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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3.09 민족주의에서 친일로 넘어가기
  2. 2008.10.07 현실의 불안이 과거를 불러온다.

민족주의에서 친일로 넘어가기

역사/1920-29 2010. 3. 9. 08:03

일본에서 해방되고 2개월 후에 태어난 조갑제는 일본에서 태어나 귀환한 가족이다.  따라서 부모님들을 통해서 일본의 생활 습관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월간 조선, 1984년 8월호에 "총독부 고관들의 그 뒤: 일본 현지 특파 취재"에 많은 노력을 들려서 한국에서 근무했던 총독부 관리들을 주로 일한 협회를 통해 만나고 그에 대한 느낌을 적은 기록물이다.  일본 관리들은 주로, 일본이 한국에 물적 여건을 많이 만들어 주었다는 것과 인적으로도 교육이나 조직 생활을 통해 근검절약, 절도, 공적인 일에 대한 열정 같은 것을 심어주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 조갑제는 내용자체에 대한 반박은 별로 없다.  아마도 자신이 가정생활을 통해서 이런 점을 수긍하고 있었던 것 같다.  즉 한국인(일본에서는 물론 한반도에서도 일제는 조선인이라고 불렀다)들은 상대적으로 이런 점이 부족하였다는 점을 인정하고 들어가고 있다.  또는 일본관리들의 일부는 한국인 협력자들(우리가 친일파라고 불리는 자들)에게 책임을 넘기고 있다.  즉 친일파들이 일제가 요구한 것을 지나치게 강압적으로 집행을 해서 한국의 피지배자들에게 나쁜 인상을 주었다는 식이다.

이에 대한 반박 논리로 조갑제는 "그러나 심하게 말한다면 '강간으로 생긴 아들도 유산은 유산이다'는 얘기로 해석될수 있다.  강간으로 태어난 아들이 유산인것 들림없지만 그것이 강간을 정당화할 수는 없는 것이다"(294쪽)라고 자신의 주장을 체계화시킨다.  그리고는 아무말이 없다.  필자가 이 글을 읽으면서, 아 당시의 조갑제 나이는 40이 되었지만, 아직 국사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가 질문하면, 이런 일을 당할 수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이는 단순히 취재자가 취재를 순조롭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사실 제시나 논리에 대항할 수 있는 정보나 지식이 없었기에 그랳을 것이라는 점이다.  일제의 강압에 의한 병합, 한국인들에게 이미 끓어 오르고 있는 교육열과 실업에의 기풍을 막은 점, 일제를 통해 조선인의 문화적인 역량을 말살하고 순종적이고 노예적인 사람으로 만들어 놓은 점, 한국인들끼리 분열하도록 통치한 점에 대한 인식을 배우지 못한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여야 할 것 같다. 요즈음의 역사적인 자료는 이미 많이 밝혀져 있어, 오래 전에 배운 사람들은 이런 점을 제대로 알기 어려울 것 같다.  필자도 한국사나 세계사에 대한 지식은 항상 새로운 자료가 발굴되고, 다른 나라의 역사와 비교하여 해석되는 것을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역사 해석의 고루함을 벗어나기 어렵다는 점을 깨닫고 있다.

조갑제에 대한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조갑제의 친일 옹호 논리가 대강 나오고 있다. 즉 친일은 당시의 대세였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 같다.  어쩔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즉 그 당시에 한국땅에 산 사람들은 모두 친일이었다는 논리이다.  이를 욕하지 말자는 것이다.  하나의 공동체는 인간성으로 말미암아, 공동체를 배반하여 사욕을 취한 사람들을 처벌하지 않는다면, 이런 공동체는 쉽게 망한다는 점을 인류 진화의 역사에서 가르치고 있다.  만일 친일한 자를 사회적으로 용서한다면, 이런 사회는 자신의 공동체 조국을 팔아 먹는 것을 장려한다고는 볼수 없어도 처벌받지 않는다는 점을 교육시키고 있는 셈이다.  이런 사회는 그렇지 않은 사회에 비해 먹힐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다. 필자가 보기에도 이런 공동체는 꼭 유지해야만 할 필요가 있다. 더 응집력이 공동체에 먹히는 것이 오히려 역사의 순리인 것 같다.  만일 우리가 같은 민족 공동체 속에서 살면서 같은 운면을 지닌 것으로 친다면, 적어도 공동체 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처벌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공동체란 인간성을 말한다.  인간적인 배신, 공동체에 대한 배신이 같은 말이다.  역사적으로 용서하기 어려운 것이 도둑질이나 독재나, 탄압을 아주 자신을 희생하면서 헌신적으로 하는 이들이다.  도둑은 밤에 자지 않고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부시대통령은 금욕정신으로 무장하여 아침마다 기도하고, 술도 먹지 않고 담배도 치지 않지만, 열심히 무고한 이락사람들을 죽이는 데 앞장선 던 것이다.  대부분의 독재자들과 탄압자들은 금욕적인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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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의 불안이 과거를 불러온다.

