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1900-1919'에 해당되는 글 39건

  1. 2010.02.05 기관총과 수류탄이 역사에 남긴 흔적
  2. 2010.02.05 노동계급의 등장이 자본주의를 발전시켰다.
  3. 2010.02.04 진주 유림 세력들의 망국에 대한 대응
  4. 2010.02.04 경남일보의 초창기 경영상황
  5. 2010.02.04 근대 초기 마산에서 발행된 신문들: 마산시보, 마산신보, 마산신문
  6. 2010.02.03 철도가: 마산행진곡
  7. 2010.02.02 철도건설이 한국의 자본주의에 끼친 해악들
  8. 2010.02.02 철도가 마산에 남긴 흔적
  9. 2010.02.01 가족만 돌보다 나라를 망친 고종
  10. 2010.01.23 군항을 위한 수심측량, 철도를 위한 측지가 침략의 징후였다.

기관총과 수류탄이 역사에 남긴 흔적

역사/1900-1919 2010. 2. 5. 10:19
1차 세계대전은 이미 1904-5년의 러일전쟁에서 나타난 새로운 전쟁 양상을 계승하여 대량 살상 무기의 등장과, 그리고 진지전이라고 불리우는 참호의 등장으로 특징지어진다.  이는 1차세계대전 이전의 전쟁이 기마전, 돌격전, 용병들의 전쟁이었다면, 이제는 대량으로 죽어가는 전쟁으로의 돌입이므로, 전국민을 동원하여 치뤄어야 하는 전쟁, 그러나 돌아오기 어려운 전쟁이 되어 버렸다.  즉 정신력이나, 돌격만으로는 기관총에 의 해 가볍게 사살당하는 운명에 처해진 것이다.  이런 전쟁에서는 용병들도 응모하지 않고, 설사 응모한다고 하더라도 목숨까지 팔려고 하는 용병들은 없었기에 너무나 많은 비용이 들어갔다.  이제 국민들을 동원하는 새로운 정치체제의 등장이 없고서는 전쟁에서 승리하기는 난망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 시기에 왕정들은 국민개병제를 실시하면서, 피치자들의 정치 참여를 허용하고, 그들의 정당성을 보여주기 위해 민족국가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는 물론 비슷한 시기에 전쟁이 없었더라도, 많은 나라에서 억압에 대한 저항이 시작되었고, 노동계급의 운동에서도 사회주의 또는 무정부주의, 공산주의 운동이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면, 반드시 전쟁방식의 변화만이 민주주의나 민족주의의 등장으로 나아간다고 주장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적어도 봉건 왕정만으로는 자신의 왕정 유지만도 버거운 상태가 되었고, 왕정의 통치력을 잠식하는 새로운 부르주아지 세력의 등장과 도시 노동자들의 세력이 확대되고 조직화되고 있었다는 점도 분명하다.  이에 따라 그동안 기존 질서에 갖혀있던 세력들이 체제의 변환과정속에서 자신의 운명을 새로이 개척하려는 조직을 만들고, 운동으로 연결시켜 질서의 변화를 도모하고 있었음을 세계 각처의 역사에서 볼 수 있다.  이는 국가 수준만이 아니라, 마을 수준에서도 토지를 기반으로 한 생산력과 지배질서가 요동치고 있었고, 이에 따라 마을 넘어서는 질서의 수립, 이를 옹호하는 상업, 상품생산세력의 등장과 아울러 근대국가로의 전환을 요구받고 있었다고 보여진다.

이러한 상황은 한반도를 염두에 둔다면, 이미 동북아 질서는 청나라의 쇄락, 한족(중화족)의 등장과 동시에 팡창력을 갖춘 근대국가로의 발돋움, 일본의 만몽진출이 이루어 지고 있었다.  러시아는 1차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중에 시베리아에서는 민족들의 독립움직임과 동시에 사회주의 세력, 왕정세력들이 각축을 벌이면서 지역의 질서를 재편해 가고 있었다.  한반도의 한국인들은(한국인은 아마도 대한제국이라는 명칭이 사용된 이후에 일본의 문헌에서 나타나기 시작한다.  따라서 일본 문헌을 따라가는 것은 조금 마음이 언찮기는 하지만, 조선인이라고 보기에는 민족의식을 지닌, 근대의식을 갖춘 조선인이라는 의미에서 한국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해 본다)은 왕조의 몰락이후에 본격적으로 지배계층에 의해 근대적인 민족의식을 표출하기 시작하였고, 왕정의 복고를 주장하는 논의는 의외로 미약하였고, 줄곧 왕정이 아닌, 이나 입헌군주국의 논의도 별로 나타나지 않는 민주공화국의 형태의 국가로의 전환을 당연시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일제가 한반도를 지배하기 시작한 이후에도 왕정의 논의는 본격적이고 조직적으로 나타나 역사의 흐름을 바꿀 정도의 움직임은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고종과 순종의 죽음에 대한 애도의 물결은 컸었고, 이를 빌미로 독립운동이 나타나기는 하였지만, 이것이 곧바로 왕정회복 운동으로 나타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한국인들이 한반도의 정치체제를 왕정을 상정하지는 않았고, 민주공화정을 상정하였다는 점을 의미한다.  다만, 이것이 일제가 지배하는 것을 받아들이고는 있었지만, 가능한 범위내에서 민족국가로 나아가기를 소망한 것도 사실이다.  결국 1차세계대전이 끝난 시점에 한반도에서도 민족자결주의의 세계적인 조류에 맞추어서 독립운동이 벌어지고, 그 규모는 한국사의 입장에서는 대단한 것이었지만, 세계사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다지 조직적이지도, 무력이나 재정면에서도 위력적이지는 않았다.  물론 한국사에서는 거의 6개월에서 1년간 약 1만여명의 희생자를 내는 운동이었으므로, 한민족의 독립 의지는 세계적으로 선포하여, 후일 민족독립의 정당성으로 활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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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계급의 등장이 자본주의를 발전시켰다.

