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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9.11 11세 일본인 소년이 목격한 마산 3.1운동
  2. 2013.09.11 1910년대 마산의 일본인 의사와 그의 아들의 삶
  3. 2013.03.04 나치의 등장과 노동계의 대응
  4. 2013.03.03 나치의 노동정책
  5. 2013.03.02 독일 바이마르 공화시기 지식인들의 전체주의적 성향
  6. 2013.02.26 자유군단과 재향군인회
  7. 2013.02.25 아리안 우월주의와 열등인종 학살
  8. 2013.02.24 바르사이유 조약과 나치의 등장
  9. 2013.02.20 자유로부터의 도피
  10. 2013.02.18 독식과 독박의 민주주의는 결국 나치의 독재로 나아간다.

11세 일본인 소년이 목격한 마산 3.1운동

역사/1900-1919 2013. 9. 11. 17:42

고길희, 2005, [하타다 다카시, 마산에서 태어난 일본인 조선사학자], 지식산업사에는 1908년에 신마산지역에서 태어나 마산 3.1운동을 목격한 진술담이 실려있다. 이는 물론 하타다다카시가 말년에 회고록에 나온 기록을 원용한 것이다.

"소학교 때의 일이다. 하타다 소년은 구마산에 있는 친구 집에 놀러갔다 오는 길에 신마산 장군천 다리 근방에서 우연히 삼일운동의 독립만세 시위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마산에서는 320, 25, 30일 즉 5일장이 서는 날을 이용해 시위행진이 있었다. 조선인들이 구마산시장에 집합해 신마산에 있는 府廳警察署 등 관청을 향해 행진해 갔다. 일본군대와 경찰은 신마산 입구의 다리에 대기하고 있다가 시위대를 진압하는 작접에 나섰고, 90여명 이상의 조선인을 체포하였다.

하타다는 노년에 당시의 일을 글로 적었다. 그에 따르면 우연히 맞닥뜨린 시위에는 조선 젊은이들은 물론 노인과 어린 여자까지 합세해 만세를 부르짖고 있었다. 어린 마음에 겁이 났지만, 그들은 어떠한 가해 행위도 없었고, 다만 귀가를 서둘렀을 뿐이었다. 그때 경찰들이 몰려와 시위대를 둘러싼 뒤 곤봉으로 마구때렸다. 시위가 있은 뒤 수 많은 조선인들이 끌려가 구속되었다. 경찰서는 신마산 시가의 변두리에 있었다. 일본 아이들은 경찰서 주변에 모여, 조선인들이 연행되어오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다. 연행되어온 조선인들은 구치소에 다 넣을 수 없게 되자, 경찰은 경찰서 안에 있는 테니스 코트에 철조망을 치고 그 안에 조선인을 몰아 넣었다. 그걸 본 하타다는 어린 마음에 비가 오면 어떻게 될까 걱정했다고 한다.

당시 하타다 소년은 조선인이 남녀 모두가 시위하고, 더욱이 자신과 동년배인 아이들까지 시위 행렬에 참가하고 있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평소에 아무말도 못하던 조선인들, 특히 노인과 아이들까지 시위에 참여하는 것을 보고 어린 마음에 놀랐던 것이다. 그리고 시위대가 자신이나 일본인들에게 어떤 위해도 끼치지 않았음에도 경찰이 몰려와 곤봉으로 마구 때리는 모습을 보고 공포를 느꼈다" (42-43).

저자는 마산 3.1운동이 20, 25, 30일에 발생한 것으로기록하였으나,실제로는 21, 26, 31일에 발생한 것으로 자료를 통해 논증되었다 (남부희, 1997, "마산 창원지역의 3.1운동 성격", 한국민족운동사 연구, 15; 김봉렬, 2002, "마산의 3.1운동", 경대사론, 12/13호).

기록에 따르면, 3차례시위가 모두 구마산 정기시장날을 이용하여 발생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하타다 다카시가 3차 시위중 어느 시위를 목격했는지는 불분명하다.  대체로 3차례 시위에 대해 각각의 격렬성, 폭력성의 정도는 다른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1차 시위 - "구마산장날 장터는 시위참가자를 비롯하여 장으 ㄹ보려고 나온 인근 지역 주민들로 붐볐다.  시위주동자들은 보부상으로 가장한 김익열에의해 시장에 들여온 태극기를 독립선언서와 함께 군중들에게 배포하였다.  이들은 정오 경 마산발 삼랑진행 열차의 기적소리를 신호로일제히 태극기를흔들고 만세를 외쳤다.  이에 장터의 군중들도 합세하여, 만세를 부르며 시내로진출하였다.  시위행렬이 이어지자 주위의 행인들도 가담하여 시위대는 삽시간에 3천여명에 이르렀다.  당시 마산에 거주하는 조선인이 15천여명이라는 기록을 감안하면, 3천여명은 거의 전 조선인이 참여한 것으로 짐작한다.  평화적 만세시위에 대해 일제는 처음부터 강압적 폭력적 방법의 진압으로 일관하였다.  시위 군중이 가두로 진출하며, 단시간에 대규모 시위로 확대되자, 마산주재 일본군 헌병과 경찰을 출동시켜 총검을 앞세워 시위대를 무차별 탄압하였다.  더욱이 일제는 진해 해군 경비대의 군함 조무호를 마산포로 출진시켜 전투태세를 방불케 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이날의 시위는 오후 6시까지 계속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주동인물 50여명이 마산경찰서로 연행되었다" (김봉렬, 2002: 182)

2차시위 -  "오후 2시경 구마산장터에 모인 군중은 앞서 제 1차 구마산장날 시위에 투옥된 애국지사와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가두로 진출하였다.  시위행렬이 북마산파출소를 지나 마산형무소로 나아가며 시위군중은 3천여명으로 극격히 불어났다.  이날의 시위는 구속인사 석방이라는 구체적 요구가 전면에 등장하며, 1차 시위에 비하여, 그 정도가 좀더 격렬해졌다.  일부 과격시위자들은 마산형무소까지 쳐들어가 수감된 동지들을 구출하고자 외칠정도였다.  시위군중의 확산에 당황한 일제는 경찰을 급파하고, 마산 가포동의 육군 중포병대대 병력까지 긴급 출동시켰다.  무장 군경의 무차별 진압속에 이날 시위에서도 주동자 14명이 체포 연행되었다" (김봉렬, 2002: 183).

3차시위 - "3차의거인 3월 31일, 구마산 일대에서 약 2천여명의 군중이 2시간에 걸쳐 만세운동을 전개했지만, 이때 일경은 물론 日軍 중포병대대원까지 동원하여 탄압함으로써 이날의 의거는 더 이상 진전되지 못했다" (203).  이 기록은 앞선 2차 의거시에도 군까지 동원하였다고 나오므로, 2, 3차 모두 군인이 동원된 것으로 이해된다.  "구마산장날 시위에는 약 2,5백여명의 군중들이 참가하였으나, 시위의 정도는 1, 2차에 비해 더욱 격렬해 지고있었다.  시위군중들은 마산 형무소로 진출하여, 애국지사들의 즉시 석방을 요구하며, 만세를 불렀다.  특히 이날 시위에는 형무소 간수까지 참여하였다.  시위군중의 만세함성에 흥분한 한국인 간수 박광연이 제복을 벗고, 시위대속으로 뛰어들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형무소간수까지 시위군중에 합세하자, 시위 분위기는 한층 고조되었다.  만세시위가 절정에 이를 즈음, 진압을 위해 예외없이 무장 일군경이 출동하였다.  이들은 총칼을 휘두르며, 또 다시 시위군중 20여명을 연행하였다" (김봉렬, 2002: 183-84).

하타다의 기록과 논문들의 기록을 비교하면, 하타다는 형무소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구마산 장터에서 신마산의 부청과 경찰서를 향하여 시위가 진행되고 있었고, 이를 장군천 다리에 저지한 것으로 진술하고 있다.  또한 약 90명이 연행되었다고 하여, 1차의거를 목격한 것으로 추정된다.  즉 2, 3차의거는 주로 1차 의거나, 앞선 의거에서 구속된 인사들을 석방하라는 것이 주요요구중에 하나였고, 2, 3차 의거는 1차 의거에 비해 적은 숫자가 연행되었다고 논문들에서는 기록하고 있기에 그렇다. 또한 하타다의 목격에는 경찰 만이 등장하고 있는 점 또한 경찰과 군인이 동시에 출동한 2, 3차의거와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따라서 하타다는 1차의거를 목격한 것으로 판단된다.  경찰서와 부청은 모두 신마산의 현재 경남대 평생교육원, 경남종합사회복지관 자리, 그리고 그 건너편의 현 파출소로 추정되기에 그렇다.

