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조선에 국정을 비판하는 언론은 언제 등장하였을까?

역사/19세기 2009. 6. 29. 19:01

일본과의 공식적인 사신 교환은 1811년으로 끝나고, 이후에는 주로 대마도와의 교류만 이어져 왔다.  그러나 대마도와의 교류는 일본 본토에서의 정보도 별로 구할수 없었고,  조선이나 대마도 모두 주로 교역을 중시하였으므로, 본격적인 정보 교류는 없었다고 보아야 한다.  조선과 일본 간에 협약이 체결된 해인 1876년에 조선은 본격적인 근대적인 사절단을 보내어 정세를 탐색케 한다.  즉 과거에 일본에 보낸 사절단을 의례적인 것이라면, 1876년의 것은 국가의 정책을 결정하는 데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는 중요한 사절이었다.  이때 사절단은 일본에서 신문을 보게 된다.  자신들이 일본에 도착한 사실, 그리고 일본 정부에 대하여 각종 논란을 야기하는 기사를 신문에 게재하는 글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에 신문이 발간된 것은 재 조선 일본인이 1881년에 먼저 발간하고, 1882년에는 주로 관보 형식의 신문이나, 해외정보나 잡기등이 실리고 본격적인 정부에 논설을 펼치는 신문은 독립신문으로 1896년에서야 1876년에 일본의 신문을 본 이후 20년이 지나서야 가능하게 되었다.  이미 이때 정치의 계절이었다.    조선에도 학교가 생기고, 활판인쇄, 그리고 집안에도 석유등잔불이 들어오고 거리에도 가로등이 설치되던 시기였다.  따라서 어느정도 글을 아는 사람들이 생기고, 학생층, 기술적으로 그을 읽을 수 있는 조명도 도입된 시기였다.  이에 더하여 가장 중요한 시대의 변화속에서 이제는 기존의 과거 시험을 치루기 위해 보아야 했던 유학저술이 아니라 신학문을 배워야 했고, 청나라는 이미 조선을 보호해 줄수 있는 나라는 아니었다.  개인의 영달을 위해서나, 국가의 안위를 위해서도 새로운 형태의 배움이 등장했던 시기이다.

1900년 경에 전국에 서당이 1만여개, 소학교가 지방에 50여개가 생겼다고 하면, 1905년경으로 접어들면 전국에 일만여개의 소학교를 세우려고 하는 움직임이 싹트게 된다.  그러나 일본은 조선을 식민 통치하면서 우선적으로 신문과 언론을 막고, 인쇄물을 막았다.  학교도 막은 것은 물론이다.  즉 문자를 아는 사람을 기르지 못하게 하고, 인쇄물로 전국에 정보가 소통되는 것을 막았다.  물론 보안법도 만들었다.  조선인민의 교육열, 지식욕을 일거에 없애버리고, 정치에 무관심을 조장하게 된 것이다.

물론 이 시기 부터 정치나 역사 물로부터 재미난 소설로 독서의 경향이 옮겨가는 시기가 된다.  우민화 정책은 결국, 백성들이 비판적인 정치의식을 잠재우고, 현실과 사회로부터 도피하여, 기괴한 세계나 자아 속으로 침잠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식민은 사회성을 말살하고, 정치의식을 무디게하여 노예를 만들어 갔다.  요즘 자꾸 19세기 식민화되던 시기가 상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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