역사/1900-1919 2010. 2. 5. 07:46
자본주의는 노동계급을 형성하지만, 이들이 착취에 저항하고, 자본가 계급에 긴장감을 주고, 정치체제를 변화시켜 민주, 자유, 평등의 가치를 보존케하면서 자본주의는 발전하게 되었다.  지난 해 7월에 중국사회학회에 참석차, 시안에 가서 한양대 전성우 교수님이 추천하신, 샌드라 핼퍼린의 [유럽의 자본주의](1997/2009, 용의  숲)를 이제야 읽게 되었다.  원래 제목은 [제3ㅅ세계의 거울속에서 유럽의 자본주의 발전을 본다]를 지니고 있다.  즉 종속이론은 단지 라틴 아메리카의 문제가 아니라, 유럽의 2차세계대전이전의 상황을 그대로 반영한다는 것이다.  라틴 아케리카도 1945년이전에는 유럽과 마찬가지로 아니, 그보다도 더 잘살았었고, 유럽이 발전한 것도 실은 1945년이후라는 것이다.  산업혁명이라는 것이 유럽살마들의 살람살이를 나아지게 만든것이 아니라, 단지 당시의 유럽 봉건지주들의 생활을 나아지게 했을 뿐이고, 나머지 피악박 계급들의 생활은 나아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본가들은 자신들의 내부의 산업을 발전시키지 않았고, 외부로 자본을 수출하고, 외부의 식민지를 통해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들의 나라들은 국민들의 평균적인 생활 수준은 높아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를 역사적인 경제생활의 통계수치를 통하여 증명하고 있는 점이 특징적인 책이다.

그러나 저자의 발견점을 현재 우리의 관점에서 해석하자면, 정치체제의 민주화를 통해 자본가를 내부에 묶어두고, 긴장감을 주지 않으면, 국내 자본주의의 혁신적 발전은 어렵다는 점을 다시한번 확인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발전적 변화는 지역차원이건 지구적 차원이건 간에 세계체제나 국가, 개인 혹은 자본주의 발전 논리에 의해 추동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적 구성체 내에서 계급들과 계급투쟁에 의해 이루어 진다"(290). "경제 발전의 중요한 필수 요소는 1인당 생산이 계속증가하는 것과 꾸준히 늘어난 국가 수입이 모든 분야의 인구에 균형있게 분배되는 것이다"(298).  "꾸준한 경제발전을 이루여면 혁신적이고 급진적인 사회개혁이 필수적이다"(300).  만일 생산성을 높이고, 기술혁신을 이루고, 소득이 높아지지 않는다면(인건비의 개념이건, 국내 시장의 확장이건) 자본주의 발전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점은 대개 동의한다.  그러나 논란이 이는 것은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자극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이냐의 문제이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현금에 자본이 없어서 투자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주장은 없고, 오히려 돈은 남아도는데, 이것이 대기업의 자본잉여금이든, 은행의 대출여유자금이든, 그러나 이를 투자할 곳이 없다는 것이다.  이때 투자는 국내나 국제적으로 거의 동등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대개는 해외 투자가 더 용이하다고 주장한다. 인건비가 싸므로.  값싼 인건비를 좇아서 해외로 나가는 기업들은 스스로 생산성 향을 위해 노력하지않는다.   국내의 인건비가 올라가는 것만 탓하지, 국내의 시장 수요가 늘어서, 이를 공략하고, 높아진 수입에 맞추어서 더 좋은 제품과 편리한 상품을 개발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최근에 뉴스의 중심에 서있는 미국의 스티브 잡스의 iPad에 대한 해석에 주의한다.  우리나라는 오래 전부터 정보통신이 발달하였다고 자랑하였으나, 그와 동시에 정보통신의 사용의 저 효율성과 비경제적 사용의 문제가 제기되어 왔다.  아무리 좋은 도로를 닦아 놓는다고 하더라고, 요금이 비싸거나, 노는 데만 사용하거나, 돈 많은 이들의 유흥장으로만 사용된다면, 발전의 가능성은 낮은 것이고, 생산유발효과나 산업연관 효과는 낮은 것으로 해석할 수 ㅇ밖에 없다.  그러나 적은 물적 구조라도, 이를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생산적으로 사용하고, 모든이들이 접근이 가느하도록 사용된다면 이것이 더 발달된 정보통신구조로 볼 수있다.  이런 점은 인터넷은 발달되어 있으나, 정보공개는 발되어 있지 않은 나라, 말은 많으나, 책과 같은 보편적인 지식의 유통은 없는 나라, 평가를 통해 남을 탓하고 변명하기에 바쁘고, 자신의 결점을 보완하는 것에 인색한 나라는 정보 통신의 발달이 아무리 잘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사회전체의 발전에 기여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스티브 잡스의 제품은 기술이 아니라, 소프트 웨어, 접근가능성, 정보 유통 가능성, 효율성과 경제성에서 뛰어 난 것이다.  이는 개인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사회적인 네트워크, 협력의 가능성과 지속성, 개인의 창의성을 모을 수 있는 기제의 발달이 없는 사회에서는 불가능한 제품이라는 점에서 필자는 부럽다는 느낌을 가지고있다.  이제는 기술의 발달이 아닌 사회의 공동체성이나, 상호신뢰에 기반한 정보 유통과 협력이 없는 사회는 경제발전도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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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유림 세력들의 망국에 대한 대응

