을 면하게 해야할 책임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여기에서 3.15의거때 희생당하고, 고문당하는 학생들을 둔 자녀들을 위하여, 1차 의거와 2차 의거 사이에서 고통을 받은 가족들, 특히 희생당한 학생들의 어머니들을 생각한다.  그리고 이들은 3월 25일의 마산시위에 대거 나서게 된다.  물론 이런식의 해석에는 러시아 혁명이 우연히 발생하였다는 점이나, 순수한 의도에서 발생하였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 트로츠키의 러시아 혁명의 역사에서도 보면, 필연성을 내포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즉 2월혁명에서는 로마노프 왕조의 몰락이 이루어지는 데, 이때에도, 니콜라이 2세는 거의 국가의 통치력을 잃고 그저 사생활만 영위하고 있었고, 거의 바깥 사정은 몰랐던 것으로 보인다.  매일 목욕하고, 손님맞이하고, 산보다니고, 놀고 쉬는 그런 날들을 보냈다.  그들의 측근에서는 그에게 사태의 심각성이나, 사태의 진전에 대해 제대로된 정보를 준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이런 점은 우리가 3.15의거에서 이승만이 후에 물러날때나, 물러 난 후에 스스로 자인하고, 또는 이승만을 숭배하는 이들이 지어낸 이승만이 나쁜 것이 아니라, 이승만을 둘러 싸고 있는 이들이 정보를 차단하고, 이승만에게 아부한 것이 이승만의 몰락을 가져왔다고 주장하는 근거와 비슷한 점을 발견한다.

그러나 실은 러시아의 경우에는 이미 1905년의 혁명을 통해 민중들의 권력이 어느정도 확인되었고, 왕조의 무능도 1904-05년의 러일전쟁을 통해 드러난 상태였다. 이때 두마를 통해서 민중들의 대표를 통해 왕조를 제어하거나, 왕조가 민중들과 협력하여 정권을 유지할 수 있는 틀은 만들어진 셈이다.  왕조는 이를 이용하기는 커녕, 주어진 기회도 잡지 못하고, 이를 오히려 억압하고, 국가의 능력은 사라지고, 1차세계대전에서도 연일 패배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당연히 민중들은 약해진 왕조를 본 이후에는 지지를 철회할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라는 점을 왕조는 인식하지 못한 것이다.  더구나 상승하는 독일을 상대로 전쟁을 하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상황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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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혁명의 현장

역사/1900-1919 2010. 2. 11. 10:23
1982년 초에 미국 LA의  Westwood(그곳 한인들은 西林이라고 부른다)에서 처음 본 영화가 Reds이다.  이 영화는 "세계를 뒤흔든 10일: 1917년 러시아 10월혁명의 현장기록"(1919/1986, 두레)의 저자 John Reed 개인에 대한 영화이다.  그는 미국 오레곤 출신으로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하바드대를 나와, 언론인을 하면서 멕시코 혁명과 러시아 혁명의 현장에서 활동한 사람이다.  리드가 1917년 2월혁명이후에 러시아의 뻬뜨로 그라드에서 혁명의 현장을 보도하고, 결국에는 참여하고, 방어하고, 미국에 돌아와서는 미국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을 굼꾸다가, 다시 러시아로 가서는 혁명의 배반을 관찰하고는 절망하면서 33살의 나이로 1920년에 죽었다.

러시아 혁명에 대해서는 여러기록들이 있지만, 현장성의 측면에서는 이 책이 단연 압도적인 것 같다.  당시의 혁명에 참여했던 인물들이 어떤 생각으로 어떻게 움직였는가를 가장 솔직하게 보여주는 것이기에 감동적이다.  감동적이라는 표현은 혁명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되기에 그렇다.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2월 혁명의 발생, 그리고 혁명의 성공 직후부터는 혁명의 배반으로 들어가는 상황에서 혁명을 폄하하는 책들은 자주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혁명의 순간에 그들의 행동, 생각, 이념, 동지애를 보여주는 것은 드문 편인데, 이 책의 저자는 당시에 돌아다니던, 팜프렛, 벽보를 수집하고, 기자신분으로 자유롭게 이쪽 저쪽 편을 넘나들면서, 풍경을 관찰하고, 인터뷰를 하고, 나중에는 혁명을 방어하기 위해 직접 총을 들기도 한다.