폭력성에 대해서는 남부희는 적었다고 표현하였고, 김봉렬은 더욱 심해졌다고 표현하나 모두, 1차 시위에서는 격렬하였다는 점을 인정하고있다.  따라서 하타다 다카시는 1차의 거를 목격한 것으로 판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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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대 마산의 일본인 의사와 그의 아들의 삶

역사/1900-1919 2013. 9. 11. 16:23

고길희, 2005, [하타다 다카시, 마산에서 태어난 일본인 조선 사학자], 지식산업에 1910년대의 마산에서 살은 일본인의 체험 기록이 나온다.  "하타다 다카시는 1908117일 경상남도 마산에서 태어나, 1921년 마산소학교를 졸업한 뒤, 부산중학교에 입학해 1925년 졸업하기까지 약 17년 동안을 조선에서 생활한 재조일본인 2이다" (25).

"개항한 1898년에는 마산 근교를 포함하여 일본인 이민자 수는 103, 1900년 마산포 사건을 전후하여 3백명으로 증가하고, 러일전쟁 뒤인 1905년이후에는 2천명으로 급증하고, 하타다가 태어난 1908년에는 3,687명에 이르렀다....1912년 당시 마산의 이민자들의 일본 지역 출신지역은, 혼슈(本州)의 야마구치(山口), 히로시마(廣島) , 규슈(九州)의 나가사키(長崎), 후쿠오카(福岡), 사가(佐賀)현에 이어 에히메(愛媛) 현과 함께 오카야마 현이 6위로 7백명의 이민자 수를 보여주고 있다 (32).  출처: 朴宗根, 1995, “旗田巍先生馬山”, 旗田巍先生追悼集刊行會, [追悼 旗田巍先生]: 140-141).  오카야마 현의 사람들은 통영 현재 도남동 관광단지 입구에 이주어촌을 형성하였다.  이에 대한 기록은 김준 외, 2007, "경남 통영 강산촌의 형성과정과 주택변용에 관한 연구", 대한건축학회 논문집 계회계, 23권 8호 (통권 226호), 8월호를 참조하시오.

"1906년에 의사였던 하타다의 부친이 오카야마 현(岡山縣)에서 마산으로 이주했다. 아버지의 이주 동기는 하타다의 조부가 경영하던 주점 (酒店, 사카야)가 망하자, 조선이란 신천지에서 성공해 보겠다는 야심을 갖고 하타다의 부친 하타다 가네타로 (旗田兼太郞)가 마산으로 이주했다" (하타다의 누이인 하타다 게이코 旗田惠子의 증언) (31).  1911년 마산에 있던 빈전 신문점이 발행한 [마산과 진해만](일문)에는 마산에 당시 8명의 의사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허정도, 2011. 8. 8, 100in.com에 올라온 것).  이때에는 이미 마산병원이 자혜의원으로있었기도 한 시기라서 의사이름도 등장하고 있었다.  즉 김형윤, [마산야화]에 "1909년 신마산 마산병원에 근무한 적이 있는 마에하라가 철도병원 위탁 산과를 경영했으며, 마산병원 도구가와는 마산병원을 시가의 배로 쳐서 조선 총독부에 기증했다.  마산병원은 경남 자혜병원으로 됐다가, 경남 도립 병원으로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현재 필자가 확인한 바로는 월영초등학교 뒷편, 헌병대장이 살았다던 인근의 언덕 집에 [자혜병원 산부인과]라는 나무 팻말이 쓰러져 있음을 확인했다.  그러나, 마산부청이 1915년에 발간한 [마산안대](일문) 책자에는 마산병원이 마산중부 경찰서, 또는 월초등학교 동편 맞은 편으로 추정되어 확인이 필요하다 (조용호, 1999. 1. 25일자 경남신문). 아무튼 중요한 것은 당시에 하타다의 부친은 8명중 한면의 의사로서 근무했으며, 아마도 초기에는 개인 병원에서 근무하다, 후에 마산병원에 근무하지 않았나 하는 추측을 해본다.  그 이유로는 마산병원의 역사가 더 밝혀져야하지만, 1908년생인 하타다가 초등학교 중간에 병원이 이전하여 이사하였다는 말이 나오기에 그렇다.  그러면 대강 1915-20년 사이로 추정된다.

"하카다의 생가는 일본인 거리가 급속히 발전한 러시아 영사관 동쪽 마산천 주변, 즉 일본인 거리와 조선인 거리의 경계에 있었다 (마산천은 현재 창원천이라 불리우는 제일각 옆, 제일여고의 연애 다리가 있는 천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 일본인과 조선인 거리의 경계라는 표현은 잘못, 일본인 거주지역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듯, 근처는 본정으로 불리우던 곳이다 – 이은진 지적). 그곳에 살다가 하타다가 소학교 저학년이었을 무렵 (1915년경으로 추정, 이은진 추가), 그의 일가는 일본인 거리로부터 약 4-5킬러미터 떨어진 동쪽 지역으로 이사했다 (마산역까지는 직선 거리 6백미터 정도 떨어진 곳이다. 따라서 걸어서 거리라고 하더라도 1킬로 미터 미만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옳을 듯, 이은진 추가). 1905년 일본이 군사목적으로 마산선 철로를 부설하였는데, 마산역에서 가까운 곳이었다. 당시 일본인 거리가 러시아 영사관 주변 (현재의 월포초등학교, 이은진 추가)에서부터 점차 동쪽으로 확대되었기 때문에 집 주변에는 일본인 소학교 (월영 초등학교, 이은진 추가)와 관공서 (마산우체국, 이은진 추가)도 있었다. 그 속에서 하타다의 집도 醫院 건물을 세워 조금씩 넓혀 갔다" (35).  앞서 조용호 기자의 글에는 인근에 창원 군청이 있었고, 장군동에 검찰과 법원이 있었다.

34쪽에 1910년대 마산의 일본인 거리 사진이 게재 => 멀리 보이는 공장은 주류 공장 (창포 동성, 창포 한백 아파트로 추정, 그러나 사진 도로가 구부러진 방향이 현재의 도로 방향과 달라서 후에 허정도에게 문의해보아야 할 사항... 이은진 추가).

책을 읽다가 흥미로와서 적어 보았다.  최근에는 일제하 조선에 살던 일본인에 대한 연구가 많이 진척되었다.  필자의 메모에 성신대 김주희 교수가 쓴 박사학위 논문에 마산 가포지역에 거주한 일본인들의 생활을 일본신문에서 기사화 한 것을 인용하였다고 들은 적이 있다.  한번 문의해 보아야겠다.  오늘 성신대 홈페이지에서 검색해보니 주소가 불명하다.  혹시 아시는 분은 댓글을 달아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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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의 등장과 노동계의 대응

역사/1930- 2013. 3. 4. 16:54

 

(1) 극단주의자들이 판치는 사회일수록 시민들의 자유를 옹호하기 위해서는 자유롭고 역동적인 노동조합이 있어야 한다(Braunthal, 1956).

  (2) 파펜 시기: 1932720일에 파펜은 연립정부에서 사회민주주의자인 브라운을 물리친다. 이에 대해 노동조합은 어떻게 대응했는가? 이들은 사회민주당의 입장과 비슷하게 당장의 실업문제가 심하므로, 미래에 문제가 심각하면 파업을 하겠지만, 현재는 유보한다는 것이었다. 사회민주당도 주의를 기울이겠지만 당장의 행동은 자제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사회민주당의 지도부는 조합, 정당 그리고 철의 전선들에 미래의 가능성에 대해 의견을 떠 보았다. 대개는 피의 숙청을 두려워하면서 부정적으로 응답하였다. 마찬가지로 철의 전선도 정당이나 노동조합이 일반 파업이 내전을 가져올 것이라며 주저하는 것을 받아들였다. 이러한 결정이 나자, 곧 이어서 파업을 선동하는 사람들에 대해 경고하기 시작하였다. 이제 되돌이켜 보면, 파업을 하지 않는다는 결정이 옳았는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이는 노동조합과 사민당 내부의 정치적 견해 차이가 결국 바이마르 정권 기간 내내 해소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Braunthal, 1956). 어떤 의미를 가지건 간에 분명한 점은 이러한 무행동의 결정은 후에 나치즘이 등장하는 데 저항하지 못하는 원인이 된 것만은 사실이다(Braunthal, 1956).

