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 해당되는 글 16건

  1. 2009.07.27 공산주의체제의 자본주의적 결과들
  2. 2009.07.14 중국에서의 지대이익 추구자들
  3. 2009.07.02 중화는 누구를 가리키고, 어디에 있는가?
  4. 2009.06.13 사회를 지키려는 자가 없었다.
  5. 2009.04.04 아편 수출로 이유로 전쟁을 일으킨 영국은 국내 아편 사용은?
  6. 2009.01.03 혼란은 발전을 위한 전단계에서 발생한다.

공산주의체제의 자본주의적 결과들

시사/중국 2009. 7. 27. 22:24
중국의 경제를 보고 있노라면 혼란을 일으키는 부분이 중국이 이미 자본주의화되어서 가시적으로 보이는 결과가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를 도입한 결과라고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적 결과라고 표현하는 것들이 꼭 자본주의적인 요소에서만 나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예를 들어 중국의 빈부 격차는 이미 서구 자본주의 국가보다도 더 심한 상황에 이르렀다.  이런 결과를 놓고 중국이 자본주의를 도입하였기 때문에 빈부 격차가 심해졌다고 결론을 내리고는 한다.  그러나 그 양상은 오히려 반대일 수도 있다.  중국이 1980년 초반에 농촌에 자율권을 주고 인민공사를 해체하고, 농민들이 실제로 향진기업을 설립하여 운영하고, 토지를 자율적으로 빌리고, 때로는 소유하고 매매하던 시절에는 오히려 중국 전체의 빈부격차는 심하지 않았다.  현재의 빈부격차는 오히려 국영기업을 국가가 차별적으로 지원하고, 농촌의 기업에 대해서는 자본시장이나 금융융자가 어려워 지고, 농민들은 이주가 어려워 지는 상황에 지속되자 즉 농촌에 과거의 공산주의적 규제가 심화되고, 도시에서는 국유기업을 중심으로 금융이나 재정적인 지원이 강해지자 빈부 격차가 심해졌다는 것이다.

중국은 현재 전체 생산량의 1/3 정도를 국유기업이 생산하고 있다.  이들 국유기업은 주로 전략적인 산업 즉, 교통과 수송, 통신, 에너지, 기초 소재들(철), 금융 산업들에 집중되고 있다.  이런 전략적인 분야에 국가가 직접 소유하는 것은 설사 자본주의 국가라고 하더라도 이정도 즉 1/3 정도까지 가는 경우도 많다.  서구 유럽 대륙의 국가들은 이정도까지 국가가 소유하는 경우가 역사적으로 흔했다.  그러므로 중국에서 1/3정도의 국내 총생산을 국유기업이 담당한다고하여 이를 사회주의 국가체제라고 규정하는 것은 별로 설득력이 없다.  다만 서구 사회민주주의와 다른 점은 이러한 기업에 대해 국가가 차별적으로 금융과 재정지원을 한다는 점이다.  이에 더해서, 노사관계 등에 대해서도 철저히 개입하고, 이들의 사회복지(의료, 주택, 실헙보험) 등에 대해 보장한다는 점이 다르다.  민간기업들의 경우에는 이러한 혜택을 받지 못하므로, 아무래도 국유기업에 비해서 생존율이 낮고, 국가의 자의적인 정책 결정에 순응해야 하므로, 창의적이고 장기적인 계획을 갖고 신용관리, 기술 축적, 브랜드 관리를 하기가 어려운 사정이 있다.

중국은 전체 경제의 거의 2/3정도를 수출에 의존하고있다.  따라서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수출시장이 줄어들자, 내수를 진작시키려는 각종 정책들을 쏟아내고있다.  정부의 지출을 늘이는 것은 궁극적으로 1/3 정도는 국가의 채무를 통하고, 나머지 2/3 정도는 금융기관을 통해 진작시키는 정책을 취하고있다.  금융기관들은 대부분 정부 소유이므로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다.  문제는 금융기관들의 부실채권일 늘어나고, 수익성이 악화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할 것이라는 점이다.  금융을 통한 신용공급은 결국 국유기업으로만 흐르고, 내수 진작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주식시장이나 부동산 시장은 과열 양상을 보이지만, 내수가 살아나지는 않고있다.  중국 국민들은 미래가 불안한 상황에서 자신들의 의료비를 (전체 의료비의 60%정도를 개인이 부담하고, 20% 정도는 국가, 나머지 20% 정도는 기업이 부담) 부담하고, 자녀들의 교육비 부담, 주택 문제를 스스로해결하여야 하는 상황에서, 더욱더 저축을 하여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현재 중국정부는 이러한 문제를 알고 의료보험 개혁이나 공공 주택 건설 등에 재정지출을 늘이고 있다고 하나, 그 영향력을 미미할 것으로 보고 있다.

