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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3년 진동의 사회세계

역사/19세기 2009. 4. 4. 11:01
지난 3월 26일 참여연대 행사가 끝나고, 창동 훌러건 뒤자리 자리에서 우무석 시인이 김려의 우해이어보를 읽어보기를 권유받았다.  진동에 유배온 학자가 스스로 표현하기에는 심심풀이로 바다의 어물과 풍경을 기록한 것이다.  김려는 아마도 현재 진동면사무소 부근인 진해현청사 부근에 살고 있으면서, 조그만 배를 타고 며칠씩 나가기도 하고,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보고 들은 바, 그리고 정취를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이를 톨해 당시의 사회세계의 범위를 파악할 수 있을 것 같다.

진동은 매우 어로활동이 활발하고, 그래서 거제도에서 젓갈을 싣고 와서 모시와 바뀌어 가고, 고성에서도 와서 젓갈을 팔고 그랬던 것으로 보아 상당한 정도의 시장이 형성되어 있던 것으로 보인다.  더 적극적으로는 동래의 장사들에게 일본 수출용 어물을 팔기도 하고(대개는 껍질이나 말린 것), 인근 함안, 칠원, 영산까지는 직접 어물을 팔러가기도 했다. 서울의 상인들이 오기도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팔지 않았다고 되어 있다.  그 이유는 세금매길 것이 두려워서 그렇다고 기록되어 있다.  인근의 섬들에서는 어획한 물고기들을 진동으로 가지고 와서 거래하였다.

이러한 활발한 진동에는 많은 외지의 사람이 살기도 하고 거쳐가기도 한다.  우해이어보에 많이 등장하는 인물들은 떠돌이 중과 주막의 여인들이다.  그리고 아마도 저자 김려와 같은 유배온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상당수의 외지인들이 진동에 머물다 떠나고, 이들을 대상으로 주막, 식당, 여인들 장사가 행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진동의 당시 사회는 어장에 대한 소유권이 확립되어 있어 아무나 바다 어장을 차지할 수는 없었고, 가난한 사람들도 부유한 사람들에게 팔수 있는 채소같은 것을 채취하여 화폐로 교환하여 다시 이를 갖고 식량을 구입하는 교환이 발달한 것으로 파악된다.  이로 미루어 보면 진동의 1803년 시기는 화폐경제가 상당한 정도 발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김려는 서울에 비해서 이곳 사람들의 치장에 대해서 촌스럽다고 표현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서울 사람들 흉내를 내기 위해 여러가지 치장을 하는 모습이 보이는 것으로 미루어 외부세계에 대한 상당한 정도의 지식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우리가 봄 도다리라고 부르는 것을 이곳에서는 가을 도다리로 부르고 있다는 점, 그리고 거의 현재의 마산과의 거래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진동과 현재의 마산(당시에는 그래도 마산창이 있었고, 어항도 발달되어 있을 테인데)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이다.  상식적으로는 거래가 있을 법한데도 마산과의 거래에 대한 표현이 전혀 없다는 점은 의아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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