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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1.21 전쟁의 규칙이 확립되었다.
  2. 2009.01.03 혼란은 발전을 위한 전단계에서 발생한다.

전쟁의 규칙이 확립되었다.

역사/17-18세기 2009. 1. 21. 11:35

1600년경은 한반도에서는 조선의 전기가 마감되고, 왜와 청나라의 침략으로 조선후기로 접어드는 시기이다.  이는 조세 자료와 신분에 관한 자료가 망실됨에 따라 국가가 국민들에게 거두어 들일수있는 재정은 더욱 악화되나, 반면에 신분자료의 망실은 신분제도의 동요가 일어나서 자산에 의해 신분상승이 일어나고, 재산이 없으면 양반이라도 신분 하락을 겪던 시기이다.  그러나 조선은 외부의 침략에 의해 내부의 개혁이 제대로 수행되지 않아 국가 융성기라고 부를 정도의 문명의 발달이 일어났다고 보기는 어렵다.  물론 상대적으로 진취적인 기상이 있어다고는 하나, 이는 세계사적인 흐름에 비후어 보면 발달에 보조를 맞출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  외부와의 연계는 청나라, 왜, 유구 열도정도 만이 관에 의해 정기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을 뿐이므로, 이웃의 일본이나 청나라도 쇄국정책을 취했다고는 하지만, 부분적으로 교역을 하고 있던 점에 비추어 보면, 우리는 지나칠 정도로 외부의 정보에 어두웠다고 평가할 수 밖에 없다.

유럽대륙은 신대륙을 발견하고, 남아프리카를 거쳐 인도와 중국으로 향하는 항로을 개척한 상태에서 대량으로 상품 교류를 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이때 해외 식민지는 동인도회사 또는 서인도 회사라는 왕실과 국가가 세운 주식회사의 형태로 진출하지만, 이들 회사는 토지 점유, 군 고용, 독점 무역 등의 형태를 띠면서 의사 국가의 형태를 취한다.  포루투갈, 스페인의 시대를 끝내면서 1600년경에는 네덜란드가 공화정의 형태로 스페인 왕실로부터 독립하고, 본격적으로 자유로운 국가를 건설해 나간다.  이어 영국이 1600년대를 거치면서 청교도 혁명, 명예혁명의 실험을 거치면서 왕권을 제약하고, 귀족을 중심으로 한 의회의 권한을 강화한다.  프랑스는 절대주의 국가로서 중농, 중상주의 국가를 만들어 간다.  국가는 단순히 한 나라의 인민들의 생산물을 수취하여 운영되는 것이 아니라, 대외적으로 무역을 독점함으로써 국가가 하나의 회사처럼 운영되는 시기이다.  여기에서 국제적인 통용화폐인 은이 남아메리카를 거쳐, 중국으로 들어오게 되는 과정을 거친다(은행-> 은을 다루는 상점).

유럽대륙은 상대적으로 내부적인 전쟁과 식민지 전쟁을 동시에 치루는 전쟁의 시기를 거친다.  전쟁의 방식은 겉으로는 내부의 왕권을 둘러싼 전쟁, 왕의 권력과 귀족간의 내전, 해외식민지 쟁탈전의 양상, 종교전쟁의 형태를 띤다.  유럽대륙의 지배체제는 왕정, 공작령, 후작령과 같은 독립적인 국가형태를 띤 것, 도시국가 체제, 수도원과 가톨릭 교구가 지배하는 형태로 나뉘어져 있다.  혹자는 유롭대륙은 약 200여개 이상의 통치단위로 나위어져 있다고 지적한다.  여기에서 잦은 전쟁이 발생하는 원인이 되면서 동시에 이러한 작은 단위들이 본격적으로 통합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상대적으로 유럽은 국가간의 전쟁이 발생하면서도, 동시에 교회의 이데올로기가 각 나라에서 그것이 가톨릭이건, 루터교, 또는 캘빈교, 청교도 등의 형태로 공유되고 있었다.  따라서 전쟁은 어느정도의 규칙을 갖고 진행되고 있다.  물론 전쟁은 대부분 용병들에 의한 전쟁이므로, 왕정간의 전쟁이지, 국민들간의 전쟁은 아니었다(종교전쟁의 경우에는 인민들간의 살륙의 성격을 띠고 있기는 하지만).  따라서 전쟁은 죽기 아니면 살기의 전쟁은 아니었고, 상대적으로 용병들과 전쟁 무기, 재정 능력에 따른 전쟁이었으므로,  비교적 서로간에 인정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전쟁이 진행되었다.  또한 아직 국경선이 획정되지 않은 시기에는 인민들은 상대적으로 민족국가의식이 강하지 않았다는 점도 전면전의 양상을 띠지 않은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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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은 발전을 위한 전단계에서 발생한다.