역사 2008. 10. 7. 14:11

사회현상을 이해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시간과 공간, 그리고 제도나 사회관계를 꼽는다. 물론 시간이란 물리학적인 기계적인 시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회관계가 누적된 사회적 시간을 가리킨다.   인생을 살아가는 개인은 자신의 시간에 대해 알고 싶어한다.  내가 살아 왔으면서도, 내가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시간들.  내가 살아온 세계마저도 내가 이해할 수 없다면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세계란 어느 세계인가? 라는 의문.   현재의 삶에 대해 적응하지 못하면서, 우리는 과거의 삶을 다시 말하고 싶고, 돌아보고 싶고, 과연 내가 현재는 변하지 않았는데, 내가 잘못해석하면서 살았는가, 아니면 세상이 변하여 내가 적응하지 못하는가?  이런 의문을 갖게 된다.

아마리 우리가 시간과 역사, 지역과 공간, 사회제도와 관행들에 영향을 받으면서 산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현실은 과거보다는 더 오랜 과거, 내가 알 소 있는 지방보다는 더 넓은 세계를 알아야 세상을 이해하면 살아 갈 수있는 세상이 되었다.  현재의 시간은 점차 불안정해지고, 자연의 섭리도, 자연의 규칙도 사라지고, 인간이 만든 제도들 대부분이 흔들리는 세상이 되었다.  가족도, 직장이나 직업도, 이웃도, 고향사람들도 모두 흔들리고 있다.  내가 모르는 것들이 나를 흔들고, 영향을 주는 세상이 된 것이다.  이럴때 우리의 현재는, 그리고 현재에 기반을 둔 미래는 흔들린다.  나의현재는 어떤 과거의 산물인가?  이런 질문이 고루한가?  현재의 과거의 산물이라는 물리학적 진실, 그리고 미래는 현실의 결과일 것이라는 시간의 불가역성의 진실도 흔들릴 것으로 생각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제 과거를 돌아볼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현재가 너무도 혼란스럽기에!

이런 나의 생각은 김영목, 2004, "집단적 기억과 역사: 19세기 전반의 독일 역사담론"(독어교육, 29집: 456에는 하버마스를 인용하면서, "불안의 원천으로서 미래를 목적론적 역사기획으로 다시 채워보려는" 시도라고 정하였다.  이를 따라서 김영목도 "역사는 원칙적으로 방향성 상실과 위기의식에 대한 일종의 보상으로 기획되고 있다"(457)라고 진술한다.  물론 이러한 역사 서술을 인정한다면 매우 주관적인 역사 서술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나는 이점을 인정한다. 각자의입장에 따라 서술이 달라지고, 강조점이 그리고 해석하는 방식이 달라진다는 점을 인정한다.  따라서 나는 역사란 하나의 역사가 아닌 각자의 입장에 따른 역사 있을 뿐이고, 중요한 것은 개인에 갖힌 역사를 통해 보편적인 세계관을 공유할 수 있는가의 문제일 것이다.  같은 맥락을 Beredetto Croce(1866-1952)는 "역사상의 사실은 기록자의 마음을 통하여 항상 굴절된다"고 주장하게 한다.  이렇게 역사가 주관적으로 해석된다는 명제, 또는 이 명제를 실제의 역사에서 적용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전체주의 사회일수록, 다양한 역사 해석을 부정하고, 국가주의적인 단일한 역사 해석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가족도, 하나의 인간도 마을과 이웃도 부정된다.  단지 국가의 정통성을 강조하는 역사만이 드러난다.  다양한 역사 해석이 가능한 사회는 그 자체로서 다원성, 다양성을 인정하는 사회이고, 미래를 위해 다양한 가능성의 씨앗을 보유한 사회이므로 어떠한 불확실성과 위험에도대처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회가 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다양한 역사 해석의 하나를 서술할 것이다(전제주의 사회에서는 공적인 기억을 사적인 기억으로 환원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권귀숙, 2006: 12; Hosking, 1989; Marques, Paez & Serra, 1997을 참조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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