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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2.15 1차세계대전은 공장에도 전쟁을 불러 일으켰다.
  2. 2010.02.05 기관총과 수류탄이 역사에 남긴 흔적

1차세계대전은 공장에도 전쟁을 불러 일으켰다.

역사/1900-1919 2010. 2. 15. 10:54
1차세계대전은 기본적으로 국가간의 전쟁이다.  국가 간의 전쟁이라고 하더라도, 대량샐상무기에 의해 민중의 대량 죽음, 이를 뒷받침 하기 위한 군수역량과 이념적 동원이 필요하기에 국가내부의 이데올로기와 국가의 국민 동원능력, 산업 역량이 총동원된 전쟁이었다.  그래서 1차세계대전은 국가의 재정능력, 대외 무역 루트가 봉쇄된 가운데 국가들의 산업역량이 최대한 개발된 시기였다.  국가의 재정능력은 대내적인 저축과 희생니마, 징세능력과 과세 부담의 증가는 물론이고, 이에 따른 국민들의 생활고, 국가의 재정 착취능력, 국민들의 국가의 희생요구에 헌신할 수 있는 가능성에 기반을 두어야 했다.  또한 대외적으로는 이미 해상봉쇄가 이루어지고, 각 나라들이 자기들의 국채 발행을 통해 해외 자금을 조달하고, 보호무역주의가 활개를 치던 시기이기에, 각 나라들은 최대한 생상량을 늘려, 군수장비는 물론이거니와, 민수물자의 수급에도 만전을 기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여기에 각 국가의 산업체들은 과거에 수입에 의존하던 산업들을 국내에서 생산하여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영국이 이 시기에 섬유산업의 쇄퇴를 가져오고, 일본이 섬유산업의 발전을 가져오게 된다.  일본응 이 시기에 특히 전쟁을 피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아시아 지역에서 독일이 점령한 영토를 가볍게 쟁탈하고, 섬유 산업의 발전을 가져오게 된다.  영국의 쇠퇴와 일본의 일등국가로의 발돋움이 완성된 것이다.  각 국가들은 이제 인민들의 필수품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대량생산체제로 들어가고 이를 위해 산업의 기계화, 합리화, 대규모화에 들어가게 된다.  이에 성공한 국가들은 미래의 강자가 되었고, 이를 수행하지 못한 국가들은 쇠퇴의 길을 가게되는 분수령이 된 시기이다.

또 하나의 산업체내의 갈등은 계급간의 갈등시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산업화가 진행되고, 대량생산체제가 들어서면서 과거의 숙련노동자는 점차로 일자리를 잃게 되고, 대신, 반숙련노동자나, 미숙련노동자들이 대거 노동자로 참여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숙련노동자들의 저항, 미숙련노동자들의 착취에 대한 항거가 본격적으로 일어나게 된다.  이미 1차세계대전 전에 시작되었던 노동자들의 저항은, 1차대전 기간과 1917년의 볼세비키 혁명이라는 유리한 고지를 맞이하여, 전세계적으로 노동조건의 향상(특히 8시간노동자가 미국의 전시기간에 군수물자 생산 산업에 도입되고, 러시아의 2월혁명 후에 곧바로 8시간 노동제가 확립되었으며, 이제 전세계의 노동자들은 자연스럽게 8시간 노동제를 주창하게 된다), 작업장내에서의 억압에 대한 불만 토로, 공장관리운동, 공장 소유운동등이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이에 대해 비단 혁명이 성공한 러시아만이 아니라, 독일과 오스트리아, 불란서 등에서도 공장 관리운동이 부분적으로 등장하고, 미국에서도 자비로운 사업주에 의해 선도적으로 부분적으로 도입되게 된다.  이제 노동운동은 단지 작업장의 문제로서가 아니라, 기업내의 복지, 즉 노동자 식당, 노동자 주택, 노동자 건강 보험(산업재해), 퇴직기금 등이 도입되는 계기가 된다.  공장이나 기업만이 아니라, 국가 차원에서의 노동자 복지제도도 이제 서서히 도입하려는 움직임과 실제의 도입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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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관총과 수류탄이 역사에 남긴 흔적

