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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6.19 식민지란 자율성을 빼앗기는 것이다 1
  2. 2010.06.18 화폐가 실물을 지배한다.
  3. 2010.06.16 애국, 매국 논쟁
  4. 2010.05.28 Tom Hayden이 1960년 한국의 학생혁명에 영향을 받았다.
  5. 2010.03.12 1927년 통영의 폭동사건 1
  6. 2010.03.11 일제에 저항하여 청년들이 마산을 이끌어가다.
  7. 2010.03.10 1926-29년 마산의 시민사회운동
  8. 2010.03.09 민족주의에서 친일로 넘어가기
  9. 2010.03.08 물질적 포만은 정신적 불안을 가져왔다
  10. 2010.03.06 지배의 정당성: 민중, 민족, 종교

식민지란 자율성을 빼앗기는 것이다

역사/1920-29 2010. 6. 19. 07:41

일제는 한국을 무력으로 강점한 이후에, 한국을 근대화 시켰다.  근대화를 새로운 제도의 도입, 생산성의 증대, 국가의 능력 강화로 규정한다면, 사실이다. 그러나 근대화, 특히 식민지적 근대화는 한국민의 자율성을 약화시켰다.  지난 토요일 (6월 5일) 중국 베이징의 인민대학, 일부 회관(연구와 발표하는 곳, 그러나 연구하는 곳은 아니라고 중국인 교수가 지적한다)에서 2003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Beckman교수의 강연이 있었다.  이 강연은 유효한 인간에 대한 경제학적, 심리학적, 생물학적 기반을 찾는 것이었다.  이 강연의 핵심은 동기화된 인간을 만드는 것이 지적인 능력보다 중요하며, 이는 어릴 때 형성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생물학적으로 이러한 비인지적 능력은 유전자까지도 바뀔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1920년대의 한국의 식민지 상황을 살펴보면서 한민족의 유전자에 자율성, 스스로 무엇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사라지게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한다.  국가의 사대주의, 학문과 생활의 사대주의, 생각의 사대주의, 판단과 기준의 사대주의의 수준이 이제 거의 100년이상된 외세의 수탈에 한민족의 유전자가 바뀌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든다.

근대화와 자율성의 상실이라는 주제는 실은 식민지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나, 그 정도가 매우 심하고 강압적으로 그리고 노예근성을 만들었을 정도로 심하다는 것이다.  적어도 근대화가 식민지 경험이 없이 진행된 곳은 스스로의 힘으로 민주적인 제도를 정착시키고, 노동자들의 힘으로 공장의 혁신을 강제하고, 식민모국의 잇점으로 공장주들(자본가)이 협상을 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식민지의 현실은 근대화가 강압적으로 진행되고, 이에 대한 저항은 살인적으로 진행되어, 오히려 심리적으로 동기화가 부여되지 못하고, 자율적 해결능력을 상실한 데에서 찾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일제는 이미 1905년부터 한국을 무력으로 강점한 후에는 자신들의 식민정책을 수행한다.  이는 한국의 요구가 아니라, 일본의 인민들을 한국으로 이주시키고, 일본의 경제적, 대외적인 필요에 따라 강압적으로 진행하는 형태를 띄게 된다.  그리하여 위생 의료사업이 침투되고, 수리사업이 진행되고, 금비보급, 개간과 간척사업이 진행되는 것은 모두 사실이나, 이러한 사업들이 대지주, 일본인 지주화를 야기하고, 자주적인 능력에 의한 것이 아니었기에, 그 실패의 정도가 매우 컸던 것이다.  즉 재래 볍씨에는 금비가 맞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보급하여 사실상 생산성 향상이 늦어진 점, 수리사업의 결과 대지주의 이익은 그대로 온존하고(소작료는 여전히 5-6할을 받았고, 수리사업을 위한 동의율도 과반수면 되고, 토지기준으로 2/3로 정하였다), 상당수 개간사업의 결과는 일본에서 온 이주민들이 지주로 전화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한국민들은 이제 체계적으로 수리조합을 통해, 총독부에 종속되고, 금융적으로 총독부와 식산은행과 동척에 채무자로 전락하게 되어 결국, 토지를 수탈당하게 된다.

특히 경남의 경우에는 재래의 수리시설이 유지되지 못하여, 이를 보수하고, 새로이 개간하는 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된 지역이다.  그리고 수리조합의 발달도 한국 전체로 보면 빨랐던 지역이므로, 아마도 일본인 지주의 증가가 심하였을 것으로 해석된다.  이는 단순히 자연적인 지리조건 외에도 지정학적으로 일본인들의 심리적인 근접성, 친근성, 수탈의 지리적 용이성 등이 작용하였을 것으로 본다.  필자는 이러한 일본과의 친근성이 해방이후의 적산물자 이전, 그리고 1960년대 이후에 진행된 일본자본의 한국이전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고 있다.


참고 문헌
우대형, 2005, "일제하 만경강 유역 수리조합 연구", 동방학지: 139-179
정승진, 2009, "한국 근현대 농업수리질서의 장기적 재편과정 (1908-1973): 만경강 유역 전북수리조합의 합병사례 분석", 243-274
이애숙, ?, "일제하 수리조합의 설립과 운영," 한국사 연구, 50-51호: 319-362
우대형, 2005, "개량농법의 이식과 농촌의 양극화," 역사와 사회?: 234-251
우대형, ?, "1920년대 한국 미곡생산성의 정체," 경제 사학, 25호: 4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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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가 실물을 지배한다.

역사/1920-29 2010. 6. 18. 12:00

일본이 사실상 한국을 점령한 것은 군사를 보내어 서울을 점령하고, 러일전을 위해 한국의 모든 가용자원을 마음대로 쓸수 있게 만든 시점인 1904년으로 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는 군사적으로 서울이 점령당했다는 점을 넘어서서, 1905년이 되면, 일본 제일은행권을 한국의 공식화폐로 채택한데서 시작한다.  우리가 1997년에 문제가 된것은 한국에 들어온 외환들이 일제히 빠져나가면서, 국제거래가 중단될 위기에 처했기에 그런 것이고, 2008년의 금융위기 역시 같은 맥락이며, 최근에 우리나라가 OECD국가중 거의 최하위 수준의 신용평가를 받는 이유도 외환이 한국내에 들어와서, 삽시간에 회수해 간다면, 우리가 감당할 수 없다는 데에 있는 것이다. 외환은 형태상 빚은 아니어도, 실제로는 빚과 같은 역할을 수행한다.  대한제국이 멸망한 것은 외환이 부족하여, 근대화를 이루기 위한 해외의 물자 도입과 외국인 고용 빚을 감당할 수 없자, 일본이나 외세의 빚에 의존하여, 결국은 이를 갚지 못하고, 우리의 해관 수입(관세)도 담보로 잡히고, 대부분의 해관은 외국인이 직접 장악하는 형태를 띄었다.

