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땅이 일본 땅으로 바뀌었다.

역사/1920-29 2010. 6. 26. 20:14
국가가 멸망했다는 것은 자연이나 공간이 그대로 있는데, 사람들만이 바뀌었다는 뜻은 아니다.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 없다는 것이 아니라, 산천도 인걸도 바뀐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바로 나라를 잃어버렸다는 것, 나라를 잃어버린 것은 역사와 정체성을 잃어버린 것이라는 것, 우리나라사람들이 아닌 다른 나라 사람으로 바뀐다는 점을 의미한다.

식민이라는 한자의 의미이든. 영어의 의미이든 다른 나라 사람들이 들어와서 몰려 사는 곳을 colony, 또는 식민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따라서 일제가 한국을 병탐한 후에 일본인들이 몰려 들어와서 한국의 영토에 살기시작하였고, 이들은 자신들의 주거지와 상가와 자신들의 지배체제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서울에서는 남산아래, 현재의 충무로, 명동을 중심으로 상가를 형성하였고, 용산에서도 거주하였으며, 마산에서는 주로 혼마치라고 불리우는 현재의 반월동 통술집 거리에서 상가를 형성하고 살면서 상가를 형성하고, 이들은 자신들의 징수체계, 신문발간, 종교(신사) 등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이들이 형성한 서울을 현재 서울의 기본 구도가 되었고, 이를 이어받은 대한민국은 현재에도 일본이 만든 도시계획을 거의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일본이 파괴한 종로상가, 덕수궁,, 세종로를 그대로 유비하고 있으며, 오히려 일본이 그들의 상가유흥지역으로 개발한 명동(메이지 마치)은 이제 다시 일본인들의 관광유흥지로 거듭나고 있다.  독립한 한국인들은 일제의 유산을 그대로 이어받아 일제의 근대화를 그대로 이어받아 지속시키고  있는 셈이다.  독립은 했으돼, 도시는 독립하지 아니한 셈이다.  일제는 1920년경까지 개별건축물별로 대한제국의 흔적을 지웠고, 1920년대들어서는 일본인 거주지역을 중심으로 구역별 도시계획을 실시하였던 것이다.

마산의 경우에도 일본은 자신들의 폐쇠적인 공동체를 유지하면서, 일상적인 생활에서 한국인들과의 접촉을 끊고 거류지역을 형성하고, 교육과 종교, 유흥, 언론활동을 하였다.  당시에 살았던 마산거주 일본인들은 거의 한국인과 접촉없이도, 영화를 관람하고, 목욕탕을 갔으며, 요정에서 술을 먹고, 다방에서 차를 마시고, 신사에 가서 자신들의 행운을 빌었고 병의원을 설립하여 치료를 받았고, 우체국에서 전신을 이용하였다.  이것이 바로 본래 의미의 식민지다.  1920년대에 들어서면 자신들의 상설시장을 건축하고, 한국인의 재래 정기시장을 억제하였다.  마산의 경우에도 재래시장의 규모는 팽창하기는 하였어도, 일본인들의 상설시장을 따라가지 못했다.  재래 정기시장은 한국인들이 모이는 규모가 너무 크고, 공식적으로 일본식민당국은 자주 열리므로 농민들의 유휴시간이 늘어나서 농업생산에 투입하는 인력의 손실이 크므로, 정기시장을 장려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겉으로는 소비의 활성화가 오히려 농민들을 나태하게 만든다는 이유이나, 숨겨진 이유는 아마도 많은 이들이 모이는 (적어도 정기시장에세는 5천명내지 2만여명이 모이는 것으로 추정) 기회를 봉쇄하려는 것으로 해석된다.  정치적인 소요의 불안감이 1919년 독립운동이 이들 재래 정기시장을 중심으로 발생한 점을 감안한다면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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