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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1.28 종교 -> 과학 -> 산업혁명
  2. 2009.01.21 전쟁의 규칙이 확립되었다.

종교 -> 과학 -> 산업혁명

역사/17-18세기 2009. 1. 28. 15:07

역사를 배우면서 항상 떠나지 않는 의문은 어떻게 서양이 동양을 지배하게 되었느냐? 라는 초보적인 질문에서부터 서양의 문화나 생활양식이 지구의 모든 거주자들에게 영향을 강요하게 되었느냐에 있다.  중세의 서양이 종교에 의해 지배되던 세상이라면, 르네상스를 거치고, 지구상으로 개척이 이루어지면서 과학적 세계관이 나타나게 되었다.  물론 간단하게 서술하고, 이를 역사적인 사실로서 외우는 것의 이면에는 상당한 진통과 역사의 반동이 진행되었다는 점도 지적해야 할 것이다.  지구상의 탐험은 물론 해외 식민지 개척을 통한 부의 축적이 일차적인 동기이기는 하지만, 항해술의 발달이 한몫을 했을 것이다.  부의 축적이라는 동기가 중요하게 된 이면에는 유럽 역사에 등장하는 왕조들의 국가 재정 확보, 이를 통해 전쟁능력의 고양, 끊임없는 전쟁의 위협과 전쟁에 의한 영토 침략의 유혹이 존재했을 것이다.  혹자는 전쟁에 의해 국가가 형성되었고, 국가는 전쟁에 의해서만 존재할 수 있었다고 까지 평하기도 한다.  아무튼 서양의 17-18세기는 전쟁의 세기였다는 점만은 분명하고, 이러한 전쟁은 대부분 왕조들간의 영토야욕을 툴러싼 전쟁이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국민국가의 전쟁이나 종교전쟁, 징집된 군인들에 의한 전쟁은 아니었다.  상비군이거나 또는 용병이거나 대부분 돈을 주고 고용한 사람들에 의한 전쟁이었다는 점이 다르다.  조선의 경우에는 전쟁이 발발하면, 예를 들면 임진왜란과 같은 경우에는 농민들을 아무런 급여를 주지 않고 강제로 동원하는 형태였거나, 아니면 왜군의 경우에는 조선을 정복하여 그 약탈품을 소유하게끔 하여 군인들을 독려하였다.  물론 당시에 참여한 명나라군들은 급여를 주는 군인들이었다.

부의 축적에의 갈망이 곧바로 과학적인 사상의 보급을 가져온 것은 아니었다.  과학적 아이디어는 한편으로 절대주의 국가체제나 로마 교황청의 명목상의 허가를 받는 것이기는 하지만, 국가 지배의 신성함을 보장받는 기반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과학적 아이디어는 국가 지배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전쟁무기나, 전쟁에 소요되는 재정을 풍족하게 하는 산업에는 도움이 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11600-1700년대에는 끊임없는 갈등이 계속되었다.  즉 한편으로는 종교의 신성함을 강조하기 위해 종교전쟁이 벌어지고, 과학적 세계관이 세속에 퍼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종교재판을 통해 사상과 표현을 통제하는 한편, 건축물이나 무기, 길, 항구, 터널 등의 건설을 위해서는 과학의 힘을 사용하게 된다.  종교나 세계관에 대한 갈등은 일반인들에게까지 광범위하게 퍼져서, 종교전쟁의 폐해는 일반인들까지 전쟁에 가담하게 되었고, 마녀 사냥이라는 이름으로 사회적인 따돌림을 행하게 된다.  사회적인 따돌림과 희생양은 사회적인 격변기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회에서 발생한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당시의 사람들이 느낀 사회격변(생산성의 발달, 도시의 등장, 사회적 격차의 심화, 지식의 보급에 의한 종교적 권위의 상실)의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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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규칙이 확립되었다.