  (3) 술라이혀 시기: 1932123일에 파펜정부를 승계한다. 술라이혀는 독일 장성들이 이끄는 노동정부를 구성하려 했다. 이러한 구상은 히틀러의 등장을 방지하려는 것이었다. 조직노동자들과 교섭에서 술라이혀는 장단기 두 가지 목표를 갖고 있었다. 실제로 술라이혀는 이를 실현시키기 위해 최대 노조인 ADGB와 만났으나, 오히려 노동조합과 사민당 측에서 자신들이 당할 것을 우려해서 논란을 벌인 끝에, 사민당과 노조는 정부와의 연정을 거부했고, 이 상태에서 술라이혀 정부는 출범하였다(Braunthal, 1956).

  1932-33년 초에는 실업율이 40%에 육박 (안병직, 2002: 227).  특히 청소년들의 실업율, 도시지역의 실업율이 높았다실업율과 나치의 등장은 관계가 있으나, 직접적 지역적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실업율이 높은 지역은 공산당이 강세.... 공산당원의 80%이상이 실업자들. 일부는 나치의 친위대 조직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사민당의 지지세력은 취업노동자들 (안병직, 2002: 233). 실업자 대부분은 정치에 대한 무관심으로 원자화되었다 (안병직, 2002: 235).  나치의 지지세력은 실업자가 아니라 오히려, “주로 소규모 수공업이나 가내공업의 노동자들이거나 아니면, 농촌의 농업노동자, 혹은 철도나 우편 등 공공부문에 취업한 노동자들이었던 것이다. 대도시나 공업화된 지역보다는 농촌이나 지방 중소도시 지역에 집중되었던 것이다” (안병직, 2002: 239).

  (4) 히틀러시기: 대부분의 일반 당원이나 노조원들은 정치에 무관심했지만, 또한 히틀러의 등장에 대해 체계적인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노조는 조합원들에게 조직하라, 그러나 시위하지 말라고 요청하였다. 131일자 노조의 결정에는 새로운 히틀러 정부와 협상을 통해 합의를 하려고 한다고 정하였다. 2월중 까지만 해도, 노조는 어느 정도의 희망이 있다고 여겼다. 그리고 새로운 선거에서도 중립을 지킬 것으로 결정하였다. 35일의 선거에서 나치가 폭력을 앞세워서 승리한 이후에도 봉급생활자 노조에서는 정치적인 결정의 영향은 노조가 관여할 바가 아니라고 선언하였다. 10일 후에 개최된 ADGB 노조도 역시 마찬가지 결정을 내렸다. 이런 공식적인 결정이후에 지방 노조의 소식지들은 조합원들에게 정치적인 견해의 표현을 자제하고 경제적 분야에서 노력을 기울이라고 충고하였다. 그러나 이후 나치는 노조에 대대적인 공격을 가해서 노조의 의도대로 되어가지 못했다. 노조의 신문에 대해서도 공격을 가했기에 이들 소식지들도 논조에 조심스러워 했다. 이어서 히틀러 정부는 공장 내 평의회에서 ADGB구성원들을 몰아 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이러한 나치의 불법적인 행동에 대해서도 조합원들은 일치된 의견을 내지 못했다. 일부는 특히 전통적인 숙련 노동자들은 나치와 협력하려고 했다. 노조는 나치의 대표자와 회담을 통해 입장을 드러내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328일에 AFA 노조는 정부에 새로운 노동자 조직 방침에 따르겠다고 통보했다. 정부의 노조에 대한 탄압은 점증했다. 415일에 정부가 조직하는 노동절 행사에 참여하는 것에 노조는 노조원들 개인이게 일임한다는 선언하였다. 때로는 나치의 이념에 동조하는 노동조합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실제로 이들 노조는 전 기간을 통해 나치에 저항할 수 있는 정치적인 기제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이러한 힘을 행사하지 못했다 (Braunthal, 1956).

  19333월에 실시된 종업원 평의회 선거에서 자유노조가 해산의 운명에 처했음에도 불구하고 73.4%의 높은 지지율을 보였고, 나치가 내세운 공장세포 NSBO11.7%의 지지율을 보였다 (안병직, 2002: 240).

    참고문헌

안병직, 2002, “바이마르 시대의 노동계급과 노동운동,” 오인석 편, [바이마르공화국: 격동의 역사], 삼지원

Gerard Braunthal, 1956, “The German Free [Socialist] Trade Unions during the Rise of Nazism,” Journal of Central European Affairs, XV (Janu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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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의 노동정책

역사/1930- 2013. 3. 3. 15:43

(1) 전반적인 평가

파시스트 이데올로기와 선동 가운데 특정 요소들, 예를 들어 독일에서의 지도자 원칙 (종업원에 대한 사업장 간부의 독재적 폭력사용), 인종차별주의 (타민족들에 대한 강제노역의 정당화), 민족공동체와 사이비 사회주의 (노동의 숭상, 노동업적의 강화, 생산투쟁), 국수주의 (군수산업 이윤, 군수산업에서의 노동강도의 강화) 등이 얼마만큼이나 착취계급의 직접적 이윤창출욕구에 부응하는가 하는 질문이다... 일차적으로 파시즘 이데올로기는 착취계급의 직접적인 경제적 이해가 아니라, 이들의 기본적인 정치적 이해에 상응하는 기능들 (맑시즘의 척결, 근로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계급적 위치를 자각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 계급투쟁으로부터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는 것, 국수주의 타인종과 타민족을 향한 증오감의 고취, 전쟁과 식민지주의 예찬)을 떠 맡아야 한다” (Eichholz, 1980/1987: 331-32).

객관적인 소득 분배 데이터의 분석 결과, Jürgen Kuczynski, “파시즘 하에서 부자와 가난한 자 사이의 적대성은 독일의 그때까지의 역사에서, 또는 다른 민족의 어떤 역사에서보다도 더욱 신속하게 첨예화되었다” (Eichholz, 1980/1987: 346).

유일한 대안은 팽창적인 경제정책이었다. 그러나 보수적인 정치가들과 기업가들은 경기 부양에 앞서 배상금의 종식과 노동운동의 약화를 원했다. 그들은 그것을 달성하였다. 그러나 그 열매는 나치가 가져갔다. 대외 경제적 압력이 현저하게 감소되고, 노동운동이 대공황을 통하여 약해질대로 약해진 상황에서 나치는 집권하였던 것이다. 게다가 나치가 권좌에 올랐을 때, 경제는 이미 최저점을 지나 회복세로 돌아선 뒤였다” (김학이, 2002: 180).

(2) 나치 집권 직전

19321월에는 실업자가 6백만 명이 등록되었다.

대공황은 전체 독일인의 절반에 가까운 사람들에게서 인간다운 삶을 위한 최소한의 소득마저도 앗아갔던 것이다” (김학이, 2002: 178).

(3) 나치가 집권한 1933년에 취해진 조치들

이 영역에서 노동자 계급이 투쟁에 의해 달성한 모든 성취물들을 무효화 시킨 파시스트 법률들은 이미 히틀러 독재의 초기 몇 달 안으로, 극히 반동적인 독일 독점자본 세력들의 결정적 참여와 직접적인 영향아래서 생겨났다” (Eichholz, 1980/1987: 338).

독일 산업전국연맹의장, Gustav Krupp, 1933220, “이제야 말로 독일에서 내정 문제들을 깨끗하게 처리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시시이다”.  19333월 독일 산업전국연맹, “새로운 경제정책과 고용정책은 노동조합 문제가 해결된 이후에야 비로소 착수될 수 있다

3-4, 자유노동조합과 경영협의회에 대한 테러의 물결

44, 경영대변과 경제적 연합에 대한 법: 이 법에 의하면 경영협의회 선거는 1933930일까지 중지될 수 있었고, 국가적대적 또는 경제적대적인 의미헤어 설치되어 있는 경영협의회들을 해산하고 새로운 친정부적 경영협의회로 대체하기 위한 법적 기초가 마련되었다” (Eichholz, 1980/1987: 339).