1920년의 농민들의 상태를 보면, 수리 시설, 비료와 같은 기본적인 농사에 필요한 물자를 보급받고, 관개 시설이 개선되지만, 농민을은 이러한 시설과 비료를 빚을 통해 해결한다.  그러나 이러한 빚은 식민당국인 총독부가 일본의 잉여자본과 일본국가 자본을 끌여들여 설립한 조선식산은행(1918년 설립)을 통해 이루어 진다.  직접적인 국가 자본은 자본금의 형태로, 그리고 일본의 잉여 유휴자본의 유입은 채권발행의 형태로 식산은행으로 유입이 이루어 진다.  물론 식산은행의 자금은 다른 금융기관의 자금보다는 장기 저리이기는 하지만, 다른 한편, 농민들의 의사에 의해 이루어지기 보다는 정책자금의 형태로 조선총독부의 정책수행을 위해 국가 재정이 아닌 민간 자본을 통해 집행이 이루어 진다.  우리로 치면, 산업은행으로 생각하면 된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자금을 활용하여 비료를 사고, 수리시설을 개선하여 농사를 지었다고 쳐도 이를 갚을 만큰 농사의 생산성과 이익이 나지 않는다면, 자금을 갚을 길이 없게되고, 농민은 부채의 악순환에서 허덕이거나, 아니면 담보로 잡힌 자산을 몰수 당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 1920년대 중반부터 발생하기 시작한다.  즉 일본의 쌀, 만주에서의 들어온 쌀이 생산되고, 일본내에서도 쌀의 소비가 줄어드는 상황(밀이나 다른 곡물을 사용)이 발생하게 된다.  이는 곡가의 하락을 발생하고, 농민 토지는 이제 채권자들이나, 식산은행, 아니면 지주들에게 넘어가는 상황이 발생하게된다.  빚은 쓰라고 해놓고, 결국은 빚에 허덕여서, 재산을 빼앗기는 과정을 보면, 현재 농협이 농민에게 정책 대출을 해주는 상황을 떠올린다.  정책대출을 통해 농사를 짓게해놓고는, 결국은 농산물 개방정책을 통해 농산물 가격의 하락을 유도하고, 농민들을 곤궁으로 몰아 넣는 정책이 바로 1920년대부터 시작된 셈이다.  권대웅 논문의 마지막 페이지에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1920년대 산미증식계획에서 식은을 통한 농촌침투는 '식산은행의 금고'를 토지문서로 채운다는 경제적 수탈의 표징이었다.  1926년 12월 28일 동척 서선농장이 위치한 황해도 재령군 북율면의 소농출신 나석주가 '신산과 동척에 폭탄을 투척'했다는 것은 생활의 근거지를 상실한 한국 농민의 참상을 대변하는 사건이었다".

참고문헌
권대웅, ?, "1920년대 금융자본의 농업지배에 관한 연구: 조선식산은행을 중심으로", 민족문화론, 5: 101-129
김재훈, 2005, "1925-1931년 미가하락과 부채불황",
정병욱, ?, "1918-1937년 조선식산은행의 자본형성과 금융활동," 한국사 연구, 79호: 5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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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 매국 논쟁

역사/1920-29 2010. 6. 16. 11:18
참여연대가 유엔 안보리에 천암함 침몰 사태에대한 의견을 표명하는 서한을 보냈다고하여, 정부측에서 난리를 치는 모양이다.  이해할 만하다.  정부는 그 동안 관련 분야 과학자, 관련 분야의 전문가와 사업 종사자들, 그리고 이번 선거에서 나타났듯이 유권자들을 설득하지 못했다.  자신들의 설명에 대해 설득할 수 없으니, 자료를 숨기고 은폐하고 조작하는 것은 극히 당연하고, 희생양을 찾으려 하는 것은 당연할 것일 것이다.  참여연대의 성명서 내용을 아는 것 보다는 합리적 의심이 든 사안에 대해 표현하는 것, 의사소통하는 것을 막는 정권은 도대체 대한민국의 헌법정신, 민주주의의 기본권인 시민적 자유에 대해 어느정도 이해하고 있는 것인지 의심이 든다.  이러한 애국과 이적의 논쟁은 한국적인 상황이라고는 하지만, 그 동안 한국사의 논쟁에서도 있어왔다. 그러나 이러한 논쟁을 1920년대 경제발전, 근대화라는 측면에서 살펴본다면, 이의 핵심은 민족자본에 대한 평가에 있다.

1920년대 한반도는 일본이 장악하였고, 이미 1905년경부터 20년 정도 경과하였고, 호카이도, 오키나와는 물론 대만까지 점령하고, 이제 만주를 거의 점령을 마무리하는 단계에 접어들고 있었다.  산업발전의 면에서는 과잉자본, 과잉생산의 조짐이 나타나는 시기였다. 한반도는 바로, 과잉자본과 과잉생산, 대외적 팽창의 전진기지로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여기에 자본이 민족성과 동시에 나타난다.  민족성은 식민지 모국의 도움을 받는 정도, 정부나 국가의 혜택들 받는 형태에 따라 나타날 수 밖에 없다.  이때 혜택은 관세, 금융혜택, 직접적인 보조금의 형태를 띈다.  또한 공장법과 같은 공장 설립의 조건, 세금, 공장 가동과 노동자들 고용의 자유(강압적 고용과 강압적 노동관리)에 관한 것과 연관된다.

논쟁은 대개 경성방직, 박승직 상점과 같은 민족 자본에 의한 기업활동에 대한 평가이다.  더 나아가면 조선방직과 같은 일본자본의 투하에 의한 산업활동에 대한 평가의 문제이다.  박섭교수(2002)는 인도와의 비교를 통해 한국에서 일제는 일본자본이 압도적이고, 화학공업을 발전시킨 점을 중시하고 있다.  이는 인도가 민족자본, 그리고 섬유공업에 치중한 것과 대비되는 것이다.  또한 인도는 자치를 중시하고, 보호관세를 유지한 반면에, 한국은 일본과의 동화에 치중하고, 일본제국에 의해 직접 지배를 받고, 그리고 법을 달리 적용되고, 자본과 상품의 유동은 동일시장이 유지된 것이다.  직접지배와 단일 시장, 그러나 차별적인 억압체제를 유지한 것으로 해석된다.  1920년대 만주를 일본이 지배하면서 부터는 한국은 조공업, 일본은 정공업, 만주는 농업과 원료지대로 기능하게 분업체계를 갖춘다.  차별적인 억압체제를 일단 문제삼을 수 밖에 없고, 또한 자주적인 정치훈련을 쌓지 못한 자율정신이 후에는 고질적인 폐해가 된다.  지난 토요일 아침에 중국 북경 인민대 앞의 연산호텔 식당에서 카메룬 출신의 현재 ILO에서 근무하고 있는 캄덴 박사와 같이 식사하면서 나눈 얘기가 떠오른다.  카메룬은 독일의 식민지였다가, 1차세계대전에 독일이 패함으로서 영국과 프랑스에 의해 분할 점령당하였다.  이 때 캄덴 박사는 한국이 1945년후에 분할 지배되어 지금까지 분단된 상황을 상기시킨다.  그래서 지금도 영어와 프랑스 어가 공용어가 되었다.  현재의 일인당 GPD수준은 2천불 정도이다(인터넷 자료 활용, wikipedia, 우리가 현재 1만 5천불 수준).  그러면서 유럽과는 식민지 경험이 있어서 아사이 국가들과 친하다고 한다.  중국, 더 적게는 한국이나 일본을 존경하는 이유는 스스로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립하여 경제발전을 이룩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자신의 1970년대에 쓴 박사학위논문이 중국의 자립발전에 대한 것이었다고 한다.  내가 아프리카 국가에도 사회주의적 자립경제 발전을 실험한 나라들이 많이 있지 않느냐고 하니, 지적해 보라고 하여, 탄자지나아를 지적하니, 맑스 레닌주의가 판을 친 적은 있어도, 자립발전을 시도한 적은 없다고 한다.

우리에게 민족기업을 있었던가?  경성방직에 대한 연구를 보면, 분명 민족자본이 불리한 시장 개쳑을 위해 민족주의를 외치며, 민족기업의 물산을 소비해 줄것을 호소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이들이 식민지 총독부의 협조를 받지 않은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받기를 위해 노력하였고, 적어도 일본자본이 받는 정도는 받으려고 노력했고 성공했다.  즉 식산은행이 토지를 담보로 잡고 차입해 준것, 조선총독부의 산업장력금을 받은 것(이는 조선방직이 먼저 받았다)에 의존한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또한 1920년대 당시는 1920년 전후와 마찬가지로, 전쟁에 의한 원료생산, 소비, 생산지역의 불안정성, 그리고 수송통로의 문제가 겹쳐서, 투기가 횡행하고,이에따라 기업들의 이윤의 부침이 심했던 시기이다.  정상적인 기업활동 보다는 외적인 환경에 의해 기업의 운명이 좌우되던 시기였던 것 같다.  이는 일본 기업의 경우에도 마찬가지 이다.  여기서는 조선방직을 의미한다(정안기, 2009).  물론 절대적으로 식민지라는 것은 식민정책에 의해 노동력 공급과 저임금 유지, 노동자 파업의 엄단, 원료 공급(면화의 재배를 장려하는 것), 공장 용지의 저가 적소 매입의 강점이 있을 수 밖에 없다.