역사/1900-1919 2010. 2. 4. 12:13

대한 제국의 주권 상실은 유교를 이념으로 하는 왕조의 몰락이자, 동시에 이에 기대어서 물질적인 이익과 권력을 장악 세력들의 기반이 상실될 가능서에 직면한 상황이었다.  이렇게 확실한 문장을 쓰지 않는 이유는 한편으로 몰락이면서, 동시에 다른 세력에게는 특히 일제의 근대 국가 관료기구로 편입될 수 있는 세력(근대 기술을 상대적으로 일찍이 접하고 익힐 수 있는 세력)과 일본 제국주의의 등장이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창출과 유지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한 세력들은 기회를 보아가면 친일로 돌아서게 된다.  1904년 2월에 사실상 조선왕조의 한성은 일본군이 점령하고, 이후에는 적어도 군사적으로는 중앙정보는 일본의 무력 앞에 놓인 존재가된다.  이후 점차적으로 외교권, 고문제도, 통감부를 통한 통치, 군대와 재정권한의 상실 등을 거치면서 서서치 그리고 완전하게 국권 상실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이에 대한 대응은 이미 명성황후의 일본군과 낭인들에 의해 살해되고, 고종이 일본군인을 두려워하여, 러시아 공사관으로 자리를 옮기는 과정을 보면서 국가의 몰락을 이미 예견하였던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다만 당시에는 대부분의 권력자들은 외세를 이용하여, 즉 강한자에 붙어서, 침력하려는 세력을 물리치는 방식을 생각하고 있었을 뿐 복겨적으로, 형식적이고 미봉책으로는 어느정도 외교력과 군사력을 키우려고 노력하였지만, 실제로 국가의 능력을 강화시키는 희생적이고 과단성있는 정책을 내세우지는 못했다.  적어도 독립협회가 활동하고, 3국간섭으로 한반도에 어느정도의 세력균형이 형성되었던 시기에는 입헌군주국 정도의 정치개력을 진행하고, 동시에 이를 기반으로 재정과 군사개혁을 진행할 수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고종은 독립협회의 의회 개설론, 자강론, 어느정도의 시민사회의 인정을 거부하고 오히려 탄압함으로써 마지감 기회를 놓쳐버리고, 망국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한국인이 체감하게된 망국은 1907년 군대의 해산과 동시에 통감부 통치가 진행되면서, 국가체제를 일본이 장악하면서, 실제로 통치의 효과가 나타나게 된 시기이다.  이때 왕조 부활을 주장하지 않았고, 대신 실력자강론, 실업의 진흥과 교육의 진흥, 그리고 의병의 등장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들은 근대적인 세력이라기 보다는 왕조에 기반하여 기득권을 가진 세력이 반발하는 형태이었다.  그러나 그 대응은 달랐다.  과거처럼, 단순히 왕정복고를 주장하는 수준은 넘어서서 자강을 생각하면, 스스로 실력으로 국가의 부흥을 꾀하는 방식이 등장한다.  이 와중에 의병운동도 발생하고, 교육운동, 실업운동이 등장하고, 계몽운동의 한 형태로서 신문도 등장하게 된다.

물론 단순히 경남일보가 유학자들의 계몽운동의 한 형태로 등장했다고 주장하기에는 반대되는 증거가 너무도 많이 등장한다.  김경현 박사가 주장하는 것처럼, 친일적인 인사들의 참여, 일본의 노골적인 찬사, 기사의 애매성, 춘장절의 찬양, 춘장절 행사의 주관을 들고 있다.  여기에 논란은 더하여, 당시의 주필 장지연의 친일적 행위까지 증거로서 제시된다.  이는 당시의 관찰사가 보조하였고, 관공서를 통한 배급과 수급, 일제의 기사 검열, 일제가 본격적으로 국가기관을 장악하던 상황이라는 상황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필자 여기에 더하여, 지방 향토세력(향반, 향리의 유림세력)의 물질적 기반의 상실과 동시에 당시에는 먹어돈 면장의 주민 선출, 주민 자치의 존재라는 것이 있었으나, 일제의 등장으로 지방에서도 권력을 빼앗기고, 대신 기껏해야 일제의 세금 수탈의 역할이나, 국가 공무에 대한 부담을 대신 부담하는 일을 담당하므로서 면민들에게도 일제의 앞잡이나 수탈의 대행자라는 역할을 맡게 되면서 피해를 직접적으로 받게 되는 세력이 된다.  이에 대한 대응의 하나로서 필자는 경남일보와 같은 신문이 등장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경남신문은 향촌 유림 세력이 국권상실에 대한 물질적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대응을 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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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일보의 초창기 경영상황

역사/1900-1919 2010. 2. 4. 11:27
경남신문은 지주지역에서 발간된 신문이라는 의미를 넘서서서, 1909년에 인근 경남지역의 유지들과 관직자들이 모여서 만든 신문이다.  즉 이사원에는 창원의 손덕우가 참여하고 있고, 동래, 양산등지에서도 참여하고 있다.또한 편집부에는 장지연을 주필로서 경성에서 초빙하였고(월 급여 50원, 당시에 편집 겸 발행인의 급여가 25원이므로 그 대우수준을 알 수있다), 번역 1인(월급여 30원), 인쇄인(월급여 25원, 수당은 별도), 식자인(월 급여20원), 삽지인(월급여 20원 1인, 14원 1인), 채자인(16원, 14원을 급여로 지급), 회륜인 등 적어도 편집과 인쇄 분야에 경성에서 11인을 초빙하였고, 인근 대구에서 회륜인을 초빙하여, 전국적인 수준에서 기술자나 경험있는 자들을 모집하였음을 알 수 있다.  자본금  모집의 어려움에 더하여 경험이 없는 신문 사업은 서울에서 하는 것보다 인력을 구할 수 없어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에 더하여, 신문 구독와 배달, 수금 시스템의 부족이 어려웠다.  대부분의 신문들은 각 지역 면단위에서 자체 기금으로 구입토록 관공서에서 권고하여 구입하는 형태를 띠고, 이를 신문종람소에서 식자가 읽어주는 형태였다.  기록에는 한때 8천부까지 발행했다고 하고, 대개는 2천부 정도를 발간을 한 것으로 보아서, 적어도 면단위 배포망을 유지하려고 노력한 것으로 볼 수있다.  그러나 상당수의 면에서는 서울에서 발간되는 매일신보는 구입하면서도 경남일보의 구입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갖는 경우가 많았다.  그 때나 이제나 서울 중심의 매체가 선호되는 것으로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  배달은 대개 우편을 이용하였으나, 수금에 어려움을 겼고 있어서, 수금 도력하고 수금하면, 커미션을 주는 제도를 택하였으나, 밀린 대금이 항상 존재하여서, 경영난을 가중시키고 있었다.

