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대'에 해당되는 글 6건

  1. 2010.02.22 마산의 일본인과 한국인
  2. 2010.02.22 차별하는 사회에서는 혁신이 없다.
  3. 2010.02.18 식민지 이해법
  4. 2010.02.16 1910년대 조선인이 본 일본의 발전 1
  5. 2010.02.16 히로시마 1910년대 조선인의 노역흔적들
  6. 2010.02.16 고독한 개인, 浮游하는 대중의 형성

마산의 일본인과 한국인

역사/1900-1919 2010. 2. 22. 17:39

마산은 명백하게 구분되는 2개의 사회로 나뉘어져 있다.  과거의 조계지역인 일본인이 주로 거주하는 지역과, 마산포를 중심으로 하는 한국인 지역이 그것이다.  일본인 지역에 한국인이 전혀 상업활동을 하지 않거나 거주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각각의 사회는 한국인과 일본인 혼재되어 사업을 하고 거주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사업면에서는 한국인이 비교적 구마산에서 과거의 상권을 어느정도 유지하고 있었다고 해도, 1910년대에는 이미 창고기능을 상실하고, 다만 어시장이 존속하고 있었지만, 이미 과거의 명성인 원산과 강경을 이어지는 중개항구 또는 인근지역의 물산을 집산하고 분배하는 기능의 상당부분이 약화될 수 밖에 없는 사정에 처해 있게된다.  즉 세금은 이미 금납화로 바뀌었고, 강경과 원산의 중개기능은 이미 개항장으로바뀜에 따라 해외의 세력이 장악하는 계기가 되고, 경부선, 경의선, 호남선, 그리고 마산선의 철도 개설은 아직 자동차가 등장하지 않은 시기라고 하더라도, 항구를 기반으로 하는 또는 강길의 배를 중심으로 하는 운송기능의 약화를 가져왔다.

이제 마산포는 신마산에 건설된 철도정거장과 마산항의 일본항구로서의 기능은 새로운 상업기회를 가져왔다.  물론 진해가 일본의 요항으로 군사기지화함으로써 진해로 일본인들이 어느정도 이전하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마산은 중요한 일본무역항으로서, 그리고 일본인 거주사회의 중심지로서 정착되어 발달하기 시작했다.  신마산에는 일본인들을 위한 신문의 발행, 일본인들의 자치기구들, 국가 권력기구들, 일본인들의 경제활동을 돕기 위한 세관, 금융기관, 우체국 등이 들어서고, 또한 생활상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학교, 병원, 일본인들의 절이나 신사 등이 세워졌다.  여기에 더하여 일본인들의 사업상의 필요에 따라 요정이나 창녀촌, 영화관, 목욕탕 들이 들어서고, 도로의 개설, 다리의 건설, 가로등, 전기의 공급, 상수도 시설의 등장, 도서관, 벚꽃의 식목, 일본술의 제조(아직 막걸리는 상품화되기전이었다), 인근에 유원지를 건설하고(공원) 등등의 근대적인 시설을 급속도로 공급한다.

실제로 마산에 1910년대에 살았던 이들은 마산에서 한국인과 같이 놀거나 교류한 기억이 없다고 진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사업면에서는 한국인들의 상권에 침투하여 일본의 수입품을 판매하고, 한국의 물산을 일본에 수출하고, 한국인 사업가들을 통하여 예속적인 방식으로 사업을 영위하는 등의 행태는 드러나고 있다. 이 당시에 구마산을 지배한 일본인 등장하고, 특히 대토지 소유자는 구마산에 그리고 신마산에도 등장하고, 대규모 건설업자나, 부산의 금융을 지배하던 일본인이 마산에도 장악을 시도하는 장면이 여럿이 등장한다.  마산의 금융은 구마산이건, 신마산이건 모두 일본인이 거의 완전히 장악한다.  전당포나 작은 금융기관까지도 모두 일본인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따라서 일본인들 마산에서 거부가 된 이들이 상당수에 달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이후에 한반도 일본인 사회를 상당한 정도 독자성을 유지하면서, 제국의 본국 일본인 국가를 벗어나 독자적으로 한반도를 지배하려는 시도를 상당히 하게 된다.