52, 나치돌격대 (SA), 나치친위대 (SS)에 의한 노동조합 건물의 점거, 자유노동조합의 해체 및 그 재산의 압수

510, 독일 노동전선 Deutschen Arbeits-front DAF 이 창립

519, 노동의 신탁에 관한 법

193397일의 괴델러의 진정서, “경제는 의미없는 임금협약들의 사슬로부터 드디어 최종적으로 해방되어야만 한다”. “지금 필요로 하는 것은 열심히 노동하는 것이고, 8시간 노동일이 철폐되는 것이다” (Eichholz, 1980/1987: 341-42).

  (4) 1934년 노동질서법

  1934112, 제국 경제장관 Kurt Schmitt, “법 초안은 이제는 경제계에 있어서도 지도자 원칙을 고착시키고, 계급투쟁의 사고들을 제거하며, 이 계급투쟁의 자리에 공동체의 사고를 대체시켜서 궁극적으로는 사회적 명예의 개념을 최초로 확립할 것이다” (Eichholz, 1980/1987: 342).

1934120, 노동질서에 관한 국민법 (AOG): 이 법의 주요한 개념적 기초들, 특히 업적 공동체로서의 사업장 공동체의 이념에 따르면, 이곳에서 착취와 계급투쟁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지도자(기업가)와 추종자(노동자)가 공동체적으로 작용하고 상호간에 의지한다는 것인데, 이러한 이념들은 이미 20년대에 지도적인 콘체른들, 특히 Siemens 콘체른, 강철산업 연합회의 ... 등이 개발하였다” (Eichholz, 1980/1987: 341).

191811월 혁명의 결과인 경영협의회를 완전히 제거하고, 신임협의회를 도입 => 그러나 이 제도는 1934년과 35년 선거에서 많은 노동자들이 불참, 만은 수의 무효표, 반대투표, 적대자 명단의 나열 등에 의해 파시스트들이 패배하였다.

  망명 사민당 Sopade의 독일 정세 보고서, 1934626, “노동자들은 저임금에 분노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적어도 일자리를 갖게 되었다는 사실에 기뻐하고 있으며, 바로 그것 때문에 집권자에 대한 불만 표출을 자제하고 있다” (김학이, 2002: 139).

19341030, “낙관주의의 물결이 전국을 휩쓸고 있다. 전례없이 격렬하였던 정치적 갈등 뒤에 찾아온 안정은 신뢰를 강화하고 있다. 기업가들은 노조를 괴멸시킨 정권을 지원하기 위하여 고용창출에 기꺼이 협조하고, 노동자들은 과거 같았으면 용납하지 않았을 임금 삭감을 감내하고 있으며, 관리들 역시 사실적인 의구심을 옆으로 치워놓고 있다. 당장은 거대한 실험이 성공한 듯 보인다. 220만 명이 일자리와 빵을 되찾았다고 한다“ (김학이, 2002: 139).

  참고문헌

김학이, 2002, “바이마르 공화국의 경제”, 오인석 편, [바이마르 공화국: 격동의 역사], 삼지원

Dietrich Eichholz, 1980/1987, “Faschismus und Ökonomie zur Problemen der Entwicklung der Produktionsverhältnisse unter der faschistischen Diktatur” “파시즘 체제하의 경제 독일의 경우”, 김세균 편역, [자본주의 위기와 파시즘], 동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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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바이마르 공화시기 지식인들의 전체주의적 성향

역사/1930- 2013. 3. 2. 15:47

 1. 니체의 권력에의 의지

 762항목, “유럽의 민주주의가 힘의 해방이라고는 조금도 말할 수 없다. 특히 그것은 나태함의 , 피로의, 약함의 해방이다” (Nietzsche, 1880년대/1988: 445).

 모든 민족의 머리 위에는, 모든 선의 표적이 걸려 있다. 보라! 이것이야말로 그 민족이 극복한 것들의 표적이다. 보라! 이것이야말로 그의 권력에의 의지가 지르는 소리이다” ( Nietzsche, 1885/2010: 79).

 니체의 비이성주의는 결국 범 게르만주의와 히틀러 스타일의 인종주의로 귀결되었다. 비이성주의는 이시기의 독일 사상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과거에 독일의 철학과 사상이 제공하였던 인간의 약한 측면에 피난처를 제공하였던 그 근거를 없앴다....이러한 비이성적 본능의 강조 등은 결국 히틀러의 제삼 제국 시기에 독일 신념 운동에서 다시 등장한다....“더구나 니체의 권력에의 의지 이데올로기는 미래의 나치들에게 일단 니체의 뜻이 오해되고, 곡해되고, 그리고 진실된 의미가 뒤틀려지자, 나치의 독트린이 되었다는 점은 인정해야 한다” (Vermeil, 1956: 18).

 2. 1924-1929년의 기회와 좌절

 1924-29년의 황금기 (6년간): 민주적이며, 평화로운 시기였다. “이 시기는 독일이 정상적이었다고 판단하지만, 실은 이시기에 이미 후기 독일의 모습이 잉태되고 있었다” (Taylor, 1946).

 1926힌덴 부르구의 당선은 독일 국민이 의원내각제적 정부의 책임으로부터 벗어나 전쟁전의 권위주의적 정부가 제공하던 안락한 안전으로 도피하려는 시도였다고 볼 수 있다” (니콜스, 1977/1980: 140).

 슈트레제만은 가장 중요한 국경협상을 東歐의 프랑스 맹방들 (특히 폴란드와 체코)를 제외시킨 채 마음에 드는 서방국가들에 국한시켜 진행시킬 수 있었다. 이것은 4대 강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이 협의하여 유럽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개념이 19389월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악명높은 뮌헨의 배신에서 절정에 달했던 1930년대의 사건들을 예고해 주는 전조였다” (니콜스, 1977/1980: 133). 1926년에 슈트레제만은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정당을 통해 구체적인 이익이 표현되는 것이 비정상이 아니며, 불명예스러운 일도 아니다. 그러나 정부가 효율적으로 운영되려면 이러한 부분적 목표가 정치적 리더쉽의 우선적인 관심사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공화국 정부가 의회의 지지를 얻으려면 사전에 연립정당간의 타협과 협상이 필요했기 때문에 정부가 의회를 무시해버리지 않는 한 일관성 있는 정책을 수행하기 어려웠다” (니콜스, 1977/1980: 148).

 1928년 가을, “독일 국가민족당의 정책은 이제 공화국에 대한 거칠고 무제한적인 반대로 굳혀졌다” (니콜스, 1977/1980: 150).

 3. 독일 지식인의 전체주의적 경향

 프랑스에서 새로운 정치적 및 문화적 가치를 대변하면서 등장한 사람들이 주로 보수적 이념과의 단절을 통해 스스로를 정립하고 있었다고 한다면, 독일에서 생겨나기 시작한 일군의 문명비평가 내지 사회비판가들은 교육시민 계층출신으로 빌헬름 제국의 주도문화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박용희, 2002, “바이마르 공화국의 지식인과 정치문화”: 111).

 대학의 경우 역시 많은 학생들과 교수들이 바이마르 체제를 경멸했다. 20년대가 저물어가면서 보다 권위주의적인 정부형태로 국가를 개혁해야 한다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니콜스, 1977/1980: 147).

 4. 19331월 히틀러의 등장

 히틀러에게는 이상한 점은 없었다. 오히려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것이 오랫동안 지체된 셈이었다. 이 지체는 독일인들 원망의 비극적 비상치성(하나로 일관성있게 묶을 수 있는 끈의 부족)에서 비롯되었다. 부유하고 (떠돌아 다니고) 무책임한 젊고, 폭력적인 자들이 허가받은 깡패로서의 기회를 쟁취하였다” (Taylor, 1946: 25).