신문 제작에서는 뉴스보다는 대개 관급 기사나, 해설기사, 정부의 방침을 정하는 것을 위주로 실었음을 알 수 있다.  취재는 2명의 기자가 담당하였는데,  창간기의 기자는 진주 출신의 김갑순, 강한초이었다.  이들이 신문 4면중 기사로 만든 정도는 10-15%정도의 지면을 장식하고 있었다고 보여진다.  따라서 직접 취재에 의한 기사의 양은 많지 않았다고 볼 수있다.  그러나 이들 기사도 대개는 누가 그렇게 말한다고 하더라라는 문체나, 누가 어떻다고 전하더라라는 문체의 사용을 보아서, 전언이나, 제보하는 것에 의존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들에 의해 나온 기사들이 당시 1909년-1915년 폐간할 때까지, 대개 주당 3회정도 발간한 것으로 평균할 수 있는데, 일제에 의한 세금 수탈(주세, 연초세, 가옥세의 신설), 징세의 강제성과 야만성(인신구속과 폭행, 재산 경매, 압수)을 폭로하고, 일제 행정의 폐해(면사무소의 신설에 따른 주민 부담의 가중,도로 건설에 따른 노역, 세금 부과시 소요되는 비용의 납부)를 폭로하고, 또한 일제에 의해 잘 보도되지 않는 폭도들(의병들의 활동)의 활동을 보도하고, 일제의 역사왜곡과 학교교옥의 탄압을 보도한 점은 높이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신문은 실제로는 1913년 주필 장지연이 사임할 때 즈음에 이미 파국에 이르렀고, 공식적으로는 1915년에 폐간하는데, 폐간할 당시에는 폐간 결정을 할 주주총회에 주주들이 참석치 않아 영업을 공식적으로 종료시키기도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필자는 이에 관한 기록들(부산대 민족문화 연구원 차철욱 박사가 제공한 것)을 검토하며서, 잦은 인사이동, 약속한 주금 납입의 불이행, 구독대금의 미납 등이 주된 이유였었고, 이를 메꾸어 준 것이 동래군 구포 저축 사채였었다.  그러나 아마도 이때 즈음에는 구포 저축은행도 부산으로 넘어가는 시기였다.  나는 지금도 한국에서 책임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잦은 이동에 따른 업무 노하우가 축적이 되지 않고, 조직의 노하우가 쌓이지 않는 점, 무책임한 자금 문제 등이 대부분의 조직에서 나타나는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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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초기 마산에서 발행된 신문들: 마산시보, 마산신보, 마산신문

역사/1900-1919 2010. 2. 4. 10:48

한반도에서 신문의 발행은 자본금, 설비, 인쇄할 수 있는 식자와 채자 기술인력의 부족, 신문에 대한 정부의 공적인 방해와 구독자의 간섭, 신문발행의 필요성을 느끼는 계층의 존재에 의해 결정되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애초에는 정부의 홍보물 성격의 신문이 발간되었고, 제대로된 신문은 아무래도 독립신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아무튼 신문이라는 것은 문자화된 뉴스를 의미하였고, 지식의 습득, 정부 방침, 개인사의 안내, 상품광고 등의 목적으로 발간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마산의 경우에는 일본인들이 거류하면서 이들이 만든 신문이 마산에서 발간된 신문의 시초로 볼 수 있다.  박용규, 1998, "구한말 1881-1910 지방신문에 관한 연구"(한국언론정보학보, 가을, 11호)에 따르면 부산체류 일본인들이 발간한 신문이 1881년 12월에 [조선신보]를 발간한 것이 최초의 신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에는 공식적으로 부산에는 2천여명의 일본인들이 거주하고 있었으니, 상대적으로 적은 인원이 신문을 발간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일본인의 경우에는 신문은 이미 상당한 정도의 대중적으로 받아들여진 제도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직 당시의 조선인들은 신문이라는 정보 매체 방식을 제대로 받아들일수는 없었을 것이다.  부산의 조선신보는 중간에 발간을 중단하고, 다시 1894년 11월에 발간되는 데, 조선시보로서 이는 일본 규슈 구마모토 현 사람들, 이들은 단지 조선반도와 가까와서 많이 이주했다기 보다는 한반도 침략을 선도했던 세력들인 낭인 침략세력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이들의 신문이 조선의 침략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일문에서는 약간의 한인 폄하 발언이 실리지만, 한문혼용체에서는 근대화가 중요하다는 정도의 글을 싣는 것으로 근대화와 침략이 동시에 진행되는 프로젝트임을 드러냈다.

"마산에서는 1905년 월 6회 발행의 마산시보가 창간되어, 1906년 초에는 격일간으로 발전했지만, 곧 없어지고, 결국 1908년 10월에 마산시보가 창간되게 되었다"(박용규, 1998: 125).  즉 1905년-1906년 사이에 잠시, 그리고 1908년에 마산시보가 발간된 것으로 보면 될 것이다.  1910년도에는 841부가 발간된 것으로 조선총독부 통계년보에 기록되어 있다.  당시의 마산에 체류중인 일본인 거류인(민간)만 생각한다면 많은 부수를 발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는 마산신보로 기록되어 있다.  1909년 10월에 진주에서 창간된 경남일보 창간호(10월 15일자)에는 마산신문 사장 鳥越圓次郞이 축사를 보낸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1908년이후에 발간된 것은 사실인데, 그 제호는 마산시보, 마산신보, 마산신문 중 어느 것이 맞는지는 확실치 않다.

