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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3.04 나치의 등장과 노동계의 대응
  2. 2009.09.15 공산당지배와 강남지배

나치의 등장과 노동계의 대응

역사/1930- 2013. 3. 4. 16:54

 

(1) 극단주의자들이 판치는 사회일수록 시민들의 자유를 옹호하기 위해서는 자유롭고 역동적인 노동조합이 있어야 한다(Braunthal, 1956).

  (2) 파펜 시기: 1932720일에 파펜은 연립정부에서 사회민주주의자인 브라운을 물리친다. 이에 대해 노동조합은 어떻게 대응했는가? 이들은 사회민주당의 입장과 비슷하게 당장의 실업문제가 심하므로, 미래에 문제가 심각하면 파업을 하겠지만, 현재는 유보한다는 것이었다. 사회민주당도 주의를 기울이겠지만 당장의 행동은 자제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사회민주당의 지도부는 조합, 정당 그리고 철의 전선들에 미래의 가능성에 대해 의견을 떠 보았다. 대개는 피의 숙청을 두려워하면서 부정적으로 응답하였다. 마찬가지로 철의 전선도 정당이나 노동조합이 일반 파업이 내전을 가져올 것이라며 주저하는 것을 받아들였다. 이러한 결정이 나자, 곧 이어서 파업을 선동하는 사람들에 대해 경고하기 시작하였다. 이제 되돌이켜 보면, 파업을 하지 않는다는 결정이 옳았는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이는 노동조합과 사민당 내부의 정치적 견해 차이가 결국 바이마르 정권 기간 내내 해소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Braunthal, 1956). 어떤 의미를 가지건 간에 분명한 점은 이러한 무행동의 결정은 후에 나치즘이 등장하는 데 저항하지 못하는 원인이 된 것만은 사실이다(Braunthal, 1956).

  (3) 술라이혀 시기: 1932123일에 파펜정부를 승계한다. 술라이혀는 독일 장성들이 이끄는 노동정부를 구성하려 했다. 이러한 구상은 히틀러의 등장을 방지하려는 것이었다. 조직노동자들과 교섭에서 술라이혀는 장단기 두 가지 목표를 갖고 있었다. 실제로 술라이혀는 이를 실현시키기 위해 최대 노조인 ADGB와 만났으나, 오히려 노동조합과 사민당 측에서 자신들이 당할 것을 우려해서 논란을 벌인 끝에, 사민당과 노조는 정부와의 연정을 거부했고, 이 상태에서 술라이혀 정부는 출범하였다(Braunthal, 1956).

  1932-33년 초에는 실업율이 40%에 육박 (안병직, 2002: 227).  특히 청소년들의 실업율, 도시지역의 실업율이 높았다실업율과 나치의 등장은 관계가 있으나, 직접적 지역적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실업율이 높은 지역은 공산당이 강세.... 공산당원의 80%이상이 실업자들. 일부는 나치의 친위대 조직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사민당의 지지세력은 취업노동자들 (안병직, 2002: 233). 실업자 대부분은 정치에 대한 무관심으로 원자화되었다 (안병직, 2002: 235).  나치의 지지세력은 실업자가 아니라 오히려, “주로 소규모 수공업이나 가내공업의 노동자들이거나 아니면, 농촌의 농업노동자, 혹은 철도나 우편 등 공공부문에 취업한 노동자들이었던 것이다. 대도시나 공업화된 지역보다는 농촌이나 지방 중소도시 지역에 집중되었던 것이다” (안병직, 2002: 239).

  (4) 히틀러시기: 대부분의 일반 당원이나 노조원들은 정치에 무관심했지만, 또한 히틀러의 등장에 대해 체계적인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노조는 조합원들에게 조직하라, 그러나 시위하지 말라고 요청하였다. 131일자 노조의 결정에는 새로운 히틀러 정부와 협상을 통해 합의를 하려고 한다고 정하였다. 2월중 까지만 해도, 노조는 어느 정도의 희망이 있다고 여겼다. 그리고 새로운 선거에서도 중립을 지킬 것으로 결정하였다. 35일의 선거에서 나치가 폭력을 앞세워서 승리한 이후에도 봉급생활자 노조에서는 정치적인 결정의 영향은 노조가 관여할 바가 아니라고 선언하였다. 10일 후에 개최된 ADGB 노조도 역시 마찬가지 결정을 내렸다. 이런 공식적인 결정이후에 지방 노조의 소식지들은 조합원들에게 정치적인 견해의 표현을 자제하고 경제적 분야에서 노력을 기울이라고 충고하였다. 그러나 이후 나치는 노조에 대대적인 공격을 가해서 노조의 의도대로 되어가지 못했다. 노조의 신문에 대해서도 공격을 가했기에 이들 소식지들도 논조에 조심스러워 했다. 이어서 히틀러 정부는 공장 내 평의회에서 ADGB구성원들을 몰아 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이러한 나치의 불법적인 행동에 대해서도 조합원들은 일치된 의견을 내지 못했다. 일부는 특히 전통적인 숙련 노동자들은 나치와 협력하려고 했다. 노조는 나치의 대표자와 회담을 통해 입장을 드러내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328일에 AFA 노조는 정부에 새로운 노동자 조직 방침에 따르겠다고 통보했다. 정부의 노조에 대한 탄압은 점증했다. 415일에 정부가 조직하는 노동절 행사에 참여하는 것에 노조는 노조원들 개인이게 일임한다는 선언하였다. 때로는 나치의 이념에 동조하는 노동조합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실제로 이들 노조는 전 기간을 통해 나치에 저항할 수 있는 정치적인 기제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이러한 힘을 행사하지 못했다 (Braunthal, 1956).