 독일인들은 절망의 마지막 순간에 민족사회주의를 받아들였다. 결국 혼란에 협박을 받아서 그들의 높은 철학적 사유의 능력과 전통을 놓치게 된다. 독일의 가장 훌륭한 전통으로 추앙받던 것이 이제 전체주의적 지배의 도구로 변하게 되었다( Anderson, 1949).

 참고문헌

박용희, 2002, “바이마르 공화국의 지식인과 정치문화”, 오인석 편, [바이마르공화국: 격동의 역사], 삼지원

Eugene N. Anderson, 1949, The Struggle for Democracy in Germany, Chapel Hill, the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Press

A. J. 니콜스, 1977/1980, [바이마르 공화국과 히틀러], 과학과 인간사

Friedrich Nietzsche, 1880년대, [Der Wille zur Macht 권력에의 의지], 청하, 1988

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85/2010,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Also sprach Zarathustura], 누멘

A.J.P. Taylor, 1946, The Course of German History: A Survey of the Development of Germany since 1815, New York, Coward-McCann

Edmond Vermeil, 1956, Germany in the Twentieth Century, New York, Frederick A. Prae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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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군단과 재향군인회

역사/1930- 2013. 2. 26. 14:35

 

밤에는 야경꾼이 돌고, 마을을 위협하는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자위대가 구성되고,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도 외세가 침입하면,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의병들이 나섰다. 따라서 국가가 조직한 군대 외에도 역사적으로 민간이 조직한 군사조직은 항상 존재했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독일의 경우에 프러시아에 17세기부터 자유군단의 이름으로 국가외 조직이 존재했었다, 특히 국가가 프랑스와의 7년전쟁, 나폴레옹에 의한 해방전쟁 시기에 애국적으로 마을을 지키려는 의용자위대가 조직되었고, 이는 국가에서 칭찬하는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1차 세계대전 후에 참전장교와 사병들을 중심으로 각 지역에서 자유군단이 조직되었다. 자유란 아마도, 국가의 상비군이 아닌 자율적인 군대라는 뜻일 것이다. 물론 이미 1차 세계대전시기에는 국민 개병제가 실시되고 있었고, 1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말미암아, 베르사이유 협약에 의거하여 국민 징병제는 다시 폐지되었다. 그러나 자유군단의 이름으로 1차 대전 후에도 수십만명 (혹자는 백만명 단위를 거론하기도 하나 40-50만 명 수준으로 평가하는 것이 적당할 것으로 보인다)이 속해있었고, 이들의 규모는 정규군이 10만 명으로 제한된 것과 비교하면 상당한 숫자라는 점을 잘 알 수 있다. 특히 국가의 위기시에 심지어, 히틀러의 등장과 같은 시기에도, 오히려 정부의 정규군이 히틀러의 돌격대와 자위대에 눌러 있을 정도였다고 보면된다. 히틀러의 돌격대와 보위대는 자유군단 출신들이 그 구성원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면 이들 자유군단은 무슨 일을 하였고, 어떻게 재정을 충당하였는가? 자유 군단은 겉으로만 보면, 국가적인 수준의 일을 행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노동자들의 파업을 파괴하고, 프랑스가 배상금의 불이행을 근거로 라인지역을 점령하자, 파업을 선동하고, 폴란드 지역에서 전위대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신문 광고를 통해 그들이 필요로 하는 일이 있으면 용병으로 고용할 수있다고 광고도 하였다. 사회적으로 국가의 경찰이나 군인이 합법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그러나 사회적으로 해결하여야 하는 일들이 많았음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이들이 무료로 봉사한 것은 아니었다. 모든 마치 직업군인처럼, 급여를 받고, 추가적인 보너스도 충분히 받고, 연금혜택까지 받았다. 이들의 수요는 국가적인 수요를 빙자하여 사업적인 수요가 많았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자유군단과 이들이 히틀러의 등장에 어떤 기여를 하였는가에 대해서는 자동적인 연관관계를 설정하는 것은 또 다른 연구 대상이다. 이에 대해 J.J. Schokking, 1955, “Militarism in Berman Society”는 국민 징병제의 등장이 상비군 제체와는 다른 정치적 효과를 가져왔다고 주장한다. 한편으로는 상비군의 폐쇄성을 혁파하여, 상비군이 개인적인 충성심으로 뭉쳐있는 상황을 완화시킨 반면에, 국민 개병제는 국민들의 심리나 행동방식 속에 군사주의를 광범위하게 확산시킨 면을 강조하다. 이렇게 확산된 결과 그들의 확신은 단순한 충성심을 넘어서서, 인생관, 역사관, 세계관을 포괄하는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변모했다는 것이다 (John L. Snell ed., 1959: 60). 구체적으로 가장 민감한 청춘의 시기에 군사훈련을 받은 이들은 특유의 사나이의 특성을 갖게되었다. 또한 군대에서 맺은 사회적 관계가 사회에서도 어느 정도 적용되었고, 이는 민주적인 질서로 재편하는데 장애로 작용하였다. 따라서 사호의군대화가 진행되어서, 전쟁에서의 패배나 내부로부터의 혁명과 같은 방식이 아니면 이것이 타파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독일의 경우에, 1차 세계대전에서의 패배와 바이마르 제국을 끝장낸 노동자사회주의 혁명에 의해서만 바이마르 민주주의 체제가 가능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독일 사회에서는 민주주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바이마르 체제도 불가피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또한 Schokking은 바이마르 체제에서의 자유군단과 히틀러가 자유군단과 독일인들의 군사주의적 성향을 이용한 것은 다른 측면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점에서는 너무 히틀러가 시대에 대해 완벽하게 독일사회를 이용하였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 같다. 독일의 군대사회적 성격은 바이마르 공화국 체제에서도 군사조직에서 베르사이유 체제를 무력화시키는 사실상의 군사훈련을 민간 항공사, 민간 항공기 제조의 제조를 진행하였고, 또 러시아와의 협정을 통해 군사훈련도 진행했다. 그리고 민간 군사조직이 정규군에 비해 적어도 4-5배 이상이 존재하였기에 쉽사리 군대로 재편이 가능했을 것이다. 이에 더해, 군사전략이나 새로운 군사기술을 활용하는 것에 능숙하게 대해 전격전을 활용한 점도 히틀러의 대담한 전략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군사전문가들은 공수부대의 활용, 전차군단과 통신장비를 활용한 적군의 종심을 관통하는 전격전, 전략에서 후방과 전략적 거점을 상공을 통해 장악하여 심리적으로 상대방의 저항의지를 초기에 꺾어 버린 점은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독일 국민들도 히틀러의 전쟁을 자신들의 생명을 버리면서까지 헌신적으로 지지하였는가는 시간이 흐르면서 희미해진다. 상당수의 해석에서는 외부의 과격함 (볼세비키)을 싫어하였기에, 내부의 과격함(히틀러)을 선택하였을 뿐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당시에 이미 미국에서는 전쟁에 게임 논리를 도입하여 전략게임을 랜드연구소를 통하여 개발하고 있었다. 독일의 병력자원, 무기자원, 국민들의 사기, 전반적인 경제능력 등은 독일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팽창해져 있었고, 히틀러 자신도 전쟁 후기로 접어들면서 대담한 작전을 두려워 한다. 즉 수세로 몰리면서 대담성이 줄어들고, 그래서 초기에 나타난 독일군의 전격전은 빛을 잃게 되는 것이다.

 

참고문헌

Christopher Ailsby, 2001/2007, [히틀러의 하늘의 전사들: 2차세계대전 최강 독일 공수부대의 신화], 프래닛 미디어

Gorden A. Craig, 1955, The Politics of the Prussian Army, 1640-1945, Oxford, The Clarendon Press

Allan Shepperd, 1990/2006, [프랑스 1940: 2차 세계대전 최초의 대규모 전격전], 플래닛 미디어

Robert G. L. Waite, 1952, Vanguard of Nazism: The Free Corps Movement in Postwar Germany, Cambridge, Mass.: The Harvard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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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안 우월주의와 열등인종 학살

역사/1930- 2013. 2. 25. 12:14

 서구의 인종주의는 공식적으로는 폐기되었지만, 사회적으로는 인종 차별적 언어나 관행은 지속되고 있다. 이의 근원은 바로 19세기 중반으로 넘어간다. 즉 서구가 산업혁명을 이루고, 식민지를 본격적으로 직접 지배하던 시기와 일치한다. 선구자적 인종 결정론은 당시에 고비, An Essay on the Inequality of the Human Races (18531855)를 통해 이루어 진다 (고비노의 이론은 Nicholas S. Timasheff, 1955/1961, Sociological Theory: Its Nature and Growth, 사회학이론, 수도문화사: 74-76를 참조).