실은 중국 얘기를 했지만, 이와 같은 딜레마는 현재 한국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너무나 많이 풀린 돈들, 국가 채무의 증가, 그러나 돌지 않는 돈, 주식과 부동산 시장, 그리고 은행 권에 잠기고 있는 자금들, 내수는 늘지 않고 미래는 불안하므로 저축을 늘려야 하는 소비자들, 늘어나는 교육비, 주택 비용이 늘어나는 상황에서 소비를 늘릴 수 없는 상황은 같은 경제적 딜레마에 빠지게 된 것이다.  중국은 여기에 더하여 장기적인 기술과 디자인 투자, 지적 재산권 투자에 소홀한 점이 더욱 어려움을 가중 시킨다.  물론 중국은 일인당 국내 총생산 면에서 한국의 1/5 수준, 일본의 1/ 10 수준이므로 서로 다른 경제 발전 단계를 감안하여야 할 것이다.
:

중국에서의 지대이익 추구자들

시사/중국 2009. 7. 14. 21:42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사회를 표현하면서 공평하게 분배받는 사회라는 표현보다도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소비하는 사회"로 규정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일한 만큼 댓가를 받는 사회를 바람직한 시장경제 사회로 규정한다.  현재 중국의 경우를 보면, 시장사회주의로 전환하면서, 도시의 주택이 사유화되고, 사영기업이 설립되고, 2007년부터는 물권법의 통과로 사유 재산을 보호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이에 따라 중국도 본격적으로 사유재산을 통해서 임대 소득을 취하려는 세력이 강력하게 늘어나고, 재산권을 둘러싼 사회적인 논쟁이 시작될 것으로 예상된다. 우선 농민들의 경우에는 사적 소유권을 인정받지 못하므로, 마을 공유 재산을 정부에 뺏길 위험에 처하면서 소요가 늘어나고 있다.  또한 도시지역에서도 이미 주택을 소유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모임을 만들고, 개발업자나 주택단지 운영회사와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 

사영기업들의 경우에도 기업들의 경쟁능력을 키우기 보다는 기득권을 지닌 국유기업이나 공산당 권력자, 아니면 정부 관계자들과의 꽌시를 과시함으로써 이익을 취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즉 기존의 꽌시를 중심으로 지대이익을 취하려는 것이다.  이는 공산당이 전체인구에서 5-7%정도를 차지하지만, 여전히 이들이 기득권을 유지하고 있다.  국유기겅, 그리고 군대의 경우에는 다른 정부 조직의 간섭을 받지 않으면서 독자적으로 사업을 하고 있다.  전체 군대가 공급받는 물자의 70-80%를 군대 자체적으로 사업을 영위하는 업체로부터 공급을 받고 있다고 한다.  또는 지방정부의 관료들이 직접 사업을 운영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이런 경우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간의 "이해 충돌"을 회피하는 윤리적인 문제가 전혀 거론되지 않는 것이 문제이다.

이에따라 대부분의 중국의 학자들은 "법에 의한 지배"의 원칙이 집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다른말로 표현하면 현재의 중국은 법에 의한 지배가 아니라, 특정 개인에 의한 자의적인 판단에 의해 정책이 결정되고 집행된다는 점을 의미한다. 따라서 중국의 경우에는 국가를 둘러싼 기득권이 워낙 강하므로, 국가와 자율적으로 경제적 부를 축적시키기 어려운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국가의 부의 축적의 기회를 장악하고 있다는 점은 국가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운 시민사회의 등장을 어렵게 하고 있다.  국가가 기업가나 지식생산자와 같은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서는 포섭전략을 사용하면서도 2002년이후 호금도 공산당 총서기의 등장이후 강조된 조화사회, 화평굴기의 문제의식이 쉽게 쟁점화되지 못하고 있다.  사회적인 불평등의 심화가 국가의 기득권을 중심으로 벌어짐에 따라 소유권이나 경제적인 기회의  불평등과 같은 불만이 인종이나 공동체 내의 공공재의 파괴와 같은 범죄행위의 증가로 나타나고 있다.