역사 2009. 1. 3. 17:31
유럽 중세의 역사는 비판의 의미를 지닌 중세봉건사회라는 표현에서부터, 암흑시대라는 표현에 이르기 까지 상당한 정도의 부정적인 평가가 등장한다.  즉 폭력과 무질서, 그리고 농노제도와 봉걵건제도에 딸린 영주가 농노들이 결호낳기 전에 처녀와 미리 잠자리를 같이 한다거나, 흑사병, 마녀사냥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십자군 전쟁, 농업혁명, 도시의 등장, 기사도(궁정사회), 직업장인의 등장, 분업과 동시에 원거리 무역의 발전과 내지 무역의 등장, 한자 동맹, 바이킹의 아이슬란드와 그린랜드 정착 등을 든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표면적인 평가 또는 관찰의 뒤에 있는 보다 깊은 사회구조적 변화의 동인을 살펴보는 것이다.  기후 사학자들은 중세 온난화 현상을 주장한다.  즉 800년경부터 1350년경까지 현재의 기후보다 1도가량 높았다는 것이다.  이는 사람들이 개간할 수 있는 땅의 증대를 가져왔고, 농산물이 풍성하게 수확되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 북쪽에서는 바다가 얼음에서 녹고, 유빙의 한계가 극지방으로 밀려감으로써 노르웨이에서 아이슬란들와 그린랜드 나아가 현재의 캐나다 북동부지방까지 진출했다는 점, 덴마크인들은 노르만디와 영국 방향으로 진출하게 되었다느 점을 지적한다.  즉 중세의 온난화시기는 농업의 풍요로음과 동시에 바이킹들이 적극적으로 바다에서 활동하게 만들었다는 점을 든다.

동서양의 관계, 더정확히 말하면 현재의 서부 유럽과 중국과의 교류라는 측면, 그리고 이 둘을 매개하는 이슬람 권인 중앙아시아와 아랍의 관계까지 넣고본다면, 중국이나 이글람 권보다도 열등한 문명을 지니고있던 유럽이 중세암흑기를 거쳐 이들 두개의 문명권보다도 앞선 문명을 구가하는 과정이 이 중세에 들어 있다.  따라서 우리는 유럽이 세계를 제패하는 현재의 유럽으로 등장하는 계기를 설명하는 방식을 찾는 것이 흥미롭다고 하겠다.

중국은 11세기에 거란과 여진을 밀어내고, 다시 훈족을 밀어내어 간접적으로 유럽에 파급효과를 준다. 특히 훈족은 앞선 시대의 북방에서 내려오는 민족이동을 야기시킨 하나의 원인이 되어 로마제국 멸망의 한 요인이 된다.  거란과 금나라 역시 유럽의 문명과 대면하여 최초로 중국을 소개하는 민족이 된다.  이후 1200년대들어서는 몽골의 징기스칸이 유럽의 흑해 연안까지 진출하여, 한편으로는 흑해를 장악하던 라틴 문명과 충돌을 일으키기도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대륙내의 교역의 안전성을 보장하여, 지중해 연안의 장거리 무역이 더욱활발해지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한다.  베니스가 현재 크로아티아 연안을 거쳐, 그리스 연안, 흑해까지 진출하여 사실상 유럽의 동방 무역을 독점하고, 지중해의 르네상스를 준비한다.

유럽은 또한 십자군 전쟁을 통해 1000년대 말부터 막강한 사라센 제국과 겨눈다.  이는 내부적으로 중앙집권국가로 향하는 과정에서 기독교 세력과 힘을 합치고, 유럽의 봉건적인 내부 무장 세력들의 힘을 결합시켜 외부로 향하게 하는 의도때문에 발생한 것이기는 하지만, 과학과 수학이 발달한 이슬람의 문명과 본격적인 교류를 통해 르네상스를 준비하는 계기가 된다.

물론 중국 또는 이슬람 세력과의 문명 접촉은 직접적으로는 흑사병의 창궐, 종교재판의 등장과 같은 사회적 혼란이 야기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유럽의 중세 역사를 통해 나는 외부와의 접촉을 무서워할 것이 아니라, 어느정도의 혼란을 감수하고라도, 이를 수용하여 앞으로의 발전의 전략을 삼는 것이 역사의 발전을 이루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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