자본의 민족성에 대한 논란은 최근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삼성이 애국적인가?  창원의 볼보 건설장비 업체가 애국적인가? 금융 투기 자본들의 먹튀 논란이 여전히 진행중이다.  애국 매국보다는 이제 지속가능경영과 같은 기준으로 논란을 벌이는 것이 옳지 않은가 싶다.


참고문헌
박섭, 2002, "식민지기의 한국과 인도에 있어서 공업화: 통치제도와 자본수출", 제 39회 전국역사학대회 발표문집: 467-476
정안기, 2006, "식민지기 경성방직의 경영사적 연구: 초기 경영 1919-26을 중심으로", 아세아 연구, 49, 4: 215-265
정안기, 2009, "식민지기 조선인 자본의 근대성 연구: 경성방직과 조선방직과의 비교 시점에서", 지역과 역사, 25호: 5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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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m Hayden이 1960년 한국의 학생혁명에 영향을 받았다.

역사/20세기 2010. 5. 28. 20:01

지난 수요일 26일 광주 전남대  용지관 컨벤션 홀에서 5.18기념 국제 학술대회가 열렸다.  이날 참석한 인사 중에 Tom Hayden이 있다.,  책자에는 전직 캘리포니아 상원으로 기록되어 있고, 위키피디아에는 1960년대의 동물보호, 인권운동, 반전운동가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참석자들에게는 사회학 교수로 캘리 포니아의 클레몽에 있는 피처 대학에서 강의하고 있다.  그리고 필자에게 이 대학이 하바드를 지향한다고 하면서 근처 거리이름에 하바드가 있다고 전한다.  필자가 한국의 동료 교수들에게 물어보니, 이 사람을 잘 모르고 있었다.  헤이든은 미국에서는 전설적인 60년대의 학생운동가이자, 반전배우인 제인 폰다의 남편이었었고, 필자가 1980년대 미국의 LA에 살고 있었을 때 근처 태평양 바닷가에 있는 도시인 산타 모니카의 사회주의적인 정책을 이끌고 특히 임대료 통제법을 통해 도시 전체가 진보와 보수의 대결이 심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잇다.  필자가 목요일 저녁 리섭션 때 우리 테이블로 오게 하여, 동료 교수들에게 인사시켰더니, 언론이 자신을 유명하게 만들었다고 하면서, 자신이 하지 않은 훌륭한 일도 자신이 한 것으로 해놓고,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잘못도 자신이 한 것으로 묘사하여 영웅이 되었다고 고백한다.

수요일 오후에 헤이든의 발표가 끝나고 자신이 1960년 당시에 미국의 미시간 대학에서 잡지 편집자로 있었을 때, 한국의 학생운동 뉴스를 접했다고 한다(발표문 책자 1권: 97).  발표문의 문장을 그대로 옮기면, "50년전, 세계에 청년과 학생운동이 싹트고 있었을 때, 나는 일상적 영웅주의에 고무된 학생기자였다.  나의 세대의 많은 이들이 이승만 독재정권을 무너뜨리는 우리와 같은 나이의 청년들을 보여주는 한국에서 온 사진을 보고 흥분했었다.  나는 처음으로 한국전쟁과 냉전의 감추어진 역사를 배웠다"  내가 나중에 질문시간에 어떻게 뉴스를 이해하였느냐고 하니, 구체적인 것을 안 것은 아니고, 사진을 보았었고, 학생으로도 정권이 무너질 수 있구나하는 생각에 감동을 받았고, 당시에 일기 시작한 미국의 학생운동에 자극을 받았다고 진술했다.  그리고는 아마도 그 당시에 미국이 한국의 독재정부를 지지하지 말도록 시위를 했다고 한다.  당시 4월 19일 한국의 학생혁명이 있기전 일주일 전에 북 캐롤라이너의 쇼 대학에서 수백명의 학생이 모여 학생 비폭력운동조직을 결성하였고, 4월 19일에는 다이너마이트로 죽은 변호사를 기념하고 항의하기 위해 시장을 향해 항의행진을 하였다고 한다.  자신들도 지난 4월 19일에 50주년 기념행사를 하였다고 한다.  한국에 초청받아 연설하느라 약간 과장할수 있겠지만, 한국의 학생운동은 당시의 다른 나라의 학생운동세력들에게 상당한 희망을 준것은 사실로 보아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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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통영의 폭동사건

역사/1920-29 2010. 3. 12. 07:05

사건의 경과

(1) 경상남도 평의원 김기정이 평의원 석상에서 "조선에서는 보통학교를 증설할 필요가 없으며, 교육도 필요하지 않다.  보통학교를 마치고 나면 사상이 악화되어 위험하므로 학교를 늘릴 필요가 없다" 주장하였다.
1927년 5월에 발생한 사건이다.

"금일 조선인의 일반적 심리는 교육의 불급을 가장 한난사로 알뿐 아니라 위정자가 조금만 성의로 노력할 것 같으면 좀더 확충될 수가 있다는 것을 믿고 있는 이때에 그와 반대되는 언행을 보고 분노한 것이다"(동아일보, 1927. 5. 17일자).

(2) 1차 시위
이에 대해 통영시민은 대회를 열고 규탄하였으며, 성토대회와 진상보고회가 열렸다.
"그 결과 김기정의 도평의회 민선에도 영향이 있어서 낙선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당국에서는 다시 이 사람을 관선 평의원으로 정하였었다"(동아일보, 1927. 5. 17일자)

(3) 검거되었던 12명 호송 - 통영 부협의회 위원의 한국인 모독발언에 대한 저항 (중외일보, 1927. 5. 17일자)
"통영서에 제일 먼저 인치되었던 12명은 5월 14일 새벽 90여명의 경관대와 100여명의 재향군인, 소방, 청년단 등이 전후 좌우로 도열한 중에 마산으로 호송되었으며,
검거를 시작한 관헌은 아직도 그 손을 떼이지 않고, 계속하여 14일 오후 5시까지에 다시 여자 3명외 십수명을 피의자로 인치하였는데, 그 후 민중은 통영서와 지방법원 지청, 기타 판검사의 관사 등을 습겨할 형세를 보임으로 경찰은 한층 경계를 엄중히 하였으며,
14일 저녁때에는 마산상업학교 생도 다수가 통영에 돌아와 습격에 참가하였고, 또한 통영 보통학교 어린생도들이 제일선에 서서 돌을 던지는 등 과연 형용치 못한 비장한 광경을 보이었는바,
14일 밤에는 마산 기타의 지방으로 부터 다수한 민중이 응원을 하러 온다는 소문이 있어 일반 형세는 더욱 긴장하였으며,
14일 밤 9시경에 이르러서도 적지 않은 군중이 경찰서 앞에 집합하였으되, 그리 큰일에는 이르지 않았었더라".

(4) 2차 시위
"이러한 일반인의 의사와 감정에 합치되어 가지고 행동한 사람들이 검거되어서 예심에 까지 넘어가게 되었다는 말에 격앙된 것이다"(동아일보, 1927. 5. 17일자)
 "이와 같이 격앙된 민심에 피검거자가 단식을 실행함에 그 친척과 우인은 감정이 극도에 이른 것이요.  그 결과는 일찍이 듣기 어려운 파괴적 직접행동이 폭발된 것이라고 볼수 있다"(동아일보, 1927. 5. 17일자).

