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폐가 실물을 지배한다.

역사/1920-29 2010. 6. 18. 12:00

일본이 사실상 한국을 점령한 것은 군사를 보내어 서울을 점령하고, 러일전을 위해 한국의 모든 가용자원을 마음대로 쓸수 있게 만든 시점인 1904년으로 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는 군사적으로 서울이 점령당했다는 점을 넘어서서, 1905년이 되면, 일본 제일은행권을 한국의 공식화폐로 채택한데서 시작한다.  우리가 1997년에 문제가 된것은 한국에 들어온 외환들이 일제히 빠져나가면서, 국제거래가 중단될 위기에 처했기에 그런 것이고, 2008년의 금융위기 역시 같은 맥락이며, 최근에 우리나라가 OECD국가중 거의 최하위 수준의 신용평가를 받는 이유도 외환이 한국내에 들어와서, 삽시간에 회수해 간다면, 우리가 감당할 수 없다는 데에 있는 것이다. 외환은 형태상 빚은 아니어도, 실제로는 빚과 같은 역할을 수행한다.  대한제국이 멸망한 것은 외환이 부족하여, 근대화를 이루기 위한 해외의 물자 도입과 외국인 고용 빚을 감당할 수 없자, 일본이나 외세의 빚에 의존하여, 결국은 이를 갚지 못하고, 우리의 해관 수입(관세)도 담보로 잡히고, 대부분의 해관은 외국인이 직접 장악하는 형태를 띄었다.

1920년의 농민들의 상태를 보면, 수리 시설, 비료와 같은 기본적인 농사에 필요한 물자를 보급받고, 관개 시설이 개선되지만, 농민을은 이러한 시설과 비료를 빚을 통해 해결한다.  그러나 이러한 빚은 식민당국인 총독부가 일본의 잉여자본과 일본국가 자본을 끌여들여 설립한 조선식산은행(1918년 설립)을 통해 이루어 진다.  직접적인 국가 자본은 자본금의 형태로, 그리고 일본의 잉여 유휴자본의 유입은 채권발행의 형태로 식산은행으로 유입이 이루어 진다.  물론 식산은행의 자금은 다른 금융기관의 자금보다는 장기 저리이기는 하지만, 다른 한편, 농민들의 의사에 의해 이루어지기 보다는 정책자금의 형태로 조선총독부의 정책수행을 위해 국가 재정이 아닌 민간 자본을 통해 집행이 이루어 진다.  우리로 치면, 산업은행으로 생각하면 된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자금을 활용하여 비료를 사고, 수리시설을 개선하여 농사를 지었다고 쳐도 이를 갚을 만큰 농사의 생산성과 이익이 나지 않는다면, 자금을 갚을 길이 없게되고, 농민은 부채의 악순환에서 허덕이거나, 아니면 담보로 잡힌 자산을 몰수 당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 1920년대 중반부터 발생하기 시작한다.  즉 일본의 쌀, 만주에서의 들어온 쌀이 생산되고, 일본내에서도 쌀의 소비가 줄어드는 상황(밀이나 다른 곡물을 사용)이 발생하게 된다.  이는 곡가의 하락을 발생하고, 농민 토지는 이제 채권자들이나, 식산은행, 아니면 지주들에게 넘어가는 상황이 발생하게된다.  빚은 쓰라고 해놓고, 결국은 빚에 허덕여서, 재산을 빼앗기는 과정을 보면, 현재 농협이 농민에게 정책 대출을 해주는 상황을 떠올린다.  정책대출을 통해 농사를 짓게해놓고는, 결국은 농산물 개방정책을 통해 농산물 가격의 하락을 유도하고, 농민들을 곤궁으로 몰아 넣는 정책이 바로 1920년대부터 시작된 셈이다.  권대웅 논문의 마지막 페이지에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1920년대 산미증식계획에서 식은을 통한 농촌침투는 '식산은행의 금고'를 토지문서로 채운다는 경제적 수탈의 표징이었다.  1926년 12월 28일 동척 서선농장이 위치한 황해도 재령군 북율면의 소농출신 나석주가 '신산과 동척에 폭탄을 투척'했다는 것은 생활의 근거지를 상실한 한국 농민의 참상을 대변하는 사건이었다".

참고문헌
권대웅, ?, "1920년대 금융자본의 농업지배에 관한 연구: 조선식산은행을 중심으로", 민족문화론, 5: 101-129
김재훈, 2005, "1925-1931년 미가하락과 부채불황",
정병욱, ?, "1918-1937년 조선식산은행의 자본형성과 금융활동," 한국사 연구, 79호: 5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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