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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방 내 담론의 특징

교양 2010. 3. 16. 07:13

1950년대 후반 서울 중심지의 다방 모습에 대해서는 소설이기는 하지만 다음과 같은 묘사를 볼 수 있다. “정치를 장사하고 다니는 무리들의 수작이나, 예술가라는 골패를 앞가슴에 달고서 한밑천 잡아보자고 드는 족속들이나, 서커스의 재주부리는 원숭이 처럼 정의나 이념같은 것을 붓대로 재주부리는 것 쯤으로 알고 있는 지식인들이 협잡, 국록을 먹는 관공리들의 의자를 싸고 도는 장사 수법, 심지어 똥차에서 쏟아지는 폭리를 노리고 이권을 쟁탈하는 데도 점찮은 무슨 단체의 인사나 무슨 유명인들의 귀부인(?)들이 돈보따리를 안고 다방에서 면담을 하는 것이다”(박경리, 1959/1980, “표류도”, 13장, 박경리 문학전집 12권, 지식산업사).

1960년 마산 남성동 부근의 보리수 다방 부근에서 오상원 이라는 구두닦이를 소개하는 글 속에서 우무석은 다음과 같이 다방을 평가한다. “50년대부터 70년대까지 우리 사회의 문화적 표상에서 다방이라는 장소이미지는 유달리 남다르다. 다방의 풍경에서 시대별 정서를 찾을 수 있고 특정한 한 세대의 감수성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방은 단순한 약속과 만남의 공간만이 아니라 정보교환과 상호소통의 담론구조를 지닌 일종의 아고라였다. 다방이란 공간에서 당대 지식인들의 사회적 관심에 대한 비판적 담론이 잠재했기에 사회혁명의 바탕이 만들어졌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다방은 신산스러운 현실 앞에 놓인 절망과 고통에 찬 삶을 정신적으로 서로 위무해주는 안식처이기도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너나없이 다방에서 죽치고 있었을 터”(우무석, 2010, “마산의 다방문화사”, 2. 17일자, 도민일보).

1970년대 후반 마산에는 약 150여개의 다방이 산재해 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마산시 통계연보, 1979). 이 당시의 다방에 대해 평가하면서 필자는 1979년의 마산민중항쟁을 기록하면서 “적어도 다방이라는 곳이 모르는 사람들이 만나서 쉽게 사회적인 정보를 교환하면서 비판적인 사고를 기르는 장소인 것 만큼은 틀림없는 것 같다”고 평가하였다(이은진, 2008, 1979년 마산의 부마민주항쟁, 불휘: 85).

최근에 한 사회학자가 평가한 우리나라의 다방에 대한 평가를 보면, 프랑스나 영국과 같이 비판적인 공론이 형성되기 보다는 쾌락적인 장소였다는 점을 강조하는 글을 본 것 같다. 그러나 서양이나, 우리나라라 공통점은 전적으로 공적인 장소도 아니고, 사적인 장소도 아니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회색지대는 완전히 공적 지대로 아니고 작은 폐쇄적 공동체도 아닌 전이지대의 성격을 띠고 있다. 즉 가족을 만나는 장소도 아니며, 그렇다고 직장의 상사와 공적인 일을 의논하는 장소도 아니다. 그러나 이런 것을 보완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 즉 다방은 집안일의 공적인 행사는 치르기도 한다. 먼 친척이 오거나, 아니면 상견례를 할 때, 아니면 회사에서 직적 상의하기 어려운 것들은 다방에서 협상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런 보완적인 기능은 달리 표현하면, 기존 질서에 대한 문제점을 해결하고, 새로운 해결을 모색하는 싹이 트는 역할을 담당한다. 그 시대의 고민이 모두 모이고, 아이디어가 창출되는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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