참고문헌
조용호, 1999, "마산개항백년: 근대화 1세기 향토 유사", 1월 18일자, 1월 25일자, 경남신문 (신마산 조계지역, 1915년대 마산시가지)
허정도, 2001, "20세기 초 마산 도시공간구조의 복원적 연구: 1912년을 기준으로", 4월 19일 경남대 인문과학연구소 세미나 발표문
허정도와 이규성, 2002, "일제강점기 원마산의 도시공간 변천과정 연구: 1912년부터 1945년까지", 건축역사연구, 11권 2호: 57-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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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하는 사회에서는 혁신이 없다.

역사/1900-1919 2010. 2. 22. 13:34

인도에서 가장 소프트웨어가 발달한 지역은 남중부 지역이다.  근처에 현대자동차 공장이 있다.  이곳은 현재 인도에서 가장 투자가 활발히 이루어 지는 곳이다.  즉 정치의 중심지인 델리, 경제의 중심지인 뭄바이가 아닌 천민들만이 사는 곳에서 가장 투자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필자가 2007년 12월에 첸나이 현대자동차 공장을 방문하였을 때에도, 이곳은 공산당이 지배하고 있었으나,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인도 사람들조차 자신들을 천민으로 여기는 상황에서 현대자동차가 공장의노동자로 고용하여 평등한 조건아래에서 노동을 시키고, 급여를 주는 것에 대해 상당한 정도로 감동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또한 이 근처는 세계적으로 콜센터로 유명하고, 소프트웨어의 개발력도 인정받고 있다.  즉 인도는 지금 천민들의 열정으로 경제발전이 일어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끔 중국과 인도의 미래 경제발전가능성에 대한 논란이 이는 것을 본다.  나는 여러가지가 있으나, 중요한 점은 국민누구나가 평등한 조건에서 공평하게 일을 하고, 자신이 한 일에 대해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이 갖추어져 있는가가 중요한 요건이라고 본다.  겉으로 보면 인도가 더 민주적인 제도에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사회적으로 특히 직업선택이나 경제활동 면에서는 카스트 제도가 아직도 완고하게 남아 있다.  물론 법률적으로나, 공식적으로는 카스트가 철폐되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인도 사회는 천민을 멸시하고 직업세습, 멸시하는 직업이 남아 있다.  반면에 중국은 공산당이 사회의 중요한 지배계급으로 등장하고, 이들을 중심으로 특혜를 받는 층들이 부당하게 이익을 취하는 경우가 많기는 하지만, 그래도 전통속에서, 그리고 공산주의 사회의 이념속에서 그동안 사회평등이 상당히 자리를 잡았다. 특히 직업면에서는 천대받는 직업이 거의 없고, 돈을 많이 버는 것에 대한 열망이 무척 강한 사회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는 천민자본주의적인 요소는 남아 잇다고 하더라도, 당분간 중국이 인도보다는 앞서서 경제성장을 이룰 가능성은 더 높다고 보는 것이다.

우리의 역사에서 1910년대를 본다면, 한반도에서 가장 경제활동이 활발한 지역은 경기도의 수도권, 그리고는 평안남도와 경상남도가 손꼽힌다.  조선의 역사에서 본다는 평안도와 경남지역은 가장 소외받는 지역이었다.  평안남도 지역은 이후에 기독교를 일찍받아들이고, 근대 산업이 발전하는 지역으로 변신한다.  물론 독립자강운동이 가장 발전한 지역이다.  경상남도는 일본인들이 한반도에 이주하여 발달시킨 부산과 마산을 축으로 상공업의 발달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마산의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1910년대에 아직 공업이 발달하지 않고, 본격적으로 민족자본가들이 등장하지 않은 시기에 일본인 자본가들에 의해 경제활동이 활발하던 지역이었다.  그래도 마산은 상대적으로 지주계급보다는 상공인세력이 강했고, 기독교나, 일본의 외래 종교가 일찍 이입되어 정착한 점으로 미루어 볼때, 봉건적인 차별에 대항하여 자신들의 열망을 성취하고자 하는 의식이 강했던 지역이라고 볼 수 있다.

현재의 상황에서 바라보아도, 이루는 지나치게 자신의 기득권을고집하는 경향이 심함을 쉽게 관찰할 수 있다.  이런 사회는 혁신이 나타나지 못하고, 정체되게 마련이다.  차별없이 기회를 주고, 성과에 대해 보상하는 제도나 관행이 확립된 지역에서만이 모험, 진취성, 혁신성이 나타난다.  이는 역사적으로 그리고 다른 지역에서도 찾아볼수 있다.