:

중화는 누구를 가리키고, 어디에 있는가?

시사/중국 2009. 7. 2. 07:47
중화는 중국을 세계의 중심으로 여기는 생각이다.  물론 중국이라는 표현은 고유명사라기 보다는 일반 명사이다.  그래서 가운데 나라라고 생각하면 중국이라고 이름을 붙일 수 있다.  마산에 중앙동, 중성동 등이  가운데 동네, 성의 가운데 동네라는 뜻을 지닌 것 같가.  일본의 혼슈 남쪽에도 중국이라는 지명이 있다.  나라의 지명은 대개  역사적으로 자신들의 피치자와 대외적으로 자신들의 위치를 나타내기 위해 고안해낸 말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중국이라는 이름은 한족이 양자강과 황하강 사이를 중심에 두고 자신들의 세계를 외부에 나타내기 위해 역사적으로 형성한 용어이다.

현실 역사에서는 중국은 단일의 민족이 동일한 장소에서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중국이 다시 세계적으로 부상하면서 중국은 자신의 중국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세계 속의 위상을 재정립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노력은 제도나 체제면에서 이루어지기 보다는 대내적 통치 이데올로기와 대외적인 국가간의 관계의 측면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가 각별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  중국은 역사적으로 서북부의 침략을 받아왔지만, 900년경의 거란 이후에는 동북부의 침략을 받아,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 청나라가 들어섰다.  한민족의 중국 역사에서는 이를 침략으로 해석하고 한족의 민족 자부심에 상처를 내는 사건으로 여겼다.  그래서 항상 북방의 이민족에 의해 지배를 받았을 때에는 어김없이 양자와 황하강 주변의 한족을 중심으로 저항운동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 중국은 자신의 역사책을 펴 내면서 이러한 이민족의 지배를 중국의 역사 내로 편입시켰다.  이제 징기스칸의 지배도 중국이므로, 중국 역사책의 표현에 따르면, 중국 역사상 최대의 제국을 건설하였다고 표현한다.  2007년에 몽골 국립대학교를 방문하여 중국교수와 몽골 교수 간의 논쟁을 들은 경험이 있다.  중국 교수는 중국의 내몽골은 몽골말을 가르쳐서 몽골의 풍습을 지니고있는데, 몽골에서는 오히려 자신들의 말을 잃어버리고 러시아 말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징기스칸의 후예를 자처한다는 점을 비판한 것이다.

조금 더 나아가 중국의 동북 삼성으로나아가 보면, 실은 동북 삼성은 중국의 영토라고 보기에는 제대로 통치한 경험이 거의 없었다.  따라서 지금도 동북 삼성은 중국의 입장에서 보면 일제가 만든 만주구 시절의 광산 개발과 중공업의 유산이 그대로 남아 이를 발전시키려는 전략은 있으나, 중국의 중심 산업화는 역시 중국의 중심 해안가에서 이루어지고있다.  동북 삼성은 서부의 발전 이후에 마지막으로 발전 계획이 세워진 정도이다.  따라서 한족의 중국 중앙정부의 사고에는 동북부는 변방에 속하는 지역이다.  다만 이 지역에서 조선인들이 항일 무장 투쟁을 벌였으므로, 중국의 공산당 입장에서는 중국을 방어해준 조선인이라는 매우 중국 중심적으로 보아서 고마운 조선인이었다.  그러나 동북부의 중국인들(아마도 만주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은 별로 중화중심적인 사고를 갖고 있지는 않은 것으로 판단하는 것 같다. 항상 이곳에는 중국의 중심에서 파견된 통치자가 지배하는 인사원칙을 갖고 있다.  이러한 원칙은 소수민족에게도 적용되어 소수민족 자치구의 책임자는 중앙정부의 책임자이고 그 바로 아래 서열에 자치족의 대표가 자리를 잡는다.