체포에 항의하는 시위
"그 검속된 12동지를 내 놓으라고 경찰에 반항하다가, 소요죄 및 출판법 위반, 건물 파손 및 상해죄로 기소되었다"(중외일보, 1927. 11. 11일자).  죄의 내용으로 보아서, 시위를 하면서, 유인물을 살포하고, 경찰서나 기타 사법기관의 건물을 파손하고 저지하는 경찰과 격렬히 싸운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매우 조직적이고, 광범위한 동원된 것으로 보이므로, 통영 민족운동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사건으로 기록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22명, 마산으로 이감, 통영사건 관계자, 마산 형무소로: 1차 시위에 이어 체포에 항의하는 시위 다시 발생 (중외일보, 1927. 6. 8일자)
"5월 26일에 22명을 송국하였다가 6월 5일 아침에 경비선으로 마산형무소로 이감되었다"  22명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남성: 황덕윤(아마도 가장 중심적인 인물로 보인다.  가장 먼저 이름이 나오고, 또한 누구 외 몇명할 때 누구가 황덕윤으로 표기되고 있다), 황봉석, , 주경문, 이태원, 김상훈, 김동근, 김영중, 김위조, 김재륜, 김근조, 서상권, 박종한, 배봉지, 염원모, 양동세, 신전회, 문복만 이상 17명, 여성: 박갑이, 김작부, 최봉선 양, 강명환 여사, 주선이 여사 5명.

통영시위사건, 공판일 결정, 오는 22일 마산지청에서, (중외일보, 1927. 11. 11일자)
6월 18일자 기사에 비해, 인원을 황덕윤 외 23명이라고 표현하여, 위의 22명 외에 2명이 추가된 것을 알 수 있다.  총 24명이다.  1차 시위 12명, 2차 시위 24명으로 총 36명의 구속자가 발생한 사건이고, 여성도 5명이 포함되고, 피의자들의 성씨가 각기 다른 점으로 보아서, 광범위하게 시민들이 참여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잇다.


이런 통영시민들의 저항이 가능했던 점은 통영이 사전 전에 통영시민들의 잠재된 조직적 동원력과 의식 고양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물론 동아일보 1924. 10. 19일자와 같은 운동 내부의 능력에 대한 비판 기사도 실렸지만, 전반적으로는 일부분이라고 하더라도 조직력의 확산이 있었고, 또한 상호간에 비판과 알력이 심할 정도의 규모와 활발한 활동이 있었다고 역설적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통영은 아직 암암한 칠야중이다.  같은 전선에선 동료끼리 간간이 싸움을 마지 않는다.  그리고 청년단이 있으나, 우리를 위함이 없을 뿐, 외라 유야무야중에 있고, 노동공제회가 있으나 간판뿐이다.  착취급에 앉은 몇몇이 중임을 맡아있다.  어찌 우리의 사정을 알아주며, 우리를 위하여 철저히 노력하여 주랴?"(통영의 한 걸인, 조선일보, 1924. 10. 19일자").  중외일본 5월 17일자에 호송하는 피의자들의 연변에 청년단도 포함되어 있어, 여기에서 표현하는 청년단이 1923년에 조직된 청년단인지, 아니면 일본인 거주지역에서 결성된 청년단인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만일 1923년 이후에 결성된 청년회 중의 하나라면, 이 당시의 청년회 조직은 상당히 친일화된 조직으로 관의 동원조직으로 바뀐 것을 판단할 수 있다.

통영은 1919년 여름 통영청년단이 창립된 이래 활동사진대를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이 이루어지고,
1923년이 되면서 부터 회원의 활동이 부진해 청년회의사결정 자체가 회원정족수 미달로 계속해서 유회된다(동아일보, 1923. 1. 13일자).  위에 언급된 상황은 바로 이 때의 상황을 비판한 것이다.
그러다가 1925년 2월 18일에 통영청년동맹이 맨먼저 조직하여 혁신을 시작하였고, 이후 통영청년동맹을 근간으로하여 구역별 정비에 들어가서 1926년에는 서부, 동부, 중앙 등으로 나누어서 조직이 완료된다(동아일보, 2월 12, 4. 30, 5. 19, 5. 27일자).  이들이 다시 통합하여 1926년 10월에 연합조직을 결성한다.  이들 단체를 주도하는 인물들은 1919년 3.1독립운동에 참여한 젊은 세대들이다.  마산과 마찬가지로 청년들이 지역의 새로운 운동세력으로 떠으로 지역사회를 리드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위와 같은 민족을 모멸하는 자들에 대한 저항운동이 일너났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김승, 1996, "1920년대 경남지역 청년단체의 조직과 활동: 청년연맹 결성을 중심으로", 지역과 역사, 2호: 139-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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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에 저항하여 청년들이 마산을 이끌어가다.

역사/1920-29 2010. 3. 11. 10:03



일제 시대의 마산에서 지역사회를 이끌은 조직은 단연 마산 청년회가 눈에 뜨인다.  눈에 뜨이는 모습은 1926-29년 사이의 중외일보 기사를 읽으면 분명하게 드러난다.  청년회는 단순히 청년들의 모임이 아니라, 지역의 다른 조직을 돕고, 지역의 중요한 행사를 주관하고, 또한 그들의 미래를 위하여 가장 선두에 서서 한국지역사회의 문제를 고민하고 이를 해결하려 하였다는 점이다.  지역사회의 문제에는 물론 민족차별에 대한 저항, 독립국가에의 열망, 새로운 세계적인 조류를 파악하려는 노력등이 포함되어 있다.  마산의 지역 1920년대 민족해방운동을 연구한 이귀원 (1996, "1920년대 전반기 마산지역의 민족해방운동", 지역과 역사, 1호: 7-34)은 전반기의 흐름을 잘 요약해주고 있다.  "한편 비밀결사운동과 문화 종교운동, 3.1운동에 참여했거나 사립학교나 교회 청년조직 등을 통해 민족의식을 배양했던 지식인들과 청년들은 문화운동 속에서 활로를 모색하였으나, 조선의 자본주의적 발전이 조선인의 경제를 파멸로 몰아가는 식민지 현실에서 자본주의적 실력양성론이라는 문화운동 노선의 무망함을 실망하고, 그 일부는 사회주의 사상을 수용한다"(33쪽).  즉 초기의 문화운동, 그리고 후기의 사회주의 운동으로 흐른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즉 1920년 6월경에 마산지역 문화운동의 구심적으로 마산구락부가 창립되는 데, 이는 당시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던 청년회 운동의 일환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조직에는 노장년층의 친일자본가들이 자리를 잡고 있어서, 전투적 민족해방운동을 지향하는 청년층과는 융화되기 어려웠다.  이후 청년 중심의 조직으로 바꾸려는 움직임이 1922-23년에 있었으나, 실패하고 만다.

이에 1924년 6월에 마산구락부 청년들을 중심으로 마산청년회가 창립된다.  마산청년회는 18세-35세로 연령를 규제함으로써 원천적으로 노장년층의 참여를 봉쇄하였다. 마산청년회는 주로 마산구락부 출신들이지만, 상당수는 3.1운동 등 민족해방운동의 경력을 가진 전투적 활동가들이며, 사회주의자나 상업자본가도 들어 있었다.  활동 내용은 마산구락부와 크게 다르지 않았고, 다만, 계몽내용에 반제 반봉건, 사회주의 사상을 포함시키고 있었다.  주된 활동은 강연회, 토론회, 웅변대회, 체육대회, 음악연예회, 동화회 등이었다.  현재로 치면 시민사회단체의 활동과 유사하다.  오히려 건강한 시민단체의 모습을 풍기고 있다.  1925년에 접어들면, 마산청년회 (회원 90여명), 수양청년회 (1925년 1월 창립, 회원 40여명), 형평 청년회 (1923년 5월 창립, 회원 20여명), 어시공조 청년회 (1924년 7월 창립, 회원 55명)의  4개 단체가 연합하여 마산청년회 연합회를 만들었다.