참고문헌
주익종, 1994, [일제하 평양의 메리야스 공업에 관한 연구] 서울대 경제학 박사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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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이해법

역사/1900-1919 2010. 2. 18. 07:09
식민지 기간의 업적에 대해서 근대화로 보는가 아니면, 강제 수탈의 빼앗긴 40년으로 보아야 하는가의 문제가 역사해석에서의 논란꺼리로 남아 있다.  식민지 근대화를 주장하는 근거는 현재의 업보는 모두 과거에 근거하므로, 우리의 현재가 잘되고 있으므로(산업화, 경제성장, 민주화), 이것의 원인은 과거로 거슬러 갈 수 밖에 없다는 것에 근거한다.  이럴 경우, 현재에 대한 평가, 그리고 과거라는 것이 어느 정도의 과거를 가리키는가가 논란의 핵심이 된다.  즉 현재를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과거의 긍정적인 것을 중심으로 이해할 것이고, 만일 현재를 부정적으로 본다면 과거도 부정적으로 볼수 밖에 없다. 

또한 과거를 조선후기, 열강의 침략이 시작되고 이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조선왕조와 대한제국기, 일제의 침략에 당하고 일제의 가혹한 침략이 자행된 1980년대에서 1910년대까지, 아니면 일제가 한반도를 만주와 몽고, 연해주의 침략의 전진기지로 삼고, 일본의 식량과 공업원료 생산지대로 개발한 1920년대와 30년대, 전쟁시기의 1940년대, 일제가 건설한 물적 기반이 와해되어 버린 해방이후와 한국전쟁, 거의 일제시대 수준에 머물러 정체된 시기인(미군에 의해 군정이 이루어 지고, 오직 군사적인 목적으로 생존하던 ) 1950년대-60녀대 중반, 아니면 본격적인 개발이 이루어진 1960년대 중반이후 등, 어느 시기를 강조하느냐에 따라 논란이 달라 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또한 과거의 누적적이고 집적된 것이 현재를 이루었다고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단순히 물적 자본만 가리킬 것인가, 인적 자본(교육, 기술, 숙련, 규율적), 사회적 자본(조직력, 단력력, 사회관계능력),자연자본(한반도의 자연자원들, 광산, 수자원, 해양 수산자원 등), 자본의 형성(자본주의 경영 능력)까지 포함한다고 한다면 각 분야마다 또 평가가 달라질 것이다.  대개 식민지 근대화 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은 물적 기반 특히 교통 수송 통신 시설이 남아 있다는 점을 가리킨다.  공장과 같은 산업적 물적 시설은 대개 한국전쟁을 통해서 파괴되었다.  인적 자본도 거론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한국인 스스로 개발하였다거나, 아니면 일본인 공장에서의 공장 경험을 가리킨다.

그런데 식민지라는 것의 요체는 식민모국, 제국과의 관계에서 항상 보조적인, 부수적인, 쉽게 희생당하는 존재라는 데 특징이 있다는 점은 별로 지적되지 않고 있다.  다만, 이를 물적인 표현으로 바꾸어야 하니, 불평등, 차별, 분업구조의 열등한 위치 등으로 고정시키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더욱 중요한 것은 자율적으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능력을 지녔느냐의 문제이다. 만일 우리가 현재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지 못하다면, 우리는 식민지 상태와 같은 상태에 있다고 보면된다. 우리의 군대를 우리가 운영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우리의 의사를 표현할수 없다.  대통령이 잘못하고, 법을 어겨도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 이런 상황은 사실상 일제하의 식민지시절과 같은 상태가 되는 것이다.