역사/1900-1919 2010. 2. 5. 10:19
1차 세계대전은 이미 1904-5년의 러일전쟁에서 나타난 새로운 전쟁 양상을 계승하여 대량 살상 무기의 등장과, 그리고 진지전이라고 불리우는 참호의 등장으로 특징지어진다.  이는 1차세계대전 이전의 전쟁이 기마전, 돌격전, 용병들의 전쟁이었다면, 이제는 대량으로 죽어가는 전쟁으로의 돌입이므로, 전국민을 동원하여 치뤄어야 하는 전쟁, 그러나 돌아오기 어려운 전쟁이 되어 버렸다.  즉 정신력이나, 돌격만으로는 기관총에 의 해 가볍게 사살당하는 운명에 처해진 것이다.  이런 전쟁에서는 용병들도 응모하지 않고, 설사 응모한다고 하더라도 목숨까지 팔려고 하는 용병들은 없었기에 너무나 많은 비용이 들어갔다.  이제 국민들을 동원하는 새로운 정치체제의 등장이 없고서는 전쟁에서 승리하기는 난망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 시기에 왕정들은 국민개병제를 실시하면서, 피치자들의 정치 참여를 허용하고, 그들의 정당성을 보여주기 위해 민족국가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는 물론 비슷한 시기에 전쟁이 없었더라도, 많은 나라에서 억압에 대한 저항이 시작되었고, 노동계급의 운동에서도 사회주의 또는 무정부주의, 공산주의 운동이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면, 반드시 전쟁방식의 변화만이 민주주의나 민족주의의 등장으로 나아간다고 주장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적어도 봉건 왕정만으로는 자신의 왕정 유지만도 버거운 상태가 되었고, 왕정의 통치력을 잠식하는 새로운 부르주아지 세력의 등장과 도시 노동자들의 세력이 확대되고 조직화되고 있었다는 점도 분명하다.  이에 따라 그동안 기존 질서에 갖혀있던 세력들이 체제의 변환과정속에서 자신의 운명을 새로이 개척하려는 조직을 만들고, 운동으로 연결시켜 질서의 변화를 도모하고 있었음을 세계 각처의 역사에서 볼 수 있다.  이는 국가 수준만이 아니라, 마을 수준에서도 토지를 기반으로 한 생산력과 지배질서가 요동치고 있었고, 이에 따라 마을 넘어서는 질서의 수립, 이를 옹호하는 상업, 상품생산세력의 등장과 아울러 근대국가로의 전환을 요구받고 있었다고 보여진다.

이러한 상황은 한반도를 염두에 둔다면, 이미 동북아 질서는 청나라의 쇄락, 한족(중화족)의 등장과 동시에 팡창력을 갖춘 근대국가로의 발돋움, 일본의 만몽진출이 이루어 지고 있었다.  러시아는 1차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중에 시베리아에서는 민족들의 독립움직임과 동시에 사회주의 세력, 왕정세력들이 각축을 벌이면서 지역의 질서를 재편해 가고 있었다.  한반도의 한국인들은(한국인은 아마도 대한제국이라는 명칭이 사용된 이후에 일본의 문헌에서 나타나기 시작한다.  따라서 일본 문헌을 따라가는 것은 조금 마음이 언찮기는 하지만, 조선인이라고 보기에는 민족의식을 지닌, 근대의식을 갖춘 조선인이라는 의미에서 한국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해 본다)은 왕조의 몰락이후에 본격적으로 지배계층에 의해 근대적인 민족의식을 표출하기 시작하였고, 왕정의 복고를 주장하는 논의는 의외로 미약하였고, 줄곧 왕정이 아닌, 이나 입헌군주국의 논의도 별로 나타나지 않는 민주공화국의 형태의 국가로의 전환을 당연시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일제가 한반도를 지배하기 시작한 이후에도 왕정의 논의는 본격적이고 조직적으로 나타나 역사의 흐름을 바꿀 정도의 움직임은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고종과 순종의 죽음에 대한 애도의 물결은 컸었고, 이를 빌미로 독립운동이 나타나기는 하였지만, 이것이 곧바로 왕정회복 운동으로 나타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한국인들이 한반도의 정치체제를 왕정을 상정하지는 않았고, 민주공화정을 상정하였다는 점을 의미한다.  다만, 이것이 일제가 지배하는 것을 받아들이고는 있었지만, 가능한 범위내에서 민족국가로 나아가기를 소망한 것도 사실이다.  결국 1차세계대전이 끝난 시점에 한반도에서도 민족자결주의의 세계적인 조류에 맞추어서 독립운동이 벌어지고, 그 규모는 한국사의 입장에서는 대단한 것이었지만, 세계사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다지 조직적이지도, 무력이나 재정면에서도 위력적이지는 않았다.  물론 한국사에서는 거의 6개월에서 1년간 약 1만여명의 희생자를 내는 운동이었으므로, 한민족의 독립 의지는 세계적으로 선포하여, 후일 민족독립의 정당성으로 활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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