1920년대 후반기의 활동(1926-29년)은 아래에 중외일보에 보도된 것을 참조하면 된다(송성안, 2007, 일제강점기 중외일보 속의 마산, 마산문화원).
마산청년 토론, 성황리에 개최, 26. 12. 8일자 - 토론 주제: 신여성?
마산토론회 성황, 28. 5. 23일자 - 대중교화에 말이냐 글이냐?
마산청년동맹 임시대회, 28. 5. 25일자
마산청맹, 임시대회, 28. 5. 30일자 - 그동안의 무책임한 운영에 대한 인책사퇴시키고 새로이 시작한다.
마산청년동맹, 웅변대회 준비 28. 6. 17일자
마산청년동맹 집행위원회, 28. 2. 20일자
마산청년동맹 임시총회, 29. 2. 21일자
마산청년동맹 집행위원회, 29. 2. 24일자
마산청년동맹, 국제부인데이, 기념강연금지, 29. 3. 10일자
마산서 검거한 마산 정명복, 김형윤 창원손조등, 거제도 권오진등 4명을 석방 (3월 8-9일에 검거), 29. 3. 18일자
마산청맹, 정기위원회 반조직, 29. 3. 19일자
마산 청년동맹이 주최하는 마산시민 춘기 대운동회, 준비회 경과, 29. 3. 20일자
마산청맹 정기대회연기, 경찰의 간섭으로 29. 4. 1일자
마산청맹, 정기집행위원회, 29. 4. 5일자
마산청맹 정총 선언 축문 압수, 29. 4. 9일자
마산청맹, 집행위, 29. 4. 9일자
청맹 간부 구류, 마산서 고등계에서, 29. 4. 15일자 - 김환을 구속, 진주, 동래, 고성의 청년동맹에 축문을 보낸 것
마산청맹, 집행위, 29. 9. 23일자
마산청맹, 추석간담회 금지, 금지 일관의 마산경찰서, 29. 9. 24일자
마산청맹, 재동포 강제귀환 반항과 마산경찰서 고등계 주임의 기괴한 집합금집 이유, 29. 9. 27일자
마산청년동맹 위원회 연기, 경찰의 간섭으로, 29. 10. 19일자
마산청맹, 집행위, 29. 11. 5일자
경남도 청련, 위원회 준비, 29. 11. 16일자 - 29년 6월 이후로 박람회 개최로 당국의 억압이 심해졌다.
공산당원 귀래의 광고첩지도 압수, 이유는 민심소란이다 28. 10. 10일자 - 석방된 공산당원이 청년동맹에서 환영하려는 사건
마산청맹위원회, 29. 8. 13일자

1926년-29년 사이의 청년동맹의 활동을 보면, 일제 경찰의 감시를 지속적으로 받으면서 활동을 하였다는 점, 그리고 마산의 여론을 주고하고 있다는 점, 지역의 다른 사회활동도 결국은 청년동맹의 연게망 속에서 행해지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마산의 주도적인 활동은 이외에도 노동운동이 있다.  이것 역시 상당부분은 청년동맹과의 연계속에서 시작되었고, 조직적으로 발전된 요인이 많다.  물론 노동자와 농민들의 권익을 위한 것이었으므로, 노동자와의 연대, 그리고 자본가는 일본인도 있었지만 한인 자본가와도 다투어야 했으며, 보다 더, 계급의식이 있어서 지역내의 활동이 가능한 영역이었다.

그러면 왜 청년들이 나서게 되었을까?  필자는 노장년층은 한일 합방을 통하여 변절자도 발생하고, 그 책임감에서 자율로울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에 새로운 지역사회의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또한 새로운 청년운동을 주창한 사람들은 그들의 신분적 배경을 본다면 어느정도 유산자이기는 하지만, 새로운 선진 사상을 학습하고 받아들인 사람들이었으므로, 일제라는 상황이 그들의 앞날의 발전에 벽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미래의 발전이 가로 막힌 이유는 바로, 일제의 식민지 라는 사회상황이라는 점을 깨달은 결과로 보인다.  청년들이 이제 지역사회의 미래를 개척하는 주인으로 나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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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29년 마산의 시민사회운동

역사/1920-29 2010. 3. 10. 08:33

1926-29년 경남의 저항


I. 시민운동

밀양 단장면소 이전 반대 소요사건 26. 12. 8일자

검거되었던 12명 호송 - 통영 부협의회 위원의 한국인 모독발언에 대한 저항 27. 5. 17일자
22명, 마산으로 이감, 통영사건 관계자, 마산 형무소로: 1차 시위에 이어 체포에 항의하는 시위 다시 발생 27. 6. 8일자
통영시위사건, 공판일 결정, 오는 22일 마산지청에서, 27. 11. 11일자

경남 도평의원들이 해임되다, 도지사로부터, 29. 3. 18일자
해임도의원, 대책협의, 마산에 회합, 29. 5. 29일자

마산부 협의회, 20일경 개최, 조선인 협의원 일동의 행동, 29. 3. 19일자
마산부 협의회 23일 개최, 29. 3. 23일자

유권자들, 명부에 제외, 마산부의 실태, 29. 1. 2일자
마산부의원 당선자 발표 14명, 29. 11. 22일 - 이중, 일본인 7인 한국인 7명

신간회 마산지회 창립, 이어 발회식, 27. 7. 23일자
신간회 간사 보선, 28. 10. 17일자
신지 간사회, 29. 4. 15일자
마산신간지회 집행위, 29. 10. 6일자
마산신지 집행위, 29. 11. 2일자
마산신지 집행위, 29. 11. 21일자

경남북도, 형평운동자회, 12일 마산에서, 28. 3. 10일자

창원 흑우연맹 사건, 29. 10. 25일자

마산우체국 이전위치 문제, 부윤의 태도에 구마산측 부민 대 분개, 27. 8. 31일자
방만 무쌍한 마산부청원, 고원 모의 괘씸한 언동, 일반의 여론 비등, 29. 3. 9일자
마산서 경계는 의연 삼엄, 고등 사법 양계원출동, 수상하면 검속취조 28. 11. 24일자


II. 노동운동

마산 창기 맹휴, 1926. 12. 12일자

마산운송쟁의, 원만 해결 복업, 27. 6. 10일자
마산운송쟁의, 요구조건 전면 철회, 노동자측 실패로 돌아가 27. 6. 13일자

마산 노동연합회 집행위원회 28. 5. 16일자 - 메이데이 행사, 해육운수부, 북마산역조, 구마산역조, 목공조 등의 조직
마산노동연맹회 임총, 28. 5. 24일자
마산노련회관에 빈번한 적한침입, 소득없이 돌아가나 그 이면이 자못 기괴 28. 12. 1일자 - 벌써 4회째
노동연맹의 전마산 노동자 신춘간담회, 토의 사항을 금지 29. 2. 20일자
마산노맹 연맹, 정기집행위원회 29. 3. 26일자
마산노련, 노동제 기념 준비, 정기대회도 준비, 29. 5. 1일자
마산 600노동자 노동제 기념성대, 추산공원에 모였노라, 기간 행렬은 불허, 29. 5. 7일자
마산노맹 집행위, 29. 8. 22일자
마산노동연맹, 창립기념식, 29. 8. 25일자
마산노련, 우마차 조합, 부정안 토의는 금지, 단체 공동회관안만 토의, 마산노련위원회 경과, 29. 10. 21일자
노동연맹 주최로, 마산 사회단체, 공동회관 기성회, 내월 8일에 조직키로 결의, 29. 10. 26일자