신문의 발간은 기술적으로도 쉽지 않고, 이를 뒷받침할 재정, 구독시스템, 수금시스템, 취재 등의 면에서 쉽지 않은 일이었다.  만일 일본인 들이 마산에서 발간했다면, 인쇄기와 식자와 채자공, 기자, 우편배달시스템이 갖춰져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  아쉽게도 아직 마산의 한국인들은 신문이라는 제도를 받아들이지 못한 상태였다는 점을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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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가: 마산행진곡

역사/1900-1919 2010. 2. 3. 17:03
철도청 Korail 홈페이지 한국 철도 100년에 들어가 보면, 1905년에 건설된 마산포선 철도의 철도가가 수록되어 있다.

삼랑진을 갈려오는 기적 소리는
산악이 울리는 듯 강물이 요동
차례로 바퀴를 굴리울 때에
黑煙은 滿空하여 그름을 편 듯

바람같은 형세의 번개와 같이
낙동강 정거장에 得達하니
무수한 돛대는 강을 덮었고
번창한 무로하는 수륙을 잇네

넓고 넓은 鐵橋를 얼른 건너서
어언간에 한림정을 지내였고나
빨리 닿는 기차는 속력을 도해
진영역도 어언듯 넘어섰고나

창원역의 번화함을 잠시 살피고
구마산의 정거장에 당도하여서
往去의 유적을 듣고도 보며
광천의 욕장도 멀리뵈도다

기적이 해수를 놀래일듯이
진해만 鋪聲을 같이하는 듯
산악을 무늘듯 크게 울리니
어언듯 종점의 마산역이라

遠山을 굽으려 가깝게 하고
近山을 뻗치어 멀게하면서
살같이 빨리 부는 나는 새같이
어느듯 제물포에 다달았도다

이상과 같이 6개 연으로 되어있다.  각 연은 삼랑진에서 출발하여 낙동강, 한림정, 진영, 창원, 구마산, 마산역에 이르는 풍경을 묘사한 것으로 되어 있다.  마지감 연에서 왜 제물포가 나와는지는 잘 모르겠다. 배를 타고 제물포에간다는 것이진, 아니면, 마산선-경부선-경인선을 타고 제물포에 간다는 것인지가 분명치 않다.
흥미로운 점은 낙동강이 당시 아나도 1905-6년경에도 여전히 배를 통해서 운송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철도와 동시에 수운을 통해 화물 운송이 대세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창원은 번화하다고, 묘사하였고, 그러나 구마산은 지나간 유적을 듣고 본다고 하여, 영화가 사라져 갔다는 내용을 이루고 있다.  이는 현실로서 나타난 것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당시에 이미 국권이 빼앗긴 상황에서 일본인의 느낌을 적은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아무튼 구마산은 이제 신마산에 비해서 상권이 약화되는 현상이 발생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곧 해수욕장을 보인다고 하여, 당시에도 멋진 풍광을 자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이때에 해수욕장이라는 것이 실제로 존재하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마도 모래사장의 풍경을 묘사한 것으로 보여진다.  마산은 산호동 앞부근, 여객터미날, 그리고 가포 지역에 모래사장이 발달되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산호동 쪽의 모래사장을 가리킨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는 신마산역으로 가는 철로 노선은 바닷가에 면에 있기에 바닷가의 파도소리와 같이 날 수 있다.  그러나 글에서 한자의 포성은 아마도 진해만에 이미 일본 포병대대가 들어서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포사격 소리를 의미하는 것을 한자를 잘못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1907년에 들어서면 고종은 물러나고, 군대가 해산되면, 완전히 일제의 손으로 넘어가고, 일본은 한반도 통치를 위해 군대를 추가로 파견하고, 한반도의 백성들의 소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해이다.  1907년 7월 26일자 부산이사청 이사관 松井 茂가 이본 외무총장에게 보낸 전문에 따르면, 7월 26일부터 밀양철교와 삼랑진낙동강 철교를 지키기 위해 5명씩의 병졸을 파견하고 있고, 진영부근에 살고 있는 일본인들은 자체적으로 수비대를 구성하여 자체 경비에 나서고있다.  당시의 흉흉한 민심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진영지역이 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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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건설이 한국의 자본주의에 끼친 해악들

역사/1900-1919 2010. 2. 2. 18:53

일본이 역사 해석을 하면서 항상 강조하는 것이 일본이 한반도의 근대화에 기여하였다는 것이다.  그 증거로서 한반도에 남겨놓은 기반시설들(철도, 도로, 항구, 체신 등)과 아울러 근대적인 제도들(재정, 군사, 사법, 위생, 교육 등)을 든다.  이것은 또한 사실인 것으로 드러나기에 다만 일제의 침략성을 강조하는 논의는 대부분 그들의 의도에 촛점을 맞춘다.  즉 그들은 아무리 좋은 것을 만들었다고 하여도, 그것은 그들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고, 한반도의 조선인들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필자의 기존의 논리는 한반도에서 일제가 행한 것은 일본의 자본주의의 발전을 위해 필요불가결한 것이었고, 이것이 없었더라면, 오늘날과 같은 일본은 없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논리는 수량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발전 단계에서 필요한 것이 무엇이었는가를 이해하는 것과 동시에 필요한 것을 적시에 적합한 방식으로 충족시켜 일국의 자본주의 발전에 어떻게 기여하였는가를 밝혀야만 가능한 것이다.  즉 한반도의 철도는 일제가 만주와 한반도를 통해 물자, 사람, 군사의 이동을 쉽게하여, 일본 자본주의의 값싼 원료의 확보, 일본 노동자들의 식량 공급, 잉여 자본의 투자 기회 제공, 시장의 선점, 일본에서 유출된 잉여 노동력의 한국이주, 일본의 농민과 어민들의 추가적인 이역실현 기회 제공 등의 다양한 방식으로 기여하였다는 점을 인식시키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그러나 또 하나나의 논리는 한국의 기반 시설 건설이나, 공장건설, 또는 일본 내나 일본인들이 경영하는 곳에서 한국인들은 실은 일본인의 하청이나, 하부적인 낮은 기술만을 아주 낮은 임금을 받으며, 공사하여, 내부적인 식민지 (또는 임금 노예, 채무 노예)의 성격을 띠며 종사하였다는 점이다. 이는 일본에 가보면 더욱 뚜렷이 드러난다.  일본내의 기반공사나 탄광 등 혹독한 노동조건을 견디어야 하는 일에는 한국인들이 일본에 건너가서 이에 종사하였다는 점이다.  즉 일본의 기반 시설을 실은 한인 노동자들이 건설하여 종사하였다.