 이 이론은 가장 자명한 명제로 (1) 문명의 흥망이나, 국가의 흥망은 우세한 인종의 혈통 순수성에 기인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당시에 널리 인용되던, 서구의 진보론을 거부하고, 서구는 현재 팽창하면서 인종이 혼혈이 되어서 퇴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면에서 고비노는 독일인들이 생물학적으로 좀 더 혼합종이기 때문에 불란서인들보다 민족적으로 열등하다고 생각하였다. 진실로 우월한 민족은 영국에 가장 잘 보존되어 있다고 그는 논하였다” (Timasheff, 1955/1961: 74). 그에 의하면, 북구 유럽 사람들과 북부 독일, 그리고 영국인들이 가장 순종인 백인을 유지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후에는 미국, 독일 발달하자, 이론을 수정한다. 백인이 다른 인종과 합쳐도 백인종의 우월성이 보존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2) 두 번째 명제로는 아리안 우월주의를 주장한 것이다. “모든 주요한 문명들은 백인종의 최고의 줄기를 이룬 아리안인종이 달성한 것이었다” (Timasheff, 1955/1961: 75). 이는 물론 사후적인 설명이다. 즉 과거에는 백인종보다도 우월한 문명이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현재 남아 있는 문명은 백인종의 문명이 가장 우월하므로, 아리안종의 문명이 가장 우월한 문명이고, 따라서 백인종이 우월하다는 주장이다. 우월주의는 두가지 형태로 구체화된다. 즉 저열한 인종은 우월한 인종의 지배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점과, 동시에 우월한 인종의 생존공간이 부족하므로, 저열한 인종의 영토를 침략하여 이들을 몰아 내는 것은 문명적으로 정당하다는 주장이다.

 특히 나치의 인종이론가인 Hans F. K. Günther는 아리안 인종중에서도 노르딕 인종이 가장 우월한 인종이고, 이는 독일 게르만 민족에서 가장 잘 보존되어 있다고 주장하여 독일 게르만 종족의 우월성을 주장한다 ( 1922, Rassenkunde des deutschen Volkes, 독일민족의 인종과학). 즉 아리안 인종이 코카사스 산맥 아래에서 시작하였다면, 게르만 종족은 민족 대이동시기에 고트, 반달족 등의 이름으로 북부에서 이동을 시작한 종족이다. 아리안 종족에는 아시안 아리안 즉, 셈족까지 포괄하는 것이었으나, 나치의 지도자들은 아시안 계통의 아리안 족은 배제한다. 그러나 나치의 갈고리 상징모양 (불교의 상징을 방향을 바꾼 모양)이나, 스스롤 정당화할 때는 힌두교의 베다, 시들을 인용하였다.

 (3) 당시에 인종이론의 영향력은 대단하였다. 이러한 영향력은 현실에서의 이종족에 대한 억압과 수탈을 윤리적으로 정당화시켜주는 것이기에 환영을 받았다. 19세기 중반의 고비노 이론은 프랑스에서 그의 이론은 많은 사람의 상상을 황홀케 하였다... 그러나 당시에 퍼져 있던 진보이론에 배치되는 것이라고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Timasheff, 1955/1961,: 75-76).

 독일은 고비노의 이론을 이어받아 Houston Stuart Chamberlain (1855-1927)19세기 말에 독일에 소개한 소개하고, 독일어로 [19세기의 기초]라는 책을 발간하였다. 결국 프러시아의 빌헤름 2세와 그의 주변에 영향을 주었고, 후에 나치는 이를 취하여 인종이론에 기초한 침략, 우생학적 정책을 실현할 수 있었다. 특히 챔버린이 1899년에 발간한 책은 그 후 10년간에 걸쳐 약 6만부가 판매되었고, 1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10만부가 판매되었고, 1938년까지 25만부 이상이 판매되었다. 즉 지속적인 베스트 셀러 자리를 유지한 셈이다. 미국에서도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영향을 주어 1924년의 이민제한법을 정하는데 이론적 기초를 제공한다.

 (4) 아리안 우월주의는 반대로 흑인과 유태인은 열등민족이라고 규정한다. 그러나 애초의 고비노나 챔버린의 반유대주의에서는 주장되지 않았지만, 나치 시기의 이론가인 군터에 의해 제기되고 이론화되었다. 즉 고비노는 Essai sur l'inégalité des races에서 오히려, 유대인들은 어려운 자연조건에서도 이를 극복한 자유롭고, 강하고, 지적인 민족이라고 지적하였다. 이러한 견해는 자치에 의해 편집되었다. 챔버린의 경우에도 유태인에 대해 호의적인 것은 아니었으나, 중세이후 반유태주의 정서는 독일에 이미 만연해 있었다. 이는 종교적인 이유와 경제적 경쟁관계에 의해 더욱 촉발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기독교가 유대교를 대항하여 발생하였다는 점, 그리고 유대인들이 상인이나 금융업 등에 중사하였으므로, 이 분야의 경쟁관계에 있는 토착인들의 배척을 받았을 것이다. 나치의 이론가인 군터도 유대인들의 특성을 상인정신을 가진, 그리고 기교가 많은 무역가로 표현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이미 1885년에 Josiah Strong 목사가 인종주의 사상을 배태하였다. 반유대주의적 사회적 분위기는 프랑스의 드레퓨스 사건, 그리고 러시아의 유태인 대학살에서 드러난다. 러시아에서는 19세기 중엽이후 1905년에 이르기까지 주로 남부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유태인에 대한 민중의 학살과 박해가 일삼아 졌다. 당시에 수천 명이 죽은 것으로 보고된다.

 (5) 히틀러는 1938년부터 시작된 체코 침입, 그리고 1939년의 폴란드 침입에서 같은 아리안 계통의 인종끼리 침입하는 것에 대한 이론적 혼란을 느끼게 된다. 폴란드, 체코 민족은 아리안 계통이기는 하지만, 폴란드는 1939년 침략 당시에 하위 인종으로 다시 규정하여, 지배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체코는 물론 독일 거주인들 Sudeten문제로 침략하기는 했지만, 역시 인종적으로 몽골계통이 섞인 것으로 의심된다고 주장하여 아리안 인종에서 철회하고, 침략 대상이 된 것으로 주장한다.

 물론 러시아를 침입할 때는 슬라브 민족은 인간에 속하지 않고, 하위 인류에 속하므로, 제네바 협약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전쟁포로에 대해서도 자의적으로 처분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또한 우월한 인종의 생존공간 Lebensraum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슬라브 민족이 살던 지역으로 참략하여, 이들을 몰아내고, 우월한 인종인 게르만 민족이 살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여 자신의 침략을 정당화하였다. 물론 전쟁 말기 병사의 숫자가 부족해 지자, 슬라브 인종도 전쟁주인이 아니라, 도구로서 사용할 수 있다고 주장을 일부 변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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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사이유 조약과 나치의 등장

역사/1930- 2013. 2. 24. 12:04

  나치의 등장에 바르사이유 (히틀러의 표현에 따르면, 파리 교외) 조약의 가혹함에 있느냐의 문제가 제기된다. 가혹하다는 것은 관점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독일이 1차세계대전을 발발시킨 책임을 묻는 것은 승전국인 프랑스, 이태리, 영국, 미국, 러시아, 일본등이 다른 당사자로 참여하고, 독일이 그 대상으로 참여하는 형태이다. 주목할 점은 일본이 바르사이유 조약의 대표단의 사진에 따르면, 59명의 대표단이 참석하였다. 대규모의 대표단이나, 실제로 협상에 참여하지는 않았고, 서명의 당사국이 되지도 못하였다. 최후까지 협약의 협상과 서명에 참여한 나라는 미국, 영국, 프랑스였다. 당연하게도 프랑스가 가장 강경하게 독일의 전쟁 배상 책임을 강하게 물었다. 프랑스는 나폴레옹 시절에는 독일을 침략하여, 승리로 이끌었지만, 반면에 1871년 독불 전쟁과 1차 세계대전에서 연이어 패배의 곤혹을 치루면서 가장 피해가 켰고고, 독일과 국경선을 직접 마주하면서 위협을 직접적으로 느끼고 있던 국가였으므로,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영국과 미국은 상대적으로 독일의 경제가 불황에 빠지면 세계경제가 위축될 수 있으므로, 약한 제재를 원하였다.

