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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2.22 마산의 일본인과 한국인
  2. 2010.01.20 마산에서 근대는 일제의 수탈이었다.

마산의 일본인과 한국인

역사/1900-1919 2010. 2. 22. 17:39

마산은 명백하게 구분되는 2개의 사회로 나뉘어져 있다.  과거의 조계지역인 일본인이 주로 거주하는 지역과, 마산포를 중심으로 하는 한국인 지역이 그것이다.  일본인 지역에 한국인이 전혀 상업활동을 하지 않거나 거주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각각의 사회는 한국인과 일본인 혼재되어 사업을 하고 거주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사업면에서는 한국인이 비교적 구마산에서 과거의 상권을 어느정도 유지하고 있었다고 해도, 1910년대에는 이미 창고기능을 상실하고, 다만 어시장이 존속하고 있었지만, 이미 과거의 명성인 원산과 강경을 이어지는 중개항구 또는 인근지역의 물산을 집산하고 분배하는 기능의 상당부분이 약화될 수 밖에 없는 사정에 처해 있게된다.  즉 세금은 이미 금납화로 바뀌었고, 강경과 원산의 중개기능은 이미 개항장으로바뀜에 따라 해외의 세력이 장악하는 계기가 되고, 경부선, 경의선, 호남선, 그리고 마산선의 철도 개설은 아직 자동차가 등장하지 않은 시기라고 하더라도, 항구를 기반으로 하는 또는 강길의 배를 중심으로 하는 운송기능의 약화를 가져왔다.

이제 마산포는 신마산에 건설된 철도정거장과 마산항의 일본항구로서의 기능은 새로운 상업기회를 가져왔다.  물론 진해가 일본의 요항으로 군사기지화함으로써 진해로 일본인들이 어느정도 이전하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마산은 중요한 일본무역항으로서, 그리고 일본인 거주사회의 중심지로서 정착되어 발달하기 시작했다.  신마산에는 일본인들을 위한 신문의 발행, 일본인들의 자치기구들, 국가 권력기구들, 일본인들의 경제활동을 돕기 위한 세관, 금융기관, 우체국 등이 들어서고, 또한 생활상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학교, 병원, 일본인들의 절이나 신사 등이 세워졌다.  여기에 더하여 일본인들의 사업상의 필요에 따라 요정이나 창녀촌, 영화관, 목욕탕 들이 들어서고, 도로의 개설, 다리의 건설, 가로등, 전기의 공급, 상수도 시설의 등장, 도서관, 벚꽃의 식목, 일본술의 제조(아직 막걸리는 상품화되기전이었다), 인근에 유원지를 건설하고(공원) 등등의 근대적인 시설을 급속도로 공급한다.

실제로 마산에 1910년대에 살았던 이들은 마산에서 한국인과 같이 놀거나 교류한 기억이 없다고 진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사업면에서는 한국인들의 상권에 침투하여 일본의 수입품을 판매하고, 한국의 물산을 일본에 수출하고, 한국인 사업가들을 통하여 예속적인 방식으로 사업을 영위하는 등의 행태는 드러나고 있다. 이 당시에 구마산을 지배한 일본인 등장하고, 특히 대토지 소유자는 구마산에 그리고 신마산에도 등장하고, 대규모 건설업자나, 부산의 금융을 지배하던 일본인이 마산에도 장악을 시도하는 장면이 여럿이 등장한다.  마산의 금융은 구마산이건, 신마산이건 모두 일본인이 거의 완전히 장악한다.  전당포나 작은 금융기관까지도 모두 일본인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따라서 일본인들 마산에서 거부가 된 이들이 상당수에 달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이후에 한반도 일본인 사회를 상당한 정도 독자성을 유지하면서, 제국의 본국 일본인 국가를 벗어나 독자적으로 한반도를 지배하려는 시도를 상당히 하게 된다.


참고문헌
조용호, 1999, "마산개항백년: 근대화 1세기 향토 유사", 1월 18일자, 1월 25일자, 경남신문 (신마산 조계지역, 1915년대 마산시가지)
허정도, 2001, "20세기 초 마산 도시공간구조의 복원적 연구: 1912년을 기준으로", 4월 19일 경남대 인문과학연구소 세미나 발표문
허정도와 이규성, 2002, "일제강점기 원마산의 도시공간 변천과정 연구: 1912년부터 1945년까지", 건축역사연구, 11권 2호: 57-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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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에서 근대는 일제의 수탈이었다.