일본이 주장하는 일제가 한반도의 근대화에 기여하였다는 논리는 일제 남겨놓은 기반시설이나 공장 시설을 가지고 한국이 근대화에 성공했다는 논리이다.  물론 이 논리는 공장들이 대부분 북한에 있었기어 남한에서는 별로 도움이 안되었다거나, 아니면, 한국 전쟁시기 이러한 공장들이 대부분 파괴되었다 또는 공장은 있었지만, 이러한 공장들을 운영한 기술이나 경영진은 대부분이 일본인이었고, 기술자도 한국인들은 양성하지 않았기에 실제 공장 운영을 할 수 없었다거나, 일제가 남긴 공장은 일제가 만주, 대만을 점령하여, 국제적인 물류 체제 내에서 그들의 공장운영을 설계하였기에 그후에 벌어진, 만주와의 교류가 단절된 상태에서는 별로 효력이 없었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한다.

또 다른 논리는 일제가 남겨 놓은 기반시설의 기형성에 대한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철도 연구의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는 정재정 교수의 글이 유용하다.  (1) 중앙선 철도는 일제가 경부선이 함포사격권에 들기에 새로 건설하였다거나, (2) 만주와 연결을 위하여 북선루트를 만들었고 이것이 회령0웅기 나진으로 연결된 도로이다.  (3) 경부선의 경우에는 노선이 서쪽을 치우치다가 추풍령을 넘은 이유는 일제가 자신들이 경부선을 통해 모든 철도 이권을 장악하려는 의도에서 설계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서울-부산간의 빠른 선로가 개설되지 못하고, 현재와 같은 비효율적인 노선이 확정되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즉 "경부선은 서울과 지방의 수송을 원활히 하고 각 지역의 발전을 균등하게 만드는 데는 결점이 많은 기형선"이라는 것이다.  어찌보면, 한국의 지역발전의 불균형은 이미 경부선을 일제가 건설하면서 시작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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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가 마산에 남긴 흔적

역사/1900-1919 2010. 2. 2. 07:04
애초에 철도를 연구하려는 목적은 근대화의 역사에서 철도의 개발은 각 나라의 원시적 자본축적을 가능하게 하고, 시장의 발달과 자원 개발(수탈)을 촉진시켜 자본주의 발전을 가속화시켰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마산과 삼랑진 사이의 철도 건설이 갖는 의미를 탐구하여 하였었다.  물론 사회적으로는 철도의 등장은 철도를 매개로 한 좌석의 평등성(양반 상놈, 남녀노소에 관계없이 동일한 위치에서 앉아서 서로 담론을 나누거나, 아니면 적어도 눈을 마주치면서 장시간 있어야 된다는 사실 그 자체), 시간과 공간 개념의 변화도 중요한 인식세계의 변화를 촉진 시킨 것으로 되어 있다.  즉 당시 1904년 정도의 철도의 속도가 시간당 20Km, 최대 50Km까지 가능하였다고 하더라도, 아무튼 당시까지 나온 어떤 운송수단보다도 빠른 것이었다.  사람의 걷거나 달리는 속도가 최대 8Km정도, 따라서 대개 하루에 40-50Km가 최대한 속도였고, 말을 타고 달리더라도, 대개는 50Km 정도의 속도로 전진하였었다.  징기스칸의 말달리는 속도도 빠르다고 하더라도, 말이 휴식을 취하고, 먹이를 먹고, 적의 저항에 부딪치고, 말에 탑재한 무게를 줄이는 방식으로 속도를 빠르게 만들었었다. 아무튼 기차의 등장은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시공간의 변화를 가져온 획기적인 변화였다.  물론 이런 변화가 이미 영국에서는 1825년경 시작되었지만, 마산에서는 1905년에 마산선이 등장함으로써 시작되었다.

마산선은 애초에는 우리나라의 철도의 선각자인 이기종이 시작하였으나, 자금의 부족, 특히 외자가 필요한 상황에서 일본 자금에 의존하여여만 하는 상황에서 의지만 갖고 될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일본인의 자금, 조선왕조 세력의 후원으로 일을 진행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일본인의 자금이 필요한 이유는 당시는 일본의 경우에도 철도 선로 자재는 해외에서 수입하던 시기였고, 또한 철도 기관차나 수송용차 등 거의 모든 것을 해외에서의 수입에 의존하여야 하는 상황에서 외환이 필요하였다.  또한 측량기사, 터널 공사, 교량공사, 궤조부설, 기반조성 공사, 운영에 관한 상황 등 거의 모든 것이 이미 경인선을 개설하였고, 경부선 공사가 진행중이었지만, 이에 대한 노하우를 아직 갖지 못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 육군은 한일의정서에 의거하여 군용을 목적으로 한 것에 대핸 대한제국정부의 전폭적인 협조를 빌미로, 일본의 육군이 강제로 빼앗아서, 공사를 진행한다.  당시의 경부선, 경의선, 마산선 공사로 인해 일본의 철도건설업자들은 막대한 이익을 취하고, 그 근거는 한국인을 활용한 인력과 대한제국정부가 제공한 막대한 토지를 거의 아무런 보상도 하지 않은 정도의 상태에서 일을 진행하였기에 세계에서 당시까지의 기록에는 가장 싼 철도를 부설하였던 것이다.  그 이익은 대한제국 인민들의 원시적 자분축적이 아닌, 일본의 원시적 자본축적에 기여하였고, 철도 운영의 각종 기술을 익히는 장이 되었던 것이다.