  제재라는 것은 전쟁 배상, 배상이 현금으로 어려우므로, 현물과 지적재산권도 포함하고, 침력으로 팽창된 영토만이 아니라, 식민지와 독일 국경내의 광산자원이 매장된 영토까지 장악하는 내용이었다. 이에 더불어 군축과 군수산업의 기반활동을 금지시키는 내용이었다. 이에 대해서도 미국은 독일이 직접 현금으로 주는 것은 오히려 독일 경제를 파괴시켜 세계경제에 위협을 준다는 점을 잘 인식하고, 독일에 대해 금융지원을 통해 배상하는 방안을 제시하였고 실제 그렇게 실행되었다.

  그러면 전쟁 패배국에 대해 이러한 내용의 제재가 타당한가에 대해서는 당시 영국대표였던, 케인즈가 카르타고식의 평화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비판하고, 영국 협상대표직을 사퇴했고, 또한 대부분 1871년 독-불전쟁에서 독일이 프랑스에 5년정도에 배상이 가능한 정도를 부과한 점에 비해 59년에 걸친 배상을 부과한 점은 과도하다는 등의 지적이 있었다. 카르타고식의 평화라는 것은 기원전 로마가 카르타고를 대상으로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에 카르타고를 완전히 불살라버리고, 주민들을 모두 노예를 삼아, 도시 자체가 사라진 점을 지적한 것이다. 즉 케인즈가 판단하기에는 바르사이유 조약대로 이행될 경우, 독일 경제는 사실상 파산한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그러나 반론을 펼치는 학자들은 바르사이유 조약의 내용은 당시의 배상 수준으로 보면 상식적인 내용이지 특이한 점은 없었다고 지적한다.

  바르사이유 조약은 독일의 1차 세계대전 전범 책임을 묻기도 하였지만, 또한 러시아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와해에 따른 새로운 국경선을 획정한 점도 포함되어 있다. 이 점이 중요한 것은 유럽 대륙에서 독일의 팽창을 강력하게 제어하던, 동부지역이 사실상 사라짐으로써 국제적인 세력균형이 사라졌다는 점을 지적한다. 신생국에 해당하는 폴란드, 독일주민을 대량으로 갖고 있는 체코슬로바키아, 역시 독일주민이 많은 오스트리아, 신생국 헝가리, 제국이 사라지고 볼셰비키 혁명으로 국가가 혼란 속에 빠진 러시아 등이 모두 독일에 대항할 수 없는 상황에 빠져 있었다. 이런 상황은 결국, 독일 1936년 오스트리아를 병합하고, 1938년에 체코, 1939년에 폴란드를 공격함으로써 증명되었지만, 아무튼 국게적 세력균형의 와해라는 것이 독일의 나치등장과 성공에 결정적으로 작용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독일이 바르사이유 조약을 충실히 이행하였느냐의 문제는 별개이다. 실제로 바르사이유 조약은 1919년에 체결된 이후에도 계속 약화되어 가고, 히틀러의 등장 직전인 1932년에는 사실상 사라지는 상황에 까지 가게 된다. 물론 1932년의 상황은 1929년부터 시작된 국제적인 대공황의 영향이기는 하지만, 지불 배상을 유예하였던 것이다. 실제의 배상은 1932년 현재 1919년에 약정된 금액의 1/8정도가 지불 완료되었다고 한다. 물론 배상의 부담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로 부담이 컸었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많은 학자들은 이 기간중 독일의 경제가 발달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1933년에 히틀러가 조약 무효를 선언하고, 2차세계대전에서 패배한 이후에 독일 정부, 특히 서독정부는 배상 의무를 다하여, 2010년에 배상이 완료되었다고 한다. 2차세계대전이후에 바르사이유 조약이후에 조정된 배상금을 독일 통일이후로 미루어졌으나, 서독 정부는 자발적으로 배상의무를 통일 이전에도 지불하고 있었다. 이로 미루어 독일 자체의 문제라기 보다는 독일 내부에서도, 히틀러의 역사적 채무를 무겁게 여기는 정치적 상황의 변화가 이러한 책임을 다하는 것으로 이끌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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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부터의 도피

역사/1930- 2013. 2. 20. 10:20

 독일인들이 1920-30년대에 나치즘에 흡수된 것은 그들만의 독특한 집합심성때문인가? 이에 대한 확정된 답을제공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나치 지도자들은 대중들의 피학 증세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였다는 점, 그리고 스스로 가학을 선호하였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나치 지도자들은 때로는 지배받는 것이야말로 대중의 소망이다” (Fromm, 1941/2012: 232)라고 주장하였다.

 Zevedei Barbu, 1956, Democracy and Dictatorship: Their Psychology and Patterns of Life (New York, The Grove Press)도 같은 맥락에서 이를 설명한다. 즉 민주주의를 생성하는 조건과 전체주의를 생성하는 조건을 매울 다를 것이라고 전제하고, 독일인들이 민주주의적 상황에서 전체주의를 수용하는 상황으로 전환되는 사회심리적 조건을 분석한다. 즉 나치즘이라는 정치문화적 수준에서의 표현은 실은 당시 독일 국민들의 사회심리적 상태에서 드러난 것이라는 것이다. 사회심리적 해석이 경제적, 정치적 해석을 도외시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수용한 국민들의 집합심리적 상태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과연 현재 우리의 집합심리상태가 향후 민주주의 또는 전체주의적 정체와 어떤 상호 선호성이 있는지를 파악하는데 유용하다는 점에서 중요한 고찰대상이 되는 것이다. 즉 민족 사회주의적 (나치즘) 사고 경향, 통제된 경제, 군사주의에 대한 선호 등은 나치즘으로 나아간 조건이 되었지만, 이는 오히려 사회심리적 성격의 깊은 현실의 한 증후로 볼 수 있다.

 만일 이 견해를 받아들인다면, 나치즘은 독일만의 특수한 역사적 경험이 아니라, 적어도 특정한 사회 경제적 조건아래에서는 나타날 수 있는 보편적인 현상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아니 물음을 현재 우리의 상황에 대입하면, 현재 대한민국은 나치즘을 견딜만한 수준인가로 질문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에리히 프롬의 자유에서의 도피에 일단의 암시가 나와 있다. (1) 민주주의 상태에서도 심리적으로 피곤하고 내적으로 체념한 상태에서는 나치즘이 수용될 것이라는 점이다. “그들이 이처럼 쉽게 나치정권에 굴복한 것은, 심리적으로 보면 주로 그들이 내적으로 피곤하고 체념한 상태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태는, 다음 장에서 설명하겠지만 오늘날의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개인의 특징이다” (Erich Fromm, 1941/2012, Escape from Freedom 자유로부터의 도피, 휴머니스트: 217).

 (2) 두 번째로, 개인들의 상승이동의 가능성이 막히고, 사업기회가 제한되고, 부익부 빈익빈이 가속화되는 희망없는 사회에서는 나치즘이 수용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국민 대다수는 우리가 앞에서 일반적인 독점자본주의의 전형적 특징으로 설명한 개인적 허무감과 무력감에 사로 잡혀 있었다” (Fromm, 1941/2012: 225). “나치는 보수적인 견해이든, 진보적인 견해이든 일치하는 것이 있다. 즉 나치는 일자리와 생존을 보장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대다수의 인민들이 바라던 연대감을 제공하였다” (Robert H. Lowie, 1954, Toward Understanding Germany,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3) 마지막으로 개인들이 가족이나, 이웃, 동료 등의 일차적 공동체에 소속되지 않을 경우에는 나치즘이 수용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가학적 경향과 피학적 경향은 둘 다 고립된 개인이 고독을 참지 못하고, 그 고독을 극복하기 위해 공생관계를 필요로 하는 데에서 생겨 난다” (Fromm, 1941/2012: 229). “일반 사람들 입장에서는 자기 개인이 더 큰 집단과 하나가 아니라는 느낌만큼 견디기 어려운 것은 없을 것이다” (Fromm, 1941/2012: 218). 나치는 이러한 상황에서 민족공동체로의 귀속감을 제공하였다. 1차 세계대전의 패배에 따른 심리적인 굴욕감과 공격적인 성향에 대해 나치는 민족공동체의 이름으로 대외적인 위상을 공격적으로 높이면서, 바이마르 공화국이 당한 수치를 회복하는 기능을 담당한다. 이는 미래에 대한 안전감도 동시에 주는 것이었다. 나치는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와는 달리, 굴욕을 당한 독일 국민들에게 자존심을, 패배자들에게 권력을 주었고, 구제도의 몰락과 파괴이후의 국민들에게 인간사회의 유기적 안정감을 제공하였다. 물론 이는 민족 공동체의 이름으로 제공하였다. 물론 이 민족공동체는 열등한자들을 배제하는 배타적 민족 공동체였지만, 적어도 공동체 내에 포섭된 이들에 대해서는 심리적인 위안을 제공하였다.