역사/1900-1919 2010. 1. 20. 20:43

일제가 조선반도를 완전히 장악하던 시기에 마산은 러시아, 영국, 일본의 각축장이었다.  러시아는 해군에서는 남포에, 러시아 부영사관에서는 율구미를 중심으로, 애초에는 블라디보스톡과 여순을 연결하는 군항으로, 후에는 저탄장, 제빵소, 해군 병원의 기지로 생각하여, 이곳을 사들였다.  일본은 애초부터,  부산을 보완하는 무역항, 그리고 진해의 해군기지를 보완하는 군항으로서 마산을 지목하고, 끈질기게 마산의 외서면 지역(신마산)에 조계지, 전관거류지를 만들고, 후에는 러시아의 율구미 장악을 막기 위해 부산의 일인 부호들을 동원하여 땅을 사들였다.  영국도 19세기 말에는 거문도를 점령하면서 까지 한반도에 탐을 내었지만, 결국은 남아프리카에서 진행중인 보아전쟁에 전력을 쏟느라, 러시아의 침략을 막는 방향으로 선회하고, 일본과 동맹을 맺는다.  이제 러시아와 일본의 대결이 진행되지만, 결국은 러시아는 만주에 집중하고, 일본이 마산을 장악하는 과정을 겪게된다.

20세기의 초엽에는 구마산(원마산)을 중심으로 일본 상인들이 수입품 장사(주로 면제품)와 한일 상인들의 미곡 수출이 주된 상업활동이었다. 그러아 이후 특히 1904년 초이후에는 일본이 마산을 장악하고, 일본육군이 군항을 만들고, 마산선을 건설한다.  이 과정에서 땅을 빼앗기고, 철로 부지의 조성, 궤도 부설에 일본인의 건설업자들의 하청 노역을 담당하게 된다.  이들 철도건설지역은 1904년 2월에 맺은 한일 협정서에 따라, 그리고 대부분의 철도 주변 부지는 관리하느 나라의 군사적인 통치와 사법체제의 적용을 받는 점에 따라, 노무자들은 일본 법의 지배를 받게 된다.  즉 법을 어기거나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일본 영사관에 송화되어 처벌을 받는 것이다.  이러한 일들은 조선정부가 러일전쟁을 위한 철도건설에 적극협력한다는 방침에 따라, 조선정부의 권유로 마산의 주민들이 동원된 것이다.  이후에는 중앙 마산지역(즉 철도 정거장 부지 약 40만평, 장군동에서 반월동 정도까지)의 도로 건설에서도 마산 주민들이 노역으로 동원된다.

땅을 빼앗겨서 이에 대한 소송이 많이 발생한다. 특히 철도 부지나 정거장 부지의 경우에, 조상의 묘지나 옥토를 강제로 팔아야 되는 경우가 많아 창원 감리에 호소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미 1904년말에 들어서면, 조선왕조에는 재무와 외무 분야에 고문정치가 행해지고 있고, 1905년 말에는 을사보호 조약에 의거하여, 외교권을 완전히 상실한 상황이 되어서 일본인들의 횡포에 대해서 일본 이사청(일본 영사관)에 호소 해야하는 모순이 발생한다.  이에 더하여, 일본인들은 조선인민을 착취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대부업에 많이 진출하였다.  특히 부산의 경우에는 토착상인을 상대로 일인들이 대부업에 종사하여 착취하는 경우가 많았다.  1905년 1월에는 화폐개혁으로 일본의 화폐와 같게 만드는 조치가 발생하여 금융공황이 초래되고, 일제의 제일은행을 비롯하여 일본 거류민들 계통의 은행들이 한국의 금융을 장악하게 된다.  이시기에 일제는 신마산 지역에 전당포를 많이 설치하게 된다. 
 
일인들은 또한 이미 1905년이 되면, 사실상 조계지 또는 일본인 전관 거류지역, 군사지역 등에서는 완전히 독자적인 행정을 실시하고 있었고, 징세도 조선왕조의 권한이 미치미 못했다. 관세권도 외국인들의 손에 들어가 있었다.  그럼에도 대한제국 조선왕조는 지방지배체제를 제대로 확립하지 못하고 여전히 관리들의 부패와 탐관이 횡행하고 있었다.  아니 일제에 빌붙어서 자신의 개인적인 영달을 도모하는 자들이 많았다.

일제는 제조업분야에서는 주조, 정미 등, 그리고 상업 분야에서는 일단 신마산 지역에서는 자체의 시장을 개설하고, 구마산 지역에는 서서히 침투하는 양상을 보였다.  교통분야는 하루에 2회정도 왕복하는 부산과 마산과의 철도, 인력거의 등장을 볼 수 있었고, 신마산 지역의 영화관 등장, 일본군인들을 상대로 하는 화류계의 등장과 더불어 구마산지역으로 침투를 볼 수 있다.  이렇게 서서히 근대의 물결은 일본의 착취와 약탈과 더불어 마산에 들어 오게 된다.  물론 마산의 유지들도 역시, 상업에 종사하고, 금융업에도 진출하고, 학교를 설립하고, 인쇄소도 만들고, 야학도 하는 상황이 발생하나, 다른 전통적인 지역에 비해서는 그리 강한 편은 아니다.  그래서 마산은 기본적으로 일제의 육군 군항으로 도시가 성장해 온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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