식민지는 헌병경찰제도와 동시에 군대의 주둔, 세금체제의 강화로 나타났다.  특히 1910년대에는 주세와 연초세와 같은 세금을 도입하여 일반서민가 가장 많이 소비하는 제품에 승부를 걸고, 이를 통치자금으로 사용하였다.  즉 우리가 낸 세금이 우리를 억누르는 비용으로 지출된 것이다.  주세의 아이디어는 일본에서 이미 도입되어 성공을 건두었기에 조선왕조시절의 세금을 체제를 거의 그대로 두면서, 간단하게 도입하였던 것이다.  당시 약 30만명이상의 한국인들이 술 제조허가를 얻어서 세금을 납부하고, 술을 먹는 사람들도 간접세 형태로 세금을 납부하였다.  일본제국은 한반도의 공장 건설을 저지하고, 단지 일본상품의 소비와 원료수취지역으로 운영하였다.  개발하여 수취한 것도 아니고, 단지 있는 것을 빼앗는데 열중하였다.  이리하여 관세의 수입이 늘고, 토지조사사업을 통해서는 토지세가 급증하게 된다.  그러나 1918년의 일본에서 발생한 도시에서의 쌀 부족사태는 이후에 한반도를 쌀 생산지역으로 본격적으로 개발하게 된다.  그리하여 1920년대는 쌀 생산의 전문화된 지역으로 전화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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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대 조선인이 본 일본의 발전

역사/1900-1919 2010. 2. 16. 11:38
(1) 이인직, 1910, [자유종]에 부인들끼리 시국 토론을 하면서 나온 이야기
"일본도 삼십년전 형편이 우리나라보다 우심하여 혹 천하대세라 혹 자국전도라 말하는 이는 미친자라, 괴악한 사람이라 지목하고 인류로 치지 않더니, 점점 연설이 크게 벌리매 전도하는 교인같이 거리거리 떠나니 민족사세라, 이삼인 못거지라도 술잔을 대하기 전에 소회를 말하고 마시니 전국 남녀들이 십여년을 한담도 끊고 자담도 끊고 언필칭 국가라, 민족이라 하더니 지금 동양에 제일 제이되는 일대 강국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정치나 종교에 관심을 가치면 미친사람이라고 하다고, 30년전부터 일본인들이 거리에서 술집에서, 한담이나 자담도 끊고, 오직 민족사세, 국가, 민족을 말하더니, 강국이 되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2) 하와이 호놀루루 기독학원, 1919년 8월, [대한독립혈전기]에 수록된
합중국 필라델피아에서 대한국회 임원 일동의, 1919년 4월 14-16일에 쓴 글 중에
"세계대전이 개시되기 전에 덕, 아 등 모든 구라파 각국들이 권력이 의보다 승하고, 약한자의 고기를 강한자가 먹고 살찐다는 망령된 뜻을 가지고 교만한 태도를 부리다가 마침내 실패를 당하고, 그들의 상설같던 국위가 지금은 변하여 다만 무력한 한 정치기관에 불과하고, 그들의 망령된 몽상은 사방으로 흩어져 다시는 수합할 수도 없게 되었는데, 아직도 그대(일본)의 정부는 근간 구라파에서 꺼꾸러진 전제정부와 같은 욕망과 불의한 뜻을 버리지 못하니, 만일 그대의 백성들이 적이 총명과 지각성이 있어 우리의 생각하는 것과 같을 진데, 그대는 이 정책을 바꾸며 그대의 정부를 위하여 존귀스럽고 안락이 자재한 공화의 참뜻을 모방하기로 힘쓸 터이라.  만일 그대가 지금 사용하는 프루시아 정책을 그대로 계속할진대, 그대의 나라도 응당 멀지 아니하여 그대의 표준되는 구라파 몇나라와 같은 참화를 받게 되리라".

일본의 지각있는 민중들에게 호소하는 형태의 글이다.  일본은 실은 1차세계대전 당시에는 그다지 영향을 받지 않고, 오히려 미국과 거의 비슷하게 경제적 번영과 제국주의적 야욕을 달성하게 된다.  미국의 경우에도 경제적 성장을 구가하여 미국의 민중들은 안락을 취하고, 자국 중심적인 계급투쟁이 일어나더라도 오히려 애국주의에 호소하여 거의 해결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시기에 한인 독립가들은 일본에 대해 제국주의 정책을 버리라고 호소하고 있다.  독일을 예로 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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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 1910년대 조선인의 노역흔적들

역사/1900-1919 2010. 2. 16. 11:21
필자는 1996년 2월 14일에 히로시마에 계시는 타키오 에이지 선생(인권도서관, 히로시마 청구문고)의 집에 가서, 한센병의 역사, 일본 부락인들의 생활, 한인 징용에 관한 자료를 소개 받고 아루 저녁 잔 일이 있다.  이분은 스스로 자료를 모아서 한정본으로 자료집을 출간하고 계셨다.  1910년대 조선인들이 히로시마 부근에서 노역한 흔적들을 모은 자료가 있어서 사진으로 스캔해서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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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개인, 浮游하는 대중의 형성