일본외무성 기록을 보관하고 있는, 그 중에서도 아시아 관련 자료를 보관하고 있는 아시아 역사자료 센터의 인터넷으로 들어가면, 마산 사삼랑진간 군용철도 부설 1건이라는 114쪽 분량의 자료가 뜬다.  여기에는 1904년 8월 3일부터 1905년 8월31일까지 외무성이 주고받은 서류가 철해져서 보관되어 있다.  필자는 일본어의 붓글씨체로 쓰여져 있고, 독해에 능하지 못해 완전히 해석하면서 읽지는 못했다.  기회가 되면, 이 자료는 마산에서 번역, 해석하여 자료로서 공간했으면 한다.  지도도 5장이 첨부되어 있다.  마산의 정거장 부지에 관한 것들이다.  정거장 부지 지도를 보면, 장군천의 하류는 현재 시청 옆으로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현대 다파트 방향으로 흐르던 것을 시청방향으로 직선화 시킨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미 당시에 현재의 장군천 시장 앞의 길은 있었고, 새로 현재 시청 앞길을 만들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철도정거장 부지는 각국조계지를 경계선으로 하여, 현재의 시청앞 길과 철도가 만나는 지점까지 소위 신마산 전체를 아우르는 정도의 규모를 지녔었다.  정작 실제로 정거장 시설로 사용한 것은 시청옆의 부터 각국조계지 경계선까지 인것으로 보인다.  당시에는 이 부지는 대부분 논이었고, 여기에 정착한 사람들은 현재 추산동 무학국민학교 뒷산 중턱, 신월동(정거장 부지 경계선 바로 바깥), 그리고 반월동 부근에 마을을 이루고 살고 있었다.  따라서 정거장 부지 용지를 매입하려면 이들 소유의 부지와 마을을 매입하여야 하는 문제가 얽혀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조선정부와 협의를 해야하지만,사실상, 일본이 위협을 내세우고, 협상을 벌이는 양면적인 전략을 구사하였다.

현재의 마산의 도시구조를 보면, 구마산(원마산)에서 3.,15의거탑을 지나면서 부터 정거방 부지, 각국조계지, 그리고 경남대학교 부근부터는 공터, 다시 일본인 전관거류지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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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만 돌보다 나라를 망친 고종

역사/1900-1919 2010. 2. 1. 16:43
한국 철도사 제 1권, 36쪽에 로일 전쟁 직전에 러일 사이에 벌어진 외교 상황을 서술하면서, 이런 의문을 제기한다.  "러시아와 일본 또한 청국이 한국을 가운데 두고 이렇게 요리할 때 한국은 과연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알길이 없으나 노일이 자기들끼리 한국을 요리할 타협을 맺지 못하자, 러시아는 러시아대로, 일본은 일본대로 서로 다투어 군비를 서두르며, 서로 힘을 뻐기다가 이윽고, 1904년 2월 6일로서 국교를 단절하고 칼싸움으로 번지게 되었다".

1894년 갑오경쟁 개혁시기부터, 일본은 이미 경부선 철도를 부설하기 위하여 측량을 시작하였고, 러시아는 1899년이 개항하자 마자, 극동함대 사령관과 주한 러사이 영사가 마산에서 회합을 하고, 마산을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과 여순을 잇는 중간 기착 항구로 개발하려고 서두르게 된다.  1903년이 되면, 압록강 하구의 용암포를 1만명이상의 러시아 군인이 점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1903년에 대한제국 정부는 일본 미쓰비시 조선으로부터 군함을 한 척 사들이나, 이 역시 재정부담이 크고, 운영할 해군력이 없어서 인천항국에 묵히고 만다.  이에 항의하는 군부대신의 의견에 대해 의정부 역시, 해군의 창설을 미루고, 군함은 군부의 물자 처리하는 곳으로 보내게 한다.

앞서 한국철도사를 집필한 필자의 질문에 답을 구하기 위해 고종실록의 1903년도 판, 특히 후반기의 기록을 훑어 보았다.  대부분, 인사 명령에 관한 것과 왕족의 상이나 혼례에 대한 기록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기록을 넘어서, 이와 관련 인사들에 대한 상훈이나, 노고를 치하하는 것, 그리고 재정을 후하게 배정하는 것이 등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는 가끔 정부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출근을 제대로 하라, 보고를 제대로 하나, 가렴주구를 하지 마라는 정도의 훈령을 내리는 정도로 통치에 임하고 있었다.  고종이 대한제국의 정부를 다스릴 능력이나, 대외적인 정보 수집과 대처능력이 제대로 되어 있는지 의심이 된다.  러일 전쟁이 벌어지자, 열강들은 기관총의 위력, 기마전의 취약성, 요쇄와 참호의 등장 등으로 새로운 전쟁 방식이 나타난 것으로 기록하고,이러한 전쟁방식이 앞으로 전쟁에서 등장할 것으로 예견하고 있다.  이때 대한제국 정부에서도 러일전쟁의 상황을 관찰하기 위해 시찰단을 보냈다.  이들이 고종에게 보고한 내용을 실록에서 보면, 상대방이 보여주지 않으려 하고, 구차하게 보지 않았다는 답이 나온다.  이것이 고종에게 보고한 내용이다.