구마산역 운수노동조합 1회 정총대회 28. 5. 31일자
구마산역 운수노동조합 창립 1주 기념, 28. 6. 2일자
구마산역 노조 집행위 개최, 29. 4. 8일자

마산 해륙운수노동조합, 신마산반 설치, 28. 6. 10일자

마산목물공동맹, 7회 정기총회 29. 3. 18일자

마산자유노련조합, 정기집행위원회, 29. 3. 19일자
마산자유노조 정기대회와 기념식 금지, 29. 3. 23일자

마산인접 인부 100여명 맹파, 열두곳의 종업원들이, 원인은 임금삭감, 28. 11. 24일자
마산파업장농공, 태도 거의 강경, 경찰은 파업공의 배후를, 암암 탐색한다고, 29. 10. 8일자


III. 사회운동

마산청년 토론, 성황리에 개최, 26. 12. 8일자 - 토론 주제: 신여성?
마산토론회 성황, 28. 5. 23일자 - 대중교화에 말이냐 글이냐?
마산청년동맹 임시대회, 28. 5. 25일자
마산청맹, 임시대회, 28. 5. 30일자 - 그동안의 무책임한 운영에 대한 인책사퇴시키고 새로이 시작한다.
마산청년동맹, 웅변대회 준비 28. 6. 17일자
마산청년동맹 집행위원회, 28. 2. 20일자
마산청년동맹 임시총회, 29. 2. 21일자
마산청년동맹 집행위원회, 29. 2. 24일자
마산청년동맹, 국제부인데이, 기념강연금지, 29. 3. 10일자
마산서 검거한 마산 정명복, 김형윤 창원손조등, 거제도 권오진등 4명을 석방 (3월 8-9일에 검거), 29. 3. 18일자
마산청맹, 정기위원회 반조직, 29. 3. 19일자
마산 청년동맹이 주최하는 마산시민 춘기 대운동회, 준비회 경과, 29. 3. 20일자
마산청맹 정기대회연기, 경찰의 간섭으로 29. 4. 1일자
마산청맹, 정기집행위원회, 29. 4. 5일자
마산청맹 정총 선언 축문 압수, 29. 4. 9일자
마산청맹, 집행위, 29. 4. 9일자
청맹 간부 구류, 마산서 고등계에서, 29. 4. 15일자 - 김환을 구속, 진주, 동래, 고성의 청년동맹에 축문을 보낸 것
마산청맹, 집행위, 29. 9. 23일자
마산청맹, 추석간담회 금지, 금지 일관의 마산경찰서, 29. 9. 24일자
마산청맹, 재동포 강제귀환 반항과 마산경찰서 고등계 주임의 기괴한 집합금집 이유, 29. 9. 27일자
마산청년동맹 위원회 연기, 경찰의 간섭으로, 29. 10. 19일자
마산청맹, 집행위, 29. 11. 5일자
경남도 청련, 위원회 준비, 29. 11. 16일자 - 29년 6월 이후로 박람회 개최로 당국의 억압이 심해졌다.
공산당원 귀래의 광고첩지도 압수, 이유는 민심소란이다 28. 10. 10일자 - 석방된 공산당원이 청년동맹에서 환영하려는 사건
마산청맹위원회, 29. 8. 13일자

마산 교회 분규, 장로측과 일반 신도간의 분규 - 26. 12 9일자

마산서도 협동조합 조직, 28. 5. 20 - 경제적 파멸과 중간 구전 상인의 착취를 다소라도 완화하려고

성신대제, 28. 5. 22일자

마산호신교생 맹휴, 지난 6일에 4학년일동이, 요구조건 4개조 제출, 28. 6. 8일자 - 학교 부정, 한인교원증원
호신학교 맹휴, 의연 해결 무망, 학부형회 요구 거절, 학부형대회 개최 준비 - 28. 6. 20일자
거익 악화하는 학생맹휴, 맹휴생 작당하여, 교원실에 틈입폭행, 폭행생도 22명을 경찰이 검거하여, 폭력행위 취체 위반으로 문제를 삼을터, 마산호신교 맹휴 속문 28. 6. 22일자
호신 맹휴사건 검거, 교원 1, 학생 29인 검거, 28. 6. 25일자
마산서에 청년 2명 (중외일보 마산지국 기자 김형윤, 조선일보 마산지국 기자 박제)를 검거, 29. 6. 25일자
마산청년동맹원 김형윤을 검거, 마산서 28. 7. 3일자 - 무산자 신문의 출처
마산청년동맹 선전조직부 상임 이상조를 수객 경제, 마산서에서 28. 6. 29일자 - 호신 맹휴와 연관된 것
맹휴로 검속된, 마산호신학교 일부 무죄석방, 28. 7. 13일자
교사 13명 전부 해직, 학교는 명춘까지 휴교? 마산호신학교 맹휴 후문, 28. 7. 17
마산호신학교 맹휴생공판, 30일에 열리었는데, 판결언도는 오는 6일, 28. 8. 2일자
마산호신학교 맹휴사건 판결, 대구 복심법원에서, 28. 10. 27일자

마산소년위원회, 28. 7. 3일자
청년동맹과 소년동맹의 분규, 28. 8. 13일자
마산소년 동맹, 성명서 발송 중지, 28. 8. 17일자 - ---진주사건과 관련되어 발생한듯
아동 애호주간, 마산서서 금지 28. 12. 4일자 - 조선 소년 총동맹 결의에 의거, 마산소년동맹이 주최하는 것, 마산 무산소년단과 마산여학생회의 후원 28. 12. 4일자
마산 소년동맹 정기 집회를 금지, 마산청년동맹의 기념식도 금지 28. 12. 6일자,
마산소년 동맹 2회 정총, 29. 4. 13일자
마산소맹 위원회, 29. 4. 15일자
마산소맹 어린이날 준비, 29. 4. 30일자
마산소년동맹, 임시대회 금지, 하등이유도 없이 29. 8. 16일자
마산소년 조기회, 29. 8. 16일자
경남소년연맹, 위원회 소집, 오는 30일 마산에서, 29. 8. 24일자
마산소년동맹, 임시대회 경과, 29. 8. 28일자
마산소맹, 위원회 연기, 경찰의 간섭으로, 29. 10. 26일자
마산소맹, 정기대회 금지, 경찰태도 비난, 29. 11. 12일자
소년동맹과 실업축구단과 축구시합, 29. 11. 17일자

마산근우회 발기대회, 29. 2. 26일자 - 여성운동
근우 마산지회, 설립대회 성황, 29. 3. 18일자
마산근우회, 정기집행위원회, 29. 4. 13일자
마산근우회, 편물강습회, 10월 16일부터, 29. 10. 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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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에서 친일로 넘어가기

역사/1920-29 2010. 3. 9. 08:03

일본에서 해방되고 2개월 후에 태어난 조갑제는 일본에서 태어나 귀환한 가족이다.  따라서 부모님들을 통해서 일본의 생활 습관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월간 조선, 1984년 8월호에 "총독부 고관들의 그 뒤: 일본 현지 특파 취재"에 많은 노력을 들려서 한국에서 근무했던 총독부 관리들을 주로 일한 협회를 통해 만나고 그에 대한 느낌을 적은 기록물이다.  일본 관리들은 주로, 일본이 한국에 물적 여건을 많이 만들어 주었다는 것과 인적으로도 교육이나 조직 생활을 통해 근검절약, 절도, 공적인 일에 대한 열정 같은 것을 심어주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 조갑제는 내용자체에 대한 반박은 별로 없다.  아마도 자신이 가정생활을 통해서 이런 점을 수긍하고 있었던 것 같다.  즉 한국인(일본에서는 물론 한반도에서도 일제는 조선인이라고 불렀다)들은 상대적으로 이런 점이 부족하였다는 점을 인정하고 들어가고 있다.  또는 일본관리들의 일부는 한국인 협력자들(우리가 친일파라고 불리는 자들)에게 책임을 넘기고 있다.  즉 친일파들이 일제가 요구한 것을 지나치게 강압적으로 집행을 해서 한국의 피지배자들에게 나쁜 인상을 주었다는 식이다.