역사/1900-1919 2010. 2. 16. 07:16
1차세계대전이 대량살상무기에 의한 인민의 대량 희생을 야기하고, 이에 따라 민족주의, 민주주의, 복지문제가 등장하였다면, 경제적으로는 대량생산체제, 대량 소비사회가 나타났다.  이러한 대량 생산과 소비는 포드의 T자동차의 년간 1백만대 이상 판매, 집보다도 차의 소유를 우선 원하는 세태가 나타났다.  적어도 미국은 고립주의 외교전략의 고수로 적어도 1917년 전쟁 개입을 하기 전까지는 유럽의 전쟁물자를 공급하고, 유럽의 보호주의와 해상봉쇄를 통해 생산력을 늘리고, 이로 인해 경제성장을 구가할 수있었다.  따라서 미국의 국내는 1차세계대전의 피해로부터 한옆에 물러나 있으면서, 소비사회의 도래를 향유하는 입장이었다.

대량생산은 물질적인 면에서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었다.  미국의 자본도 19세기 말을 통해 합병과 독점체제를 궂히고 있었고, 광고, 박람회, 놀이터, 영화, 소설, 춤과 노래 등이 흥행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명실공히 세계의 산업생산국이자, 경제대국으로서의 입지를 완성하는 시기라고 보면된다. 이 시기는 따라서 한편으로는 대중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찾기 위해 유리한 조건으로서 민족국가를 통한 민주주의와 전쟁에 필요한 총력전 동원, 대량생산에 따른 산업합리화와 소비능력의 제고를 통해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한층 드높일 수 있는 시기였고, 공장주나 경영주의 입장에서는 합리화에 따른 댓가를 노동자들에게 강요해야 하는 입장에서 충돌을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  노동자의 고통과 부유층의 놀이가 동시에 등장하는 시기였지만, 소위 경영, 판매, 재무, 기술개발, 회계와 법률, 의료, 등의 분야에서 소위 중산층의 획기적으로 팽창되던 시기이다.  이들은 참정권, 남녀 평등과 여성해방, 고급문화의 향유를 주장하는 세력이었다. 

이들을 대상으로 여성들의 머리와 치마는 짧아지고, 바지 차림이 등장하며, 얼굴화장이 진해지기 시작하고, 여성의 벗은 모습이 서서히 영화(무성)에 등장하기 시작한다.  춤의 시대였던 1910년대(미국의 경우)는 탱고와 같은 좀더 육감적이고, 템포가 빠른 춤이 유행하고, 소설에서도 노골적인 성적인 묘사가 등장한다.  물론 이에 대해 사회나 정치적으로는 용납하지 못하고, 이를 판매금지하는 세태, 술을 금지하는 법안, 표현물에 대한 사후적 검열, 미국에 대한 애국심의 고양, 타민족에 대한 경멸(인종전시관을 통해 다른 열등민족을 구경하는 전시회)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고 이는 하나의 국가사회적인 희스테리 현상으로 나타났다.

19세기 말에 프로이드가 무의식을 발견한 이후에 이를 통한 교육이론, 인간 세뇌이론 등이 교육과 소설에 본격적으로 도입되는가하면, 반면에 전쟁 놀이에서는 아직 인간의 사기, 사회적인 속성 등이 고려되지 않은채, 전쟁전략을 세우고 있고 그대로 실천되었다.  따라서 일차 세계대전에서의 민중의 희생은 전력자원으로서의 인적자원의 형태로만 고려되곴고, 아직 인간의 내면적 능력을 감안한 전략은 선보이지 못했다.  심리소설의 등장은 의식의 흐름, 고독한 인간, 차별받는 인간, 인간성의 해방을 부르짓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으로는 고독하고, 한편으로는 휩쓸리는 개인들과 대중이 나타난 것이다.  이는 결국 기존의 공동체인 가족, 마을, 술집에서 얼굴을 마주대하는 동료들의 영향력보다는, 영화, 신문과 소설, 방송, 공연 등이 더 큰 영향을 발휘하는 세상을 만들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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