역사/17-18세기 2009. 1. 21. 11:35

1600년경은 한반도에서는 조선의 전기가 마감되고, 왜와 청나라의 침략으로 조선후기로 접어드는 시기이다.  이는 조세 자료와 신분에 관한 자료가 망실됨에 따라 국가가 국민들에게 거두어 들일수있는 재정은 더욱 악화되나, 반면에 신분자료의 망실은 신분제도의 동요가 일어나서 자산에 의해 신분상승이 일어나고, 재산이 없으면 양반이라도 신분 하락을 겪던 시기이다.  그러나 조선은 외부의 침략에 의해 내부의 개혁이 제대로 수행되지 않아 국가 융성기라고 부를 정도의 문명의 발달이 일어났다고 보기는 어렵다.  물론 상대적으로 진취적인 기상이 있어다고는 하나, 이는 세계사적인 흐름에 비후어 보면 발달에 보조를 맞출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  외부와의 연계는 청나라, 왜, 유구 열도정도 만이 관에 의해 정기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을 뿐이므로, 이웃의 일본이나 청나라도 쇄국정책을 취했다고는 하지만, 부분적으로 교역을 하고 있던 점에 비추어 보면, 우리는 지나칠 정도로 외부의 정보에 어두웠다고 평가할 수 밖에 없다.

유럽대륙은 신대륙을 발견하고, 남아프리카를 거쳐 인도와 중국으로 향하는 항로을 개척한 상태에서 대량으로 상품 교류를 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이때 해외 식민지는 동인도회사 또는 서인도 회사라는 왕실과 국가가 세운 주식회사의 형태로 진출하지만, 이들 회사는 토지 점유, 군 고용, 독점 무역 등의 형태를 띠면서 의사 국가의 형태를 취한다.  포루투갈, 스페인의 시대를 끝내면서 1600년경에는 네덜란드가 공화정의 형태로 스페인 왕실로부터 독립하고, 본격적으로 자유로운 국가를 건설해 나간다.  이어 영국이 1600년대를 거치면서 청교도 혁명, 명예혁명의 실험을 거치면서 왕권을 제약하고, 귀족을 중심으로 한 의회의 권한을 강화한다.  프랑스는 절대주의 국가로서 중농, 중상주의 국가를 만들어 간다.  국가는 단순히 한 나라의 인민들의 생산물을 수취하여 운영되는 것이 아니라, 대외적으로 무역을 독점함으로써 국가가 하나의 회사처럼 운영되는 시기이다.  여기에서 국제적인 통용화폐인 은이 남아메리카를 거쳐, 중국으로 들어오게 되는 과정을 거친다(은행-> 은을 다루는 상점).

유럽대륙은 상대적으로 내부적인 전쟁과 식민지 전쟁을 동시에 치루는 전쟁의 시기를 거친다.  전쟁의 방식은 겉으로는 내부의 왕권을 둘러싼 전쟁, 왕의 권력과 귀족간의 내전, 해외식민지 쟁탈전의 양상, 종교전쟁의 형태를 띤다.  유럽대륙의 지배체제는 왕정, 공작령, 후작령과 같은 독립적인 국가형태를 띤 것, 도시국가 체제, 수도원과 가톨릭 교구가 지배하는 형태로 나뉘어져 있다.  혹자는 유롭대륙은 약 200여개 이상의 통치단위로 나위어져 있다고 지적한다.  여기에서 잦은 전쟁이 발생하는 원인이 되면서 동시에 이러한 작은 단위들이 본격적으로 통합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상대적으로 유럽은 국가간의 전쟁이 발생하면서도, 동시에 교회의 이데올로기가 각 나라에서 그것이 가톨릭이건, 루터교, 또는 캘빈교, 청교도 등의 형태로 공유되고 있었다.  따라서 전쟁은 어느정도의 규칙을 갖고 진행되고 있다.  물론 전쟁은 대부분 용병들에 의한 전쟁이므로, 왕정간의 전쟁이지, 국민들간의 전쟁은 아니었다(종교전쟁의 경우에는 인민들간의 살륙의 성격을 띠고 있기는 하지만).  따라서 전쟁은 죽기 아니면 살기의 전쟁은 아니었고, 상대적으로 용병들과 전쟁 무기, 재정 능력에 따른 전쟁이었으므로,  비교적 서로간에 인정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전쟁이 진행되었다.  또한 아직 국경선이 획정되지 않은 시기에는 인민들은 상대적으로 민족국가의식이 강하지 않았다는 점도 전면전의 양상을 띠지 않은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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