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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3.06 지배의 정당성: 민중, 민족, 종교
  2. 2010.02.12 신해혁명과 러시아 혁명

지배의 정당성: 민중, 민족, 종교

역사/1920-29 2010. 3. 6. 07:35

(1) 신해혁명의 영향

1911년 왕정을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성립시킨 혁명이었지만, 이 혁명의 기본 성격은 만주족이 지배하던 중국을 한족이 다시 그 권력을 장악하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손문이 직접 정권을 장악하지 못하과, 북양정권에 의지해야 하는 상태로 바뀐다. 이때 몽골과 티베트 역시 청나라의 멸망은 곧 자신들의 독립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 착안하여 독립을 주장한다.

그러나 몽골과 티베트는 민족을 구성하면서도 동시에 티베불교를 중심으로 하는 국가체제르 구상하여 몽골의 통치자도 애초에는 티베트에서 온 불교지도자를 내세우고 받아들여진다. 티베트는 당연히 달라이 라마가 국가 지도자가 된다.

(2) 민족 자결주의의 영향

민족 자결주의가 논의되던, 1차세계대전 후의 세계에서는 지구상의 민족들이 각자 자신의 국가 건설을 주장하고 나섰다. 물론 패전국도 승전국도 아니지만, 이미 공화국을 선언한 중국은 제국열강들과의 불평등 조약의 폐기, 일본의 21개조 요구 철회, 전쟁 중에 독일이 장악한 산동반도를 약탈한 일본에 대해 산동반도를 돌려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파리 강화회의는 일본의 우선권을 인정하고 중국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았다. 당시의 북양정부는 일본이 만주지역의 철도운영을 위해 군사를 파견한 사실은 애써 무시하고 있었다. 이는 북양정권이 사실상 중국의 한족의 권리를 주창하는 정권이었기에 그렇다. 이후에도 손문이 죽기 전까지 대개는 한족의 권리를 주창하고 있었다. 즉 일본이 만주와 내몽골로 침투하고, 외몽골이 이미 신해혁명이후에 독립을 선언하고, 티베트에서는 사실상 자치를 하고 있었을 때에도 적극적으로 중국으로의 편입을 강요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1919년 5월 4일 북경에서 대규모 시위를 통해 중국민들이 민족에 기반하여 독립국가가 될 것을 열망하고 있다는 점을 과시하였다.

한반도에서도 1919년에 민족 자결주의의 영향을 받아 독립운동이 발생하여 민족에 기반한 국가 건설로 나아가게 된다. 이 해는 또한 조선왕조의 사실상 독립된 마지막 왕인 고종이 서서함으로써 왕조의 복고에 의한 국가 건설보다는 근대국가인 민족국가를 주창하게 된다. 물론 순종이 1907년에 고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지만, 사실상 일본제국이 만든 괴뢰적인 성격이 강했다. 즉 외교, 군사, 재정 등 국가를 구성하는 모든 권한이 일본으로 넘어간 뒤에 강압에 의해 물러난 고종의 뒤를 이엇으므로, 사실상 고종이 마지막 조선의 왕으로 보는 것일 옳을 것이다. 아무튼 한국인들은 민족국가의 건설을 주창한다.

(3) 볼세비키 혁명의 영향

볼세비키 혁명은 민중에 새로운 형태의 국가 건설이 가능하다는 점을 확인해 주었다. 즉 노동자 농민 병사 소비에트에 의거한 국가 건설이다. 이에 따라 1920년에 중국에서는 공산당이 창립하고, 이를 기반으로 세력을 확장해 나간다. 물론 초기 중국의 국민당은 손문의 3민주의와 5권 분립을 기반으로 하여 국가 구성을 계획하므로, 이념적으로는 공산당과 유사한 점이 많았다. 그러나 손문의 사후, 장개석이 권력을 장악하고, 공산당과 북벌을 협력하여 성사시킨 후인 1927년 이후에는 공산당에 대해 적대적인 정책으로 돌아 선다. 이것이 공산당으로서는 더욱 적극적으로 농민들을 상대로 민중의 국가 건설이념을 전파하고 동조자를 구하는데 성공하는 계기가 된다.

같은 시기에 베트남의 공산당이 지역적 분열(통킨, 안남, 코친 차이나)을 싸우면서 공산당 이념에 의한 프랑스에 대한 독립운동을 주창한다. 역시 볼세비키 혁명의 직접 영향을 받은 몽골과 신장지역 역시 공산혁명의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몽골은 직접적으로 이를 성사시키고, 신장은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으면서 무슬림에 의한 국가 건설운동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일본인과 한국인들도 공산당을 기반으로 하는 정치세력들이 등장함은 물론이다.

(4) 일본 제국주의의 인종적 정당성 주창

일본은 기본적으로 이미 장악하고 있던 한반도, 만주, 산동반도, 대만을 넘어서, 소위 만몽지역까지 넘나 보게 된다. 물론 장기적으로는 화북지방까지 나아가게 되고, 중국 전역을 침략하는 것이 그들의 군사전략이었다. 다만, 이들이 한반도, 만몽으로 나아가는 과정은 한편으로 몽골, 만주, 한반도, 일본으로 이어지는 같은 혈통을 지녔다는 점을 강조하는 이념적 전략이었고, 그 역사적 사실에 관계없이 이 지역의 많은 이들이 이에 동조하게 된다. 후에 일본제국주의는 더 나아가 아시아인 또는 황색인종을 대신하는 지위로까지 이념을 확장하고 있다.