반면에 1904년에 들어서면, 고을의 관리들이 문제가 생기면, 벌써 외국군에게 의존하여 처리를 요청하고, 일본 상인이나 일본군인들, 그리고 철도를 건설하면서 생긴 문제로 조선인을 처벌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있다.  이에 대해 고종은 일본군인을 접대하고, 일본군인이나 일본인들에게 상해를 입히거나 방해를 한 사람들에 대해 처벌을 내리고는 일을 주고하고 있다.  갖은 아부를 다하고 있는 셈이다.  이에 대해 가끔 대한제국의 우국 지사들이 고종에서 의견을 올리지만, 이에 대해서는 의정부에서 논의하라고 하는 정도에서 처리를 미루고 있다.   오히려 일본대사 하야스 곤노스께나 미국 대사를 만나는 횟수가 늘어나고, 이들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요즘 뉴스를 보면, 대통령이 자신의 가족을 국가 재정을 사용하여, 국가의 행사에 데리고 다니는 문제가 제기되었고, 이에 대해 청와대는 미국의 예를 따른다고 말한다.  미국에서는 개인 용도의 전화와 공적인 전화까지도 구분해서 사용하는 나라이고, 영국도 수상이 시장을 가거나 아이를 등교시키는 것은 개인 차를 사용하고, 공용차를 사용하지 않는다.  이럼 점을 더욱 본받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한다.  그리고 남북 정상회담에 대한 논의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는 데, 실은 남북관계는 어찌 보면, 최근들어 더구나 중국이나, 미국, 일본 등의 외교관계의 종속적인 측면이 너무나 큰 상황이다.  더구나 이명박 정부들어서서는 강대국 외교의 종속적인 위치로 스스로 위치지운 것으로 이해된다.  중요한 점은 강대국 외교의 각축 속에서 우리의 정보력이나 외교력, 그리고 군사력을 더욱 잘 호라용하여야 하는 데, 그것도 잘 안된다는 점에서 자꾸 러일전쟁 시기의 고종정부의 처지가 떠오른다.  일본의 해군력은 한국의 3배이상이고, 미국의 태평양 함대에 비해서는 반정도 된다고 보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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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항을 위한 수심측량, 철도를 위한 측지가 침략의 징후였다.

역사/1900-1919 2010. 1. 23. 21:27

조선왕조와 대한제국은 애초에, 그리고 지속적으로 길을 내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이는 외침의 길이 될 것을 걱정한 것이었다.  또한 지도의 발간도 지형보다는 사람과 산출물 위주로 지도를 발간하다보니, 토지의 성질이나 자원의 량을 알아내기 위한 지도는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실은 내치를 위한, 또는 산업화를 위한 지도, 아니 부국강병책을 마련하기 위한 측량과 지도가 없었다고 ㅍ여가할 수 있다.

한반도를 침략하려는 19세기 초반에는 프랑스와 독일, 이어서 영국, 미국, 러시아, 급기야는 일본까지 가세하여, 일단 바다의 수심을 측량하여 침략의 배가 (군함) 바다에 상륙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기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19세기 초반부터 이양선들이 등장하여 바다의 수심은 이미 대부분 측량을 끝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육지를 측량하고 관찰한 것은 실제로 이를 실행에 옮긴 것은 일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상황에 따라 철도건설을 위해, 도로 건설을 위해, 자원파악을 위해, 그 목적에 따라 부분적으로 이루어지면서 한일합방이 이루어 진 후에는 전국토를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완전한 수탈을 목적으로 이루어 진 점이 특징이다.

지난 1월 초 유장근 도시 탐험대 기회에서 허정도 박사는 19세기 말에 일본이 제작한 지도에 상세하게 마산의 모습이 그려진 것을 입수했다고 전언했다.  이는 1895년 12월에 부산에 도착하여 경주로 향하던 러시아 군사시찰단의 기록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이때 러시아는 군함 여러척을 부산에 정박시켜서 시찰단을 통해 전국 방방 곡곡을 돌아보았던 것이다. 이 기록에는 1896년 4월경에 고성을 통해 마산, 창원, 김해, 부산으로 여행하면서 관찰한 장면이 나오고 있다. 
카르네프 외 4인, 2003, 내가 본 조선, 조선인 (러시아 조선장교 조선 여행기), 가야넷: 142-146쪽을 보면 흥미로운 장면이 나온다.

물론 이후에도 일본 육군이 러일전쟁기간 중에 마산과 삼랑진 간의 철도 건설을 위해 부산, 제물포, 마산에 직접 군사조직내의 측량단이 등장하여 마산과 삼랑진 간의 철도 부설을 위한 측량에 착수하여, 삽시간에 완성하고, 1904년 7월경부터 기반 공사에 들어간다.  후에 일본은 한일 합방을 전후하여 본격적으로 츨량사를 전국적으로 보내서, 체계적으로 측지를 하게 된다.  경상남도의 경우에도 비교적 한반도에서는 이른 시기에 측량이 시작되고, 이를 보조하기 위한 측량사로 조선인들을 양성하기 시작한다.

19세기 후반만해도 아직 우리나라의 정부 관료들이 측량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즉 일본이 1892년에 측량한 것은 협약상 권한 밖이지만, 그렇지만, 일본은 경부선을 부설하기 위하 무지한 조선왕조의 외부대신이나 관료들을 상대로 조선의 새들을 잡아서 전세계에 이를 소개하겠다고 하면서, 이를 위해서는 총을 쏘아서 잡아야 하고, 이럴 경우 조선인들이 다칠 위험이 있으므로, 부근에 줄을 쳐서 못들어오게 한다고 하자, 조선의 관료들은 일본의 측량팀이 조선인들의 생명을 위하는 마음이 갸륵하다고 고마움을 전한다.  그러나 실은 이 때 일본은 경부선 부설을 위한 사전 측량을 실시하였던 것이다.
이현희, 2001, 한국철도사 (한국 학술정보): 342-244

측량을 이해하지 못한 조선왕조의 상황을 잘 보여준다.  적어도 50년 이상 바닷가를 측량한 것, 이미 일본과 서구에서 30녀이상 전에 시작한 측량이란 것을 이해하지 못한, 그리고 그들의 침략 의도를 이해하지 못한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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