이에 대한 반박 논리로 조갑제는 "그러나 심하게 말한다면 '강간으로 생긴 아들도 유산은 유산이다'는 얘기로 해석될수 있다.  강간으로 태어난 아들이 유산인것 들림없지만 그것이 강간을 정당화할 수는 없는 것이다"(294쪽)라고 자신의 주장을 체계화시킨다.  그리고는 아무말이 없다.  필자가 이 글을 읽으면서, 아 당시의 조갑제 나이는 40이 되었지만, 아직 국사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가 질문하면, 이런 일을 당할 수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이는 단순히 취재자가 취재를 순조롭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사실 제시나 논리에 대항할 수 있는 정보나 지식이 없었기에 그랳을 것이라는 점이다.  일제의 강압에 의한 병합, 한국인들에게 이미 끓어 오르고 있는 교육열과 실업에의 기풍을 막은 점, 일제를 통해 조선인의 문화적인 역량을 말살하고 순종적이고 노예적인 사람으로 만들어 놓은 점, 한국인들끼리 분열하도록 통치한 점에 대한 인식을 배우지 못한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여야 할 것 같다. 요즈음의 역사적인 자료는 이미 많이 밝혀져 있어, 오래 전에 배운 사람들은 이런 점을 제대로 알기 어려울 것 같다.  필자도 한국사나 세계사에 대한 지식은 항상 새로운 자료가 발굴되고, 다른 나라의 역사와 비교하여 해석되는 것을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역사 해석의 고루함을 벗어나기 어렵다는 점을 깨닫고 있다.

조갑제에 대한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조갑제의 친일 옹호 논리가 대강 나오고 있다. 즉 친일은 당시의 대세였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 같다.  어쩔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즉 그 당시에 한국땅에 산 사람들은 모두 친일이었다는 논리이다.  이를 욕하지 말자는 것이다.  하나의 공동체는 인간성으로 말미암아, 공동체를 배반하여 사욕을 취한 사람들을 처벌하지 않는다면, 이런 공동체는 쉽게 망한다는 점을 인류 진화의 역사에서 가르치고 있다.  만일 친일한 자를 사회적으로 용서한다면, 이런 사회는 자신의 공동체 조국을 팔아 먹는 것을 장려한다고는 볼수 없어도 처벌받지 않는다는 점을 교육시키고 있는 셈이다.  이런 사회는 그렇지 않은 사회에 비해 먹힐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다. 필자가 보기에도 이런 공동체는 꼭 유지해야만 할 필요가 있다. 더 응집력이 공동체에 먹히는 것이 오히려 역사의 순리인 것 같다.  만일 우리가 같은 민족 공동체 속에서 살면서 같은 운면을 지닌 것으로 친다면, 적어도 공동체 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처벌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공동체란 인간성을 말한다.  인간적인 배신, 공동체에 대한 배신이 같은 말이다.  역사적으로 용서하기 어려운 것이 도둑질이나 독재나, 탄압을 아주 자신을 희생하면서 헌신적으로 하는 이들이다.  도둑은 밤에 자지 않고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부시대통령은 금욕정신으로 무장하여 아침마다 기도하고, 술도 먹지 않고 담배도 치지 않지만, 열심히 무고한 이락사람들을 죽이는 데 앞장선 던 것이다.  대부분의 독재자들과 탄압자들은 금욕적인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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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적 포만은 정신적 불안을 가져왔다

역사/1920-29 2010. 3. 8. 08:02

1920년대의 미국은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시대이자, 교통과 통신의 발달이 이를 뒷받침했다.교통과 통신의 발달은 상품과 인간의 이동을 빠르게 했을뿐 아니라, 정보의 소통의 속도 역시 빠르고, 대량으로 가능케했다. 인간에게는 신체의 이동만이 아니라, 정보의 확산으로 말미암아,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것들이 이제는 상상 가능하고, 인간의 머리 속에서 이를 처리하여 하루 하루의 생활을 영위하여야 하는 세상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1920년대의 사회를 한국의 대량소비시대의 사회와비교하는 경우에는 대개 소비자 내구재의 범람과 동시에 자동차를 개별가구가 보유하게 된 것, 대중매체의 광범위한 수용, 신용카드에 의한 소비, 국내외 여행의 일상화 등을 꼽게 될 것이다. "1920년대의 미국 사회는 1980년대, 1990년대의 한국사회와 그 모습이 너무나 비슷한 점이 많"다(김형곤, ?: 91). 이에 더하여, 혹자는 대량소비에 이어진 경제위기를 연상하면서, 비슷한 점, 혹은 무절제한 소비가 가져온 재앙을 예고하기도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 다른 점도 많이 있다. 한국의 경우에는 민주화, 노동시간이 단축되지 않은 점(물론 노동시간의 단축은 1990년을 전후하여 주로 화이트 칼라 층을 중심으로 발생하였다. 노동자들은 노동시간의 단축을 주장하여 법률적인 단축은 이루어 졌으나, 실제 공장의 근무시간에서는 줄어들지 않았다), 따라서 여가의 활용이 미국처럼 발생하지 않았다. 또한 미국이나 영국은 여가의 활용, 특히 라디오나 텔레비전의 시청이 폭발적으로 발생하고, 가정일을 위한 기계들의 도입(전기다리미, 진공소제기, 그릇세척기, 세탁기, 냉장고 등)은 늦어졌다. 한국은 그보다는 보다 혼합적이다. 중요한 점은 한국의 여가는 텔레비전에 더 많이 의존하였으며, 여성들을 위한 가전제품의 도입은 상대적으로 원만하였다는 점이다.

1920년대의 미국은 대중매체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한편으로는 소위 시공간의 압축을 정신적으로 느끼고, 이를 행동으로 옮길 자동차도 보급되었던 시기이다. 신문과 잡지, 라디오의 등장이 가장 보편적이었다. 여기에는 자동차의 보급으로 촉발된 교외 주택의 광고는 물론이고, 대량소비를 위한 광고도 큰 몫을 차지한다. 당시의 미국은 한편으로는 금주법을 지속시켜, 정치적으로는 금욕주의적인 생활을 영위한 것으로 기록될 지 몰라도, 광고 문안은 다분히 감성적인 광고가 주를 이루었다. 현재의 미국의 광고보다는 현재의 우리의 광고와 매우 닮아 있다.

"보다 좋은 디자인과 설득적이고 리얼한 사진으로 상품을 소개하면서 당시의 광고 카피라이터는 상품의 특질과 잇점에는 그다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오히려 대중들이 언제나 바라고 있는 욕망인 '젊어지고 싶다', '사랑받고 싶다', '지지 않고 싶다', '선망의 대상이 되고 싶다' 등의 것을 상품과 결합시켰다. 예를 들면 가공의 남녀가 X비누를 사용하였더니, 운명이 바뀌었다든가, 인기 있는 사교계 인사가 눈을 가리고 담배맛을 본다거나, 영화배우 등의 인기인이 광고물품을 사용하는 것 등이다"(김형곤, ?: 108).