아무튼 일본의 제국주의는 인종에 기반하여 제국의 침략 확장 정책으로 가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제국주의는 한편으로 민족주의에 기반한 국가 건설운동의 해외팽창적인 성격을 지닌 것이라고 본다면, 민족주의의 특수한 형태라고 볼수 있다. 1920년대는 현재의 국가가 나온 역사적 기원이 발생한 시기였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더구나 동아시아 지역은 민족, 종교, 민중적 이념, 인종 등의 요인들이 착종하면서 국가 건설이 이루어 지고 있다는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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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혁명과 러시아 혁명

역사/1900-1919 2010. 2. 12. 23:03

신해혁명은 중국 청나라 왕조를 무너뜨리고, 아시아 최초로 공화정을 수립한 획기적인 사건이다.  1911년에 무창에서 일어난 무장군인들의 도움을 받은 혁명세력들의 반란이 성공을 거둔 것으로 해석된다.  물론 이들은 내부의 각종 혁명세력들이 외부 중국인들의 도움을 얻어 성공한 것으로 평가된다.  다른 한편 청 왕조의 입장에서 보면, 반란을 진압하라고 명령을 받은 군부가 반란편과 타협을 하고 자신들이 정권을 장악함으로써 반란을 완성시킨 것이다.  이로써 청왕조는 아편전쟁이후 쇠약해진 틈을 타, 만주족을 무너뜨리려는 중화민족에 의해서 멸망당한 것이다.  중화 한족들은 청왕조가 흥했을 때에는 숨을 죽이고 있다가, 청왕조가 쇠약해진 이후에는 태평천국의 난을 통해, 그리고 의화단 사건을 통해 외세에 지리멸렬한 청왕조를 보고, 1904-5년의 로일 전쟁시기에는 자국에서 발생한 전쟁에서 단지 중립을 지키면서 다른 나라끼리의 전쟁터로 변하고, 여기에서 발생하는 중국인민들의 희생에 대해서 한마디도 못하는 처지를 보면서 오랑캐 왕조인 청왕조에 대한 적대감을 키워나갔다.

청왕조의 입장에서 보면 19세기 후반기에 이미 청일 전쟁의 패배후에 근대화의 의욕을 불태우고, 해외에 거의 2만명가까이를 보내어 훈련시키고, 실패하기는 하였지만, 변법자강을 시도하였으나, 결국은 망하고 만 것이다.  특히 해외에 내보낸 국비 유학생들이 대부분 혁명운동에 가담하였으니, 국비로 청나라를 망하게 만든 것이나 다름 없는 것이 되어 버린셈이다.  1906년에는 과거제도를 없애 과거의 신사세력의 싹을 없애고 보다 근대적인 관료총원을 시도하였다.  군인의 경우에는 팔기군을 개편하고, 근대적인 군대로 만들면서 군벌이 만들어지는 계기가 된다. 군벌의 존재는 러시아와 다른 특이한 형태이다.  즉 러시아의 군대는 절대적으로 중앙의 군수지원을 받고 명령을 받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청나라의 군벌은 마치 지역의 깡패조직처럼, 작은 지역 단위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가지면서, 세금을 거두고, 명령권을 가지고 세력을 불려나가고있었다.  결국 청의 마지막 왕조는 가장 큰 군벌인 북양군벌인 원세개에 의존하려한다.  그러나 원세개는 청왕조나 중화민국을 팽게치고 오직 자신의 이익과 황제가 되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  1차세계대전 기간에는 일본에게 독일의 이권을 전부 넘기고, 러시아 혁명기간에는 중국군이 오히려 일본군의 지휘아래로 들어가 일본군 7만여명이 내몽고, 만주, 연해주에서 마음껏 러시아 적군과 대적하게 만들어 준다. 

중국은 한편으로 오랑캐 정권을 한족 정권으로 교체하는 것, 그리고 외세와의 대결을 통해 국가의 주권을 세우는 것이 초미의 과제가 된다.  손문은 심지어 만주를 포기하는 방안을 강구할 정도로 위험하게 한족 위주의 중화민국을 구상하였다.  일본은 이중적인 외교전략을 통해 한편으로 일본 재벌의 자금과 군부내의 정부부서를 통해 중국의 혁명세력을 손을 대고, 다른 한편으로는 청나라나 원세개 북경정부를 통해 혁명을 공격하게 하여 궁극적으로는 두개의 중국을 만들고, 그 틈을 타 만주와 몽고를 자신들의 손에 넣으려는 전략을 구사하게 된다.  이는 2007년 10월 1일자 아사히 신문을 통해 기사화되었다.

중국내의 각종 지역적 혁명조직들과 상인세력들이 서서히자라고 있었고, 해외의 손문과 같은 중국 통일 세력들이 손을 잡고 있었으나, 아직 중국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혁명조직이 부재하고 군사력을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나 손문의 3민주의는 민권, 민주, 민생은 당시의 이론을 쉽게 통합시킨 이론이라고 볼수 있다.  국권을 수립하는 것, 그리고 민주까지는 드러낼 수 있었지만, 민생이론은 사회주의나 미국의 공산주의 이론을 받아들인 것으로 해석된다.  링컨의 게티스버그 연설(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조지 소로의 이론, 레닌의 러시아 혁명을 소화한 이론이다.  아무튼 손문은 무장봉기, 해외자금을 활용한 국내 혁명지원, 이론화를 통해 혁명에 헌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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