중국은 자신의 직접 통치를 위해서도 통치영역을 넓혀 나갔다.  특히 1700년대에 서부지역과 연해주 지역을 자신의 통치 영역으로 편입시켰다.  그러나 동시에 1800년대 중반이후부터는 통치 영역이 외부의 힘에 의해 짤려나가기 시작한다.  일본은 대만에 대해 중국이 아무런 통치를 하지 않으므로, 우리가가져 간다고 선언하고, 유구 열도에 대해서는 중국에 대한 조공을 중지하라고 명령하고 점령하여 버렸다.  베트남는 프랑스가, 버마는 영국이 가져갔다.  중국은 자신의 국가 수도가 1860년 서구 제국의 군대에 의해 파괴당하고, 점령당한다.  조선이 일본에 의해  1876년 강제로 독립된 국가의 지위를 확보하자 이를 막기 위해 1882년에 3천여명의 군사를 주둔시킨다.  조선에 대해서는 북경과 근거리에 위치하여 일본의 침입을 막기 위해 조선을 지키려고노력하였으나, 이러한 힘이 없었다.  궁극적으로 조선은 청나라와 1899년에 독립적인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그러나 1905년에 일본에 의해 외교권일 박탈당함으로써 청나라와의 독립적인 외교관계를 끝을 맺고 만다.  이후에 1992년이 되어서야 한국은 중국과 독자적인 외교관계를 맺는다.  한국과 중국이 독립적이고 대등한 외교 관계를 맺은 것은 극히 짧은 기간이었고, 대부분의 시기에는 조공관계였고, 무력관계였다. 조공관계란 중국은 조선을 무시하였으며, 조선은 외교적으로 중국에 의존하였다.  이런 역사적인 사실은 현재 남북한, 그리고 중국, 일본, 이에 더하여 미국과 러시아까지 끼어든 현금의 한반도 정세를 내재되어 있다.
:

사회를 지키려는 자가 없었다.

역사/19세기 2009. 6. 13. 08:19
조선말기, 아니 말기가 아닌 한양에서 1천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부산에서 신의주 정도의 거리에 있는 북경에서 들려오는 서양세력의 중국 침탈, 그리고 일본을 통해 들어오는 서양의 침탈 소식을 몰랐을까?  아니면 알았고, 해결하려고 노력하였는데도 못했던 것인가?  알았으나, 무능하여 해결하지 못했는?  알았지만, 중국이 이를 해결해 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는가?

대체로 조선은 19세기 전반에는 영어를 할줄 아는 사람들이 없었고, 따라서 설사 외국인 표류하는 방식으로 들어온다고 해도, 이들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었고, 무조건 중국 북경으로 송환하는 방법 밖에 없었다.  또는 우리나라에서 일어나는 서양세력들과의 접촉에 대해서는 중국에 상세히 보고하였고, 이를 통하여 해결하려고 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잘 알다시피, 중국도 이미 1840년대에 접어들면, 서양세력에 유린당하는 신세가 되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실에 대해 중국은 조선정부에 제대로 알려준 적도 없고, 조선의 외교사절들이 이를 간취하여 제대로 신속하게 조선정부에 보고하지도 않았다. 조선 정부 역시, 이러한 것에 대한 조금은 불안해 하였지만, 이를 적극적으로 자신의 문제로 여기지도 못했다.  서양의 군대와 배들이 조선 영토에 침입하였어도, 이들의 배가 놀랍고, 무섭고, 위력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대처를 전혀 하지 않은 것은 무능 그 자체라고 볼수 있다.  물론 후에 대원군이 집권하면서, 함선을 건조하려는 노력도 하고, 물론 실패하였지만, 전통적인 군대라고 하더라고 군사력을 강화하려고 노력한 것은 높이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사대주의적인 정적들, 수구세력들에 휩싸여서 부국강병 정책의 실행에 실패하였다러도 이러한 시도 자체가 조선정부의 당시 관행에 비추어 보면, 매우 획기적인 것이었다.

이후에 결국, 조선은 청국의 중재로 서양 제세력들과 개방 조약을 맺는다.  이러한 개방 조약 역시, 우리 스스로 맺은 것이 아니라, 이미 서양 세력들의 먹이가 되어버린, 청국의 중재로, 청국이 거의 전적으로 주도하는 가운데 조선과 서양세력들의 개방조약이 맺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협약에 대해서도, 조선정부는 근대적인 국가 주권의 개념도 없이 마치 고종이 하나의 민사상의 당사자 자격인 것으로 생각하고, 협약을 맺은 것 같다.  즉 왕조 스스로 국가 개념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국가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었을까?  단지 몇몇 수구적인 유학자들만이 수구적인 사고만으로, 우리가 소중화이고, 세상의 예절을 지키는 사상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만으로 서구의 것은 야만이라고 판단한 것 같다.  예의 범절이 생각에만 있고, 스스로 수양에만 있을뿐, 현실의 일상생활이나, 국가 정책에까지 미치지는 못했다.  따라서 실제로 조선 사회를 지키려는 자는 없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 같다.