  19333월에 실시된 종업원 평의회 선거에서 자유노조가 해산의 운명에 처했음에도 불구하고 73.4%의 높은 지지율을 보였고, 나치가 내세운 공장세포 NSBO11.7%의 지지율을 보였다 (안병직, 2002: 240).

    참고문헌

안병직, 2002, “바이마르 시대의 노동계급과 노동운동,” 오인석 편, [바이마르공화국: 격동의 역사], 삼지원

Gerard Braunthal, 1956, “The German Free [Socialist] Trade Unions during the Rise of Nazism,” Journal of Central European Affairs, XV (Janu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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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지배와 강남지배

시사/베트남 2009. 9. 15. 22:07

필자가 1997년 7월에 베트남 호지민 시 근교의 송베에 소재한 open university의 캠퍼스에 한달간 머무르는 기간중인 7월 20일에 베트남의 국회 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당시 선거는 아마도 조국인민전선에서 후보자를 국회의원 정수의 1.5배를 내놓고, 이를 대상으로 주민들이 중선거구제 정도의 투표를 실시하는 형태이었다.  투표권자는 18세이상이고, 피선거권은 21세였다.  물론 스스로 후보자가 되는 방법도 있으나, 현실적으로는 매우 불가능한 상황이다.  전국에서 아마도 5명미만이 당선된다고 한다.  조국인민전선은 공산당이 주도하면, 대중조직들(여성동맹, 노동조합 등)이 공동으로운영하는 조직이다.  이들 조직은 물론 공산당원 뿐만 아니라, 비공산당원들의 후보자 추천도 받아서 후보자를 유권자들에게 제시한다.  그러나 역시 공산당원이 아닌 사람이 당선될 비율은 전체 국회의원 중에 10% 미만이다.  1997년에 당시의 국회의장은 비공산당원의 비율을 20%정도까지높이는 방안을 강구한다고 말했지만, 그후 5년마다 실시되느 선거를 보면(2002년, 2007년 5월 20일) 오히려 비공산당원의 비율은 줄어들었다.  공산당원들의 국회의원 진출이 더욱 늘어나는 추세인 것이다. 전체 인구의 3% 만이 공산당원이면서, 이들이 나머지 97%에 해당하는 비공산당원들에게 국회의원자리를 주는 것은 쉽지 않은 것 같다.

북한이 전 인구의 10% 정도, 중국이 7% 정도가 공산당원이라고 한다면, 베트남은 상대적으로 적은 셈이다. 그 대신, 제도상으로는 조국인민전선이 추천하지 않고 스스로 자천하여 후보자가 되어 유권자가 선출한 국회의원이 1명이 있고, 비공산당원의 비율도 7%정도는 되므로, 한편으로는 중국보다는 개방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중국은 공산당원의 비율은 더 높고, 그 대신 공산당원 끼리의 경쟁을 강화하는 형태로 나아가는 것 같다.  베트남은 또한 국회, 그리고 성단위, 그리고 아래도 2개의 하부 지방단위에서도 선거를 통해 의원을 선출하고 이들이 다시 인민위원회( 즉 지방정부)를 구성하는 제도이므로, 중국보다는 더 민주적인 선거가 많은 것으로 보인다.  흥미로운 점은 한국도 끝자리가 2. 7자가 들어가는 해 12월에 대통령선거가 행해진다.  중국도 바로그해에 아마도 10월경에 공산당의 정권교체가 발생한다.  베트남은 국회의원선거가 실시된다.  한국, 중국, 베트남 모두 5년마다 선거가 행해지는 주기를 갖고 있다.  시기는 베트남이 5월 또는 7월에 중국이 10월에 한국이 12월에 선거가 행해진다.  국제적인 선거를 통한 정권의 교체가 강대국의 영향을 받아서 다른 나라로 성향이 바뀌는 것을 감안한다면, 앞으로 한국의 선거는 중국의 영향을 받을 가능서이 높아지고 있다.  한국의 2007년 12월 선거가 미국 부시의 강경노선을 본받은 정당한 한나라당 후보자가 당선되었지만, 미국의 2008년 하반기의 선거에서는 민주당이 당선되어 한국인이 선택한 정당의 성향과 어긋나 버렸다.  이어서 일본은 최근에 민주당으로 정권을 바꿈으로써 미국의 정권교체와 보조를 맞추었다.

공산주의 국가의 경우에 시장사회주의 체제로 넘어가면서도, 정치면에서는 끝까지 공산주의 일당체제를 고집하고 있다.  그리고 과거의 공산당 간부들이 그 혜택을 독점하고있다고 학자들은 분석하고있다.  따라서 사실상, 공산주의 시러이나, 그 이후의 시기에 지속적으로 국가 지배체제의 윗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의 경우, 국회의원이나 정부의 관료들을 보면, 대개 강남거주자들이 많고, 대통령을 비롯하여 위장전입을 통하여 강남으로 몰려 들었다.  강남의 인구의 대한민국 전체인구의 1%정도가 된다면(48만명정도?), 나는 대한 민국이 사실상 1%가 지배하는 나라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곳에 살든, 살지 않든, 실제로거주하든 위장으로 거주하든 강남에서 살아야만 지배층이 될수가 있기에 그렇다.  독일이나, 영국의 경우에는 부자는 경제를 지배하고 운영하고, 경제적 약자는 정치를 지배하고 운영하고 하는 분업체제를 통해서 국가의 통합을 유지하고 있는 점을 보면, 어느 나라의 정치가 더 사회통합과 안정에 유리한가를 판정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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