영화에서는 그와 그의 부인 (아니 애인)의 이야기가 감동깊게 묘사된다. 러사이아에서의 활약보다는 미국에서의 탄압이 더욱 리드의 고립감이나, 인간적인 무력감을 느끼게 만들었을 것이다.  자신의 글이 미국에서 반미국적이고 반역에 해당하고, 선동죄에 해당하여, 기소당하고, 모멸당하고, 실패하고, 결국, 가짜 신분증을 만들어서 러시아로 다시 건너가는 과정을 겪는다.  돌아올 때도 핀란드에서 검거당하자, 미국 정부는 이를 기뻐하고, 리드를 구출해 주려 하지 않는다.

책은 결국, 10월 혁명을 다루고 있다. 1, 2장은 배경, 3장은 10월 21-24일, 4장은 혁명의 성공이라고 일컬어지는 임정부가 붕괴된 10월 25일, 5장 10월 26일, 6장 10월 27일, 7장 10월 28일, 8장 10월 29일-30일, 9장 10월 31일, 10장 11월 1일, 11장 그 이후를 다루고 있다.  만일 책 제목에 나온 10일을 그대로 인용한다면, 10월 23일-11월 1일까지를 다룬 것으로 보면 된다.  당시 볼세빅은 왕조와 이후에 수립된 케렌스키 정부로부터 만이 아니라, 관료, 군대, 동료 온건 사회주의자들, 농민사회주의자들, 심지어는 낭만적인 안정을 바라는 노동자들까지도 볼세비키의 혁명을 적대적으로 보거나, 적어도 협력하지는 않았다.  마지막에는 결국 방해하는 과정까지 나아간다.  볼세비키를 뭉치게 한 것은 전선에서 죽어가는 병사들과 이들의 가족들, 그리고 노동자 소비에트 조직이었고, 이것도 주로 러시아의 수도인 뻬떼스그라드에서 고립된 채였다.

"유산계급의 대부분은 혁명보다는 차라리 독일군을 더 좋아했으며, 또한 그렇게 말하는 것을 서슴치 않았다.  내가 살고 있던 곳의 러시아인의 가정에서는 거의 언제나 저녁 식탁의 화제가 법과 질서를 가져다 주는 독일군의 진격이었다"(37쪽).
"전화국을 방어하던 융커들에게, 대부분이 귀족의 자제로 그들의 사랑하는 짜르체제를 회복하기위해 싸우고 있던 젊은 융커들에게 탄약상자를 날라주고 그들의 상처를 치료해주던 이 여자들(교환양들)의 경험은 얼마나 낭만적이었을 것인가!  그러나 지금 그들 앞에 있는 이들은 평범한 노동자, 농민들이며 '무지한 사람들'일 뿐이었다"(177쪽).

그러나 리드는 혁명이 왜 성공했는지, 그  진행과정을 명확하게 현장에서 판단한다. 

"극장에서, 광장에서, 학교에서, 클럽에서, 소비에트 집회장에서, 조합본부에서, 병영에서, 전선의 참호속에서, 마을 광장에서, 공장에서의 무수한 집회에서 강연과 논쟁과 연설이 있었다.  푸찔로프 공장에서 쏟아져 나온 4만의 노동자들이, 그가 사회민주당이든, 사회혁명당이든 무정부주의자이든 누구든지 간에 무엇인가 말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열심히 귀를 기울이는 모습은 얼마나 경이로운 광경인가!  몇달동안 뻬뜨로그라드에서, 또한 러시아 전역에서 모든 길모퉁이는 공공의 연단이 되었다"(42쪽).

전선에서 돌아온 병사의 발언:
"병사들은 말합니다.  내가 무엇을 위해 싸우고 있는지 알려달라.  콘스탄티노플을 위해서인가?  아니면 자유로운 러시아를 위해서인가?  민주주의를 위해서인가?  아니면 자본가라는 도둑을 위해서인가?  내가 혁명을 수호하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내게 증명해 줄 수 있다면 극형으로 위협하지 않아도 나는 자발적으로 나가 싸울 것이다"(49쪽).

"광대한 러시아의 도처에서 수많은 노동자, 농민, 병사, 수병들이 현명하게 사태를 이해하고 선택하려고 애쓰며, 그리하여 만장일치로 경의하는 모습을 생각해 보라.  그것이 러시아혁명이었다"(150쪽).

"볼셰비키가 성공한 유일한 이유는, 그들이 기층민중의 거대하고도 단순한 욕구를 현실화하고 구체제를 산산히 파괴하는 일에 민중을 끌여들여 무너져 내리는 폐허와 연기 속에서 새로운 것의 뼈대를 민중과 일치협력하여 구축했던 데 있었다"(2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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