이후에도 조선 정부는 서구인들과 같이 금광사업, 해운사업, 유리공장, 성냥사업을 전개하려고 하나, 서양인들과 일본인들은 한결같이 조선정부나 조선 상공업 사업가들의 외화자금을 횡령하고, 떼어먹고, 도망치고, 이들이 국가 대리인인인 조선정부에 주재하고 있는 그들의 공사나 영사를 통해 범법자는 보호하고, 자신들의 국민들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조선정부에 협박하는 일을 서슴치 않는다.  당시에 조선정부는 대외적인 교섭업무의 상당부분을 외국인을 고용시켜 일을 처리함으로써, 스스로의 주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한다.  현재의 시점에서 당시를 되돌아 보면, 여전히 우리 사회에 만연한 한국사회의 주체가 없다는 점은 비슷한 것 같다.  그저 각자의 이익을 위해 해외로 진출하고 열심히 정보를 구하기는 하지만, 국가의 정보체계는 여전히 미흡하고, 대한민국의 주권을 고려한 정보수집과 대처를 하는 조직은 부족한 것 같다.
:

아편 수출로 이유로 전쟁을 일으킨 영국은 국내 아편 사용은?

역사/19세기 2009. 4. 4. 17:05

1840년 중국의 아편 수입금지에 맞서 영국은 인도에서 제배한 아편을 중국으로 수출하기 위해 증기기관으로 움직이는 철판을 두른 함대를 파견한다.  이 함대는 양자강을 가로질러, 중국 북경으로 가는 세금물품을 실은 배를 공격하여, 그 항로를 차단함으로써 북경에 있는 중국정부의 항복을 받아낸다.  중국은 전통적으로 아편을 어느정도는 복용하고있었고, 특히 필리핀을 장악한 스페인이 신대륙에서 직접 담배를 가져와, 여기에 아편을 피는 방법이 개발되자 아편 흡연이 급격히 증가하였다고한다.  이에 포르투갈, 네덜란드가 신대륙이 아닌 인도의 갠지스 강 유역에서 재배되는 아편을 중국으로 수출하여 부족한 무역수지를 메우려고 하였다.  영국이 갠지스 강 유역을 장악하자, 영국은 홍차, 비단, 중국도자기 등을 수입하기 위하여 아편을 수출한다.  중국에 영국이나 인도에서 생산한 면과 모직물을 팔려는 계획이 실패하였기 때문이다.

중국의 임칙수는 전달되지는 않았지만, 영국의 국왕에서 당시에 영국에서도 인체과 정신적으로 해로운 아편을 중국에 수출하는 것을 비난하고, 이를 영국 국왕이 직접 금해줄것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낸다.  여기에서는 영국에서 아편을 법률적으로 금하고 있다고 지적하나, 서양의 서적에서는 대개 영국에서 당시에 법률적으로 금하지 않았다고 정정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영국에서는 당시에 로드넘이라는 아편과 알콜을 섞은 물질을 음용하는 것으로 아편중독자가 생기고 이를 의사들이 정부에 금지할 것을 요청하는 장면이 나온다.  영국정부는 그 폐해는 알고있었지만, 유통과 무역을 담당하는 세력들의 로비에 의해 무산되었다고 한다.  결국 영국에서는 1860년경에 공식적으로 금지한다.  그러나 1860년경은 실은 중국에 대해서 2차 아편전쟁을 일으키고, 중국전역에 걸쳐서 아편무역을 공식적으로 허용하던 때이다.  따라서 영국은 자국에서는 아편을 금지하고 중국에 대해서는 아편을 공식 무역으로 허용하라고 무력으로 강제한 국가로 기록될 수 밖에 없다.

아편은 적은 량은 의료용으로사용되고, 19세기 초반에 풍미한 낭만주의 문학가들에게는 상상력과 감수성, 그리고 형상화 능력을 신장시키는 기능을 담당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아편중독이 되면, 신체가 서서히 마모되어 죽어간다고 한다. 따라서 중국의 남부에서 심하게 추정하는 사람들은 2천만명 이상이 아편중독자였다고 한다.  영국과 서구열강들은 1906년이 되면 중국에 아편을 금지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으로 되어 있다.  참으로 강대국이란 힘이 있는 나라이다. 