라디오의 보급은 한편으로 상업적인 소비에 몰두하여 그들의 사회적인 의식을 마비시킨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들은 소비가 주는 즐거움에 취해 사회나 국가에 대한 공익성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이제 그들은 세계평화와 같은 이상주의적 사고보다는 현실적 가체에 집착하게 되었다"(김형곤, ?: 117). 그러나 라디의 효과는 단순하기 보다는 하나의 표준화되고 규격화된 음성정보가 대량으로 보급된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따라서 라디오의 보급은 단순히 상업적인 목적에만 적합한 것만은 아니었고, 표준말의 보급, 말씨나 억양의 전국적인 통일을 향해 나갔고, 사고방식이나, 뉴스의 보급, 뉴스에 대한 해설, 음악의 보급, 쌍방향적인 라디오 프로그램의 편성을 통한 청자들의 참여 등을 통해 국가의 사상적 언어적 통일이 이루어지고, 민주주의적인 감각이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본격적 대중문화의 시대를 열어갔음을 뜻하며, 만약 미국이라는 국가의 통일이 무성영화와 함께 시작되었다면 라디오와 함께 국가/민족의 시공간적 통일과제가 완성되었다고 볼수 있다"(강현두 외, 1997: 42).

"그보다는 라디오를 통한 국가적 통신망의 구축은 민족국가의 개념을 더욱 공고히 하는 것이며, 가상공동체로서의 민족국가 개념을 확고히 인식됨으로써 근대적 시민, 혹은 정체의 대상으로 주체화되는 과정을 거쳤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기때문이다"(강현두 외, 1997: 42).

이 시기에 산업 심리학, 게임이론, 심리적인 고민을 담은 소설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여 심리가 이제 사회과학적 연구대상이자, 조작의 대상으로 떠 오르게 된다. 세상이 공간적으로 동시에 소식이 전해지고, 자동차, 기차, 비행기를 통한 여행이 가능해지고, 신문잡지, 라디오, 영화가 등장하여 정보의 유통이 많아지고, 빨라지자, 이에 적응하지 못한 개인들은 정신적인 혼란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참고문헌
강현두, 원용진, 전규찬, 1997, "대중매체의 시공간 재구성과 소비주체 형성: 1920년대 미국의 라디오 방송과 광고를 중심으로," [한국언론학보], 42, 1: 5-47
김형곤, ?, "1920년대 미국 소비 사회의 형성배경과 영향," [미국사 연구]: 91-120
Sue Bowden and Avner Offer, 1994, "Household appliances and the use of time: the United States and Britain since the 1920s," Economic History Review, XLVII, 4: 725-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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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의 정당성: 민중, 민족, 종교

역사/1920-29 2010. 3. 6. 07:35

(1) 신해혁명의 영향

1911년 왕정을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성립시킨 혁명이었지만, 이 혁명의 기본 성격은 만주족이 지배하던 중국을 한족이 다시 그 권력을 장악하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손문이 직접 정권을 장악하지 못하과, 북양정권에 의지해야 하는 상태로 바뀐다. 이때 몽골과 티베트 역시 청나라의 멸망은 곧 자신들의 독립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 착안하여 독립을 주장한다.

그러나 몽골과 티베트는 민족을 구성하면서도 동시에 티베불교를 중심으로 하는 국가체제르 구상하여 몽골의 통치자도 애초에는 티베트에서 온 불교지도자를 내세우고 받아들여진다. 티베트는 당연히 달라이 라마가 국가 지도자가 된다.

(2) 민족 자결주의의 영향

민족 자결주의가 논의되던, 1차세계대전 후의 세계에서는 지구상의 민족들이 각자 자신의 국가 건설을 주장하고 나섰다. 물론 패전국도 승전국도 아니지만, 이미 공화국을 선언한 중국은 제국열강들과의 불평등 조약의 폐기, 일본의 21개조 요구 철회, 전쟁 중에 독일이 장악한 산동반도를 약탈한 일본에 대해 산동반도를 돌려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파리 강화회의는 일본의 우선권을 인정하고 중국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았다. 당시의 북양정부는 일본이 만주지역의 철도운영을 위해 군사를 파견한 사실은 애써 무시하고 있었다. 이는 북양정권이 사실상 중국의 한족의 권리를 주창하는 정권이었기에 그렇다. 이후에도 손문이 죽기 전까지 대개는 한족의 권리를 주창하고 있었다. 즉 일본이 만주와 내몽골로 침투하고, 외몽골이 이미 신해혁명이후에 독립을 선언하고, 티베트에서는 사실상 자치를 하고 있었을 때에도 적극적으로 중국으로의 편입을 강요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1919년 5월 4일 북경에서 대규모 시위를 통해 중국민들이 민족에 기반하여 독립국가가 될 것을 열망하고 있다는 점을 과시하였다.

한반도에서도 1919년에 민족 자결주의의 영향을 받아 독립운동이 발생하여 민족에 기반한 국가 건설로 나아가게 된다. 이 해는 또한 조선왕조의 사실상 독립된 마지막 왕인 고종이 서서함으로써 왕조의 복고에 의한 국가 건설보다는 근대국가인 민족국가를 주창하게 된다. 물론 순종이 1907년에 고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지만, 사실상 일본제국이 만든 괴뢰적인 성격이 강했다. 즉 외교, 군사, 재정 등 국가를 구성하는 모든 권한이 일본으로 넘어간 뒤에 강압에 의해 물러난 고종의 뒤를 이엇으므로, 사실상 고종이 마지막 조선의 왕으로 보는 것일 옳을 것이다. 아무튼 한국인들은 민족국가의 건설을 주창한다.

(3) 볼세비키 혁명의 영향

볼세비키 혁명은 민중에 새로운 형태의 국가 건설이 가능하다는 점을 확인해 주었다. 즉 노동자 농민 병사 소비에트에 의거한 국가 건설이다. 이에 따라 1920년에 중국에서는 공산당이 창립하고, 이를 기반으로 세력을 확장해 나간다. 물론 초기 중국의 국민당은 손문의 3민주의와 5권 분립을 기반으로 하여 국가 구성을 계획하므로, 이념적으로는 공산당과 유사한 점이 많았다. 그러나 손문의 사후, 장개석이 권력을 장악하고, 공산당과 북벌을 협력하여 성사시킨 후인 1927년 이후에는 공산당에 대해 적대적인 정책으로 돌아 선다. 이것이 공산당으로서는 더욱 적극적으로 농민들을 상대로 민중의 국가 건설이념을 전파하고 동조자를 구하는데 성공하는 계기가 된다.

같은 시기에 베트남의 공산당이 지역적 분열(통킨, 안남, 코친 차이나)을 싸우면서 공산당 이념에 의한 프랑스에 대한 독립운동을 주창한다. 역시 볼세비키 혁명의 직접 영향을 받은 몽골과 신장지역 역시 공산혁명의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몽골은 직접적으로 이를 성사시키고, 신장은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으면서 무슬림에 의한 국가 건설운동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일본인과 한국인들도 공산당을 기반으로 하는 정치세력들이 등장함은 물론이다.

(4) 일본 제국주의의 인종적 정당성 주창

일본은 기본적으로 이미 장악하고 있던 한반도, 만주, 산동반도, 대만을 넘어서, 소위 만몽지역까지 넘나 보게 된다. 물론 장기적으로는 화북지방까지 나아가게 되고, 중국 전역을 침략하는 것이 그들의 군사전략이었다. 다만, 이들이 한반도, 만몽으로 나아가는 과정은 한편으로 몽골, 만주, 한반도, 일본으로 이어지는 같은 혈통을 지녔다는 점을 강조하는 이념적 전략이었고, 그 역사적 사실에 관계없이 이 지역의 많은 이들이 이에 동조하게 된다. 후에 일본제국주의는 더 나아가 아시아인 또는 황색인종을 대신하는 지위로까지 이념을 확장하고 있다.

아무튼 일본의 제국주의는 인종에 기반하여 제국의 침략 확장 정책으로 가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제국주의는 한편으로 민족주의에 기반한 국가 건설운동의 해외팽창적인 성격을 지닌 것이라고 본다면, 민족주의의 특수한 형태라고 볼수 있다. 1920년대는 현재의 국가가 나온 역사적 기원이 발생한 시기였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더구나 동아시아 지역은 민족, 종교, 민중적 이념, 인종 등의 요인들이 착종하면서 국가 건설이 이루어 지고 있다는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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