 3가지 측면만 고찰해 보아도 현재의 우리사회에서 과연 나치즘을 버틸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이 갖추어져 있는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나치즘의 새로운 이념에 깊이 매료되어, 그 이념을 주창한 자들을 열광적으로 추종한 사람들은 바로, 소상인, 장인, 화이트칼라로 이루어진 하류 중산층이었다. “그들의 인생관은 아주 편협했고, 낯선 사람을 의심하고 미워한 반면, 아는 사람에 대해서는 호기심과 질투심을 불태우면서 자신의 질투심을 도덕적 분노로 합리화하고 있었다. 그들의 삶은 경제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결핍의 원리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Fromm, 1941/2012: 220). 사회적 연대감의 폭이 좁고, 깊이가 없을 경우에는 편협한 사고의 틀에 잡혀서 적대감과 질투심에 불타 결국은 민족 공동체와 같은 보다 폭이 넓으면서도 귀속적인 속성에 의존하여 귀속될 수 있는 배타적 공동체로 들어가기를 원하는 것이다. 따라서 프롬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하지만 이 문제는 교묘한 선전으로는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없고, 모든 나라에서 한 가지 근본적인 진리가 승리를 거두었을 때 해결될 수 있다. 그 진리란 윤리적 원칙이 국가의 존재보다 위에 있으며, 개인은 이 원칙을 지킴으로써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하여, 이 신념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에 속할 수 있다는 것이다” (Fromm, 1941/2012: 219). 좁은 공동체를 포괄하는 윤리적 원칙이 아니라, 바로 시공간적으로 폭과 깊이를 가질 수 있는 공동체의 구성이 나치즘을 이겨낼 수 있는 해결책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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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식과 독박의 민주주의는 결국 나치의 독재로 나아간다.

역사/1930- 2013. 2. 18. 17:29

대중 민주주의의 위험성에 대해서는 프랑스 혁명 이후 많은 논쟁이 있었지만, 나치의 등장처럼 역사에서 극적으로 그 위험성을 드러 낸 적은 없다. 대중 민주주의는 결국 전체주의에 취약하다는 점을 드러내게 되었다. 이런 관점에서 Gerhard Ritter (1955, “The Fault of Mass Democracy”)1920-30년대 독일의 상황을 살피면서, “왜 합헌적 자유 의회주의 국가를 건설할 절호의 기회에 일당독재의 전체주의 국가를 낳게 하였는가라고 의문을 제기한다.

나치 등장의 초점은 민주주의 원칙을 통해 나치가 권력을 장악하고, 장악한 이후에는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전체주의 체제로 나아가는 데 있다. 그렇다면, 유권자들은 민주중의를 통해 전체주의를 선호한 셈이 되는 것이다. 일단 나치가 전체주의 체제로 전환시키는 과정을 연대기로 서술해 본다. 물론 전체주의는 관료제 만이 아니라, , 대중조직, 독재자 개인 추종 조직 등을 동원하는 형태를 띤다.

Ritter가 지적하는 1920-30년대에 중부 유럽에 민주주의가 전체주의로 전환된 역사적 배경에서 다음 2가지는 현재 우리 상황과 관련해서도 주목할 만하다.

(1) 시민이 아닌 대중의 등장

정치교유, 진정한 토론, 개인들의 생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대중들에 대한 소구가 더 중요하게 되었다. 대중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이제 감각적인 것에 의존하게 되었다. 감각적인 사람이 대중적이 되었다. 가장 효과적인 방식은 적대감을 불러오는 것이었고, 가장 덜 효과적인 것은 평화적 사유이었다. 평화적인 사유는 독자나 청자가 생각하고, 어느 정도의 학습욕구나 지식을 요하는 것이었기에, 덜 효과적인 방식이 된 것이다.

(2) 정보 통신 기술의 발달

정치적 선전을 위한 새로운 기술 능력은 부루주아지 시대보다 대중의 동원을 용이하게 하였다. 확성기, 라디오, 수천 부를 단숨에 발간하는 일간지들, 군사들을 신속하게 수송하는 화물열차, 철로와 도로와 항공로를 통해 대량수송이 가능해 진 점. 이에 따라 국가의 한 끝에서 다른 끝으로 신속하게 정보를 전파하고, 매일 밤 대규모 군중집회를 통해 연설이 가능하게 되었다. 히틀러는 국가 정당 대회에 50만 명을 모아놓고 연설하였다.

 

결과적으로 토론을 통한 의회민주주는 무시되었고, 급진적 민주주의가 가능해 졌다.

현실적으로는 직접 민주주의 이론에 기반한 국민 주권의 이론이 현실적으로 가능해 졌다. 그러나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가능해 진 것이다. 이제 대중은 직접 정치의 주역이 될 수 있고, 의회를 통한 우회적인 방식이 유일한 것은 아니게 되었다.

이는 의회민주주의 체제와는 대립되는 것이었다. 영국의 대의 민주주의는 대다수의 정치적 권리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봉건주의의 여러 계층에 의해 향유된 정치적인 특혜에 기반하고 있었다. 이는 근대 의회에서 집단화되어 근대적인 정당이 되었다. 중요한 사람들의 집단이 인민을 대표하였다. 영국에서는 이러한 집단들이 서서히 19세기에 정당이 되었다. 그러나 1920-30년대의 독일에서는 민주적 급진주의에 핵심인 인민의 의지에 따른 직접 통제로 나타나게 되었다. 급진적 민주주의는 단호한 결정이 중요하고, 타협이 중요치 않았다. 주권은 결정을 의미하는 것이지, 타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소수의 권력을 무시하고, 개인이나 집단의 지성에 대해서는 적대적이었다.

 

급진 민주주의가 전체주의적 압제로 변하는 조건 (Ritter의 견해).

(1) 사회적으로 비조직화된, 지적으로 단일한 대중들이 정치화될 때

(2) 과거의 정통성에 의존한 공공 권위가 파괴되고, 신뢰를 잃었을 때.

(3) 이러한 상황에서 기존의 정치지배에 대한 불신이 불붙고,

(4) 추종자들이 뭉쳐서 치밀한 전선을 형성하였을 때

> 이럴 때 대중들은 애매한 제도를 믿기보다는, 살아있는 사람을 믿게 된다.

 

교훈: “일반 국민들은 일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더욱 예민해야 하고, 또 여러 문제들, 예컨대 생명에 대한 존중, 다양성과 모순적인 경향들의 조화를 통해 풍부함을 누리는 것, 낯선 것에 대해 개방적이며 그 가치를 인정하고 배우는 것, 바람직하지 않은 것에 대한 관용 등의 문제에 대해 스스로 점검해 볼 수 있어야 할 것이며, 그것은 보다 건강한 사회 건설의 기반이 될 것이다” (김승렬, 2004, “대중에 대한 독재 또는 대중에 의한 독재? - 나치 독재의 대중적 기반”: 264).

 

참고문헌: 리터의 글은 Maurice Baumont, John H. E. Fried, Edmond Vermeil, and others, 1955, The Third Reich, New York, Frederic A Praeger, Inc.에 수록

김승열의 글은 임지현, 김용우 엮음, 2004, [대중독재] 책세상에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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