:

혼란은 발전을 위한 전단계에서 발생한다.

역사 2009. 1. 3. 17:31
유럽 중세의 역사는 비판의 의미를 지닌 중세봉건사회라는 표현에서부터, 암흑시대라는 표현에 이르기 까지 상당한 정도의 부정적인 평가가 등장한다.  즉 폭력과 무질서, 그리고 농노제도와 봉걵건제도에 딸린 영주가 농노들이 결호낳기 전에 처녀와 미리 잠자리를 같이 한다거나, 흑사병, 마녀사냥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십자군 전쟁, 농업혁명, 도시의 등장, 기사도(궁정사회), 직업장인의 등장, 분업과 동시에 원거리 무역의 발전과 내지 무역의 등장, 한자 동맹, 바이킹의 아이슬란드와 그린랜드 정착 등을 든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표면적인 평가 또는 관찰의 뒤에 있는 보다 깊은 사회구조적 변화의 동인을 살펴보는 것이다.  기후 사학자들은 중세 온난화 현상을 주장한다.  즉 800년경부터 1350년경까지 현재의 기후보다 1도가량 높았다는 것이다.  이는 사람들이 개간할 수 있는 땅의 증대를 가져왔고, 농산물이 풍성하게 수확되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 북쪽에서는 바다가 얼음에서 녹고, 유빙의 한계가 극지방으로 밀려감으로써 노르웨이에서 아이슬란들와 그린랜드 나아가 현재의 캐나다 북동부지방까지 진출했다는 점, 덴마크인들은 노르만디와 영국 방향으로 진출하게 되었다느 점을 지적한다.  즉 중세의 온난화시기는 농업의 풍요로음과 동시에 바이킹들이 적극적으로 바다에서 활동하게 만들었다는 점을 든다.

동서양의 관계, 더정확히 말하면 현재의 서부 유럽과 중국과의 교류라는 측면, 그리고 이 둘을 매개하는 이슬람 권인 중앙아시아와 아랍의 관계까지 넣고본다면, 중국이나 이글람 권보다도 열등한 문명을 지니고있던 유럽이 중세암흑기를 거쳐 이들 두개의 문명권보다도 앞선 문명을 구가하는 과정이 이 중세에 들어 있다.  따라서 우리는 유럽이 세계를 제패하는 현재의 유럽으로 등장하는 계기를 설명하는 방식을 찾는 것이 흥미롭다고 하겠다.

중국은 11세기에 거란과 여진을 밀어내고, 다시 훈족을 밀어내어 간접적으로 유럽에 파급효과를 준다. 특히 훈족은 앞선 시대의 북방에서 내려오는 민족이동을 야기시킨 하나의 원인이 되어 로마제국 멸망의 한 요인이 된다.  거란과 금나라 역시 유럽의 문명과 대면하여 최초로 중국을 소개하는 민족이 된다.  이후 1200년대들어서는 몽골의 징기스칸이 유럽의 흑해 연안까지 진출하여, 한편으로는 흑해를 장악하던 라틴 문명과 충돌을 일으키기도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대륙내의 교역의 안전성을 보장하여, 지중해 연안의 장거리 무역이 더욱활발해지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한다.  베니스가 현재 크로아티아 연안을 거쳐, 그리스 연안, 흑해까지 진출하여 사실상 유럽의 동방 무역을 독점하고, 지중해의 르네상스를 준비한다.

유럽은 또한 십자군 전쟁을 통해 1000년대 말부터 막강한 사라센 제국과 겨눈다.  이는 내부적으로 중앙집권국가로 향하는 과정에서 기독교 세력과 힘을 합치고, 유럽의 봉건적인 내부 무장 세력들의 힘을 결합시켜 외부로 향하게 하는 의도때문에 발생한 것이기는 하지만, 과학과 수학이 발달한 이슬람의 문명과 본격적인 교류를 통해 르네상스를 준비하는 계기가 된다.

물론 중국 또는 이슬람 세력과의 문명 접촉은 직접적으로는 흑사병의 창궐, 종교재판의 등장과 같은 사회적 혼란이 야기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유럽의 중세 역사를 통해 나는 외부와의 접촉을 무서워할 것이 아니라, 어느정도의 혼란을 감수하고라도, 이를 수용하여 앞으로의 발전의 전략을 삼는 것이 역사의 발전을 이루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